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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2-08 14:18
[기타] 만리장성은 낙랑군까지 들어왔는가?
 글쓴이 : 두부국
조회 : 4,291  

<창려 갈석산>
 

1. 장성은 낙랑군까지 들어왔는가?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다는 구절은 진나라 태강지리지에 등장한다.
그러나 태강지리지는 현재 존재하지 않고 이 태강지리지를 인용한 많은 책들이 만리장성이 낙랑군 수성현까지 이어져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 사기색은
(태강지리지가 말하기를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된 곳이다.)

사기 색은에서 인용된 이 돌연적인 기사로 인해 낙랑군과 갈석산은 갈 곳을 몰라 헤메고 터무니 없는 지리비정이 횡횡하게 된다. 그 혼란은 현재 뿐 아니라 당나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당나라 뿐 아니라 송나라 때에도 그렇고 그 이전에도 대혼란을 빚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碣石考가 나오고 대갈석과 소갈석, 좌갈석과 우갈석론까지 등장하게 된다.

갈석산이 어디인지에 대한 논란은 무의미하다. 진시황이 들렀고, 조조가 올라서 시를 읊은 그 유명한 갈석산이 어딘지 모르는 당대인들은 없었으리라. 조조의 시 관창해다.

觀滄海                  창해를 봄

            曹操              조조

東臨碣石,以觀滄海。  동쪽 갈석에서 푸른 바다를 보네
水何澹澹,山島竦峙。  물은 넉넉하고 섬은 우뚝 솟아있도다
樹木叢生,百草豐茂。  수목이 울창하고 백초가 무성한데
秋風蕭瑟,洪波涌起。  가을바람 소슬하니 큰 파도가 일어나네
日月之行,若出其中。  달과 해의 운행도 그 속에서 나오는 듯
星漢燦爛,若出其裡。  은하수 찬란함도 그 속에서 일어나는 듯
幸甚至哉!歌以詠志。  다행히도 나는 보았다. 그 뜻을 노래하노라.

- 作于建安十二年秋     (207년 가을에 짓다)

조조가 207년에 올라 이 유명한 시를 남긴 갈석산이 어딘지 모를 수가 있는가? 진서에 의하면 매우 구체적으로 갈석산의 위치를 찍고 있다.

遂進師,經孤竹,越碣石,次于遼水 - 진서
(마침내 군사가 진격하여 고죽을 지나고 갈석을 넘어 요수에 도달했다.)

진서에 의하면 갈석은 고죽에서 요수 사이에 있다. 고죽은 지금의 난하 유역 노룡현으로 많은 문헌이 보고있다. 갈석은 여기서 동쪽으로 불과 30Km 떨어져 있다.
이 갈석산에 다녀간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三十二年,始皇之碣石 ,使燕人盧生求羨門、高誓。刻 碣石門  - 사기  
(진시황 32년 진시황이 갈석으로 갔다. 연인 노생을 시켜 연문 고서를 찾게 하고 갈석문을 새겼다)

진시황의 아들도 역시 갈석에 갔다 온다. 한무제도 역시 갈석에 가게 된다.  

天子既已封禪泰山,...並海上,北至碣石,巡自遼西,歷北邊至九原。五月,返至甘泉 - 사기 효무제본기
(천자가 태산에서 봉선을 했다... 모두 바다로해서 북으로 갈석에 도착했다. 요서를 순수하고 북변으로 구원을 돌아 5월에 감천궁으로 돌아왔다)

이런 정도로 유명한 갈석이 어딘지 헷갈릴 수 있겠는가?
태강지리지가 작성된 진나라 시대의 정황은 어떨까? 진서 예악지에는 위의 조조의 관창해시가 실려있다. 그리고 景初二年(238년)의 기사에 위에서 언급한 군사가 고죽을 지나고 갈석을 넘어 요수에 도착한 기록이 있다.

갈석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은 바닷가에 임한 갈석산을 말하고 특히 동쪽으로 바다가 있는 갈석산을 말하고 있다. 태강지리지 이전의 어떤 기록도 서쪽으로 바다를 임해야 하는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태강지리지는 매우 돌연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태강지리지의 기록이 무분별하게 인용되는 사태다. 먼저 낙랑군 갈석을 이야기하는 사기 색은 구절을 다시보자.

