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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6-07 00:07
[기타] 조선왕조실록 인용문 - 14, 15세기 조선의 대외 위상
 글쓴이 : 해달
조회 : 5,250  

굿잡스 님의 글을 보고 궁금하여 찾아보았습니다.

과거 조선 시대, 중국만이 황제의 나라였고, 중국의 왕만을 황제로 칭했을까.
그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황제(皇帝), 그것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었다.
동아시아 각국은 군사력, 문화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나라, 즉 상국(上國)의 왕을 황제라 칭하였다.
조선은 명, 청의 왕을 황제라 칭했고, 주변국은 조선의 왕을 황제라 칭했다.
14, 15세기 조선은 전성기를 맞았다. 세종 때에는 그것이 절정에 달한 때였고, 그것은 한동안 이어졌다.
주변국은 조선국에 조공을 바쳤다. 자국의 토산물을 바친 것이 그것이다.
조선의 왕을 황제라 칭한 기록을 왕조 실록에서 찾아보았다.
아래는 그 일부이다.

일본국의 축주 관사(筑州管事) 평만경(平滿景)이 사람을 시켜 토산물을 바치니, 그를 접대하라고 명하였다. 그 서신(書信)에,
만경(滿景)은 선고 황제(先考皇帝)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적에 하늘을 우러러보고 통곡했으며 땅에 몸을 던져 울었습니다. 크게 의지할 곳을 잃었으니, 불행한 일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었습니다. 우러러 마음을 상하여 평삼랑 좌위문(平三郞左衛門)으로 하여금 글을 받들어 슬픔을 고하오니, 삼가 아뢰어 드리기를 원합니다. 조그만 예물(禮物)로 올리는 토산물은 용뇌(龍腦) 50전목(錢目), 소향유(蘇香油) 2근, 당주(唐朱) 2근, 황련위(黃練緯) 2필, 유황(硫黃) 2천 근, 곽향(藿香) 10근, 기린혈(麒麟血) 2근, 감초(甘草) 20근, 부채[扇子] 20자루를 바칩니다.”라고 하였다. 예조 참의 유연지(柳衍之)가 답서하기를,
“사람을 보내어 위문(慰問)하니 깊이 감사한다. 바친 예물은 삼가 이미 위에 아뢰어 드리었으며, 지금 토산물인 면포(緜布) 4백 70필을 돌아가는 사람에게 부쳐 보낸다.”
라고 하였다.

