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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04 02:44
[한국사] 1907~1910년 정미의병 당시 의병과 일본군 무기의 차이
 글쓴이 : Centurion
조회 : 3,706  


이건 mbc 다큐 영상입니다.

아래는 시간 없으신 분들을 위한 캡쳐본.






의병VS일본군.jpg


남한1.jpg

남한2.jpg

남한3.jpg


출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314
모신나강.jpg


블로그 출처: 

http://blog.naver.com/kc6731/120208173874

모신나강1.jpg







나라가 망할 때도.. 
의병들이 신식소총이 없어서 빈 껍데기 화승총, 창 들고 일본군과 싸웠는데...

막상 나라가 없어진지 10년 지나고.. 
청산리 대첩의 무기는 만주, 연해주의 조선동포들이 모금해서 무장한 러시아제 모신나강 소총이었습니다.
청산리 대첩의 독립군이 대략 3천명쯤되니까, 3 천정 정도는 사왔겠죠.

이 모신나강 소총이 1891년도에 나온거니 
고종이 나라 망하기전에 러시아랑 외교로 사올 수 있는 소총이었죠.

먹고 살기 막막해서 혹은 집안 재산 처분해서 
독립운동하러 만주, 연해주로 흘러든 식민지 조선의 유민들이..
대한제국 정부보다 부유했을까요?



30식보병총.jpg

38식소총.jpg


반면,

일본이 쓰던 총은 이 30식 소총, 38식 소총인데...
이게 의병들 상대로 쓰던 소총입니다.

어쨌든, 황당하게도..
일본군에게 군인의 가장 소중한 생명같은 총기와 탄약고를 제압당해서,
(아무리 그래도 외국군한테... 병영의 무기/탄약고를 뺏기고 강제해산이라..)

그 총기를 들고 의병에 합류한 대한제국군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인지... 
아예 총기를 못챙기고 합류한것인지..

일본군 토벌에 대응할 의병들의 무기가 대체로 빈약했고, 
그 결과 압도적인 비율로 사상자를 내게 됩니다.

청산리대첩.jpg



청산리대첩의 독립군보다, 
대한제국군 규모가 최소 3배는 될터인데.. 

일본군을 많이 죽인건 청산리 쪽 독립군이지 싶네요.



대한제국군.jpg
시위대.jpg

진위대.jpg



즉, 고종의 친위대격인 시위대가 병력이 정원은 9천명, 실제론 5천명 정도 있었고..
지방군인 진위대는 정원은 2만명쯤 되는데, 실제론 5천명 정도 되니..
대략 1만명쯤 되겠네요.

간도인구.jpg

연해주인구.jpg



자, 그럼 청산리 대첩을 지원해준 
간도, 연해주의 조선 유민들 숫자를 확인해봅시다.

간도
1910년대에는 대략 13만명 
1920년대에는 대략 45만명 (일본의 보복인 경신참변, 간도대토벌에 3만명 사망)

연해주
1914년 6만 3천명 이주.
1923년 23만명 거주

즉, 
1910년대로 잡으면 간도,연해주 인구는 20만명정도.
1920년대로 잡으면 많게는 70만명 정도..

이들 20~70만 인구가
대한제국 시절 군대의 1/3 수준인 3천명의 독립군을 지원한 겁니다.

그런데, 대한제국은 1300만 인구를 가졌거든요. 
여기의 20배 정도의 군대를 가지는것도 가능했을 겁니다. 대략 6만명쯤 되네요.

세금거둘 권리도 없고, 일본군 눈치 보면서, 비밀리에 모금해서, 
군대를 양성해서 민간인들이 3천명을 저렇게 키워냈는데..

그래도 주권이라도 가진 상태에서, 세금까지 거두고 있던 정식국가였던
대한제국이 모신나강 소총으로 무장한 6만명의 군대는 커녕, 1만명 정도의 군대를 가졌었다..

좀 문제가 있다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정치가 중요한 겁니다. 
애국심으로 불타는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국민들이, 
애국심으로 뭉친 독립군에게 일본과 대등하게 싸워볼 수 있는 신식 소총을 쥐어줬습니다.

1910년대에 전국적으로 수만명 많게 10만 이상도 추정되던 의병들은 저런 무기가 거의 없었어요.

그러니 좋은 여건에서도 정치를 발로 하던 구한말 집권세력들이 욕쳐먹을 수 밖에 없는겁니다.

고종을 비롯한 구한말 집권세력을 까면, 
일본 편드는것처럼 느끼는 분도 있으신데..