史記 卷二 夏本紀
【索隱】地理志云「碣石山在北平驪城縣西南」。太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又水經云「在遼西臨渝縣南水中」。蓋碣石山有二,此云「夾右碣石入于海」,當是北平之碣石。(사기 권2 하본기 색은 지리지가 말하기를 갈석산은 북평 려성현서남에 있다. 태강지리지가 말하기를 낙랑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시작된 곳이다. 또 수경이 말하기를 요서 임유현 남쪽 수중에 있다. 아마 갈석산은 두 개가 있나보다. 이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바다에서 들어 간다’는 구절은 당연히 북평의 갈석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기 색은의 저자는 사마정이다. 사마정은 당현종 초기 조산대부를 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기색은의 저술 연대는 700년대 초반으로 보아야 한다. 이 사마정은 태강지리지의 구절을 크게 신뢰하지 않고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기록들과의 차이 때문이다. 그래서 蓋(아마, 대개..)라는 수식어를 삽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태강지리지의 내용을 보충하기 보다는 갈석은 두 개가 있나보다 정도의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 문구에서 말하는 것은 북평의 갈석이다라고 못을 박고 있다.

그런데 태강지리지를 무리하게 인용한 사서는 사기색은이 처음은 아니다.
진서 지리지가 무리수를 둔다.

晉書 志第四 地理上
樂浪郡  漢置。統縣六,戶三千七百。
朝鮮  周封箕子地。屯有 渾彌 遂城 秦築長城之所起。鏤方 駟望
(진서 지제4권 지리상 낙랑군 한나라가 설치했다. 통현이 6개이고 호구는 3700이다. 조선현 - 주나라가 기자에게 봉한 땅이다. 둔유현, 혼미현, 수성현 - 진나라가 장성을 설치한 시작점, 루방현, 사망현)

진서는 방현령이 644년경 편찬한 책이다. 고구려를 침략했다 안시성에서 패해 돌아가기 한해전의 일이다. 당태종이 편찬지시를 했다. 여기서는 낙랑군 수성현이 장성의 시작점인데 진나라때 축조되었다고 말한다. 갈석산이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있다. 이 기록 역시 태강지리지에서 이어져 나온 기록으로 여겨지는데 갈석산이 낙랑수성현에 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고 장성이 낙랑수성현에서 시작된다는 구절은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진시황의 진나라시기 군현이 설치된 기록도 없는데 어떤 적을 어떤 방향으로 막기위해 장성이 축조되었는가는 매우 의심의 여지가 있다.
또한 관심있게 보아야 할 부분은 6개현 전체의 가구수이다. 전,후한서에 6만가구가 있던 낙랑군이 갑자기 3천7백가구로 인구가 줄어들어 있다. 이는 낙랑목간에 조선현 하나의 가구수만 해도 1만가구에 육박(9678가구)했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아도 6개현의 가구수로는 너무 적게 나타난다. 평양지역의 인구가 왜 이렇게 폭락했는가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런데 본격적인 문제는 통전이 일으킨다. 통전의 기록은 자치통감에도 인용되고 후의 여러 책에서 반복적으로 동일 구절이 인용되어 한반도 안에 갈석산이 있고 이 갈석산이 장성의 시작이라는 보편적인 인식을 형성시키게 된다. 당나라 재상 두우가 편찬한 통전은 거의 서기800년경에 만들어진 책이다. 두우는 다시 태강지리지를 인용한다. 그러나 태강지리지를 신뢰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첨가하게 된다. 이것이 갈석산의 위치와 장성의 출발점에 대해 수많은 논쟁을 만드는 사건의 발단인 셈이다.

通典 卷一百八十六 边防二 高句丽
碣石山在汉乐浪郡遂成县,长城起於此山。今验长城东截辽水而入高丽,遗址犹存。(按尚书云:"夹右碣石入於河。"右碣石即河赴海处,在今北平郡南二十馀里,则高丽中为左碣石。)又平壤城东北有鲁阳山,鲁城在其上。西南二十里有苇山,南临浿水.(통전 권186 변방2. 고구려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장성이 이 산에서 기초한다. 지금 장성을 조사해보면 동으로 요수를 끊고 고려로 들어간다. 그 유적이 아직 있다.(상서가 말한 것을 보면 ‘우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라고 말한다. 우갈석은 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고 지금 북평군 남쪽 20리에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 중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다.)  또 평양성 동북에 로양산이 있는데 로성이 그 위에 있다. 서남 20리에 위산이 있고 남쪽으로 패수에 붙어있다.)