좌위문대랑(左衛門大郞)이 사람을 시켜 토산물을 바쳤다. 소조하상가(小早河常嘉)가 사람을 시켜 예조에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
선고 황제(先考皇帝)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말을 받자와, 처음 듣고 놀라서 음식을 잊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상상하건대, 임금의 효성으로 사모하고 슬퍼하심이 지극하사 〈멀리 있는〉 저의 마음까지 감격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닷길이 멀어서 능히 몸소 소위(素幃)에 나아가 뵈옵지 못하와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사신으로 행인(行人) 석조선(釋祖禪)을 보내어 각하(閣下)에게 서신을 올리오니 삼가 위에 아뢰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였다. 금년 봄에 서신을 가지고 온 사신이 돌아와서 알리기를,
“후한 위로를 받고 아울러 진귀한 물품을 부쳐 보내니 기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변변하지 못한 작은 예물(禮物)로서 향(香) 70근, 수우각(水牛角) 8본(本), 소목(蘇木) 5백근, 백련위(白練緯) 1단(段), 진피(陳皮) 80근, 파두(芭豆) 10근, 당귀(當歸) 2근, 상산(常山) 5근, 연교(連翹) 2근, 기린혈(麒麟血) 2근, 유황(硫黃) 2천 근을 드립니다.”
라고 하였다. 예조 좌랑 성염조(成念祖)가 답서하였는데, 그 답서에,
“사람을 보내어 위로하니 매우 감사하였다. 토산물인 오승포(五升布) 3백 80필로 후의(厚意)에 사례(謝禮)한다.”
라고 하였다. 원도진(源道鎭)이 예조에 서신을 보내고, 인하여 곽향(藿香) 50근, 봉아목(蓬莪木) 20근, 백단(白檀) 37근, 호초(胡椒) 10근, 백지(白芷) 20근, 황금(黃芩) 20근, 정향피(丁香皮) 20근, 초과(草果) 2근, 축사(縮砂) 10근, 부자(附子) 1근, 당사(唐絲) 3근, 비파엽(批把葉) 20근, 백계(白鷄) 20근, 소목(蘇木) 1천 근, 상아(象牙) 30근, 유황(硫黃) 3천 근을 바쳤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정포(正布) 7백 60필을 주었다. 원도진이 또 서신을 보냈는데, 그 서신에,
“삼가 생각하옵건대, 황고황제(皇考皇帝)께서는, 성문(聖文)은 일월(日月)과 같이 빛나고, 신무(神武)는 뇌정(雷霆)의 위엄을 떨치었습니다. 진실로 이는 백왕(百王)의 종(宗)이요, 만세(萬世)의 법이 될 만합니다. 인(仁)은 온 세계에 흡족하고, 의(義)는 다른 나라에까지 넘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 국군(國君)이 인교(隣交)의 화호(和好)를 닦아서 방문(訪問)하는 사신을 자주 보냈으니, 이것이 몇 해가 되도록 소식이 끊어지지 않았으므로, 매양 평안하신 줄 알고 축수(祝壽)하고 기도(祈禱)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심을 듣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고비(考妣)가 죽은 것 같사온데, 하물며 성예(聖睿)야 어떠하오리까. 드디어 행인(行人)을 시켜 통신(通信)하여 가서 〈제가〉 배례(拜禮)하는 의식을 대신하게 했는데, 멀고 먼 바닷길에 〈아래로〉 높으신 용서를 주시었습니다. 변변치 못한 토산물은 별전(別箋)에 기재되어 있으니, 단목(丹木) 3백 근, 창자(槍子) 20본, 유황(硫黃) 1천 5백 근입니다.”
라고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회사(回賜)로 오승포(五升布) 2백 60필을 주었다. 좌위문대랑(左衛門大郞)이 정부(政府)에 서신을 보내고, 토산물인 단목(丹木) 1천 근, 유황(硫黃) 9천 근을 바치니, 〈우리 나라에서〉 회사로 정포(正布) 1천 2백 20필을 주었다.

일본 국왕(日本國王) 회수납정소(懷守納政所) 이세수(伊勢守) 정친(政親)이 보낸 입도(入道)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정친은 삼가 글을 조선국 의정부(議政府) 합하(閤下)에게 바칩니다. 공손히 바라건대 나라가 크게 평안해서 금상 황제(今上皇帝)의 어위(御位)가 오래도록 가소서! 폐하(陛下)께서는 공손히 덕(德)이 건곤(乾坤)과 일치하여 당(唐)·우(虞) 의 어질고 장수하는 지역(地域)을 보전하고, 현성(賢聖)을 신하로 모아서 이(伊)·주(周) 의 순수하고 소박한 기풍을 회복하도록 원하며, 성의를 다하여 축복합니다. 그런데 부상(扶桑) 전하의 높은 명령에 응하여 같은 날에 서계를 봉하여 조선(朝鮮)과 유구(琉球)의 두 나라에 사선(使船)을 보냅니다. 이는 나의 개인적인 의사가 아니니, 이와 같은 간절한 뜻을 폐하에게 주달(奏達)하여서 허락하여 주시면 오직 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일본의 관령(管領) 세천(細川)과 산명(山名)은 사사로운 야심으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므로 세천도 호군(胡軍)을 더해서 제후(諸侯)가 있고, 또 산명도 호군을 더하여 제후가 있어서 일본의 서울은 크게 어지럽습니다. 내가 토벌하여 비록 정지시키려고 하나, 아직 그치지 아니하니, 거듭 세천과 산명 두 사람의 태만한 죄과가 적지 않습니다. 지금은 세천이 이겨도 좋고 져도 좋으며, 또 산명이 이겨도 좋고 져도 좋은데, 서로 부상 전하의 높은 명령에 따른다고 하여 두 진영의 모든 군사가 내가 이긴다 내가 이긴다 하면서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접전하여 수만의 호군이 함께 죽어 갑니다. 이에 내가 부상 전하의 토벌 명령을 받들어 일본 나라 동남서북의 입도(入道)들에게 제후의 모든 군사를 모으게 하여 세천과 산명 두 사람의 큰 진성(陣城)을 향하여 출발시켜 포위하고 태평(太平)을 거두고자 하여, 사선(使船)과 부선(副船)을 건너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국의 남은 힘을 입고자 하는데, 바라는 물건은 면주(綿紬) 3천 필, 면포(綿布) 5천 필, 백저포(白苧布) 1천 필, 쌀 5천 석이니, 자비로 살피소서. 오직 우리 나라의 태평을 거두고 더 나아가 번신(藩臣)으로서의 충성된 공훈을 세우기를 빕니다. 보잘것 없는 토산물을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바야흐로 새 눈이 온 산을 뒤덮었으니 풍년이 들 길조(吉兆)입니다. 이만 그칩니다. 별폭은, 금(金) 2원(員) 21냥쭝[兩], 주(朱) 4포(包) 40냥쭝, 대도(大刀) 15파(把), 단자(段子) 1필, 수자(繻子) 1필, 부채[扇子] 50본(本)입니다. 받아주시면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다.