당시 일본은 쇼비니즘과 제국주의 야욕에 불타는 인간들이 장악한 나라였고, 
일본 우익 지네들끼리도 국력에 있어서 전성기로 보는 시절입니다.

그런 리더쉽과 군사력을 갖춘 나라를 상대하는 조선이..
너무 집권세력이 안일하고 무능하고 타락했던거죠.

결국, 차라리 일개 떠돌이 신세였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연해주, 간도의 조선이주민들이 더 큰 일을 해냈습니다.

나라 망친 인간들을 왜 쉴드를 치려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지금도 비슷한 인간들이 정치권에 많습니다만, 

그 사람들이 나라 또 다시 망쳐먹으면...
'그래도 그 사람들 할만큼 했어?' 쉴드를 쳐주실건지 의문입니다.

모름지기 나라가 발전하려면, 
노답인 인간들이 나라를 잡고 있으면...쳐내야지 발전을 합니다..

집안에서 경제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엄한 짓하면요.. 집안이 망하죠.
하다못해 연간 수억원 이상 버는 연예인도 아내가 빚보증 잘못서서 집안 들어먹거나,
떼돈 버는 트로트 가수가 가족때문에 빚만 지고 사는거 보세요.

이게 나라를 운영하는 정치와 리더쉽의 중요성입니다.

묘하게.. 요즘 방산비리나 온갖 친인척 비리, 국내외 외교 안보 상황을 보면..
구한말이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았죠. 제가 괜히 구한말 집권세력을 까는게 아닙니다.

지금도 비슷한 인간들이 정재계에 넘치는데, 
그걸 또 미우나 고우나 한국인이랍시고. 감싸고 돌면.. 역사가 바로 서질 않아요. 




결론 요약:

1907~10년 정미의병 때 전국적으로 수만명에서 십수만에 달하는 의병들이 있었으나,
일본군 2개 연대 4천여명에게 1만7천명이 전사하고 수천명이 포로로 잡히며 끝남.

근데, 청산리 대첩에선 불과 3천명의 독립군이 러시아제 신식소총 들고 일본군 1개연대 규모를 작살냄.

그 결과의 차이는 신식무기. 즉 볼트액션 소총..

왜? 10년전에도 그 무기가 없었던게 아닌데,
왜 1910년에는 그런 무기가 없어서, 의병항쟁이 대규모로 일어나도 실패했는가?
그런데 왜 1920년에는 그게 가능해져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는가?

이 문제의 해답을 고민해 봐야 됩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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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요석 16-07-04 04:00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준수한 성능의 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가진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털릴 확률은 굉장히 낮죠.

정미의병 때 그 많고 많은 의병들..의도도 좋고 숫자도 많았지만 일본군에게 처참히 패배한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일본군에 비해 너무나도 열악한 무장 상태.

청산리 대첩에선 수천 명의 독립군이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일본군과 싸워 큰 해를 입힘. 바로 이유는 우수한 무장 상태.

Centurion 님이 글 쓰신 그대로 무기 성능이 가장 중요하죠. 숫자 많고 의욕 넘쳐봐야 무장 상태가 허접이면 그냥 갈려나갈 뿐.

정신력으로 이길 수 있다는 개소리는 2차 대전 일본군이 항상 하던 소리. 결과는 미군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함.

미리 준비하고 소유한자가 이기는 법. 조선 후기. 안타깝습니다..
     
Centurion 16-07-04 11:58
   
저도 조선 후기의 참담한 역사는 정말  안타깝습니다.

다만, 이미 흘러간 역사.. 돌이킬 수 없으나,,
교훈을 얻고, 오늘날 한국의 앞날에 드리운 암 종양들을 쳐내고,
국가와 민족을 반석위에 올려둬야 하지 않나 싶네요.

이 것이 "과거와 현대의 대화"라는 역사학의 본분 아니겠습니까?

무능하고 사치스럽고, 자기 밖에 모르던 그런 리더들은...
역사적으로 봐도.. 항상 나라와 백성에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참 심삼찮은게... 나라꼴이 점점 요상하게 흘러가는데....
나라 상황은 분명 구한말급은 아닌데.. 정치인들이 하는 짓이 영...  닮았단 말이지요.

만약 또 잘못될 경우...
또 100년 뒤에 그 때 그 권력자가 나름 잘해보려고 했었는데...하며
쉴드쳐줄 사람이 나올지는 모르겠으나..

정작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를...
우리가 손수 움직이고 바꿀 수 있을 때..

그런 무능하고 부패한 리더보다..
정말 훌륭한 정치인을 후원하거나,

혹은 그런 사람이 없으면 국민 자신이 발벗고 나서서
나라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E.H.카가 남긴 명언이 이럴 때 쓰는 말 같네요.