통전은 매우 과학적으로 상황을 설명하려 한다. 장성이 요수를 건넌 상황을 설명하고, 평양성 동북에 성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태강지리지의 기술을 뒷받침한다.
그런데 성급한 해석이 하나 있다. 상서에 나오는 “夹右碣石入於河” 구절을 대뜸 우갈석을 옆에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라고 해석한다. 상서는 공자 시기에 이미 존재했던 책이다. 더군다나 “夹右碣石入於河” 구절은 하서 우공편에 나온다. 중국의 하상주단대공정에서는 하나라가 기원전 2070년에 개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공은 우임금이 임금이 되기 전의 일이므로 그보다 더 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기원전 2070년보다 빠른 시기에 한반도 평양부근의 갈석산을 중국인들이 알고 있었단 말인가? 터무니없는 추측이다. 한반도 내부의 자세한 정보는 기껏해야 기원전108년 한무제의 원정 전후에나 중국에 알려지는 것으로 보아야한다. 그 이전에는 한반도 내부의 자세한 정보는 중국문헌에 나타나지 않는다. 기자조선을 언급하지만 기자가 갔을 확률이 있는 곳은 요서지역이지 한반도 내부가 아니다.
그런 시기에 작성된 문서에 나타난 “夹右碣石”을 통전의 저자 두우는 ‘오른쪽으로 갈석산을 끼고’가 아닌 ‘우갈석산을 끼고’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우갈석’은 갈석산이 하나가 아님을 전제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우임금 시절에 얼마나 먼 바다 너머의 지리까지 알기에 한반도의 좌갈석을 염두에 두고 창려의 갈석산을 우갈석이라고 명명했겠는가?
그 시기에서 한참을 내려온 진시황 시기로 가보자. 만약 진시황이 순시한 갈석을 우갈석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당대의 사관들과 신하들, 백성들이 창려의 갈석산을 과연 우갈석이라 불렀겠는가?
한무제가 갈석산을 갔을때도 우갈석산으로 알고 갔겠는가?
바다 건너 존재 유무도 확인이 되지 않는 갈석산을 기원전 2000년전에 좌갈석으로 불렀다는 사고는 억지에 가깝다.
이것은 두우가 불가능한 추측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두우는 태강지리지의 이해할 수 없는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 상서의 내용해석에 무리를 범하면서 태강지리지의 기술을 받아들이려 한 것이다.      
 
 
2. 태강지리지의 영향을 받은 문헌들

鳥夷皮服 夾右碣石入于海 - 사기 하본기
【集解】孔安國曰:「碣石,海畔之山也。」。
【集解】徐廣曰:「海,一作『河』。」
【索隱】地理志云「碣石山在北平驪城縣西南」。太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又水經云「在遼西臨渝縣南水中」。蓋碣石山有二,此云「夾右碣石入于海」,當是北平之碣石。(색은, 지리지가 말하기를 갈석산은 북평 려성현 서남에 있다. 태강지리지가 말하기를 낙랑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또 수경은 요서 임유현남쪽 수중에 있다고 말한다. 아마 갈석산은 두곳에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갈석을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당연히 북평의 갈석을 말하는 것이다.)

通典
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長城起于此山今騐長城東截遼水而入髙麗遺址猶存
(갈석산은 한 낙랑군 수성현에 있고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지금 조사해보니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자르고 들어간다. 고려에 그 유적지가 아직 있다.)

여기서부터 이 이야기는 무한 복제된다.
통전의 두우는 용감하게도 태강지리지를 믿고 말도 안되는 추측을 해버린다. 그렇지만 뒤의 모든 책은 통전을 철석깥이 믿고 따라간다.

太平寰宇記 - 송나라 책
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長城起于此山今騐長城東截遼水而入髙麗遺址

禹貢錐指 - 명말청초의 책
史記索隱引太康地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長城所起通典云秦築長城起自碣石在今髙麗舊界非盧龍之碣石

通雅 - 명나라때 책
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長城起于此山東截遼水而入髙麗遺跡猶存

行水金鑑 - 청나라때 책
太康地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長城所起通典云在今高麗舊界恬
 
통전과 글자 하나 틀리지 않은 이야기가 엄청나게 많은 문헌에 다 등장한다. 지리에 대해 논하는 모든 중국 사람들은 다 통전을 인용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갈석산에 대해 아는 체 하고 싶은 모든 사람들...  
   

3. 정말 낙랑군 수성현에서 장성이 기초했을까?

