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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6-15 16:52
[기타] 2) 일제와 식민사학자들이 뿌려놓은 위서바이러스와 자신들의 철밥통을 지키기위한 학문권력
 글쓴이 : 스리랑
조회 : 9,343  

"천남생묘지(泉男生墓誌) 비문(碑文)"도 그러한 예가 될 것이다. 천남생(泉男生)은 고구려의 재상이자 영웅인 연개소문의 큰 아들이다. 그의 묘비명이 1923년에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남생의 아버지 개금(蓋金), 할아버지 태조, 증조부 "자유(子遊)"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태백일사太白逸史』가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밝힌 기록과 일치한다. 이 책은 여기에 남생의 고조부, 즉 연개소문의 증조부 이름을 "광(廣)"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다. 또 광개토태왕 비문에는‘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환지 17세손’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광개토태왕은 추모鄒牟왕의 13세손’이라는『삼국사기』의 기록과 다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가? 『환단고기』를 보면 그 이유가 밝혀지게 된다.
 
『환단고기』에는 고구려 제왕의 계보가 제1세 해모수(BCE 194년에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북부여 건국)로부터 →제2세 고리국의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북부여 건국)로부터 →제2세 고리국의 제후 고진(해모수의 둘째 아들)→제3세 고진의 아들→제4세 옥저후 불리지(고진의 손자)→제5세 고추모(고주몽, 고진의 증손자) … 제17세 광개토태왕(주몽의 13세손)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주몽의 선조는 해모수이며 그로부터 치면 광개토대왕은 17세가 되는 것이다. 『삼국사기』도 광개토대왕비도 모두 정확한 사실을 담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을 『환단고기』가 해명해준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환단고기』가 후대의 창작이 아닌 진서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알려주는 여러 증거들이『환단고기』 자체 내에 많이 들어있다. 문제는 그 증거들을 일일이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환단고기』를 대하는 자세이다. 왜 식민사학자들은 자세히 연구하고 검토하지 않고 위서라고 낙인찍는가 하는 것이다. 민족사학자이건, 역사학계의 주류 사학자이건 누구라도 『환단고기』를 연구하는 사람은 우선『환단고기』에 담긴 한민족과 인류의 시원 문화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열린 태도와 긍정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
 
 
『환단고기』가 편찬, 간행된 것은『환단고기』의 앞에 붙어 있는 서문에 해당하는 범례에 따르면 계연수 선생은 자신의 동지이자 벗인 홍범도 장군과 오동진 장군 두 사람의 자금지원으로 30부를 간행했다고 한다. 범례에‘기궐’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목판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환단고기』를 우리에게 전해준 이유립 선생은 1907년생으로서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의 제자이자 계연수 선생의 제자였다. 그는 13세 때 삭주 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배달의숙이라는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이 학교에서는 계연수를 위시하여 최시흥, 오동진 등이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유립 선생은 조선독립소년단에 참가하여 활동하는 등 소년시절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는데 특히 교육운동에 뜻이 있어 33세 때에는 신풍학원도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그는 1948년 남한으로 월남할때『환단고기』를 가져왔다. 이유립 선생은 1963년 대전 은행동에 정착해서 후학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쳤는데 그 때 사용했던 교재가 『환단고기』였다. 이는 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양종현梁宗鉉 씨가 직접 증언해준 사실이다. 양종현씨는 1966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이유립 선생에게 사사했던 분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유립 선생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 초간본은 1976년경에 분실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유립은 월간 『자유』지를 운영하고 있던 박창암 장군(1923-2003)의 도움을 받아 의정부에 살고 있었는데 백내장 수술차 5일간 집을 비운 사이 집주인이 야반도주한 걸로 착각하고 집세 대신에 이유립 선생의 책들을 모조리 팔아버린 것이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환단고기』 원본이 사라지는 바람에 『환단고기』 위서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인류사의 여러 경전을 돌이켜보면 수백,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는 가필과 재편집을 통한 보정 작업 끝에 오늘날의 경전이 되었다. 백번 양보하여 『환단고기』의 일부 술어와 연대 표시가 사실과 다르거나 다른 사서와 다소 어긋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시원 역사, 한민족의 국통 맥, 태곳적 한韓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밝혀 주는 『환단고기』의 독보적인 가치를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
 
 
식민사학자들은‘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한『환단고기』의 원본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조작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환단고기』 범례에서도 나오듯이 운초 계연수가 1911년에 만주 관전현에서 스승 해학 이기의 문중에서 전해 오던 『태백일사』(8권으로 구성)와 다른 4권의 정통 사서를 한 권으로 묶어 간행하였는데, 1920년 만주 관전현, 압록강 부근의 조선인의 사설학교 배달의숙(倍達義塾)에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친다. 이 학교는 독립운동가인 석주 이상룡 선생과 송암 오동진 장군이 출연, 설립한 뒤 일대 독립군 및 그 자녀들에게 조선의 역사와 혼을 가르쳐오던 터였다.
 
일본 헌병들은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계연수선생을 체포하고 계연수선생과 여러 교사들이 수집하고 연구한 책과 저술, 자료 등 3천여 점을 강탈해 헌병대로 실어갔다고 한다.“헌병대가 강탈한 온갖 자료들 가운데는 당연히『환단고기』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일본 헌병들은 운초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펴낸 바로 그 인물인 것을 알고는 온갖 고문을 가하고는 사지를 다 잘라서 압록강에 내다버렸다. 그렇게 토막토막 잘려진 선생의 시신을 동포들이 수습하던 장면을 직접 목격한 분이 그의 제자인 한암당 이유립 선생이다.
 
이유립 선생은 평안북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인 해학 이기의 제자 이관집의 아들이고 열세 살부터 배달의숙에서 계연수선생에게서 배웠다. 계연수선생과 이관집 선생은 일찍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환단고기』를 진정으로 그 전수자로서 희생되신 분들, 가신 이들을 위해서 우리가 옷깃을 여미고 정말 목욕재계하고 『환단고기』의 그 한 소식을 우리의 본래 원형역사, 원형 문화의 안목으로 그렇게 읽어야지 , 제 눈에 제 안경으로 그냥 비판하고 훼손을 시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예로부터 전해오던 한민족의 고유사서들 대부분은 전란이 빈번하여 사서들이 소실된 경우가 많았고 외적에게 탈취되어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궁궐과 많은 절, 건물들이 불에 타면서 그곳에 있던 서적들도 소실되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유학에 물든 조선 조정은 우리 고유 사서를 민간으로부터 수거하여 궁궐에 비장하였다가 전란이나 화재로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 『진역유기震域留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고기古記』, 『밀기密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려팔관 잡기高麗八觀雜記』 등 현재 전해지지 않는 고유 사서의 이름이 나온다. 이렇게 한민족사의 참 모습을 확인시켜 줄 사서들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지금, 『환단고기』와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등 몇 종의 책들이 겨우 전해지고 있다.
 