“한 사회가 어떤 역사를 쓰느냐, 어떤 역사를 쓰지 않느냐 하는 것보다 더 그 사회의 성격을 뜻깊게 암시하는 것은 없다.”
(There is no more significant pointer to the character of a society than the kind of history it writes or fails to write.)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
(History is 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역사가는 일반화를 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실 수집가와 구분된다."
(What distinguishes the historian from the collector of historical facts is generalization.)

"역사가의 역할은 과거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에서 그를 해방시키는 것도 아니다.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로서 과거를 이해하고 다루는 것이다."
(The function of the historian is neither to love the past nor to emancipate himself from the past, but to master and understand it as the key to the understanding of the present.)

“사실을 배우기 전에 역사가에 대해서 연구하라(Study the historian before you begin to study the facts.)”

“역사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결코 일방적인 과정일 수는 없다.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통해 양자를 더 깊게 이해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다.”
관심병자 16-07-04 04:25
   
대한제국의 문제는 좀더 복잡합니다.
지금 한국 민간인이 뒤로 권총을 구입하려 한다고 해봅시다.
일반적으로 구하기 쉬운 외국에서는 몇만원~10몇 만원이면 구입 가능 합니다.
국내에서 만약 구입하려 한다면 중간에서 몇십~백만원 이상 부를 겁니다.
당시도 대량으로 구매하는 일본이나, 청나라와 같은 가격으로는 구매할수 없었을 겁니다.
군비가 신식군에만 들어가는게 아니라 더 많은 수의 구식군이 있었고,
이들의 임금이 오랫동안 밀려있고 중간관리의 부패로 군란도 일어났었죠.

어찌보면 운이 없었을 뿐입니다.
일본이 개항이 빨랐지만, 무력으로 처발리고 강제개항 당한겁니다.
그에비해 조선은 개항을 요구하는 무력시위를 물리치고, 쇄국을 유지했습니다.
외세가 개항을 요구했던 시기에 조선이 일본막부에 비해 강했던게 독이 된겁니다.

덮어놓고 개항만 하면 발전 할수 있었을까요.
단순하게 일본이 운이 좋았던 거죠.
강제개항 > 경제적 수탈 > 식민화 이게 강대국의 확장 방식이었습니다.
미국이 남북전쟁탓으로 혼란해 일본에 신경을 못써서 일본이 성장할수 있었다고 봐야합니다.
일본이나 조선보다 군사, 경재적으로 훨씬강했던 청나라가 개항후 침탈당한걸 보면 쇄국정책이 무조건 틀렸다고 볼순 없습니다.

조선도 개혁 의지는 있었습니다.
개혁의 본보기로 삼으려고 했던 국가로 주변 러시아, 청, 일본등을 두고 내부에서 다툼이 있었죠.
하지만, 의지만 있다고 해서 다 되는게 아니죠.
그냥 나라 자체가 주변국에 비해 약하고, 가난했습니다.
영토 크기가 비슷한 브라질이나 캐나다가 왜 미국만큼 강한 군대를 보유하지 못하는지 생각해 보면 되죠.

그냥 모든 국력을 군사력에만 부어넣었어야 할까요.
나랏돈을 단순 몰빵식으로 무기만 사들였다면 조금 더 오래 버틸뿐이지 결국 결과는 같았을 겁니다.
고종은 전기, 전화, 신식교육 등 기본 인프라를 구축하려 했습니다.
경재력이 뒷바침 되주지 못하면 군사력은 유지할수 없습니다.
     
Centurion 16-07-04 11:10
   
님이 말씀한 내용은..
총기소지가 불법인 한국에서 민간인이  총기밀매를 할 때의 상황입니다.

반면, 당시 대한제국이 아무리 외국에 눈탱이 맞고 사기당하는 둔한 국제감각을 갖고 있다고 쳐도..
총기를 국제시장 가격에서 한 10배 이상 눈탱이 맞고 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일본한테 사기당한 양무호 구입비용이 25만엔짜리인데, 이 중고 무장상선을 55만엔에 들여왔죠.
한 2배, 중고로 쳐도 가치가 4배 정도 예상됩니다.

제가 대충 검색을 해보니..
독일에서 권총 300정과 탄약 3만발을 당시 대한제국 화폐 5000원에 사왔다는 기사를 발견했는데..
여기에 따르면, 대략 권총 1정 가격이 4~8 달러쯤 될겁니다.