대마주 태수(對馬州太守) 종정국(宗貞國)의 특송(特送) 중 하선사(賀禪師)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머리를 조아려 글을 조선국 예조 대인 족하(禮曹大人足下)에게 올립니다. 제가 정해년에 새로 국위(國位)를 계승하였는데, 다 음해 무자년에 선 황제(先皇帝)께서 보위(寶位)에 올라 서정을 친히 행하시니, 스스로 생각하기를, ‘존비(尊卑)는 비록 다르나, 같은 때를 만났으니, 마땅히 오래오래 장수하셔서 길이 경사를 함께 하도록 축원하여야겠다.’고 하였는데, 어찌 예측하였겠습니까? 흉보(凶報)를 금일에 들을 줄이야! 놀라고 마음이 떨려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진강차랑좌위문(津江次郞左衛門)의 아들 중 하선사를 보내어 집사(執事)에게 조상을 드리고, 향(香) 3근과 감초(甘草) 15근을 올리니, 거두어 주길 바랍니다. 비록 황공하오나 함께 써서 계달(啓達)하는 것은 내가 축전주(筑前州)에 건너가서 강한 적이 에워싼 큰 진(陣)을 물리쳤으므로, 부상 전하(扶桑殿下)의 높은 명령을 받들어 종 형부 소보(宗刑部少輔)의 관직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서계에 ‘종 형부 소보’라고 써서 보내는 것입니다. 먼저 제가 벼슬을 한 자축(自祝)의 의미로 부선(副船)에 비록 사소하나 큰 칼 5자루를 진상하니, 받아주시면 다행하겠습니다. 비록 번거롭고 잡다하여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나, 소망하는 물건은 면주(綿紬)·면포(綿布)·백저포(白苧布)·인삼(人蔘)이며, 또 제위(帝位)의 축례(祝禮)는 내가 관작을 받은 축의(祝儀)로 사선을 보내는 것이 조금 늦었습니다. 그리고 이 배의 주인이 나에 대해서 자주 바라는 것을 내가 족하에게 하소연합니다. 이 사선(使船)은 오래된 배이므로, 송판못[板釘]·거멀못[鉅未釘]·육지에서 나는 모든 부속품들을 내려 주시면 다행하고 다행하겠습니다. 건강에 조심 하소서. 이만 그칩니다.”
하였다.

일본국(日本國) 경극전(京極殿) 경조윤(京兆尹) 좌좌목씨(佐佐木氏)와 강기운 삼주 태수(江岐雲三州太守) 태선 대부(太膳大夫) 입도(入道) 생관(生觀)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수(壽)가 남산(南山)처럼 높고, 덕(德)은 동해(東海)에 젖으시어, 부상(扶桑)의 물이 조회하고 계림(雞林)의 들[野]이 성대하기를 빌고 빕니다. 신(臣)은 선조 이래로 대대로 일역(日役)에서 사사(士師)가 되니, 마치 진(晉)나라의 범자(范子)와 같은 자이므로, 오로지 궁마(弓馬)를 맡아 부조(父祖)의 업(業)을 실추시키지 않았습니다. 본조(本朝)에서는 정해년 이래로 중원(中原)에 난리[風塵]가 나서 전쟁이 사방에서 일어나매, 신의 고을도 함께 싸움터 안에 들어가서 적을 많이 대하게 되니, 요역(徭役)에 나가느라 농상(農桑)을 폐기하여 피륙이 가장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사졸(士卒)들이 타지(墮指)의 재앙에 많이 곤고(困苦)하여 마치 백등(白登)의 포위를 당한 것과 같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귀국의 명주와 무명의 은혜를 내려 주시면, 삼군(三軍)에서 얼어 죽는 것을 구제하고 황제의 은혜를 만세토록 우러를 것입니다. 변변치 않은 토산물 몇 가지를 별폭(別幅)에 갖추어 적으니, 살펴주시면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하였다.