 
『단기고사』는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대진국을 세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발해문자로 쓴(729년) 책이다. 전수 과정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59년 국한문으로 번역되었지만, 6·25 사변 때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단기고사』는 구전되어온 자료를 토대로 복원된 것이다. 『규원사화』는 그 서문에 의하면, 북애노인北崖老人이란 인물이 숙종 2년(1675년)에 지었다. 총 다섯 부분으로 나눠져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시대를 모두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환단고기』와 상이한 부분이 있다.
 
『제왕연대력』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지은(890년경)대표적 저술 중의 하나로 신라 역대 왕력이다. 원본은 일제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홍종국洪種國이 필사한(1929년) 필사본만 전한다. 고조선의 1세, 2세 단군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이들 고유 사서 가운데서도 삼성조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역사만 아니라 상고시대 동북아 문화권의 정치, 경제, 풍속, 언어, 음악, 국제 관계 등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전하는 『환단고기』야말로 한민족 고유사서의 최고봉이라 하겠다.
 
 
1911년은 일제에 의해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해였다. 후대 사람들한테 한민족사의 뿌리역사와 혼이 담긴 『환단고기』가 전해져야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일제에 의해서 빼앗길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계연수 선생은 1980년에 공개하라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유립 선생이 죽기 직전 책이 나왔다. 1980년도 직전까지는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정권의 군부통치 유신체제 시절로 표현의 자유가 금지되던 시기였다. 때문에 80년 서울의 봄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 그동안 음지에서 숨어있던 민중서적과 금서들이 봇물터지듯 나왔다. 결과적으로 계연수 선생은 적절한 시기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알리라고 하는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환단고기』는 우리 한민족이 근대사의 출발점 갑오동학으로부터 그렇게 무참하게 죽고 800만명이 죽었는데 그 역사의 중심에『환단고기』가 있다. 1910년 한일 합방된 그 다음해 그 첫해에 인류 창세 역사, 동북아의 원형문화와 역사의 뿌리를 밝히는 『환단고기』의 역사 경전이 나왔다는 것은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본다.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가지고 북한에서 내려온 한암당(寒闇堂) 이유립(李裕?,1907∼1986)선생이 대전에서 한 20년을 살면서 60년대 전후로 해서“커발환“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그분이 남한에 내려와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또 뜻이 있는 사람들에게『환단고기』를 대전 은행동에서 우리의 역사 원본을 가르쳤는데, 그 가운데 아주 머리가 뛰어난 양종현이라는 제자가 지금 청주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 분의 증언을 작년과 재작년에 한 열다섯 시간 정도 직접 들었는데, 양종현씨는 60년대에 다른 사람들하고 이유립 선생님 면전에서 신해년 1911년에 나왔던『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가지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창암 장군이 쓴 자유지에 이유립 선생이 60년대에 기고를 하기 시작할 때는 환단휘기로 책을 소개 했었다‘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양종현씨는『환단고기』로 쓰여져 있었던 초간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증언을 하고 있다.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1864~1920)선생이 우리의 시원역사를 선언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일제에 잡혀서 죽도록 맞고 사지가 잘려서 압록강에 버려졌는데, 그 시신이 건져질 때 흐느껴 울던 열다섯 살 소년이 바로 한암당 이유립이다. 이유립 선생이 그 명을 아주 무섭게 가슴속에 새겼을 것이다.
 
1984년, 5년쯤 되어서 오형기 발문이 붙은 1979년도에 나온 책을 처음으로 받자마자 예전에 안방에서 밥먹던 밥상을 놓고 하얀 한지를 깔고 그리고 무릎을 꿇고 초저녁부터 새벽 날 샐 쯤까지 책을 보고서 덮었는데, 한 두 시간 정도는 잠이 오지 않았다. 이게 진실이냐? 이게 한민족사의 진실이냐? 아는 내용은 아는 대로, 모르는 글자가 있으면 모르는 글자 있는 그대로 본 것이다. 그래도 책 내용의 큰 줄거리는 정확하게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때 가장 감명깊은 한 구절이 신라의 대표적 인물인 십성(十聖) 가운데 한분인 안함로(安含老, 579-640)선생의『삼성기(三聖紀) 상上』의 제 1구,“오환건국(吾桓建國)이 최고(最古)”라. 우리 환족의 나라를 세운 것이 가장 오래 되었다. 환국에 대한 정의! 한민족의 한의 뿌리에 대한 정의! 인간에 대한 정의! 인간 본성에 대한 정의! 이 모든 것이 그 한 줄에 다 들어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의 핵심 메시지는 안함로의『 삼성기 상』, 원동중의『 삼성기 하』,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범장의『 북부여기』, 일십당 이맥의『 태백일사』, 이 다섯편의 책 속에 여러가지 형태로 정의가 되고 있는데 오환건국(吾桓建國)이 최고(最古)라는 명구는 천하의 명문이다. 한민족의 뿌리, 우리 역사의 참모습을 가르쳐야 문화를 알고 또 그 문화를 알아야 역사의 원맥을 바로 세울 수 있다.『환단고기』를 가지고 교육을 하면서 느낀 것은 이『환단고기』는 번역본이 20여종이 나와 있는데『환단고기』라는 책의 뜻이 뭐냐? 그것도 정의가 된 그런 책이 없었다. 환단(桓檀)은 환단고기를 보면 천지의 광명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던 한민족의 고유사서들 대부분은 전란이 빈번하여 사서들이 소실된 경우가 많았고 외적에게 탈취되어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궁궐과 많은 절, 건물들이 불에 타면서 그곳에 있던 서적들도 소실되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유학에 물든 조선 조정은 우리 고유 사서를 민간으로부터 수거하여 궁궐에 비장하였다가 전란이나 화재로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 『진역유기震域留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고기古記』, 『밀기密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려팔관 잡기高麗八觀雜記』 등 현재 전해지지 않는 고유 사서의 이름이 나온다. 이렇게 한민족사의 참 모습을 확인시켜 줄 사서들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지금, 『환단고기』와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등 몇 종의 책들이 겨우 전해지고 있다.
 