당시 미국인 광부 월급이 33달러~50달러, 미국 공사관 직원 월급이 50달러였다고 하니,
오늘날로 치면 40만원~80만원 가격쯤 되는 느낌이겠죠. (미국식 아침식사 한끼니가 대략 0.1달러였던 시대)

소총가격도 그리 비싸진 않을겁니다.
본래 권총은 장교들이 쓰는 총기고.. 소총은 병사들이 쓰는 무기니까요.

그리고, 무기 도입과정을 보면,
일본이나 청나라에서 사오기도 하고, 프랑스나 미국에서 수천정을 대량으로 사오거나 공짜로 얻기도 합니다.
님이 걱정하는 상황과는 거리가 먼거 같네요.

그리고 이후의 일본이 운이 좋았다.. 이건 저도 예전부터 동아게에서 이야기해오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고종이 전기회사를 만든 것은 사실이나, 이런 것들도 대부분 훗날 민영화되었습니다.
외국인들에게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이게 일제시대 때 이야기가 아니라, 고종 재위시절 이야기입니다.

***************************************

"이걸 단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호러스 뉴턴 알렌[25]이다.
바로 앞서 경제적 개혁 분야에서 언급한 전기 회사가 문제였는데,
교과서에는 이걸 긍정적인 사례로만 보지만 사실상 황제랑 친하다는 이유[26]로
알렌이 소개한 이들의 미국 회사에 전기, 전차를 민영화해버렸다[27].

비록 1899년에 세워진 이 한성의 전차가 일본보다도 3년 빠른 것이고 [28]
한성의 근대적 면모를 일신했다[29] 할지라도, 실질적으로는 그저 높으신 분들만을 위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최초 개통도 아니었다. 이미 1894년에 일본 교토 시치조에서 후시미를 연결하는 6.6킬로미터의 전철를 도입했다.
한성이 최초 운운은 도쿄보다 교토에 먼저 전철이 세워진걸 모르고 하는 소리.

또한 한성에 전철을 세울 때 실무진들(설계자+운전수) 면면을 보면 전부 일본에서 온 교토전철 직원이었다.
그리고 알렌 등은 황제의 기대를 배신하고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전차비를 왕창 끌어올렸고,
졸지에 조선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파업 + 폭동이 벌어졌다."

https://namu.wiki/w/%EA%B4%91%EB%AC%B4%EA%B0%9C%ED%98%81

"인삼을 전매 수출하고,
그 외에 목재, 쌀[7] , 소가죽[8], 면화, 금광의 금을 수출했다.
독자적으로 채굴이 힘들 경우에는 채굴권, 벌목권을 넘겨줘서 수출한 부분도 제법 되었다.

여하간 이 덕분에 수치상으로는 1898년에 나라의 빚을 대다수 갚았다는 말도 나온다."

***********************************************

그리고, 결국 조선을 먹여살린 건 그런 신식문물과 인프라라고 하기 보단..
주로 농산물과 옷감, 인삼 같은 특산물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들 조선이 해외에서 무역으로 돈벌이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인삼무역이나, 저런 특산물 수출로 저 고조선시대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무역 잘만하고 살아왔고,
그거 팔아서 중국과 일본의 은자도 갖게되고, 그걸로 중국산 문물도 수입하고, 다시 일본한테 쌀 팔고,
이렇게 국제무역 네트워크가 다 갖춰져있었습니다.

그러니, 구한말에도 당연히 국제무역을 통해, 금,은을 마련하고,
그걸로 서양무기 수입이나 전기회사, 전차 개통, 전화국 설치도 돈주고 할  수 있었던것이죠.

경제력이 전기, 전화, 신식교육에서 갑자기 뿅 하고 나온것은 아닙니다.
조선의 기존의 생산력 자체에서 나온것이죠.
관심병자 16-07-04 04:31
   
내용중 의병이 4천명 인대 의병 사상자는 1만7천명 이군요.
일본군이 전공을 부풀린게 아니라면 민간인을 학살한거 같네요.
     
Centurion 16-07-04 07:44
   
해당 4천명 부분은
전라도 일부 지역만 집계 된 듯 싶네요.

그러나 정미의병
전체적으로 잡으면 전국적으로
대략 14만명이 참여해서,  2400회 정도의 전투를 벌이고,
1만7천여명이 죽고, 2천여명이 포로로 잡히고,
그래서 대략 인명피해가 2만명 가까이 나더군요.
비좀와라 16-07-04 05:54
   
대한제국이 일본에 밀린것은 시대의 조류를 따르지 않았던 면이 더 강하다고 봅니다.