낙랑군 수성현에서 장성이 시작되었다. 이를 부정할 문헌은 아직 나오고 있지 않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그럼 왜 고조선은 이 장성을 공격하지 않았나?
장성의 출발점인 낙랑군 수성현은 인구萬九千九十二명(낙랑목간에 의하면)의 현이다. 평양에서 정서쪽으로 간 바닷가에 있는 것으로 중국역사지도집은 기재하고 있다.
여기서 장성이 시작된 것으로 중국은 표기하고 있다. 이곳에서 산이있는 곳과 평양은 직선거리 30km에 불과하다. 바닷가에서 장성이 시작되었다고 쳐도 40km에 불과하다.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에서 진나라 장성이 시작되는데 고조선은 뭐하고 있었을까? 그냥 쌓도록 보고 있었을까?
또 하나의 의문점은 진나라는 평양을 함락시키고 군현으로 편제하면 될 일을 왜 평양서쪽 3-40km 지점에서 만리장성을 쌓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흉노의 선우정에서 100리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장성을 수축했다고 하는 그런 사서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흉노가 장성수축을 방해하거나 흉노의 선우정은 더 멀리 도주하거나 둘 중의 한 사건이 벌어져야 한다.
그런데 그런 일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흉노의 왼팔이라 불리는 고조선의 도읍지 부근에서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다.
진나라 장성은 왜 만든 것일까? 고조선과의 친선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면 평양서쪽 수성군에 진장성수축은 쉽지 않은 일이다.  
태강지리지의 기술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태강지리지에 별도의 기술이 없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게 될까?
중국인들은 갈석산을 잘 알까? 낙랑군 수성현을 잘 알까?
당연히 갈석산을 잘 알 수밖에 없다. 천자가 봉선을 하고 순수를 할 때 들르는 곳이 갈석산이다. 낙랑군 수성현은? 가보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들어보지도 못한 곳이다.
이럴 때 사서의 기록에 별다른 보충설명이 없이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고 하면 갈석산을 먼저 기준으로 삼고, 진나라의 낙랑군 수성현이 지금의 창려지역 갈석산 있는 곳에 설치되었구나라는 사실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정말 갈석산이 현 갈석산이 아닌 한반도 평양의 갈석산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이 헷갈리지 않도록 별도의 수식어가 있어야 할 것이다.

4. 진서의 특이한 기록하나

진서 당빈열전이다.
북평을 북쪽 오랑캐들이 침략하니 군을 이끌고 이들을 천리 물리친다. 그리고는 진나라 장성을 다시 복구하는데 온성에서 갈석까지 3000리나 되었고 군대와 봉화를 두었다

晉書
列傳第十二 唐彬
  
北虜侵掠北平,以彬為使持節、監幽州諸軍事、領護烏丸校尉、右將軍。彬既至鎮,訓卒利兵,廣農重稼,震威耀武,宣喻國命,示以恩信。於是鮮卑二部大莫廆、擿何等並遣侍子入貢。兼修學校,誨誘無倦,仁惠廣被。遂開拓舊境,卻地千里。復秦長城塞,自溫城洎于碣石,緜亙山谷且三千里,分軍屯守,烽堠相望
(북쪽 오랑캐가 북평군을 침략했다. 당빈을 사지절 감유주제군사 영호오환교위 우장군으로 삼았다. 당빈이 진에 도착하여 병사를 훈련시키고 무장을 날카롭게 했다. 농장을 넓혀 농사를 짓게해 위엄을 떨치고 나라의 명을 선유하고 은혜와 믿음을 보였다. 이로 인해 선비의 두 부족 대막외, 적하등이 함께 인질을 보내고 공물을 바쳤다. 학교를 열고 게으르지 않도록 가르쳐 어진 은혜가 널리 베풀어졌다. 마침내 옛 영역을 개척해 천리를 넓혔다. 다시 진나라의 장성새를 복구했는데 온성에서 갈석에 이르렀다. 산과 골짜기를 이어 거의 삼천리였다. 군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봉화대와 돈대가 서로 바라보았다.)

여기서도 진나라 장성이 갈석까지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진서지리지나 태강지리지가 낙랑군 수성현에서 장성이 시작되었고 그곳에 갈석산이 있다고 했으니 같은 시기의 일을 기록한 이 기록은 그 갈석산을 알기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다. 더군다나 이 시기가 바로 태강연간(280년 - 289년)의 직전의 일로 중국학자들은 보고 있다.
열전에서 위의 사건 다음에 元康初에 당빈이 雍州刺史가 되었다는 일이 이어진다. 元康 연호는 태강 다음의 연호로 291년에서 299년까지 사용된다.

태강년간에 만들어진 지리지인 태강지리지도 이 당빈의 장성복구 사실을 지리지에 기입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위의 사건은 태강년간이거나 그 직전의 일이므로 당연히 태강연간의 진나라 지리 상황을 묘사한 지리지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저 기사의 배경무대는 북평군이다. 진나라의 북평은 갈석산이 있는 노룡현 지역을 동그랗게 에워싸고 있는 곳이다. 북경 동쪽 갈석산 북쪽지역이 북평군의 위치..