 
『단기고사』는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대진국을 세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발해문자로 쓴(729년) 책이다. 전수 과정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59년 국한문으로 번역되었지만, 6·25 사변 때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단기고사』는 구전되어온 자료를 토대로 복원된 것이다. 『규원사화』는 그 서문에 의하면, 북애노인北崖老人이란 인물이 숙종 2년(1675년)에 지었다. 총 다섯 부분으로 나눠져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시대를 모두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환단고기』와 상이한 부분이 있다.
 
『제왕연대력』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지은(890년경)대표적 저술 중의 하나로 신라 역대 왕력이다. 원본은 일제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홍종국洪種國이 필사한(1929년) 필사본만 전한다. 고조선의 1세, 2세 단군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이들 고유 사서 가운데서도 삼성조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역사만 아니라 상고시대 동북아 문화권의 정치, 경제, 풍속, 언어, 음악, 국제 관계 등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전하는 『환단고기』야말로 한민족 고유사서의 최고봉이라 하겠다.
 
 
1911년은 일제에 의해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해였다. 후대 사람들한테 한민족사의 뿌리역사와 혼이 담긴 『환단고기』가 전해져야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일제에 의해서 빼앗길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계연수 선생은 1980년에 공개하라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유립 선생이 죽기 직전 책이 나왔다. 1980년도 직전까지는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정권의 군부통치 유신체제 시절로 표현의 자유가 금지되던 시기였다. 때문에 80년 서울의 봄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 그동안 음지에서 숨어있던 민중서적과 금서들이 봇물터지듯 나왔다. 결과적으로 계연수 선생은 적절한 시기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알리라고 하는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환단고기』는 우리 한민족이 근대사의 출발점 갑오동학으로부터 그렇게 무참하게 죽고 800만명이 죽었는데 그 역사의 중심에『환단고기』가 있다. 1910년 한일 합방된 그 다음해 그 첫해에 인류 창세 역사, 동북아의 원형문화와 역사의 뿌리를 밝히는 『환단고기』의 역사 경전이 나왔다는 것은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본다.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가지고 북한에서 내려온 한암당(寒闇堂) 이유립(李裕?,1907∼1986)선생이 대전에서 한 20년을 살면서 60년대 전후로 해서“커발환“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그분이 남한에 내려와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또 뜻이 있는 사람들에게『환단고기』를 대전 은행동에서 우리의 역사 원본을 가르쳤는데, 그 가운데 아주 머리가 뛰어난 양종현이라는 제자가 지금 청주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 분의 증언을 작년과 재작년에 한 열다섯 시간 정도 직접 들었는데, 양종현씨는 60년대에 다른 사람들하고 이유립 선생님 면전에서 신해년 1911년에 나왔던『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가지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창암 장군이 쓴 자유지에 이유립 선생이 60년대에 기고를 하기 시작할 때는 환단휘기로 책을 소개 했었다‘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양종현씨는『환단고기』로 쓰여져 있었던 초간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증언을 하고 있다.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1864~1920)선생이 우리의 시원역사를 선언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일제에 잡혀서 죽도록 맞고 사지가 잘려서 압록강에 버려졌는데, 그 시신이 건져질 때 흐느껴 울던 열다섯 살 소년이 바로 한암당 이유립이다. 이유립 선생이 그 명을 아주 무섭게 가슴속에 새겼을 것이다.
 
1984년, 5년쯤 되어서 오형기 발문이 붙은 1979년도에 나온 책을 처음으로 받자마자 예전에 안방에서 밥먹던 밥상을 놓고 하얀 한지를 깔고 그리고 무릎을 꿇고 초저녁부터 새벽 날 샐 쯤까지 책을 보고서 덮었는데, 한 두 시간 정도는 잠이 오지 않았다. 이게 진실이냐? 이게 한민족사의 진실이냐? 아는 내용은 아는 대로, 모르는 글자가 있으면 모르는 글자 있는 그대로 본 것이다. 그래도 책 내용의 큰 줄거리는 정확하게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때 가장 감명깊은 한 구절이 신라의 대표적 인물인 십성(十聖) 가운데 한분인 안함로(安含老, 579-640)선생의『삼성기(三聖紀) 상上』의 제 1구,“오환건국(吾桓建國)이 최고(最古)”라. 우리 환족의 나라를 세운 것이 가장 오래 되었다. 환국에 대한 정의! 한민족의 한의 뿌리에 대한 정의! 인간에 대한 정의! 인간 본성에 대한 정의! 이 모든 것이 그 한 줄에 다 들어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의 핵심 메시지는 안함로의『 삼성기 상』, 원동중의『 삼성기 하』,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범장의『 북부여기』, 일십당 이맥의『 태백일사』, 이 다섯편의 책 속에 여러가지 형태로 정의가 되고 있는데 오환건국(吾桓建國)이 최고(最古)라는 명구는 천하의 명문이다. 한민족의 뿌리, 우리 역사의 참모습을 가르쳐야 문화를 알고 또 그 문화를 알아야 역사의 원맥을 바로 세울 수 있다.『환단고기』를 가지고 교육을 하면서 느낀 것은 이『환단고기』는 번역본이 20여종이 나와 있는데『환단고기』라는 책의 뜻이 뭐냐? 그것도 정의가 된 그런 책이 없었다. 환단(桓檀)은 환단고기를 보면 천지의 광명이다.
 
 
당시 이유립은 월간 『자유』지를 운영하고 있던 박창암 장군(1923-2003)의 도움을 받아 의정부에 살고 있었는데 백내장 수술차 5일간 집을 비운 사이 집주인이 야반도주한 걸로 착각하고 집세 대신에 이유립 선생의 책들을 모조리 팔아버린 것이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환단고기』 원본이 사라지는 바람에 『환단고기』 위서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인류사의 여러 경전을 돌이켜보면 수백,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는 가필과 재편집을 통한 보정 작업 끝에 오늘날의 경전이 되었다. 백번 양보하여 『환단고기』의 일부 술어와 연대 표시가 사실과 다르거나 다른 사서와 다소 어긋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시원 역사, 한민족의 국통 맥, 태곳적 한韓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밝혀 주는 『환단고기』의 독보적인 가치를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
 
 
식민사학자들은‘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한『환단고기』의 원본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조작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환단고기』 범례에서도 나오듯이 운초 계연수가 1911년에 만주 관전현에서 스승 해학 이기의 문중에서 전해 오던 『태백일사』(8권으로 구성)와 다른 4권의 정통 사서를 한 권으로 묶어 간행하였는데, 1920년 만주 관전현, 압록강 부근의 조선인의 사설학교 배달의숙(倍達義塾)에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친다. 이 학교는 독립운동가인 석주 이상룡 선생과 송암 오동진 장군이 출연, 설립한 뒤 일대 독립군 및 그 자녀들에게 조선의 역사와 혼을 가르쳐오던 터였다.
 
