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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트술해 몽골 뭉크하누대 학장 : 한국-몽골의 역사적 관계와 향후 전망몽골과 한국은 5세기부터 활발히 교류해왔다. 서기 400년 몽골의 니런(
Nirun) 지방과 한국의 고구려 사이에 공식적 외교관계가 성립됐다. 479년 니런 군주와 고구려 군주는 만주 디고간(
Digogan) 지방을 함께 공격하기로 하고 동맹을 맺었다. 몽골 학자 달라이에 따르면 400년대 중반에 한국을 지칭하는 ‘솔론고스’라는 명칭이 몽골인들 사이에서 이미 사용됐다.
몽골과 한국은 12세기 후반과 13~14세기에도 활발히 교류했다. 당시 몽골은 대몽골제국시대(1206~1260)와 원제국(1260~1308) 시대였다. 칭기즈 칸은 한국과 연맹을 맺었다. 두 나라의 연합군대는 한국을 공격한 키단(
Kidan)국을 1220년에 격퇴했다. 당시의 연맹동의서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들의 가까운 동지 사이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이 날을 잊지 않기를.”
이 동의서에 따르면 한국 왕은 몽골로 매년 15명의 특사를 보내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칭기즈 칸 사후 우게다이 칸 시대에 이르러 두 나라의 관계는 소원해졌고 대몽골제국시대에 행해진 6번의 한국 공격 중 3번이 우게다이 칸 시대에 발생했다.
쿠빌라이 칸은 중국대륙에 원 제국을 창건했고 한국과 다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을 폈다. 쿠빌라이 칸은 한국의 태자에게 그의 딸을 주어 정략결혼하게 했다. 이 시대에 몽골은 제주도를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거점으로 이용했다. 이 무렵 몽골의 말들도 전쟁용으로 사육됐는데, 제주도 조랑말의 근원이 바로 몽골의 말들이다.
쿠빌라이 칸은 몽골인과 한국인의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략결혼정책을 폈다. 무려 20만명 넘는 여성이 원제국에서 한국으로 이주했다. 결과적으로 두 나라는 서로를 ‘신부신랑 나라’ 또는 ‘어머니 나라’로 부르게 됐다.
원(元)에서 온 20만 여성고고학과 인류학의 관점에서 몽골인과 한국인은 한 핏줄에서 비롯됐다고 볼 만한 근거가 있다고 본다. 그 증거 중 하나는 파란 몽골 반점이 몽골과 한국의 신생아 90%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두 나라 국민은 외모, 생활방식, 언어, 문화적 유산 면에서 너무도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다.
몽골 연구자 김기소니에 따르면 제주도에 사는 한국인들은 200개도 넘는 몽골어 단어를 현재도 사용하고 있다. 몽골 연구자 라그바는 13~14세기 몽골인과 한국인은 유사한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고대 때부터 이미 ‘문화·경제적 연맹’이 몽골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확립됐다. 특히 그 시대 한국인은 몽골어를 공부하기 위해 몽골어 선생들을 초빙하기도 했으며 번역서도 펴냈다고 한다.
한국이 일본에 강점된 1910~1930년, 3000명 넘는 한국인이 몽골에서 농장 일을 하기 위해 몽골 정부에 몽골 시민권을 신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1948년 10월에 몽골은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양국 관계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근거해 발전했다.
6·25전쟁 때인 1952년 몽골은 전쟁으로 인해 고아가 된 4~7세 한국 어린이 197명을 보호해주었다. 몽골은 이들을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교육시킨 뒤 1959년 북한으로 돌려보냈다. 몽골은 6·25전쟁 기간 북한에 많은 구호품을 원조했다. 4만392필의 말, 9094두의 소, 7만9965마리의 양와 염소, 1만7462벌의 모피, 4500벌의 두꺼운 외투, 1만켤레의 가죽부츠, 5만장의 양 가죽, 2248t의 육류, 30t의 버터, 65t의 지방질, 26만5000ℓ의 알코올 등이 그것이다.