보불전쟁 때 프랑스 파리코뮨 세력과 독일제국군이 부딪쳤을 때 무장의 부실이 문제가 아니라 조직이나 규율등의 신개념을 부정하고 소영웅 주의로 맞선 프랑스 좌파 세력의 참패로 끝났습니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유럽의 중세봉건의 낭만주의는 사라지는 것 입니다.

대한제국과 일본과의 차이점은 바로 이런 규율과 조직이라는 것의 이해차이에서 비롯되서 결국 장비의 부실을 일으키지 않았나 합니다. 실제로 조선통신사의 기록을 봐도 일본군의 열병식을 이해 못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보불전쟁과 같이 좌파사상을 지니고 있던 조선이 우파사상을 받아들인 일본에 침략당한 것이고 중세봉건적인 낭만주의 사상이 사라지고 오직 명령과 복종만이 남은 시대의 돌입을 의미하는 것이라 봅니다.

동학혁명을 칭송하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동학은 시대의 조류를 거슬리는 사상이지 시대를 앞서가는 사상은 아닙니다. 근세조선은 누가 뭐래도 당시 유럽이나 일본보단 조세부담이 적은 나라 였습니다. 이런 조세부담도 많다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 동학혁명입니다. 그런 시대 상황에서 어떻게 돈이 많이 들어가는 군비 확장에 힘을 기울일 수 있을까요? 군비를 확장하려면 당연히 세금부담이 늘 수 밖에 없는 것인데 당시 민중이 이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니 대한제국이 어떤 선택을 해야 올바른 선택 이었을 까요?
     
Centurion 16-07-04 08:19
   
님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만.

그러나 동학혁명은 집강소를 통해,
신분제를 타도하고, 자치를 채택하는,
민주적이면서 입헌군주제적인 요소를 요구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고..

동학군이 미신을 믿긴 했다만,
우금치 전투에서 돌격하다 떼죽음 당한걸 보더라도, 그렇게 규율 문제를 떠나서,
용기가 없는 군대는 아니었습니다.

"관군들은 2열 횡대로 서서 전열이 능선 앞에 나서서 상체를 드러내고 사격을 가하는 동안
후열은 뒤로 물러나 장전하고 전열과 사격 교대를 했다. 집중 사격의 불벼락을 받은 동학 농민군은 무수히 쓰러졌다.
동학군은 저돌적으로 돌격했다가 수많은 시체를 남기고 패퇴하기를 되풀이 하였다.
관군 측 기록은 동학군이 4-50차례의 돌격을 해왔다고 한다.

결국 전봉준이 그처럼 바라던 우금치 돌파는 공세 종말점(攻勢終末點)에 오고 말았다.
더 독전해서 몰아 부칠 수가 없는 상황이 오고 말았던 것이다.
수많은 동학군 시체들이 우금치 정상 부근과 아래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즐비하게 쌓이고 피가 내를 이루어 흘러내렸다.

관군의 부대를 지휘했던 이규태는 전투 후 우금치 고개와 골짜기를 시산혈해(屍山血海)’라고 표현했다.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피가 바다처럼 흘렀다는 비참한 장면의 묘사다."

http://bemil.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5/06/2013050602207.html

솔직히 전투양상을 보면,
무기는 물론 지형 등 전술적으로 불리한 상황이고,
이를 타개할만한 동학군 내 지휘능력이 부재했었지만,
당시의 동학농민군의 돌격은
이게 과연 규율과 명령을 따르지 않는 군대인지는 좀 의문스럽습니다.

비슷한 의미의 프랑스 대혁명 당시
프랑스 의용병들은 외국 간섭군에 의해 꾸준히 패전을 했지만,
그렇다고, 의용병들이 혼자 소영웅주의적으로 설치다, 비겁하게 튀거나해서,
전선이 붕괴되서 프랑스 혁명이 끝장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훗날 워털루에서 언덕 뒤에 숨겨져있던 영국군의 맹렬한 사격에..
유럽 최정예로 손꼽히던 그 베테랑 중 베테랑인 나폴레옹의 프랑스 근위대들조차 멘탈붕괴를 일으키고 패주했었습니다.

비슷한 상황에서 우금치 고개로
동학농민군은 바위에 계란치기의 돌격을 계속했던것과 달리 말이죠.

그리고, 사람은 내 것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는 또 자기 희생을 감당하기도 합니다.
근데, 지켜봐야 다 그게 왕과 그 외척, 탐관오리들만 득세하는 세상이라면, 별로 지킬 가치를 못느끼겠죠.