일본 헌병들은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계연수선생을 체포하고 계연수선생과 여러 교사들이 수집하고 연구한 책과 저술, 자료 등 3천여 점을 강탈해 헌병대로 실어갔다고 한다.“헌병대가 강탈한 온갖 자료들 가운데는 당연히『환단고기』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일본 헌병들은 운초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펴낸 바로 그 인물인 것을 알고는 온갖 고문을 가하고는 사지를 다 잘라서 압록강에 내다버렸다. 그렇게 토막토막 잘려진 선생의 시신을 동포들이 수습하던 장면을 직접 목격한 분이 그의 제자인 한암당 이유립 선생이다.
 
이유립 선생은 평안북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인 해학 이기의 제자 이관집의 아들이고 열세 살부터 배달의숙에서 계연수선생에게서 배웠다. 계연수선생과 이관집 선생은 일찍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환단고기』를 진정으로 그 전수자로서 희생되신 분들, 가신 이들을 위해서 우리가 옷깃을 여미고 정말 목욕재계하고 『환단고기』의 그 한 소식을 우리의 본래 원형역사, 원형 문화의 안목으로 그렇게 읽어야지 , 제 눈에 제 안경으로 그냥 비판하고 훼손을 시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예로부터 전해오던 한민족의 고유사서들 대부분은 전란이 빈번하여 사서들이 소실된 경우가 많았고 외적에게 탈취되어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궁궐과 많은 절, 건물들이 불에 타면서 그곳에 있던 서적들도 소실되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유학에 물든 조선 조정은 우리 고유 사서를 민간으로부터 수거하여 궁궐에 비장하였다가 전란이나 화재로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 『진역유기震域留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고기古記』, 『밀기密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려팔관 잡기高麗八觀雜記』 등 현재 전해지지 않는 고유 사서의 이름이 나온다. 이렇게 한민족사의 참 모습을 확인시켜 줄 사서들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지금, 『환단고기』와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등 몇 종의 책들이 겨우 전해지고 있다.
 
 
『단기고사』는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대진국을 세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발해문자로 쓴(729년) 책이다. 전수 과정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59년 국한문으로 번역되었지만, 6·25 사변 때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단기고사』는 구전되어온 자료를 토대로 복원된 것이다. 『규원사화』는 그 서문에 의하면, 북애노인北崖老人이란 인물이 숙종 2년(1675년)에 지었다. 총 다섯 부분으로 나눠져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시대를 모두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환단고기』와 상이한 부분이 있다.
 
『제왕연대력』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지은(890년경)대표적 저술 중의 하나로 신라 역대 왕력이다. 원본은 일제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홍종국洪種國이 필사한(1929년) 필사본만 전한다. 고조선의 1세, 2세 단군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이들 고유 사서 가운데서도 삼성조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역사만 아니라 상고시대 동북아 문화권의 정치, 경제, 풍속, 언어, 음악, 국제 관계 등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전하는 『환단고기』야말로 한민족 고유사서의 최고봉이라 하겠다.
 
 
1911년은 일제에 의해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해였다. 후대 사람들한테 한민족사의 뿌리역사와 혼이 담긴 『환단고기』가 전해져야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일제에 의해서 빼앗길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계연수 선생은 1980년에 공개하라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유립 선생이 죽기 직전 책이 나왔다. 1980년도 직전까지는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정권의 군부통치 유신체제 시절로 표현의 자유가 금지되던 시기였다. 때문에 80년 서울의 봄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 그동안 음지에서 숨어있던 민중서적과 금서들이 봇물터지듯 나왔다. 결과적으로 계연수 선생은 적절한 시기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알리라고 하는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환단고기』는 우리 한민족이 근대사의 출발점 갑오동학으로부터 그렇게 무참하게 죽고 800만명이 죽었는데 그 역사의 중심에『환단고기』가 있다. 1910년 한일 합방된 그 다음해 그 첫해에 인류 창세 역사, 동북아의 원형문화와 역사의 뿌리를 밝히는 『환단고기』의 역사 경전이 나왔다는 것은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본다.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가지고 북한에서 내려온 한암당(寒闇堂) 이유립(李裕?,1907∼1986)선생이 대전에서 한 20년을 살면서 60년대 전후로 해서“커발환“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그분이 남한에 내려와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또 뜻이 있는 사람들에게『환단고기』를 대전 은행동에서 우리의 역사 원본을 가르쳤는데, 그 가운데 아주 머리가 뛰어난 양종현이라는 제자가 지금 청주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 분의 증언을 작년과 재작년에 한 열다섯 시간 정도 직접 들었는데, 양종현씨는 60년대에 다른 사람들하고 이유립 선생님 면전에서 신해년 1911년에 나왔던『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가지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창암 장군이 쓴 자유지에 이유립 선생이 60년대에 기고를 하기 시작할 때는 환단휘기로 책을 소개 했었다‘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양종현씨는『환단고기』로 쓰여져 있었던 초간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증언을 하고 있다.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1864~1920)선생이 우리의 시원역사를 선언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일제에 잡혀서 죽도록 맞고 사지가 잘려서 압록강에 버려졌는데, 그 시신이 건져질 때 흐느껴 울던 열다섯 살 소년이 바로 한암당 이유립이다. 이유립 선생이 그 명을 아주 무섭게 가슴속에 새겼을 것이다.
 