진 당빈열전의 기록에 의하면 온성에서 갈석까지 산골짜기 3000리다.
온성은 어디일까?
온성은 溫城在溫縣西南三十里에 있다고 한다.
온현은 어디일까? 위서에 의하면 武德郡 溫二漢、晉屬河內。有溫
무덕군에 있다고 한다.
무덕군 즉 낙양에서 황하를 건너 나타나는 현이다. 이현의 진나라때는 하내군에 속했다고 한다.
하내군은 어디?
후한서는 하내군은 낙양에서 120리 떨어진 곳이다 라고 말한다.
(雒陽北百二十里 - 후한서지리지)
즉 온성은 낙양에서 황하를 북으로 건너 120리 떨어진 하내군의 어느 성인것이다.
당빈은 장성을 여기서 부터 보축해 나간 것이다. 봉화가 갈석산에서 이곳까지 이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3000리 떨어진 곳, 장성의 끝이며 갈석산이 있는 그곳은 어딜까?

과연 온성에서 3000리 가면 나오는 갈석이 태강지리지나 통전에서 말하는 것처럼 한반도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일까,

아니면 진시황과 여러 황제들이 기념으로 가는 창려현의 갈석일까?
  
창려현은 요서군에 속한다.
후한서 지리지가 거리를 자세히 적어 두었기에 후한서를 다시 보아야 한다.

遼西郡 秦置。雒陽東北三千三百里 - 후한서 지리지

요서군은 낙양에서 삼천삼백리 떨어져 있다.  

그럼 요서에서 하내군까지의 거리는 3300리에서 120리를 빼면 3180리 정도다.
이 요서군의 관할 현을 보면 모두 5개현이다.
陽樂, 海陽, 令支有孤竹城, 肥如, 臨渝
우리가 잘아는 산해관이 있는 임유가 있고, 갈석산에서 30km가량 떨어져 있고 고죽성이 있는 지금의 노룡현성 유적이 있는 영지 등이 들어있다.

그럼 낙랑군은 어떨까?
낙랑군은 낙양에서 5천리 떨어져 있다.

樂浪郡武帝置。雒陽東北五千里

그럼 하내군에서 낙랑군까지는 4880리 떨어져 있다.

그럼 진서에 나오는 장성의 시작점인 갈석은 어느 갈석일까?
답은 자명하다.
당연히 晉나라때 당빈이 손을 본 진시왕 진나라의 만리장성의 시작점은 창려의 갈석산이지 한반도가 아닌 것이다.
한반도 갈석산(존재하지도 않은 오류에 불과하지만)까지 장성을 이으려면 무려 2000리를 더 축성해야 되는 것이다.

태강지리지가 무언가 오기를 한 것이다.
왜 태강지리지는 착각을 한 것일까?  

 
5. 태강지리지 착각의 이유2 - 무경총요 
무경총요라는 책이 있다.
전쟁에 관한 모든 사항을 모아놓은 책 정도로 보면 된다. 북송의 인종의 명에 의해 1044년에 완성된다. 활, 노, 창 등 다양한 무기, 공성장비 등에 대한 그림도 있고, 축성법도 있어 고대 전쟁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꼭 참고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전쟁을 위한 지리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전쟁을 위해 송나라 황제가 편찬을 지시했는데 지리를 엉터리로 묘사해 놓을 확률은 매우 적다. 그 중 한 지역의 설명에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이야기가 들어있다.
송나라 광신군(廣信軍)에 대한 조항이다. 송나라는 군현의 이름을 이상하게 바꾸어 사용한다. 한나라 때의 州를 路로 바꾸고 郡이나 縣을 府, 혹은 州, 軍이라 바꾸었다. 軍은 변경지역의 지역명칭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아닌 경우도 많으나..)

武經總要
廣信軍治遂城縣戰國時武遂縣地秦築長城所起因名遂城本朝建軍東至安肅軍二十里西至長城
(광신군은 수성현을 다스린다. 전국시기 무수현의 땅이다. 진나라가 장성을 지을 때 기점이다. 그래서 이름이 수성이다. 본조(송나라)가 군을 세웠다. 동쪽에는 안숙군이 있다. 20리서쪽으로 가면 장성이 있다.)

수성현(遂城縣) 어디서 많이 본 현이름이다.
낙랑군 수성현(樂浪遂城縣)과 글자 한자 틀리지 않는다.  
秦築長城所起 진나라가 장성을 시작한 장소
이 구절도 어디서 많이 보던 구절이다.
秦築長城之所起 바로 낙랑군 수성현 아래 캡션을 달아놓은 문구다.

이상하게도 수성현이 둘인데 공교롭게도 둘다 진나라 장성의 시작점이라고 주장한다.
무경총요는 한 술 더 떠서 수성이라는 현이름 조차 진나라 장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부가 설명을 하고 있다. 이 현의 서쪽20리에 실제로 장성이 있기조차 하다.

혹시 이 책이 어떤 착오를 일으킨 것일까? 다른 책도 살펴보자. 송나라에서 편찬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지지 태평환우기다.