반면, 유럽에서 내셔널리즘이 발전하게 된 계기가 바로 프랑스대혁명이고..
그 이전까지의 유럽각군 군대들은 왕에게 고용되는 용병개념에 가까웠습니다.
돈받고 왕과 귀족, 지휘관에 충성을 바치긴 하는데, 애국심이란게 딱히 없었죠.

(왕 밑에 잇는 공작들조차 땅 욕심에 자국 왕 버리고, 이웃나라 왕한테 붙는 일도 일어나는게 봉건제 시대였죠.)

그걸 바꿔놓은게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고,
이때부터 국민개병제니 징병제니 하면서, 민족주의가 발달하게 됩니다.

국민주권의 시대가 열리니, 국가의 주인이 국왕이 아니라, 자신들 평민이란 생각에..
그런 내셔널리즘이 발달하게 된 것이죠.

프랑스 의용병들은 훈련을 제대로 못받아서오합지졸 끼는 있었어도,  그렇게 비겁한 겁쟁이들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사실 조직력이 부재했던 급조된 당시 파리코뮌 하나의 사례만 갖고 논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그리고, 독일군 원조인 프로이센군이 프랑스대혁명 시대에는  프랑스한테 얻어터지던 동네북이었죠.

막상 그 좌파들이 무장투쟁 지독하게 벌이는 케이스도 많습니다.
스페인내전이나 쿠바혁명이나 대장정, 베트남전쟁 같이 말이죠.
적백내전 때에도 결국 적군이 백군에 승리했죠. 이런건 너무 경우가 많아서..
단순히 좌파사상을 따르는 군대가 규율과 명령 복종의 시대의 조류를 거부했다 이렇게 일반화하긴 곤란합니다.
G스마트SM 16-07-04 07:40
   
1907년 9월 총포화약류단속법으로  9만정이  넘는
화승총과 창칼 같은  도검류를  압수하고.  탄환.화약류가 36만근을 압수하였다고  하니.  의병의 무장은  더욱  빈약할수밖에  없었을듯  하네요.
(이중  신기한것은 9만정의  총포속에  약 3천정  가량은  후장식 소총  같은 화기로.  대부분  함경도  지역에서 압수  한걸보면. .국경선을  넘어 중국이닌  러시아 등을 통해  유입된듯  싶기도  하네요
     
Centurion 16-07-04 11:16
   
슈타인호프라는 분 블로그에서 보니 그런 내용이 나오더군요.

의외로 북방지역에서 이런게 많이 발견되고, 남부지역에서는 발견 안되는 걸로 보아,
대부분이 중국과 러시아쪽을 통해 들여온 걸로 추정된다더군요.

아무래도 실력있는 사냥꾼들이 모피 팔아서 돈 좀 벌어서 장만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총포 압수령 이후, 비싸게 주고 산 신식소총을 뺏기는게 싫어서,
의병에 참가한 사냥꾼들도 꽤 된다는 내용도 있더군요 ㅎㅎ
촐라롱콘 16-07-04 17:22
   
본 주제와는 별 상관없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위 내용 가운데 일부 오류를 언급하자면.....

만주의 한인 무장독립군이 체코군으로부터 다소의 무기를 사들일 당시에는.....

1차대전은 이미 종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시베리아까지 흘러든 체코군단이 향후 독일군과 전투를 벌일 계획은 아니었고

오히려 볼셰비키혁명 이후 시베리아를 비롯한 러시아전역에서 벌어진 적백내전에 체코군단이 훱쓸린 부분이

컸습니다. 

따라서 러시아를 횡단하여 독립된 본국으로 귀환하려던 체코군단은 적백내전에 막혀 블라디보스톡을 통해 해로로

일본-미국을 거쳐 귀환할 수 밖에 없었으며.... 체코군의 철수를 도왔던 일본,미국,프랑스 등이 철수경비의 상당부분을

체코군에게도 요구했기 때문에...... 체코군은 자신들의 지녔던 무기와 장비를 헐값에 팔아 여비를 마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독립군이 체코군으로부터 비교적 최신식에 해당하는 소총을 1정당 불과 10~20원이라는 헐값에

사들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위에 언급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봉오동-청산리 대첩의 일본군 전사자 또는 사상자가 최소 1,300명~

최대 3,300명까지 발생했다고 여러 역사서에서 언급하였고, 우리도 기존에는 또한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 근현대 사학계에서조차도 최소 70명~최대치로 잡아도 300명을 넘지 않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리고 당시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당시 남만주 지역에서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일본군에게 지급되었던 연금과 보상금 등을 기록한

일본 후생성 자료에 의하면 전사자는 불과 10여명에 부상자까지 포함해 최대 사상자 수 십명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당시 전사자-부상자들을 남만주에서 일본본토로 이송하는 데 소요되었던 관과 야전침대 등 여러 물자들의

수량, 그리고 이후 일본신사에 합사된 당시 일본군 전사자 명부가 10여 명에 불과하다는 점 등 여러 자료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제시한 것이니 실제 전사상자 숫자가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또한 일본군 전사자가 1,300명~3,300명에 이른다는 것은 당시 우리측 자료는 구체적인 내용이 생략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 몇몇 사료에 숫자만 언급되어 있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객관적인 신빙성이 일본측 자료에 비해 열세하다는 점입니다.