1984년, 5년쯤 되어서 오형기 발문이 붙은 1979년도에 나온 책을 처음으로 받자마자 예전에 안방에서 밥먹던 밥상을 놓고 하얀 한지를 깔고 그리고 무릎을 꿇고 초저녁부터 새벽 날 샐 쯤까지 책을 보고서 덮었는데, 한 두 시간 정도는 잠이 오지 않았다. 이게 진실이냐? 이게 한민족사의 진실이냐? 아는 내용은 아는 대로, 모르는 글자가 있으면 모르는 글자 있는 그대로 본 것이다. 그래도 책 내용의 큰 줄거리는 정확하게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때 가장 감명깊은 한 구절이 신라의 대표적 인물인 십성(十聖) 가운데 한분인 안함로(安含老, 579-640)선생의『삼성기(三聖紀) 상上』의 제 1구,“오환건국(吾桓建國)이 최고(最古)”라. 우리 환족의 나라를 세운 것이 가장 오래 되었다. 환국에 대한 정의! 한민족의 한의 뿌리에 대한 정의! 인간에 대한 정의! 인간 본성에 대한 정의! 이 모든 것이 그 한 줄에 다 들어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의 핵심 메시지는 안함로의『 삼성기 상』, 원동중의『 삼성기 하』,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범장의『 북부여기』, 일십당 이맥의『 태백일사』, 이 다섯편의 책 속에 여러가지 형태로 정의가 되고 있는데 오환건국(吾桓建國)이 최고(最古)라는 명구는 천하의 명문이다. 한민족의 뿌리, 우리 역사의 참모습을 가르쳐야 문화를 알고 또 그 문화를 알아야 역사의 원맥을 바로 세울 수 있다.『환단고기』를 가지고 교육을 하면서 느낀 것은 이『환단고기』는 번역본이 20여종이 나와 있는데『환단고기』라는 책의 뜻이 뭐냐? 그것도 정의가 된 그런 책이 없었다. 환단(桓檀)은 환단고기를 보면 천지의 광명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던 한민족의 고유사서들 대부분은 전란이 빈번하여 사서들이 소실된 경우가 많았고 외적에게 탈취되어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궁궐과 많은 절, 건물들이 불에 타면서 그곳에 있던 서적들도 소실되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유학에 물든 조선 조정은 우리 고유 사서를 민간으로부터 수거하여 궁궐에 비장하였다가 전란이나 화재로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 『진역유기震域留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고기古記』, 『밀기密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려팔관 잡기高麗八觀雜記』 등 현재 전해지지 않는 고유 사서의 이름이 나온다. 이렇게 한민족사의 참 모습을 확인시켜 줄 사서들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지금, 『환단고기』와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등 몇 종의 책들이 겨우 전해지고 있다.
 
 
『단기고사』는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대진국을 세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발해문자로 쓴(729년) 책이다. 전수 과정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59년 국한문으로 번역되었지만, 6·25 사변 때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단기고사』는 구전되어온 자료를 토대로 복원된 것이다. 『규원사화』는 그 서문에 의하면, 북애노인北崖老人이란 인물이 숙종 2년(1675년)에 지었다. 총 다섯 부분으로 나눠져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시대를 모두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환단고기』와 상이한 부분이 있다.
 
『제왕연대력』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지은(890년경)대표적 저술 중의 하나로 신라 역대 왕력이다. 원본은 일제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홍종국洪種國이 필사한(1929년) 필사본만 전한다. 고조선의 1세, 2세 단군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이들 고유 사서 가운데서도 삼성조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역사만 아니라 상고시대 동북아 문화권의 정치, 경제, 풍속, 언어, 음악, 국제 관계 등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전하는 『환단고기』야말로 한민족 고유사서의 최고봉이라 하겠다.
 
 
1911년은 일제에 의해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해였다. 후대 사람들한테 한민족사의 뿌리역사와 혼이 담긴 『환단고기』가 전해져야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일제에 의해서 빼앗길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계연수 선생은 1980년에 공개하라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유립 선생이 죽기 직전 책이 나왔다. 1980년도 직전까지는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정권의 군부통치 유신체제 시절로 표현의 자유가 금지되던 시기였다. 때문에 80년 서울의 봄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 그동안 음지에서 숨어있던 민중서적과 금서들이 봇물터지듯 나왔다. 결과적으로 계연수 선생은 적절한 시기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알리라고 하는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환단고기』는 우리 한민족이 근대사의 출발점 갑오동학으로부터 그렇게 무참하게 죽고 800만명이 죽었는데 그 역사의 중심에『환단고기』가 있다. 1910년 한일 합방된 그 다음해 그 첫해에 인류 창세 역사, 동북아의 원형문화와 역사의 뿌리를 밝히는 『환단고기』의 역사 경전이 나왔다는 것은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본다.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가지고 북한에서 내려온 한암당(寒闇堂) 이유립(李裕?,1907∼1986)선생이 대전에서 한 20년을 살면서 60년대 전후로 해서“커발환“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그분이 남한에 내려와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또 뜻이 있는 사람들에게『환단고기』를 대전 은행동에서 우리의 역사 원본을 가르쳤는데, 그 가운데 아주 머리가 뛰어난 양종현이라는 제자가 지금 청주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 분의 증언을 작년과 재작년에 한 열다섯 시간 정도 직접 들었는데, 양종현씨는 60년대에 다른 사람들하고 이유립 선생님 면전에서 신해년 1911년에 나왔던『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가지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창암 장군이 쓴 자유지에 이유립 선생이 60년대에 기고를 하기 시작할 때는 환단휘기로 책을 소개 했었다‘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양종현씨는『환단고기』로 쓰여져 있었던 초간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증언을 하고 있다.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1864~1920)선생이 우리의 시원역사를 선언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일제에 잡혀서 죽도록 맞고 사지가 잘려서 압록강에 버려졌는데, 그 시신이 건져질 때 흐느껴 울던 열다섯 살 소년이 바로 한암당 이유립이다. 이유립 선생이 그 명을 아주 무섭게 가슴속에 새겼을 것이다.
 
1984년, 5년쯤 되어서 오형기 발문이 붙은 1979년도에 나온 책을 처음으로 받자마자 예전에 안방에서 밥먹던 밥상을 놓고 하얀 한지를 깔고 그리고 무릎을 꿇고 초저녁부터 새벽 날 샐 쯤까지 책을 보고서 덮었는데, 한 두 시간 정도는 잠이 오지 않았다. 이게 진실이냐? 이게 한민족사의 진실이냐? 아는 내용은 아는 대로, 모르는 글자가 있으면 모르는 글자 있는 그대로 본 것이다. 그래도 책 내용의 큰 줄거리는 정확하게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때 가장 감명깊은 한 구절이 신라의 대표적 인물인 십성(十聖) 가운데 한분인 안함로(安含老, 579-640)선생의『삼성기(三聖紀) 상上』의 제 1구,“오환건국(吾桓建國)이 최고(最古)”라. 우리 환족의 나라를 세운 것이 가장 오래 되었다. 환국에 대한 정의! 한민족의 한의 뿌리에 대한 정의! 인간에 대한 정의! 인간 본성에 대한 정의! 이 모든 것이 그 한 줄에 다 들어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의 핵심 메시지는 안함로의『 삼성기 상』, 원동중의『 삼성기 하』,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범장의『 북부여기』, 일십당 이맥의『 태백일사』, 이 다섯편의 책 속에 여러가지 형태로 정의가 되고 있는데 오환건국(吾桓建國)이 최고(最古)라는 명구는 천하의 명문이다. 한민족의 뿌리, 우리 역사의 참모습을 가르쳐야 문화를 알고 또 그 문화를 알아야 역사의 원맥을 바로 세울 수 있다.『환단고기』를 가지고 교육을 하면서 느낀 것은 이『환단고기』는 번역본이 20여종이 나와 있는데『환단고기』라는 책의 뜻이 뭐냐? 그것도 정의가 된 그런 책이 없었다. 환단(桓檀)은 환단고기를 보면 천지의 광명이다.
 
