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하면서 영산강 유역고분을 꽤나 공부했었는데요
옛날 글(논문들을 인용했고, 개인적인 생각을 쓴 글입니다)을 꺼내봅니다
3세기 중후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을 축조하며 급성장하던 백제로 인해 금강유역 뿐만 아니라 영산강 토착세력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다음 기사에 의하면 영산강유역의 여러 세력집단은 백제의 남진 추세에 위협을 느껴 282년에 晋에 사진을 파견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동이마한신미제국은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 살았으며, 유주와의 거리가 4천여 리였는데, 여러 대에 걸쳐 사신을 보내지 않았던 20여 국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였다.
마한에 속한 신미국이 중심이 되어서 진에 사신을 보낸 것인데, 왜국에서는 ‘침미다례’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미제국이 사신을 보낸 시기인 3세기 후반부터 옹관고분을 축조하는 세력이 등장하였는데, 강봉룡은 “서남해안을 끼고, 노령·소백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는 전남지방, 그 중에서도 특히 옹관고분을 지배층의 공통 묘제로 쓰고 있던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사회’를 신미제국으로 지칭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라 하였다.
진에 사신을 보내고, 20여 국과 연합하여 위세를 뽐내던 신미국은 4세기 중엽 백제의 침입으로 멸망하게 되고, 이후 영산강 토착세력들은 시종면과 반남면세력이 중심이 되어 중후기 고분사회를 이끌어나가게 된다.
5세기에 백제가 고구려의 침입으로 약화되자 왜와 연대를 하고, 왜계의 횡혈식석실분을 축조하면서 백제의 예속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하지만 6세기에 백제의 무령왕·성왕이 22담로제, 5방제를 실시하면서 백제에 서서히 귀속되었고 6세기 중후반이 되면 완전히 귀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산강 세력이 백제에 귀속되었다고 추정되는 시기에 영산강유역 토착세력의 고분인 ‘옹관고분’과 친왜적·왜계의 ‘전기 횡혈식석실분’이 사라지고, 사비 백제식의 횡혈식 석실분이 급격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고고학적으로 주목할 만하다. 이는 곧 백제가 영산강유역을 완전영역화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명확한 증거라 할 수 있다.
영산강유역의 고분 중에서 후기 횡혈식석실분으로 분류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나주 흥덕리 및 대안리 4호분, 영암 봉소리 고분, 신안 도창리 고분, 함평 월계리 석계고분 등을 들 수 있겠는데, 이들은 ‘옹관고분사회’ 의 주변부는 물론 중심부를 비롯하여 전략상의 요충지에까지 두루 분포하고 있다. 이들의 축조시기는 6세기 후반 및 7세기로 편년되고 있다. 더욱이 6세기 중반 이후에 축조된 나주 반남면 흥덕리의 횡혈식석실분과 나주 복암리 3호분 횡혈식석실에서 백제 관인이 착용한 것으로 알려진 은제관식이 출토되고 있어 6세기 초·중엽에는 영산강유역이 백제의 영역에 편입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제가 원삼국시대 고분, 그 중에서도 철제무기에 대해서 전공했는데 2~4세기대 한강유역에서 나오는 토기만 봐도 한강유역이 신미국꺼란 얘기는 하지 못합니다. 백제는 3세기에 이미 백제 자체의 토기 생산체계를 완성했고, 그 고유한 특징이 나옵니다.
백제가 중국대륙에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어느정도는 인정하는 사람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한강유역이 신미국 꺼라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신미제국의 위치를 한강유역으로 보게 되면 신미제국의 영향권에 있다가 신흥강자로 부상한 시종면 반남면 세력의 위치 또한 변경되어야 하는데... 불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