일본국(日本國) 인백단 삼주 태수(因伯丹三州太守) 산명전(山名殿) 소필(少弼) 원교풍(源敎豐)이 양영 서당(亮瑛西堂)을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치고, 아울러 사서(四書) 각각 1건(件)씩을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는 이르기를,
“공경히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皇帝陛下)께서 보위(寶位)에 오르시어 천운(天運)을 이어받으시니, 구방(舊邦)이 유신(維新)하며, 덕(德)이 하(夏)나라·은(殷)나라의 초정(初政)보다 뛰어나시고 도(道)가 요(堯)임금·순(舜)임금보다 위에 짝하시니, 지극히 축하하고 지극히 축수합니다. 신은 선조(先祖) 이래로 가세(家世)에서 상국(上國)에 빙문(聘聞)을 통하지 아니한 적이 없기 때문에, 경인년 가을에 일개 암자승(菴子僧)과 석도문(奭都聞) 등을 차견(差遣)하여서, 옛날의 맹세를 닦으며, 또 토의(土宜)의 미미한 정성을 바쳤습니다. 다행히 금상 황제(今上皇帝)께서 왕위(王位)를 이어받으시는 초정(初政)을 만나서, 눈으로는 한(漢)나라 관리의 위의(威儀)를 보겠고, 귀로는 주(周)나라 시(詩)의 가송(歌頌)을 듣겠으니, 아아, 성대(盛大)합니다. 실로 문무(文武)의 나라인지라 영우(榮遇)하기가 너무나 크옵니다. 전사(專使)가 일을 끝마치고 동쪽으로 돌아오게 되매, 화로 동반(火爐銅盤) 1개와 동경(銅磬) 1개를 더하여 내려 주시니, 이미 후한 은혜를 받았으므로, 감격하고 기쁜 마음이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만복사(萬福寺)의 주지(住持) 양영 서당(亮瑛西堂) 등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서 박(薄)한 폐물(幣物)을 바치어 오로지 황제께서 왕위를 이으신 것을 배하(拜賀)하게 합니다. 신은 비록 먼 하늘, 먼 바닷가의 땅에 있어서 위궐(魏闕)아래에 달려가 마음을 바치지는 못하나, 구구(區區)한 단성(丹誠)을 엎드려 예찰(睿察)하여 주시기를 빌며, 그리하여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신의 봉지(封地) 안의 백주(伯州)에 만복 선사(萬福禪寺)라고 하는 옛 사찰(寺刹)이 있는데, 허물어져 무너진 지가 세월이 오래 되었으므로 장차 다시 영조(營造)하려고 하여, 저번 때에 상국(上國)에 조연(助緣)을 구(求)하였으나, 너그러이 용납하여 주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바라는 바는 대왕께서 관인(寬仁)으로써 포금(布金)의 봉시를 속히 행하여 주시면, 불각(佛閣)과 승방(僧房)을 일시에 다시 옛날처럼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길이 성수(聖壽)가 만안(萬安)하시도록 봉축(奉祝)하는 일단이 될 것입니다. 하정(下情)은 지극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여 변변치 않은 방물(方物)을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하였는데, 그 별폭에는,
“활[弓] 2장(張), 백시 동대(百矢同臺) 1대(對), 대도(大刀) 10진(振), 관자 풍로(罐子風爐)·건명분(健茗盆) 2매(枚).”
이었다.

