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임란 당시...1차해전이지만, 실제로는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을 중심으로 올린것임을 알려드립니다.(본문은 글씨체를(?) 짧게 하겠습니다^^ 1차 출동은 경상우수사 원균이 옥포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구원을 요청하여 이에 전라좌수영이 응하여 출동하게 된다. l차 출동시 총 전함수는 85척이지만, 전투함이라고 할 수 있는 판옥선은 24척에 불과하고 그 외는 협선 16척, 포작선(어선) 46척으로 이런 배는 전투에는 참가할 수 없었고 보급품 운반과 연락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에서 보듯 포작선(어선)을 다수 징발,동원한 것은 적에게 세력을 과시할 목적인것으로 추정.
l차 출동시 총 전함수는 85척이지만, 전투함이라고 할 수 있는 판옥선은 24척에 불과하고 그 외는 협선 16척, 포작선(어선) 46척으로 이런 배는 전투에는 참가할 수 없었고 보급품 운반과 연락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에서 보듯 포작선(어선)을 다수 징발,동원한 것은 적에게 세력을 과시할 목적인것으로 추정
본인이 복사해 붙이고, 내용 확인 안 하시나;;
판옥선 외 나머지 배들은, 뒤에 들러리용이라고 위에 쓰여져 있잖습니까?
실질적인 전투싸움은 판옥선이 한거죠.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수군은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조선의 지휘부의 우려와는 달리
다행스럽게도 수륙병진정책이나 제해권확보에는 비교적 무관심했습니다.
임란 초기의 일본수군의 주요작전범위는 일본군의 출발지인 규슈 나고야-일기도-대마도-부산
으로 이어지는 병참선을 확보하는데 주력하였고, 개전 후 한 달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서서히 서진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명확한 전술-전략목표가 부재한 상황에서 서해방면으로의 서진도 이순신의 조선수군의
벽에 부딪히게 되자 우왕자왕하게 됩니다.
또한 조선과 같이 지휘계통이 일원화된 것이 아니라 여러 영주들의(비록 일본영내에서의
영지규모와 생산력의 차이는 있지만) 연합체이다 보니 지휘계통도 모호하여(이는 일본육군도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한 마디로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마냥 총대를 메고 난황을 극복하려는
의지도 부족했습니다.
이는 당시 조선에 출전한 육군-수군지휘관에 해당하는 거의 대부분의 영주들이
자기재산이라 다를바없는 자기영지에서 병력을 동원했기 때문에 상당한 출혈이 뻔히 예상되는
전투는 회피하려는 경향을 나타냈습니다.
어떻게 로마카톨릭 십자가 깃발을 들고
왜군들은 조선 양민들을 잔인하게 죽였고
조선을 침략했는지 살펴보아야 하며,
그 의문점에 대해 답을 해야 합니다.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합니다.
임진왜란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다양한 해석을 하겠지만,
간과되고 있는 소수 의견은
동북아지역의 십자군 침략전쟁 입니다.
아시다시피 유럽중세 십자군전쟁은
로마카톨릭과 연관이 높습니다.
마찬가지로 임진왜란은 로마카톨릭과 연관이 있으며
예수회와 연관이 있습니다.
기리시단 성화(切支丹聖畵)에 나타난 십자가이며,
흐릿하게 IHS 예수회 이니셜을 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그들을 기리시단으로 불렸고,
조선침략 실패로 그 여파로
천주교 박해의 단초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16세기 중반 예수회 신부들에 의해
일본에 로마가톨릭 신앙이 유입되었는데
일본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기리시단’이라 불렸으며
처음 50년 동안 기리시단은 크게 유행하였으나
일본의 통치자 토요토미와 도쿠가와가 잇달아
기리시단 금압령을 발표하고 선교사를 추방한 후
기리시단을 박해, 수천 명의 기리시단 순교자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일본의 기독교 역사는 16세기 예수회 신부인 에스파냐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에르의 전도로 시작 되었다. 기리시단은 일본의 카톨릭 신자를 부르는 이름이다. 처음 50년 동안은 번성 하였으나 도요토미, 도쿠가와 시대에 핍박으로 수천 명의 순교자를 낳았다. 이후 19세기까지 숨은 기리시단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는데 이때 지방의 기리시단들은 불교도로 위장하여 혼합적 종교로 살아남게 되었다. 이 그림 역시 불교의 보현 보살(십자가 바로 아래 그림)에다 십자가와 예수의 라틴어 머리글자 "IHS" 를 새겨 놓고 예배시 사용 하였다. 십자가 부분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이 그림은 일본 남부 시고쿠 지방 츠시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들어 온 것은 1549년이다. 예수회 소속 신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스페인 출신으로 인도에서 선교하다 일본행)가 큐슈 남단 가고시마에 상륙해 당시 세력가인 오다 노부나가의 승낙을 받으면서 크게 전파돼 나갔다. 기독교도의 수가 70년 간 80만 명으로 불어나 일본 전체 인구의 5~6%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직전인 1587년 기독교가 서양세력 침략의 통로로 이용되고 일본의 통치이념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텐렌(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기독교 금지령을 내렸다. 일본의 정체성과 전통문화가 와해되고 국가지배 체재가 붕괴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면에는 다케다 신겐,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으로 이어지는 군벌 세력들의 오랜 전쟁과 권력다툼으로 인한 국정혼란을 덮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럼 고니시의 깃발은 지맘대로 들었다 이말씀인가요? 두 가지 경우가 있다면 그 당시의 상황을 보고 판단해야죠... 일단 고니시가 카톨릭깃발을 들고 성전을 내세웠으니 히데요시도 당근 알았겠죠... 물론 그 전에 잠시 박해는 있을지언정 전쟁시에는 허용했다고 봐야겠죠... 그리고 임란 실패 후에는 19세기까지 계속 박해로 이어지니까요...
그건요 세스페데스가 조선에서 선교할동을 할려면 얼마든지 그런 핑계를 댈 수 있는거죠... 만약 세스페데서가 앞장서서 깃발을 들었다고 한다면 나중에 전쟁에서 승리해도 선교활동은 자유롭지 않을테니까요.. 즉 유성룡에게는 고니시의 개인일탈이라고 설명해줘야 세서페데스의 명분이 서는거죠...
아메리카에서 선교사들이 한 행동은 앞에서 웃고 뒤에서 칼을 겨누었으니까요...충분히 가능성 있죠. 그러니까 우리는 상황을 봐야하는거죠... 유성룡이 잠시 목격하는 장면보다는 실제 벌어지는 일이 더 신빙성이 있겠죠.
우리도 그렇잖아요... 개인 간에 일어나 일은 그 벌어지는 상황이 중요하지 한 쪽이 변명하고 핑계대는 것이 중요하지 않잖아요... 선발대 19000명이 카톨릭 깃발을 든다는 것은 이미 히데요시가 성전으로 인정하고 했다는 것이 더 믿음이 가죠... 고니시 개인이 방안에서 뭔가를 했다면 몰라도 이건 군대입니다. 후에 서양에서 그렇게 조작할 수 도 충분히 있죠...
님이 무슨 얘기할려고 하는지 짐작은 되지만 이번 사안은 무리네요,
고니시 집안 문장에 십자가 넣은 단초 하나로 임란이 십자군전쟁으로 바뀌다니...
고니시가 조선 출병한 것은 기독교 전파하러 간 게 아니잖아요.
약탈이라는 측면에서야 십자군원정과 임란이 비슷하나,
피에르의 독려와 십자군 결성을 세스페데스와 고니시 가문의 출병으로 대치하다니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