太平寰宇記
  遂城縣舊二十三鄉今四鄉戰國時武遂縣也史記趙悼襄王一年李牧將攻燕拔武遂是也本漢北新城縣漢書地理志云燕南得涿郡之北新城 後漢屬中山國 土地十三州志云 河間有新城故加北字後魏武帝永熙二年於此置南營州改為新昌縣隋開皇十六年改為遂城縣今治釜山村 秦築長城起首故此邑之界 遂城山舊名龍山在縣西二十五里  (수성현 옛날에는 23개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4개 마을이다. 전국시기 무수현이었다. 사기에 조나라 도양왕1년에 이목장이 연나라를 공격해 무수를 빼앗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한나라 북신성현이었고 한서지리지는 연나라 남쪽 탁군의 북신성을 얻었다고 한다. 후한때에는 중산국에 속했고 토지13주지는 하간에 신성이 있어 북자를 더한 것이다라고 했다. 후위의 무제 영희2년(533년)에 이곳에 남영주를 설치했다가 신창현으로 고쳤다. 수 개황16년(596년)에 수성현으로 고쳤다. 지금 부산촌을 다스린다. 진나라가 축조한 장성의 시작점이 이 읍의 경계에 있다. 수성산의 옛이름은 용산인데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태평환우기도 수성현에서 진나라 장성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자 그렇다면 다시 진나라 시기로 돌아가보자
몽념이 만리장성을 쌓는데 어떻게 했는지를 보자

秦已並天下,乃使蒙恬將三十萬眾北逐戎狄,收河南。築長城,因地形,用制險塞,起臨洮,至遼東,延袤萬餘裏 - 사기 몽념열전
(진나라가 천하를 병합하고 몽념을 시켜 장병30만을 끌고 북으로 융적을 쫓아내고 하남을 수습했다. 장성을 수축하는데 지형을 따라 험한 장새를 만들었다. 임조에서 일어나 요동에 까지 도달했다. 총연장이 만리 가량 되었다.)

여기서는 분명히 만리장성의 시작점이 임조라고 한다. 임조는 사실 임조군이 있던 감숙성 난주와 천수의 남쪽에 있다. 분명히 위의 이야기와는 무언가 어긋난다.
왜 그럴까?
장성은 본래 몽념이 다 쌓은 것이 아니다. 그 전의 전국시대의 여러 장성을 이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잇다가 끊어진 곳을 몽념이 새로 수축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임조에서 시작했다는 사기의 주장과 수성현이 진나라 장성의 시작점이라는 주장은 함께 병립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만리장성은 임조에서 요동까지이다. 그럼 요동은 어디일까?
당연히 요하평원이다. 많은 사람들은 요하의 동쪽이 요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요하평원에서 가장 뚜렷한 랜드마크는 의무려산이다. 이 의무려산은 조선의 사신들이 며칠을 걸어 요동평원 횡단을 마칠 즈음에 떡하니 나타나는 곳이다. 즉 요하를 건너 요동평원의 서쪽 끝에 다다르면 의무려산이 나타난다.
이 의무려산 앞의 현이 무려현이다.
이 무려현은 요하 이동을 요동이라 부른다면 당연히 요서군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전한, 후한 어느 시기에도 무려가 요동군이나 요동속국에 속하지 않은 적은 없다.

遼東郡....無慮,西部都尉治 - 한서
遼東郡 秦置。雒陽東北三千六百里....襄平  新昌  無慮... - 후한서

즉 요즘 우리가 요서라고 부르는 의무려산에 도착하기만 해도 요동에 도착한 것인 셈이다.
요하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이를 혼동해 한나라 시기나 그 이전 시기의 요동을 요하 동쪽으로 함부로 한정해서는 안된다. 하여튼 진나라 장성이 요동에 도착했다고 해서 요하를 꼭 넘었다는 구절로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안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연나라장성이 양평(오늘날의 요양)까지 왔으니 진나라 장성도 요하를 넘었을 확률은 있지만 말이다.

이와 관련된 다른 구절을 보자. 삼국지 위서가 인용한 위략의 구절이다  

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 朝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
(진나라가 천하를 병탄하고 몽념을 시켜 장성을 쌓는데 요동까지 도달했다. 이때 조선왕부가 즉위했는데 진나라가 습격할까 두려워 진나라에 복속한다고 꾀를 내고는 조회하려 하지 않았다)