일본국(日本國) 옹아기월능 5주 총태수(甕何紀越能五州摠太守) 전산 우금오독(畠山右金吾督) 원의취(源義就)가 종상 서기(宗祥書記)를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삼가 금황제(今皇帝)께서 성수(聖壽)가 무강(無彊)하시기를 빌고 빕니다. 엎드려 아뢰건대 지난해 물건을 내려 주신 은혜는 산보다 무거워서 털을 뽑아 세어도 부족하니, 은광(恩光)이 중하고도 후합니다. 그런데 근래 당한 병란(兵亂)의 재앙으로 신(臣)의 할아비가 세운덕본사(德本寺)가 불타 없어졌습니다. 제가 전쟁하느라고 겨를이 없기는 하나, 절을 다시 일으키려는 뜻을 버리지 못하여, 세재(世財)를 다 써도 모자라서 이루기 어려우므로, 귀국에 힘입어 권진(勸進)합니다. 우러러 바라건대 녹물(祿物)을 많이 내려 주시는 은혜를 입으면 다행이겠으니, 살펴 주소서. 진상(進上)하는 물건은 별폭(別幅)에 적었습니다.”
하였다.

일본국(日本國) 방장섭천 4주 태수(防長攝泉四州太守) 대내 별가(大內別駕) 다다량 정홍(多多良政弘)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삼가 황제 폐하(皇帝陛下)께서 명덕(明德)이 일월(日月)보다 빛나고 성수(聖壽)가 장래에 장구(長久)하시기를 빌고 빕니다. 상국(上國)과 우리 선조(先祖)가 통호(通好)한 지 정홍(政弘)까지 26대째입니다. 상국과 대주(對州)와 아직 동맹(同盟)하기 전에 자주 전쟁하였는데, 그 때에 신(臣)의 선인(先人)이 상국을 위하여 구원병을 보내어 사졸이 죄다 전사하고 한 사람도 귀국하지 못한 것이 이제 80여 년 전의 일입니다. 게다가 존명(尊命)을 받들어 수우(水牛) 암수를 바치기도 하였으니, 그렇다면 선인의 상국에 대한 충성이 적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정홍은 그 후사(後嗣)로서 임진년에 처음 사자(使者)를 보내어 선인이 맺어 온 구호(舊好)를 닦았는데, 그때 구례(舊例)에 어그러지는 일을 당하여 아껴 주시는 뜻이 매우 없었습니다. 집사(執事)가 옛 맹약(盟約)을 잊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또 사자가 변변치 못하였기 때문입니까? 정말 모를 일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존명에 따라 곧 거듭 사선(使船)을 보내어 명을 받고자 합니다. 따라서 유구국(琉球國)에서 보내 온 사향(麝香) 1필(匹)을 존명을 받들어 바칩니다. 정홍이 몇 해 전부터 산명 좌금오(山名左金吾)의 군사를 돕느라고 경사(京師)에 머문 지가 몇 해 되었는데, 지난해 3월 18일에 금오가 서거(逝去)하고 그달 28일에 세천 경조(細川京兆)도 서거함에 따라 두 집안의 자제들이 점점 화목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전하(殿下)가 대명국(大明國)에 사선(使船)을 보내고자 하매, 신이 명을 받들어 배를 꾸미는데, 공사간(公私間)에 그 비용이 매우 많습니다. 상국의 풍부한 재물의 나머지로 은사(恩賜)를 굽어 내리시기를 바라며 앞으로 갈수록 옛 맹약에 따라 충절(忠節)을 지키고자 합니다. 대명국과 유구국에서는 신에 대하여 은문(恩問)이 더욱 후한데, 상국만이 옛 맹약을 잊으신 듯합니다. 교맹(交盟)이 보탬이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보명(報命)에 따라 그 뜻을 알아서 엎드려 진정을 아뢰겠습니다. 변변치 않은 토의(土宜)나마 작은 뜻을 표합니다.”