 
덕흥리 고분의 벽화 덕흥리 고분의 벽화를 통해 고구려가 옛날 유주, 지금의 북경 일대까지 장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환단고기』를 통해서만 뒷받침이 된다. 무덤의 주인공은 고구려에서 벼슬을 지낸 유주자사 진(幽州刺使 鎭)이라는 분이다.‘유주자사’라는 직책은 유주(幽州)라는 것이 지금의 북경(北京)지역을 말하는데, 여기에 위치하면서 고구려에 속한 여러 지방을 총괄하여 다스리던 지금 우리로 말하면‘도지사’정도 된다. 중국 동해안 전체를 통치한 고구려 고위관리라고 보면 될 거 같다. 이분이 중국 북경인근에서 통치를 하다가 고향인 평안도로 돌아와 고향땅에 묻혔다고 보고 있다. 유주자사‘진’은 331년 태어나 408년 죽을 때까지 고구려 4대왕을 모신 고구려의 신하였다.
 
13개 태수의 위치 무덤벽면에 있는 사신들을 보면 우측에 어디에서 온 태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유주자사 진은 북경유역에 있으면서 하북성과 산서성 일대를 통치한 고구려 고위신하로써 고구려 땅 일부를 통치하였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78년 유주자사 진 무덤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내용이다. 이 보도는 일본신문을 인용보도 한 것인데 국내반응이 참 재미있다. 일본과 국내의 반응이 극과 극을 이루고 있다.
 
 
 
매금(寐錦)이란 신라왕 호칭은 국내사서로는 유일하게 『환단고기』에만 전한다.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 1988년 발견 울진봉평신라비 전시관 울진봉평비에 실린 모즉지 매륵왕 부분 국보 제242호 울진봉평리 신라비는 1988년 4월 15일 매일신문에 특종으로 보도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비는 원래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118번지의 논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이 비는 유백색의 편마상 우백질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크기는 높이 204cm 로 전체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까운 부정형이다.
 
비문은 자연석에 앞면만 다듬어 글자를 새겼는데 모두 399자로 마멸되어 판독이 어려우나 524년 (신라 법흥왕 11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의 내용은 이 비가 세워지기 얼마전에 울진지방에서 불을 지르고 성을 에워싸는 등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여 신라 중앙정부에서 대군을 동원하여 이 사태를 진압한 뒤 그에 대한 사후 처리로 모즉지매금왕(법흥왕)과 신료 13인이 육부회의를 열어 칡소(얼룩소)를 잡는 등 일정한 의식을 행한 뒤 현지 관련자들에게 장60대와 100대등의 형을 부과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방민에게 주지시킨다는 것으로 율령비의 성격을 띤다.
 
울진 봉평비 신라비가 담고 있는 신라사의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그 비밀을 풀기위한 첫 번째 열쇠는, 바로 이 비석의 주인공을 찾는 것이다. 우선 비문을 보면‘갑진년 정월 15일... 탁부 모즉지 매금왕...牟卽智 寐錦王‘ 이라고 적혀 있다. 모즉지 매금왕牟卽智 寐錦王 그는 대체 누구일까?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된 신라매금 ... 비문의 첫 문단은, 이 비석이 세워진 때가 갑진년이며, 비석을 세운 사람은 모즉지 매금왕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모즉지 매금왕은 누구인가. 광개토태왕비에도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광개토대왕 대에, 신라 매금이 고구려에 직접 와서 조공했다는 내용이다. 학계에서는 이‘매금’이, 신라의 왕을 뜻한다고 해석했다. (제3면 2행) 遂分爲郡安羅人戌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000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00新羅寐錦00僕勾 <계연수 [비문징실1895]로 복구한 내용>
 
중원 고구려비(79년 발견 81년 국보지정)에 실린 매금 중원 고구려비에 새겨진 광개토대왕비보다 조금 후대에 세워진 중원고구려비에는‘매금’이라는 명칭이, 무려 여섯 번이나 등장한다. 이와 같이 광개토대왕비, 중원(충주) 고구려비, 울진 봉평 신라비 등 발견된 세 비석에는 신라왕을 뜻하는 매금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그러나 신라를 다룬 기존 사서에는 매금이라는 용어가 보이지 않는다.
 
『환단고기』는 국내 사서로써 유일하게 매금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기록에도 나온다. (장수홍제호태열제 재위 시 413~491) 신라의 매금과 백제의 어하라와 함께 남평양에서 만나서 공물 바치는 일과 국경에 주둔시킬 병사의 숫자에 대하여 약정하였다. 又與 新羅 寐錦 百濟 於瑕羅 會于 南平壤 約定 納貢 戌兵之數. 1103p 백제왕을 어하라라고 부른 것은 고주몽이 소서노를 책립하여 부른 것이 최초 기록이다. 또한 중국의 [북사][주서 백제전] 등에서도 백제는 자기들의 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른다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백제 어라하와 상대되는 신라 매금은 신라왕의 호칭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환단고기』를 통해서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발해 3대 문왕 대흠무의 연호가 환단고기에 대흥大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서기 1949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 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 존호를‘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歷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 하고 불법의 수호자로 자처한 데서 드러나, 환단고기가 사료로서 가치 있음이 실증되었다.
 
정효공주는 발해 제3대 문왕(文王)의 넷째 딸로서 757년(문왕(文王) 22)에 태어나 792년(문왕 56) 6월에 3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무덤은 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용수향(龍水鄕) 용해촌(龍海村)의 서쪽에 있는 용두산(龍頭山)에 있다. 무덤은 1980년 10월에서 12월 사이와 1981년 5월에서 6월 사이 두 차례 발굴되었다. 현재 묘지석은 연변자치족자치주박물관(延邊朝鮮族自治州博物館)에서 보관하고 있다.
 
글자는 모두 판독이 가능하며, 그 내용은 정효공주의 출신, 공주의 지혜로움과 아름다움을 칭송한 것, 출가남편과 딸을 일찍 잃고 수절한 사실, 장례, 애도문의 순으로 구성되었다. 묘지석은 정혜공주묘지와 더불어 발해인이 남긴 귀한 자료이다. 특히 발해의 국가 기틀이 확립되던 문왕대의 정치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문왕의 존호(尊號)가‘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었으며, 그가 대흥(大興)이란 연호를 사용하다가 도중에 보력으로 바꾸었고, 다시 말년에 대흥으로 복귀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아울러 존호의 내용을 통하여 문왕이 불교에서 이상적 제왕을 일컫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자처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 문왕을‘황상(皇上)’이라고 불러 발해에서 그가 황제적인 지위를 누렸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무덤의 벽화는 발해인의 모습과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어 주목을 받았다.
 