태강지리지나 통전의 기술이 착오가 아닌 사실이라고 치자.
진나라는 요하를 건너 평양 서쪽 30km지점에서 만리장성을 수축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왕부는 복속하겠다고 약속해놓고는 사신을 보내 조회도 안하고 있다. 이 조회를 안한 사실은 진나라가 괘씸하게 생각한 부분일 것이다. 뭐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면 굳이 사료에까지 남아 있지 않지 않겠는가?
몽념은 30만 대군을 이끌던 사람이다. 그의 지휘로 만리장성이 만들어지고 진시황의 큰아들이 바른말하다가 만리장성 쌓는데 보내졌다. 그럼 이들이 힘이 없었겠는가? 조선의 수도 서쪽 30km지점에서 만리장성을 시작하면서 고조선의 수도를 건드리지도 못하고 조선왕부도 혼내지 않고 있다. 그가 뭐가 아쉬워 말타면 몇 시간 안에 도착할 평양으로 안가고 묵묵히 장성을 쌓았겠는가? 조선왕부가 두려워서? 만리장성이 중요하므로?
고조선의 침략을 막기위해 고조선 수도 서쪽 30Km 지점에 만리장성을 쌓는 것 자체가 매우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다. 그냥 멸명시키면 더 안전하지...
당시 만리장성을 쌓는 것은 그냥 대충 하는 일이 아니었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와서 죽은 사람의 피가 고랑을 이루면서 이룩된 일이었다.

當是之時,男子疾耕不足於糟穅,女子紡績不足於蓋形。遣蒙恬築長城,東西數千里,暴兵露師常數十萬,死者不可勝數,僵尸千里,流血頃畝,百姓力竭,欲為亂者十家而五 - 사기 회남형산열전
(당시 남자가 농사지은 것은 술지게미와 쌀겨에도 부족하고 여자가 길쌈하는 것은 덮개하기도 부족했다. 몽념을 보내 장성을 쌓는데 동서 수천리였다. 잔인한 병사 동원해 이슬 맞는 무리가 늘 10만이었고 죽은 자 셀수 없었다. 시체가 천리에 덮이고 피가 고랑에 흘렀고 백성은 힘을 다했다.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가 10집에 다섯이었다.)  

장성은 이렇게 쌓는다. 중국내지에서도 주변사람 다 죽여가며 쌓았다. 이런데 30km떨어진 평양에서 조회사신도 안보내고 개기는 조선왕을 내몰라라하고 장성을 쌓았다는 것에 어떤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할까?
복속을 약속하고도 조회를 나가지 않으며 배신하고 있는 조선왕을 잡고, 평양사람 다 끌고와서 장성을 쌓으면 너무나 쉬운 일아닌가?
사서에는 그렇게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조선왕부를 처벌했다는 기록도 없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그건 평양주변에서 장성을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도 없고, 장성도 없다.

모든 일은 遂城縣에서 장성수축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수성현이 공교롭게도 두곳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역주의 수성현은 공교롭게도 장성수축과 직접 관련이 있고 장성이 실제로 있다. 창려의 갈석산도 장성과 관계가 깊다.
盧龍  有長城。有關官。有臨渝宮。有覆舟山。有碣石 - 수서지리지
(노룡현.. 장성이 있다. 관문관리가 있다. 임유관이 있다. 복주산이 있다. 갈석이 있다) 갈석산과 만리장성은 같은 동네에 있는 것이다.

이런 혼란 속에 엉뚱하게도 낙랑군 수성현의 뒤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되었다는 구절이 삽입되고 만 것이다.
이런 착오의 가능성을 비판적으로 정밀 검토하지 않고 앞문헌을 단순 답습하다보니 통전의 저자 두우는 서경에 나오고 사기에 인용된 '협우갈석입우하'(갈석을 우측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오네)를 '우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오네 같은 엉터리 번역을 해야만 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세상에... 서경의 앞구절까지 보자. 

島夷皮服. 夾右碣石, 入于河다.

禹가 정치를 잘하니 섬오랑캐도 가죽옷을 입고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는 말이다. 황하로 들어온다는 말은 조회하러 온다는 말이다.
왜 하필 갈석을 우로 끼는가? 진시황이 산동반도 낭야에서 놀다가 갈석으로올때는 갈석을 좌로 끼게 된다. 산동에서 배타고 북쪽으로 가면 당연히 왼손편에 갈석이 있으니 그렇다.
우로 끼는 경우는 어떨까? 북쪽에서 남쪽 황하입구로 갈때 갈석산은 당연히 오른손편에 있게 된다.
그리고 황하로 들어갈때도 우측편에 갈석이 놓이게 된다.
그래서 우측으로 낀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사기나 한서는 入于河라고 하지 않고 入于海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서경을 조심스럽게 보지 않아서 그렇거나 착각해서 교정을 잘못한 것이다.
공물을 바치러 오는 오랑캐들이 왜 바다로 들어가나?
황하로 들어와 공물을 바쳐야지...