일본국(日本國) 대마주 태수(對馬州太守) 종정국(宗貞國)이 특별히 종무승(宗茂勝)을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공손히 생각건대 황제 폐하(皇帝陛下)는 거룩한 지위의 높음이 더욱 튼튼하시고, 거룩한 수명의 길기가 더욱 장구하시기를 극진히 축원하옵니다. 출우수(出羽守) 종정수(宗貞秀)에게 매양 해마다 한 척의 배를 보내도록 하여 숙배(肅拜)를 하게 하시니, 실로 성은(聖恩)이 매우 큽니다. 근년 이래로 그 사람됨이 순후하고 신중하여 다년간 일에 숙련하였기 때문에 저희 제종(諸宗)에서 뽑아 정병(政柄)을 맡기고 신(臣)은 이제 주로 획락(畫諾)만 할 따름입니다. 대저대마도(對馬島) 한 주(州)가 귀국(貴國)의 신하(臣下)가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입은 은혜와 보내는 배[船]의 수효도 각각 차등이 있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지금부터 이후로는 일본 사선(使船)의 수가 저희 제종(諸宗)이 소유하고 있는 것의 배(倍)가 되어 매년 10척의 배를 보내게 해주는 것은 얼마나 지나친 다행이겠습니까? 이미 신에게 허명(許命)하셨으니, 어찌 귀국(貴國)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인하여 병부 소보(兵部少輔) 종무승(宗茂勝)과 대호군(大護軍) 피고여문(皮古汝文)을 올려 보내어 구두로 거듭 개진(開陳)하게 하였으며, 또 삼포(三浦)의 쇄환(刷還)하는 일은 두 번에 걸쳐 이미 연락(然諾)을 드렸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수년 동안 상도(上都)로부터 하읍(下邑)에 이르기까지 군사 일로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전과 같이 시행하게 되어 마치 식언(食言)을 한 것 같아서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이미 종무승 등을 보내어 자세히 말씀드리니, 존명(尊命)을 받들어서 며칠 내로 쇄환이 이루어지게 하겠으므로 감히 글로써 아뢰옵고 다 갖추지 못합니다.”
하고, 또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요전에 내이포(乃而浦)와 부산포(富山浦)의 주민의 가옥이 서로 연접하여 화재를 만나 모두 잿더미가 되었는데, 이에 황송스럽게도 관원을 보내시어 술과 안주를 갖추어 서로 위로하면서 먹게 하시고 거기다가 관곡(官穀)까지 더하여 서로 진제(賑濟)하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우리 백성이라도 바다가 막히고 땅이 달라서 완급(緩急)을 구원(救援)할 수가 없는데, 이제 성은(聖恩)의 지중함을 실감하고 그윽이 부끄러움을 품었으나 너무도 절실하고 황송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지난해에 귀국의 중[僧]으로서 표류(漂流)하여 오도(五島)에 이른 자를 만난 즉시에 귀국으로 보냈더니, 보답으로 하사(下賜)하신 것이 더욱 후하여서 건건(件件)이 진기(珍奇)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습니다. 특별히 내려 주신 숙상(驌驦)은 모든 말 중에 특출하고 빠르기가 월등하여 용(龍)이 물을 벗어난 것 같았습니다. 옛말에 ‘말 한 마리가 나가고 나니 기북(冀北)에 말이 없다.’란 말이 있는데, 이제 이 말이 오고서는 우리 한 고을[對馬州]에 또한 말다운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기쁘고 섭섭함을 아울러 느끼며 감사하는 정성이 지극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였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특진관(特進官) 이극돈(李克墩)이 아뢰기를,
왜인(倭人)과 야인(野人)이 조현(朝見)하는 날, 비록 군사로 하여금 갑주(甲胄)를 갖추고 문을 지킨다 하여도 전좌(殿坐)하실 때의 군용(軍容)만큼 엄숙하지 못합니다. 야인(野人)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천안(天顔)을 뵙고는 기뻐하여 말하기를, ‘황제(皇帝)를 배알하였다.’ 하고, 그렇지 않으면 마음속으로 즐거워하지 않았으니, 세조조(世祖朝)에 신숙주(申叔舟)가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어, 왜인과 야인의 조현을 반드시 전좌하셨을 때 행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신(臣)의 생각으로도 역시 보통 왜인이라면 그만이겠으나, 만약 거추(巨酋)라면 조종조(祖宗朝)의 예(例)에 의해 조하(朝賀)·조참(朝參) 등 궁전에 임어하셨을 때, 그들로 하여금 반열(班列)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특진관(特進官) 유자광(柳子光)이 말하기를,
중국 조정에서는 무릇 외국 사람은 황제(皇帝)가 모두 조회(朝會)받을 때 본다고 하니, 이극돈의 말이 매우 좋습니다.”
하고, 동지사(同知事) 신승선(愼承善)은 말하기를,
왜인과 야인이 조현하는 날이 조하·조참과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이같이 하는 것입니다.”
하니, 이극돈이 말하기를,
“비록 2, 3일을 늦춘다 하여 무엇이 방해롭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왜인과 야인은 일찍이 조하나 조참 때 다 반열에 따르게 하였으나 지금 폐지해 온 것이니, 이제부터는 옛 예에 의해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일본국(日本國) 대내(大內) 대중 대부(大中大夫) 좌경조윤(左京兆尹) 방장풍축 4주 태수(防長豐筑四州太守) 다다량 정홍(多多良政弘)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글에 이르기를,
조선국(朝鮮國) 예조 참판 족하(禮曹參判足下)께 복계(覆啓)를 드립니다. 삼가 살피건대 〈건강이〉 청승(淸勝)하시다니 기쁘고 위안이 됩니다. 저희 〈집안은〉 계통(系統)이 귀국(貴國)에서 나왔고, 대대로 구호(舊好)를 돈독히 한 지가 오래 되어 더욱 도타왔습니다. 이 때문에 빙사(聘使)가 끊임없이 왕래(往來)하여 덕으로 다스리는 정화(政化)가 하국(下國)에까지 미쳐 남달리 융성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러 해를 계속해서 제장(諸將)이 도적[賊]을 토벌한 이래 옹희(雍熙)의 교화(敎化)에 회복됨을 얻지 못하였고, 편맹(編氓) 또한 농상(農桑)을 업(業)으로 삼음이 없으니, 절박하게 근심할 만한 바입니다. 전년[前歲]에는 공손히 양사(兩使)를 보내어 진제(賑濟)를 구(求)하였는데, 먼 곳의 사람을 회유하는 은택(恩澤)이 얕지 않은 것이겠습니까? 사자[伻]가 돌아오매, 배사(拜賜)하였습니다. 다만 부족되는 것은 동철(銅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보광원(寶光院) 요신(堯信)을 전개(專价)로 삼고 대조원(大照院) 종모(宗模)를 부사(副使)로 삼아, 삼가 원지(爰旨)의 흉도(凶徒)의 여얼(餘孽)을 아룁니다. 명(命)이 급히 내리니, 내년 맹동(孟冬)에는 장차 토벌할 것인데, 전포(戰袍)·기치(旗幟)의 비용(費用)인 동철(銅鐵)·면주(綿紬)·목면(木綿)을 인서(仁恕)하여 거만(鉅萬)을 상사(賞賜)하시면 진실로 다행하겠습니다.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전개(專价) 요신(堯信) 등에게 명하여 발돋움하고 우러러보는 사사로움을 빨리 아뢰게 하면서, 변변치 못한 토의(土宜)를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애오라지 양박(涼薄)의 정성을 나타내어 조빙(朝聘)하오니, 빌건대 갈마들여 통하게 해 주소서. 오직 황제 만세(皇帝萬歲)와 재신 천추(宰臣千秋)를 바랍니다.”
하였다.