결정적인 부분은 우리자료에서는 청산리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알려진 일본군 연대장이 이후 시기에도

여러 일본군 부대를 거쳐 복무한 자료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Centurion 16-07-04 22:52
   
본인 스스로 말하셨듯 본 주제와는 별 상관이 없는 부수적인 문제이긴한데..

이 청산리대첩 한-일 온라인 논쟁 같은 경우,
역사갤러리의 몰락과 국까 등장에도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죠?

그런데, 일본군은 할힌골 전투라던가, 수치스러운 사건을 은폐 축소하는 경향도 있었고,
포로나 위안부들을 죽여서 증거인멸도 하는 나라라서 그리 신뢰성이 높다곤 생각 안합니다.

(거기다 독도문제라던가... 심지어 일본우익들이 난징대학살, 유태인 학살도 가짜라고 하는 집단들이고
 그런 우익성향 관료, 정치인들이 발에 채이는 일본인데.. 일본 자체가 신빙성 별로 없는 나라죠.
 심지어는 자국민 상대로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서까지 사기치는 부분이 꽤 있는걸로 아는데..)
 
게다가, 야스쿠니 신사의 경우 방향이 반대긴 한데, 생존자를 전몰자로 제사지내는 등 오류도 존재하며,
일본 후생성이 발표한 자료가 일부만 공개한 것인지, 전부 공개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문서 열장 중 한장 꺼내놓고, 이게 전부다라고 우길 수도 있는 문제죠.
정보공개에서의 칼자루를 쥔건 자료를 보유한 일본쪽이니..

할힌골 전투의 경우 일본이 주장하는 전사자는 8천, 부상자 8천인데..
소련이 주장하는 건 일본군 사상자는 6만입니다. 거의 3배 이상의 차이가 나죠.

그런데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할힌골 전투 사상자가 2만명쯤 된다더군요.
야스쿠니가 산사람은 넣는데, 죽음사람을 누락시키는 경우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다소 정확도가 떨어지거나, 은폐 축소됐을 가능성도 배제못한다고 봅니다.

한국이 제대로 조사할 방법이 쉽지않을테니 말이죠.
혹은 나중에 슬그머니 만주쪽에서 몇년 뒤 질병사한 병력으로 둔갑시켜 야스쿠니에 집어넣을 수도 있겠죠.

(꼭 부상자라고 해서 전원 일본으로 후송? 간이침대 사용 이런것도 좀 애매하죠. 이런건 중환자용일 가능성이 높고..)
(예를 들어 팔을 다친 경상자는 꼭 야전침대를 사용하지 않고, 부목 정도 대주고 깁스해주고 본대복귀 시켰을 가능성 등등..)

임진왜란 때도 이순신 함대에 깨져 죽어나간 일본수군들이
질병과 폭풍에 휘말려 죽었다고, 유족들과 그 후손들이 믿고 살아가는 나라가 일본이죠.

그러나, 한편으론...독립군 쪽의 과장된 선전일 수도 있겟죠.
다른 나라 이야기지만, 독일 티거 에이스 미하일 비트만을 잡았다는 사람도 여러명이죠.

동시에 총질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러면..
A가 1명, B가 1명 사살한 것처럼 중복기록 될수도 있으나, 실제론 동일인을 쐈을 수도 있고..
숫적 열세인 전투중에 적 피해규모를 일일이 확인하고 다닐 여유가 있었는지도 의문이며,
총상을 입혔다고 사살이라고 파악한게 알고보니 죽지 않고 경상자로 살아남은 케이스도 꽤 있을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청산리대첩이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할 수는 있겠죠..

다만, 이 글의 주제는...
동세대 무기를 보유한 상태에서는 예전과 같은 압도적인 교전비로..
일본군이 독립군을 토벌할 수 없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물론, 동세대 무기를 갖춘 러시아군 상대로...
일본군은 여순요새의 203고지 등에서...수만명의 피해를 냈습니다.
이게 청산리대첩보다 15년 이전의 일이죠.
역시나 모신나강 소총, 맥심 기관총 등에 말이지요.