이런 상황임에 어떻게 좌갈석, 우갈석 이야기가 나올까?  
만약 한반도에 장성의 기초가 있다면 창려의 갈석산은 우갈석이고 한반도의 갈석산은 좌갈석이다와 같은 말도 안되는 논리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서경의 해석을 엉망으로 만들어야만 한반도 낙랑에 갈석산이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그곳에서 진장성이 시작되었다는 1000년 넘는 입씨름은 동명이인을 착각해 아버지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했다고 말하는 것같은 착오에 의한 실수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끝

 
 
 
 
 
 
 
잘보고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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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밥c 16-02-08 23:34
   
4번의 진서의 설명에 온성이 나오는데, 온현 서남 삼십리 이므로 같은지역입니다. 이유는 저동네에 온수라는 강이
있어서 그 주변지명입니다. 황하 바로 이북에 있는 곳인데 , 사마천 사기에 조선의 배신자 5인중한명을 온양후로
임명을 합니다. 사실 본문에서는 3000리 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원래 처음 만들어졌을때는 그냥 저동네
였을겁니다.
마그리트 16-02-09 20:34
   
잘 봤습니다.
이런 사료들이 있는데
아직도 우리 역사교과서는
식빠 매국충들이 싸질러 놓은
한반도 내, 한사군을 가르치고 있죠.
     
애즈한 16-02-10 08:03
   
위 글을 꼼꼼히 정독하고 이해했다면 대충 감이 오고
더 결정적으로는 링크 타고 저분 블로그 들어가보면 아시겠지만
저 분 역시 '한반도 내 한사군 설'을 옹호하는 입장입니다.

고조선 수도 평양 코앞에 秦나라가 장성을 쌓았다는게 말이 되냐?
여타 다른 근거들로 보강해볼때
낙랑군 수성현=진축장성 기점..이라는 태강지리지 기사는 오류임이 분명하다,
그 주요문헌근거인 태강지리지 기사가 오류니까
진축장성이 한반도 평양주변까지 들어왔다는 주장 역시 엉터리다..라는 주장이잖습니까.
애즈한 16-02-10 08:41
   
상당히 설득력있는 분석이네요.
저는 당초 '晉 대에 당빈이 서북한 지역에 있는 어느 장새 유지를 秦축장성으로 착각하여
상부에 보고하고 그 정보가 직후 편찬된 태강지리지에 수록되어 후대에까지 답습되었을 것이다'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읽어보니 진서 당빈전을 읽어보고서도 흘려넘긴 대목이 있었네요.
특히 '북평'과 '3천리' 대목..
펌글 쓴 분의 예리한 지적대로 당빈전 기사를 분석해보면
애초 당빈은 한반도까지 진입한 적이 없고
현재의 창려 갈석산 부근에서 활동하며 장성복구를 한 게 맞는거 같습니다.

그런데 진서 당빈전에선 단지 '갈석=진축장성 기점'이라고 했는데
태강지리지에서는 여기에 '낙랑군 수성현'이 덧붙여진 것은 단순한 착오나 왜곡일 수도 있겠고
한편으로는 태강지리지가 책이름과는 달리 실제로는 晉 태강연간에 지어진게 아니거나
또는 그 후대에 증보나 가필되는 와중에
낙랑군 수성현이 전연 이후 요서나 창려 부근으로 이치된 후의 사정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싶습니다.
서진 이후 - 당 이전에 저술된 사료나 주석에 이 대목이 인용된 경우가 있다면 좀더 분명히 확인되겠죠.

어쨌든 퍼온분 덕분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카노 16-02-10 13:27
   
결국 진장성의 기점이 낙랑군 수성현이다라는 태강지리지의 기사가 오류라는 근거는 순전히 글쓴이 추측이군요.
그리고 기초 한자 해석도 못해서 "갈석의 오른쪽을"을 우갈석으로 해석해서 그렇다면 당연히 좌갈석도 있겠구나 망상한 두우의 삽질을 근거로 좌갈석 타령하면서 한반도안에 그것도 평양에 갈석산이 있다고 짖어대는 무식하기 그지없는 식민빠 군상들을 보면 새삼 그무식함과 어거지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밥밥c 16-02-11 02:40
   
원래 서쪽의 개념은 대륙의 서쪽이였죠.
그래서 역사에는 대륙의 섬서성,사천성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현 역사는 전부 동쪽으로 이동해서 진시황조차 하북성의 북경사람이 다 된 상태입니다.
사천사람은 아예 역사에서 사라졌죠.
도배시러 17-10-30 04:42
   
갈석산의 위치는 진황도입니다. 섬에 있던 갈석산은 영국이 항구로 개조하면서 박살낸거죠.
창려 갈석산은 교치된 지명인듯 하네요.

잘 보았습니다.

그리고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는
이 당시에 낙랑군이 교치되었다는 의미가 될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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