http://blog.naver.com/haedalgil/220382183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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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miky 15-06-07 00:39
   
사실, 중국 이외에도
황제란 표현를 썼습니다.

금나라 황제가 고려황제에게 서신을 보낸다거나
동쪽의 황제(일본)가 서쪽의 황제(중국)에게 서신을 보낸다거나
왜가 조선의 황제에게 어쩌고 저쩌고~하는 표현이 나오거든요.

여기서 황제란 표현은
서로간에 상대방을 존대하며 공경하는 외교적 수사(꾸며주는 말)라고 볼수 있습니다.

원래, 화이사상엔 중앙에 황제가 있고, 사방의 오랑캐를 교화시키고 다스린다는 개념인데
이건 어디까지나 원론적인 개념인거고,
이걸 주변나라들도 가져와서, 자기식으로 맞게 변용시킨 결과라고나? 할까
     
해달 15-06-07 00:47
   
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저도 찾아보다가, 일본이 황제란 표현을 써서 조선에서 예의 맞지 않다라는 기록을 방금 봤습니다.
     
굿잡스 15-06-07 01:13
   
중요한건 지금 저런 황제라고 칭하는 국제적 권위의 존중은 그럼 어떻게

나오고 있는가를 주의깊게 봐야지요. 중세 시절만 봐도 금의 건국 초기에는 대등한 관계에서

대금황제가 고려 황제 어쩌고 하다 금(신라계황제와 고구려 후신 발해인 연합)이 동북아 패권

을 잡고는 고려황제를 고려 국왕으로 격하 시킵니다.

