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청나라의 속국이라니......
청황제나 청관리에게 굽히고 들어간 부류들은
동아시아 현지에 파견된 동인도회사의 하급관리나 상인들 뿐인데.....
정작 건륭제때 청국에 특사로 파견된 메카트니경은 청이 강요하는 삼배구고두를 거부했습니다.
영국을 청국의 속국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냥 청국의 정신승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이 조공을 바친 중국속국이라면 조선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언제 일본통일정권차원에서 조선에 조공을 바쳤는지....??
고작 조선의 1/300 규모인 대마도가 조선을 섬긴 것을 가지고 일본전체가 섬긴 것으로 확대해석을
하다니.. ㅉㅉㅉ
그 조선의 1/300 규모의 대마도마저도 그들이 발끈하여 삼포왜란 같은 난을 일으키자
당시 부산과 그 주변지역은 대마도반군들에게 탈탈 털림을 당했고
경상도전체의 관군으로도 제압이 안되어
중앙정부군까지 내려가는 수고를 거듭한 뒤에야 겨우 진압하는 취약성을 드러내지요....!!!
또한 조선전기의 최대전성기인 세종 당시의 대마도정벌 당시에도
인구 2만이하로 추산되는 대마도를, 경상-전라-충청 조선 삼남지역의 대다수 가용병력에다
대마도인구전체와 거의 맞먹는 1만7천을 동원하고서도 대마도정벌이 조선이 온전히
승리했다고 하기에는 내용면에서 허술했던 부분이 많았지요!!!
오히려 역습까지 당하여 조선기록에는 조선군180명, 일본측기록에는 2,000명의 조선군이
전사했다고 했으니.....
대개 자기의 패배는 축소하고, 자신의 전과는 과장하는 당시 조선과 일본의 공통적인
기록경향에 비추어보았을때 적어도 수 백명의 조선군이 전사한 것은 맞다고 봅니다!
최종적으로 대마도현지에서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지 못하고, 조선군은 철수하고 말았고
이후에 문서상으로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아낸 찝찝한 정벌이었습니다.
마치 수나라의 고구려원정을 연상시키듯이.....
실제 전쟁에서는 수나라군이 참패했지만, 고구려도 수나라의 물량공세가 부담스러워
형식적인 강화문서를 보낸 것과 비슷한 것처럼.....
개인적으론 예전에 센츄리온님께선 올려주셨던 글을 보니
왜구들이 고작 53명으로 명나라 남부를 휩쓸며 수천의 중국 병사를 죽이고 다니며 언제는 또 고작 73명에게 예전 명의 수도였던 남경성이 포위된적도 있더군요 (이때 성주민들은 73명이 걍 첩보들인줄만 알고 문을 닫은것도 있지만 어쨋든 당시 기록보니 왜구 73명이 몇번 올라와서 명군 100명씩 죽이기를 반복했다 하는데요) 결국 척계광같은 명장덕에 격퇴되었긴하지만
이런 원피스 찍던 왜구를 애초에 주무대를 한반도에서 명나라로 향하게 한게 조선의 대마도 정벌 덕이 아닌가요? 명나라 군 수천을 썰어제끼던 왜구들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쳐서 손실이 꽤 많았다고 조선이 폄하될 일은 아니지 아닐까란 생각이 드네요. 혹은 삼포왜란때 중앙군이 파견되어야했더고 해서도 말이죠
그리고 설령 일본 사신들이 위조라해도 어쨋든 서일본의 영주들이 조선에 조공하며 어느정도 사대했단건 사실이니...그것도 거의 독립국이나 다름없던 번들이...당장 한국인들만 해도 고구려나 백제 따까리?로 생각하는 고대 신라나 가야만해도 왜에 조공했다란 말 들으면 빡치는데 상당한 수의 일본 영주들이 조선한테 머리 조아리며 조공한걸 일본인들이 단순히 최고통수권자가 직접 조공한건 아니란 이유로 무시할수 있을지요 흠...
'조선-중국 뿐만 아니라 동남아 일대까지 진출하여 여러 곳에 일본인 촌들이 만들어졌으며...'
평소 이런 기록들을 보면 조선은 자급자족이 가능했으므로 국내에 안주하느라(종교적인 이유도 있고) 폐쇄적인 성격을 띠었고, 그 당시 자급자족이 어려웠던 일본은 해외시장 개척에 더 적극적이었다고 느껴지더군요.
시대가 바뀌어 현대 일본이 안정적인 내수시장에 안주하다가 수출에 생사를 걸었던 한국에 세계시장을 내준것을 보면 역사는 돌고 돈다 라는 말이 옳은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