몽골은 1990년 한국과 수교했다. 아시아 사회주의 국가 중 한국과 수교한 첫 번째 나라였다. 몽골은 향후 북한과 한국이 관계를 정상화해 궁극적으로 통일이 되는 것을 돕는 다리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울란바토르의 ‘서울 거리’1991년 몽골의 오치르바트 대통령이, 이어 2001년 바가반디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에,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에 몽골을 찾았다. 몽골과 한국의 국회 간 우호적 교류도 활발하다. 현재 두 나라 사이엔 20개 이상의 동의서와 10개 이상의 프로토콜이 체결돼 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몽골 방문은 대몽골제국 수립 800주년 기념행사 중의 첫 번째 정상 방문이었는데, 이는 몽골로서는 매우 큰 의미를 담고 있었다. 몽골 측 희망으로 한국은 몽골에 연화차관(국제통화인 달러를 빌려주고 현지통화로 상환받는 차관)을 제공하기로 했는데, 그것은 몽골의 물류-정보통신 인프라 구축에 사용될 것이다. 두 정상은 몽골 사막화 방지에도 협력하기로 했다. 이는 두 나라의 관계가 진일보하는 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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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로부터 50km 떨어진 바가노르 지역에서 대한항공 직원 100여 명과 몽골인들이 강한 바람을 맞으며 나무를 심고 있다. |
1990년 수교 이후 한국은 몽골에 5400만달러의 차관을 제공했고 1500만달러를 무상원조하기로 했다. 한국은 몽골의 세 번째 투자국이며 두 번째 교역 파트너가 됐다. 두 나라간 교역량은 1990년 50만달러에서 2005년 1억2600만달러로 늘었다. 몽골은 금, 구리, 광석 등을 한국에 수출하고, 한국으로부터는 각종 공산품, 식자재, 소비재를 수입한다.
몽골엔 916개의 한국 기업체가 등록돼 있는데 이들의 투자 예상액은 1억달러 정도다. 이들은 주로 무역, 서비스업, 광산업, 정보통신, 운송, 건설, 관광업에 투자하고 있다. 특히 몽골은 자원이 풍부한데, 두 나라는 1999년 에너지와 광물채광 부문에서 연합통제위원회를 확립해놓았다. 2002년 현재 9개의 한국 기업이 채광탐사에 관여하고 있다. 이 부문에 대한 한국의 투자는 총 투자금액의 20%에 달한다. 목축사업도 한국 기업에 많은 기회를 줄 수 있다.
몽골측 집계로는 현재 2만1850명의 몽골인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한국 체류 몽골인들이 몽골로 송금하는 돈은 연간 3억달러로, 몽골
GDP 18억7000만달러의 16%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480명의 몽골 학생이 한국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한편 몽골 내에는 한국의 투자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3개의 종합대학과 3개의 전문대학이 있다.
2000년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 ‘서울 거리(
Seoul Street)’가 조성됐다. 몽골의 지방도시와 한국의 지방도시가 자매결연을 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비정부기구(
NGO)와 예술단체는 자선, 나무 심기 교류를 통해 양국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양국을 오가는 관광객 수도 늘고 있다. 2001년 바가반디 대통령의 방한 때 양국은 지식 파트너십을 구축하기로 했다.
‘통일한국’, 몽골에 이익동북아시아는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독특한 지역이다. 불행히도 이 때문에 동북아에 위치한 몽골과 한국의 안보는 매우 취약하다. 따라서 몽골과 한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증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한반도의 안보는 몽골의 국가 안보와 긴밀히 연관돼 있다. 경제·정치적으로 강대한 통일한국 건설은 몽골의 국가 이익에 부합한다. 한국과의 교류증진은 몽골 외교 정책의 우선과제 중 하나다. 만일 한국과 북한이 관계 정상화를 이룬다면 남북한에선 과학 기술에 기초를 둔 경제 개발이 촉진될 것이며 통일의 기반이 조성될 것이다. 몽골은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고 천연자원 및 동물 자원이 풍부하지만 인구가 흩어져 있고 항구가 없어 경제 개발이 부진한 상태다. 한국이 북한을 통해 몽골에 한층 가까이 다가서는 것은 몽골에 긍정적인 일이다.
몽골에 수출자유지역을 설립하고 인프라와 광업 분야에 투자를 증대시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할 만하다. 또한 무역과 생산의 경제특구로 발전할 수 있는 첨단기술생산 단지를 양국이 공동으로 설립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몽골을 바다로 잇는 투만골 프로젝트에 한국이 참여할 필요가 있다. 몽골과 한국 간의 자유무역협정(
FTA) 체결도 중요하다.
몽골과 한국의 연방국가 모색은 아직은 생소한 아이디어로서, 양국의 연방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지 그 방법론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의견을 갖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가까운 장래에 이러한 목적을 위해 양국의 학자들과 조사기관에 의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뤄질 것이다. 양국의 연방국가 실현은 역사적인 결속과 전통, 지리적 위치, 사회심리학, 기타 많은 요인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