 
고조선 팔조금법 3조가 아닌 8조 전체를 보여주는 환단고기 범금팔조(犯禁八條)라고도 하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으로 8조문이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리고 그중에서도 8조 중 3조의 내용만이 한서 지리지 연조(燕條)에 전하며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실려있다.
 
 
정효공주는 발해 제3대 문왕(文王)의 넷째 딸로서 757년(문왕(文王) 22)에 태어나 792년(문왕 56) 6월에 3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무덤은 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용수향(龍水鄕) 용해촌(龍海村)의 서쪽에 있는 용두산(龍頭山)에 있다. 무덤은 1980년 10월에서 12월 사이와 1981년 5월에서 6월 사이 두 차례 발굴되었다. 현재 묘지석은 연변자치족자치주박물관(延邊朝鮮族自治州博物館)에서 보관하고 있다.
 
글자는 모두 판독이 가능하며, 그 내용은 정효공주의 출신, 공주의 지혜로움과 아름다움을 칭송한 것, 출가남편과 딸을 일찍 잃고 수절한 사실, 장례, 애도문의 순으로 구성되었다. 묘지석은 정혜공주묘지와 더불어 발해인이 남긴 귀한 자료이다. 특히 발해의 국가 기틀이 확립되던 문왕대의 정치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문왕의 존호(尊號)가‘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었으며, 그가 대흥(大興)이란 연호를 사용하다가 도중에 보력으로 바꾸었고, 다시 말년에 대흥으로 복귀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아울러 존호의 내용을 통하여 문왕이 불교에서 이상적 제왕을 일컫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자처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 문왕을‘황상(皇上)’이라고 불러 발해에서 그가 황제적인 지위를 누렸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무덤의 벽화는 발해인의 모습과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어 주목을 받았다.
 
 
고조선 팔조금법 3조가 아닌 8조 전체를 보여주는 환단고기 범금팔조(犯禁八條)라고도 하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으로 8조문이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리고 그중에서도 8조 중 3조의 내용만이 한서 지리지 연조(燕條)에 전하며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실려있다.
 
① 살인자는 즉시 사형 에 처한다(相殺, 以當時償殺).
② 남의 신체를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보상한다(相傷, 以穀償).
③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소유주의 집에 잡혀들어가 노예가 됨이 원칙이나, 자속(自贖:배상)하려는 자는 50 만 전을 내놓아야 한다(相盜,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그런데 팔조문이 유일하게 전부 적혀있는 책은 환단고기다. 22세 색불루 단군은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8조금법을 제정하였다. 8조금법은 여덟가지 죄와 각 죄에 대한 처벌을 정한 삼성조 시대의 최초의 성문법이다. 법규의 제정은 강력한 통치 체계를 갖춘 고대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사회분위기와 경제질서가 그만큼 어수선해졌음을 나타낸다.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에 8조문은 아래와 같다.
 
1, 사람을 죽이면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
2, 사람을 상해하면 곡식으로 갚는다(相傷以穀償)
3,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재산을 몰수하여 그 집의 종이되고 여자는 계집종을 삼는다(相盜者男沒爲其家奴女爲婢)
4, 소도(성역)를 훼손하는 자는 둔다(毁蘇塗者禁錮)
5,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시킨다(失禮義者服軍)
6, 게으른자는 부역에 동원시킨다(不勤勞者徵公作)
7, 음란한 자는 태형으로 다스린다(邪淫者笞刑)
 
8, 남을 속인자는 잘 타일러 방면한다(行詐欺者訓放) 자신의 잘못을 속죄한 자는 비록 죄를 면해 공민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시집가고 장가들 수 없었다(欲自贖者雖免爲公民俗猶羞之嫁娶無所수) 이리하여 백성이 마침내 도둑질하지 않았고 문을 닫고 사는 일이 없으며 부인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전야와 도읍을 개간하고 음식을 그릇에 담아 먹었으며 어질고 겸양하는 교화가 이루어졌다.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상)
 
지금의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고조선의 8조금법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환단고기에는 한서 지리지에 빠져 있는 나머지 5개 항목까지 모두 상세히 열거 되어있다. 이 8개 조항은 고대 사회의 법률 제도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상까지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이것만으로도 단군조선이 이미 고대국가로서 체계와 면모를 완전히 갖춘 문명 국가라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평양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에서 5세 구을(BCE 2099 ~ BCE 2084) 단군릉이 1993년 발굴되었다. 여기에서는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북한은 단군릉을 거대하게 개건하여 성역화하였다. 그리고 1926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모금운동을 하여 평양 강동현 단군릉을 보수하고 헤마다 제사를 올린 바도 있다.『환단고기』원문에는“BC 2092년 7월 구을단군이 남쪽으로 순수하여 風流江을 건너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곧 세상을 뜨니 대박산大博山에 묻혔다.”『단기고사』엔 풍류강을 비류강이라 하였는데 송양도 강동江東이라 하여 그곳에 묻혔다고 하였다.
 
 
『신단실기』도 『강동릉변』에서 송양을 강동현이라 했으며 제1세 단군왕검의 릉이 아니라 후대 단군의 릉이라 하였다. 대박산은 우리말 “밝산, 한밝산”의 음차音借이다.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을 일컫는데 이동의 흔적에 따라 곳곳에 백산, 장백산, 태백산, 소백산, 백악산, 불함산이란 이름을 남기고 있다. 구을단군은 이 해 유난히 순행이 잦아 장당경藏唐京 고역산古曆山을 비롯해 남쪽 지경에 이르는 풍류강을 넘어 강동이라고도 하는 송양에 이른 것이다. 얼마 전에 북한에서 대대적으로 개축한 단군릉이 전엔 평남 강동군이었던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이다. 지명과 기록이 세 史書가 일치한다.
 
또한 1530년에 완성된『신증동국여지승람』에“현 서쪽 3리에 둘레 410자나 되는 큰 무덤이 있는데 이를 단군묘라고 한다”는 기록을 내세우는 것과 또『조선왕조실록』숙종과 영조 대에 강동의 단군묘 수리 및 보수 기록이 적혀있고 정조 때 평안감사에게“강동사또가 봄가을로 단군묘에 제사 지내는 것을 제도화하라”는 지시사항이 나온다는 점을 볼때 좀더 명확해 진다.
 