그 외에도 중일전쟁 때 일본군이 포병전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중국 국민당군대에도
방어선에서 상당한 인명피해를 내는 등을 생각해보면..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산악지형에서 독립군이 하기 나름에 따라..
일본군에게 출혈을 강요하는 것은 그렇게까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체코군단의 무기판매에 관한 글을 찾았는데..

영화 '놈놈놈'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
일제 독립군 토벌자금 15만원 탈취사건이란게 있더군요.

이 때 당시 체코군단이 독립군에 소총 1자루와 탄환 100발을 넘긴 가격은 대략 30원이었다고 합니다.

이완용이 일본에게 한일합방 이후 받은 돈이 15만원이었다고 하는데..
이 액수가 대략 총기 5천정과 탄환 50만발을 구매할 돈이었던 셈이죠.

체코군단이 천사도 아니고, 아무리 본국 돌아갈 길이 급하다 해도,
러시아 연해주의 현지 무기 거래비용에 비해, 아주 헐값에 판매는 안했을 겁니다.
자기들도 여비가 충분히 필요했을테니까요..
(아마도 러시아 무기상들이 파는 가격보다 살짝 할인해줬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시중가격보다 약간 싼..)

당시, 조선인 가족단위가 간도, 연해주로 정착할 때 드는 비용이 대략 100원이엇고,
쌀 한가마가 5원, 부자의 기준이 2000원인 시절이라고 하며,
대략 15만원이 요즘돈 75억 상당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소총 한자루 가격이 쌀 6가마라면 당시 기준으론 꽤 비싼거죠.

그러면, 대한제국의 예산이 대략 600만원~2500만원에 달하기도 했었으니..
사실 총기 구매비용이 그렇게나 많이 들지 않았음을 짐작케 합니다.

고종 내탕금이 한해에 대략 81만원이고,
조선왕실 제사비용 포함하면 100만원 정도 된다는데.
이거면.. 33,333 정의 모신나강 소총을 구매할 수 있었겠네요. 333만발의 탄약과 말이죠.

즉, 고종이 하기 나름에 따라선 소총 10만정 이상은 충분히 장만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일본을 적대하는 러시아 정부를 잘 구슬리면, 모신나강소총의 대량구매도 어렵지 않았겠죠.
스리즈 16-07-04 20:39
   
일제에 진이유
-무기의질
-근대화된 군체계
-군대의 규모
-재정의 정도
모든면에서 일본에 비해 부족했습니다
글쓴분의 말처럼 설령 외국에서 무기를 수입하여도 그것을 유효하게
 활용할 숙련된 군인들과 시스템이 없으면 제2의청나라가 될뿐입니다
그시기 한국이 독립을 유지할수있는 방법은
자국을 지킬수 있는 최소한의 군대와 함께 중일러의 견제를 통한
중립국 선언 정도가 유일하네요..
머 그당시 제국주의 노선을 타고 있는 일본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말이죠..
스리즈 16-07-04 21:00
   
그래도 그 시기 조선은 꽤 질기게 잘 버티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질적으로 1890년대 거의 먹혀가는 상태에서 중국,러시아를 끌어들여
예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오래 버티었으니 말이죠..
국호 바꾸고 개혁이라도 시도할 여력이 있던건
 그당시 외교적 처세술의 결과라고 봅니다
     
Centurion 16-07-04 23:40
   
나라 군사력에 비해선 좀 질기게 오래갔다는데엔 동의합니다.
이게 사실 난잡해보이는 조선의 전략이  '이이제이'  책략이라고 하기도 하더군요.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
근데.. 결국 오랑캐들끼리 싸우다가, 최종 승리자인 오랑캐한테 나라가 먹혀버렸죠.

외교라는게 단순히 힘이 없다고,
이빨만 털어서 될 문제가 아니라 군사력이 뒷받침해줘야 생기는 것인데..
조선이 워낙에 인구나 국력, 경제력, 국가가 처한 상황에 비해서 그다지 군사력 증강에
열을 안올렸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외교관이라면..
서희를 빼놓을 수 없을텐데.. 이 서희도 결국엔 고려의 군사력에 기초해 외교력을 발휘했었지요..
거란도 결국 충돌하기 찝찝하니 오히려 선물보따리 풀어놓고 물러섰구요.
고로, 동서고금 이래 기초체력인 군사력에 기초하지 않은 외교는 너무 무의미하죠.

애시당초 제국주의 시대가 '함포외교'로 상징되는 군사력에 기초한 정글 같은 외교 환경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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