16세기 중종시기까지도 일본국 사신의 입에서 (조선)금상황제라는 발언의 기록등에도 보이

듯 이런 조선 군주의 존중과 권위는 살아 있었고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타국의 사신의 입에

서 스스로 이런 조선 황제라는 칭호는 빈번하게 나오고 있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는 것임. (이후 이런 황제의 호칭은 왜의 소요가 본격화되고 임진왜란등으로 이어지면서 조왜

간의 관계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마이님이 말하는 수서에 기록된 왜왕이 자기 스스로  일출처(日出處)의 천자(天子)로서 일몰처

(日沒處)의 천자에게 어쩌고는 글자 그대로 본인 스스로 의 자뻑으로  딱 한번 나온

것으로 이로 인해 자신 밖에 없다고 자처하는 수나라 황제의 노여움을 샀다는 기록임.

그러나 이것도 글자 그대로 국제 사회에서 타국이 인정한게 전혀 아니라

스스로 나도 한번 자처해 보자는 식의 딱 한번의 기록이며 당시 동북아에서의

왜의 입지는 도이(島夷) 소국의 패왕으로서 서토 황제의 신하급에 만족할 수 밖에 없는

위치였음.(그리고 이런 왜왕의 정체에 대해서도 실제 누구인지에 대한 선결 고찰이

누누이 필요한 것이고. 알듯 당시 동북아의 두개의 실질적 축은 신생 수나라라는 서토 황제와

전통적 이미 동방문명권의 패자인 우리 고구려가 천자로  동방쪽을 거닐고 있던 상태.

그 가지에 나와 있던 백제가 5세기 고구려의 남진으로 남으로 밀려나면서

서열도로 본격적 도래가 되면서 평정해가기 시작해서 7세기경에는 열도의 실질적

패자가 되던 시기와 맞물려 나오는 발언임. 이런 과정에서 인덕왕릉같은 대형 고분이

나오고 이후 7세기부터 점차 정치체가 안정화되면서 대형화 추세가 사라지는 고고학적

흐름.)

반대로 조선시대 조선의 사신이 왜왕에 대해 황제 어쩌고 소리의 기록은 전혀~ 나오지

않고 있군요.
굿잡스 15-06-07 01:55
   
천자(天子)라는 호칭이나 개념은 서토의 내륙에 쳐박혀 있던 전형적 농경문화의 화한족이 아니라

동이족계통에서 특히나 요하 일대에서 발견되는 우리 고조선 문명권에서 이전부터 이어져 온 선대 신권(神權)문명에

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이미 신석기 후기시대의 요하일대의 거대 피라미드 제단등에

서 확인되듯 그리고 단군에서 보이는 제사장과 군주의 제정일체의 사회상등  군주가 신적인 신성

함까지 부여받은 존재로 고조선을 이어 열국시대의 부여, 고구려 삼한등의 국가적 제천행사 외에

도 점차 제정 분리의  고구려 건국신화나 광개토태왕비문에서도 여전히 이런 신성함은

유지되어 고구려의 군주(주몽)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외손자로 뚜렷이 기록되어 있고

앞선 우리 고조선 건국신화 역시 천손강림신화로 이런 하늘에서 부여한 천권적 사상

하에 천자의 개념을 이미 가지고 건국된 나라가 우리의 건국신화이고 이는 고구려가 말기 연개소문이

비록 쿠테타를 통해 대막리지라는 최고의 위치에 올라서도 고구려 태왕의 권위는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었군요. 그외 백제의 어라하나 신라는 마립간 같은 호칭등 서토 황제격을 사용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이런 최고 통치자의 호칭은 왕이나 대왕, 태왕을 즐겨 사용합

니다.(서토는 청동의 독점적 권위가 깨지고 철기시대로 접어들면서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자

각지에서 왕을 자처하면서 왕이라는 호칭의 권위가 떨어지자 진시황이 서토을 통일하면서

본격적 황제라는 명칭이 등장하기 시작)

이후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에서 이런 태왕의 호칭을 이어받고 사용도 하는 흔적이 나오는데

그런 가운데 중세시절에 가면 점차 요동 일대도 황제라는 호칭을 즐겨 써게 되는 흐름을 보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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