 
고려사에 나온 「신지비사」 일부는 『환단고기』를 통해서 전문이 확인된다.(고조선 삼한관경제 근거 자료) 6세 달문단군 때 신지 발리가 지은 이 「서효사」가 바로 저 유명한 「신지비사神誌秘詞」이다. 「서효사」는‘삼신께 제사 지낼 때 서원誓願하는 글(『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이다.
 
「신지비사」는 『삼국유사』 「보장봉로寶藏奉老 보덕이암普德移庵」 조와 『고려사』 「김위제전金謂磾傳」에서도 일부 기록을 볼 수 있다. 단재는 『조선상고사』 제2편 3장 「신지의 역사」와 「조선상고문화사」 제2편 3장 「신지의 역사와 예언」에서 「신지비사」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였다. 단재는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한전韓傳> 등에 삼한三韓의 70여 국에는 각기 거수渠帥(군장君長)가 있다고 하였으며 그 중에 최고의 장을 신지臣智라 하여 이 신지가 곧 신지神誌였다고 보았다.
 
고려 숙종 때 「김위제전」에 인용된 「신지비사」에는“如稱錘極器, 稱幹扶疎樑, 錘者五德地, 極器白牙岡, 朝降七十國, 賴德護神精, 首尾均平位, 興邦保太平, 若廢三諭地, 王業有衰傾.”이라 하였다. 그 뜻은 단군조선의 삼한의 각 수도[三京]를 저울대[稱幹]·저울판[極器]·저울추[稱錘]에 비유하여, 삼신의 창조 원리를 적용한 신교의 삼신신앙이 영속되어 고조선 삼경三京의 균형이 잘 유지되면 삼한의 70국에게 조공을 받고 크게 번영하게 되며, 만약 삼신신앙이 쇠퇴하여 삼경의 균형이 깨어지면 바로 그날이 고조선의 종말이 된다고 후손들에게 경계한 것이다.
 
삼한三韓의 수도 위치_6세 단군 때 신지 발리는 자신이 지은 서사시 <서효사>에서 삼한의 수도를 저울대(소밀랑, 송화강 아사달), 저울추(안덕향), 저울판(백아강)에 비유하였다. 세 수도가 하나의 저울이 되어 균형을 계속 유지하는 한, 고조선의 태평시대는 보전될 것이라 하였다(『고려사』).
 
고구려 요서 10성의 명칭과 위치를 알려주는『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 문구를 살펴본다. 여기에는 태조대왕 3년에 고구려가 요서에 쌓은 10성의 명칭과 위치가 나온다.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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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 15-06-15 17:10
   
고구려 요서 10성의 명칭과 위치를 알려주는『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 문구를 살펴본다. 여기에는 태조대왕 3년에 고구려가 요서에 쌓은 10성의 명칭과 위치가 나온다.

 

『조대기朝代記』에서 태조 융무 3년에 요서에 10성을 쌓고 이로서 한나라의 10성에 대비케 하였다. 안시는 개평 동북쪽 70리에, 석성은 건안의 서쪽 50리에,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에, 건흥은 난하의 서쪽에, 요동은 창려 남쪽에, 풍성은 안시의 서북 100리에,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에, 옥전보는 한성의 서남쪽 60리에,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에, 요택은 황하가 북류하는 곳의 왼쪽(동쪽)에 각 있다.

朝代記曰 太祖隆武三年 築遼西十城 以備漢 十城 一曰安市城在開平府東北七十里 二曰石城在建安西五十里 三曰建安在安市南七十里 四曰建興在灤河西 五曰遼東在昌黎南境 六曰豊城在安市城西北一百里 七曰韓城在豊城南二百里 八曰玉田堡舊遼東國在韓城西南六十里 九曰澤城在遼澤西南五十里 十曰遼澤在黃河北流左岸」

 

「건안성은 당산 경내에 있고 그 서남을 개평이라 하며 다른 이름으로 개평이라 하는데, 당나라 때 또한 이를 개주라고 일컬었다. 建案城在唐山境內 其西南爲開平 一云 蓋平 唐時亦稱蓋州是也」 위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 문구에는 건안성은 당산 경내 있고, 안시성은 건안성의 북쪽에 있으며, 요동성은 난하 동쪽 창려의 남쪽에 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1970년대 당시 서울의 저명한 사학교수들은 모두 건안성, 안시성, 요동성은 요하 동쪽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구당서舊唐書』 「장검열전張儉列傳」 문구를 보면‘A.D 644년에 당태종은 요동을 정벌하기에 앞서 장검에게 번병(蕃兵)을 거느리고’,『삼국사기』에는‘유幽, 영營 2 도독부의 군사와 거란, 해, 말갈을 거느리고’라고 적혀 있다. 요동을 공격하여 그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그랬더니 장검은 군사를 거느리고 요서에 이르러 강물이 불어난 것을 보고 요수를 건너지 못하였다. 이에 태종은 장검이 겁이 많고 유약한 것을 보고 낙양으로 소환하였고, 그 해 11월 장검은 낙양으로 소환되어 당태종에게 지형과 군사행동에 대하여 말하니 당태종은 듣고 기뻐하여 장검을 당태종이 거느린 6군(어영군)의 행군총관에 명하고 거란, 해, 말갈 등 여러 무리를 거느리고 6군의 선봉에 서게 하였다.

 

6군은 어영을 호위하는 內, 外, 前, 後, 左, 右 6군을 말하는 것으로, 이때 장검이 6군의 선봉에 섰다고 것은 당제가 거느린 어영군의 선봉에 섰다는 뜻이다. 장검은 당태종으로부터 행군총관을 명받고 당제와 함께 이동하였는데, A.D 645년 2월 11일 낙양을 출발하여 3월 24일 정주를 지나 유주(幽州)로 가던 중 당태종은 보정 동북방 150리에 있는 신성로에서 장검에게 요동으로 가서 막리지를 요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稱莫離支將 至遼東 詔儉率兵 自新城路 邀擊之].장검열전에는 당태종이 명령을 내린 일자가 나오지 않으나, 3월 24일 정주를 지나 보정 동북방 150리에 있는 신성(新城)까지 가는데 며칠 걸렸을 것이므로, 장검이 신성로에서 나와 막리지 요격에 나선 날은 대략 3월 26-27일경으로 보인다. 이 신성의 위치는 탁군 신창현 서쪽 30리 되는 곳이고, 보정부 동북 150리 되는 곳이다.[涿郡 新昌縣..今新城東三十里. 補注] [保定府...新城 府 東北 150里 皇朝續文獻通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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