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명나라를 상대한 정도전 주도의 요동정벌은 게임도 안 될 헛짓거리였나(명은 조선을 얕봤나)
ㅡ 고려말 최영과 이성계가 하북과 만주를 휩쓸고 다닌 것을 보라
ㅡ 만주의 내로라 하는 여진부족이 이성계 휘하였다
ㅡ 게다가 세력이 약화됐다 하더라도 북원이 있었다 발해 대무예가 당나라를 정벌할 적에 돌궐과 거란이 함께 했다 양쪽(실제로는 몽골, 여진, 조선 3곳)에서 치면 당연히 명의 힘은 분산된다
ㅡ 나라가 전란에 돌입하면 특히 중국 같은 거대국가는 반란세력이 일어난다
2) 정도전 요동정벌의 배경은 무엇인가
ㅡ첫째, 명나라는 산해관을 지나 적봉 동남, 조양시를 지나 현 요하 서쪽까지 진출했다가 나아가 심양과 혼하 일대까지 진출한다
ㅡ 둘째, 철령 이북 요구(결정적)
3) 당시 명나라의 국경인식
ㅡ 혼하 중류 남쪽 인근 봉집보(봉집현) 기준 동서 500리가 명과 고려의 접경(명일통지)
ㅡ 이 봉집보가 최초 철령위 위치
ㅡ 정도전이 군사 시위하자 현 철령시로 철령위 후퇴
4) 공민왕의 요동정벌은 단지 일시 점거에 불과했다?
ㅡ 사료가 적을 때에 우리 자랑스런 대한민국 주류사학계는 항상 우리에 극단적으로 불리한 학설, 쭝궈나 왜국에 이로운 학설을 통용설로 채택한다
ㅡ 아니 명나라가 봉집현 중심 동서 500리를 접경으로 적고 있다니까?
ㅡ 일간지에 보도된 철령시, 또는 무순시 남쪽 500리 어쩌고 하는 복기대 팀의 주장은 잘못이라는 것을 이미 오래전 이곳에 논박한 바 있다(본인은 복기대팀 논문을 보지 못 했고 뉴스 기사만 접함)
ㅡ 요동이 고려 땅이 아니었으면 어째서 봉집현 > 연산관 > 봉황성 > 현 압록강 순으로 명과 조선의 접경이 후퇴하나?
5) 명과 왜 안 붙었나?
ㅡ 왜구가 수십 년, 거의 정규군 수준으로 온사방을 다 휩쓸고 다녔고 권문세족들의 부정부패로 민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ㅡ 고려의 적폐와 민생파탄은 오늘 대한민국 쌈 싸 먹는 수준, 조선말은 재롱수준
ㅡ 득보다 실이 크다
ㅡ 이미 당시 한국은 지배층의 야욕, 혹은 야망이 우선이 아니고 민생을 당위로 삼는 새로운 지식인들의 세상
6) 조선이 만주를 먹을 수 있었던 시기
ㅡ 태조ㆍ정종ㆍ태종 이 시기 : 태종 이방원의 극단적 사병철폐 등의 개혁으로 내치는 굳건해졌으나 이성계가 장악한 여진족 세력이 떨어져 나감
ㅡ 이징옥의 란 : 이징옥의 란에서 조선의 여진족에 대한 지배력을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세조의 동북면 무인들 대거 숙청으로 떨어져 나감(세조 시절 만주의 수많은 세력들이 머리를 조아리긴 했으나 실질 결속력은 극히 약화됨)
7) 명 요동도사 관할의 요동(현 요동)은 명나라의 텃밭이었나?
ㅡ 아니 전혀
ㅡ 텃밭으로서의 요동은 전국시대부터 전통적 요동인 승덕&진황도시
ㅡ 그렇다고 이 지역을 텃밭이라고 할 수도 없음 역대 한족 정권에서 여기를 차지한 정권은 서력기원 후 몇 나라가 안 됨
# 중세사, 고대사가 전문이라면서 왜 조선사에 관해서 설치냐?
ㅡ 본인은 강역사 연구가
ㅡ 한사군 문제를 풀기 위해 철령위와 공험진 쟁점부터 파고들면서 역순으로 고찰해 올라가는 연구를 해왔다
ㅡ 또한 간도문제에 대해서 맥락을 파악하는 수준에서 탐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