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찰은
이곳 동아게시판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유저 브로리님의 게시글에서 비롯하였다
브로리님은 대한민국 인터넷의 한 개인 공간에서 "수경주의 어이진은 현 산서성 영구현이고 유수는 상건하이다" 하는 주장을 하는 연구글을 접하였고 이에 대하여 이곳 동아게 역사탐문자들의 견해를 묻는 게시글을 게시하였고
이에 본인이 참여하여 문답을 이어가던 중에 수경주와 어이진, 유수 등에 대한 본인의 앎과 그 기억이 분절돼 있고, 논리적 설명으로 반박하기에 해당 쟁점에 대한 본인의 연구가 부족하다고 판단하여서 양심의 부름과 역사연구자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직접 분석, 고찰하기에 이르렀다.
수경주의 어이진과 유수, 고하, 포구수 등은 본인이 지난 해 고구려 서계를 추적하면서 '송형령, 냉형산, 염사', '고막해와 거란의 활동사', '북위 시대 이래 고구려의 서계' 등을 연구하면서 개인적으로 다루어본 바 있고, 또 이 연구들의 내용과 근거를 충실화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 판단하여 진지하게 탐구하였다.
이 고찰에는 총 6일, 60 시간여가 사용되었다. 역사 문제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말 한 마디 하는 것이 이렇게 엄중하고 힘이 드는 일이다.
브로리님이 읽었다는 글이 뒤에 아래의 글임이 밝혀졌다
해당 연구글에서 작성자는 "《수경주(水經注)》의 어이진(禦夷鎭)은 산서(山西)성 영구(靈丘)이고 고하(沽河)는 상건하(桑乾河), 유수(濡水)는 거마하(拒馬河)이다." 하는 아주 파격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산서성 영구에 어이진의 연고가 들어가게 된 때는 북주 시대로, 523~530에 이르는 북주 말기의, 6진의 란에서 비롯된 반란으로 인하여 황하의 북쪽 지역이 반란세력의 손에 들어가자 북위는 효창 연간(525~528) 때에 6진에 해당하는 진들을 남쪽으로 이치시켜 새롭게 주로 편성하였고, 영안 연간(528~530)에는 6진에 해당하는 회황진과 그 동쪽에 있던 어이진을 합쳐서 울주를 편성하여 현 산서성 진중시 개휴현에 해당하는 당시 병주 오현에 기치, 즉 붙여 다스리게 된다. 이 자리가 개휴현의 바로 동쪽인 평요현이다.
북위가 멸망하고 북주가 들어서자 이곳에 있던 울주는 폐지되었다가 영구에 새롭게 울주를 설치하였다. 이후 울주는 몇 차례 폐지와 재설치를 거치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이곳 저곳으로 이치되다가 오늘날 장가구시 위현(울현) 자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평요현(平遙縣) → 영구현(靈丘縣) → 양곡(陽曲) → 번시(繁畤) → 항주성(恆州城) → 안변현(安邊縣) → 울현(蔚縣))
이 때문에 후대의 사서와 주석들이 영구현 및 상건하 등지에서 어이진을 언급하게 된 것이다.
어이진은 북위 태무제(재위 423~452) 때에 처음으로 현 소량산(小梁山) 일대인 유원(濡源)에 설치되었다. 이것이 바로 자치통감주에서 호삼성이 유수에 주석을 달며 "탁발위(북위) 태무제 때에 설치되었다"한 연원이다.
이 약칭, 태무제 어이진은 수경주 유수 편에서 "유수는 어이진의 동남쪽에서 나온다"한 첫 기술, 그리고 "유수는 (발원처)를 떠나 서북쪽으로 흐르며 어이진 옛 성을 지난다" 한 기술에서의 그 어이진이며
수경주 포구수 편에서 "포구수는 어이진의 북쪽 새 가운데에서 나온다"한 기술, "어이진 동남쪽 90리에 서밀운수가 있다"한 기술, "활염현(곡염수)의 서북쪽 200 리에 어이진이 있다"한 기술에서 말하는 그 어이진이다.
한편 유원(濡源) 근처의 태무제 어이진 외에 태화 연간(477~499, 실제로는 500년 1월 4일까지)에 설치된 어이진이 수경주 고하(沽河, 고수) 편에 나온다. 현 장가구시 적성현 독석구진 남쪽에 있는 독석(獨石)과 첨곡수가 고하로 흘러드는 지점의 사이에 위치하면서 독석에 가깝게 위치한 지점에 제시되는 이 어이진은 수경주의 해당 기술에 따르면 "태화 연간에 북정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곳이다.
태화 연간에 이 지역에는 480년 지우두의 공격을 피해 고막해가 들어와 살았으며 490년에는 지두우가 침범하여 북위에 의한 소탕전이 벌어졌으며 498년에는 이 지역에서 북위 주민들과 섞여 살던 고막해가 안주 지역(포구수, 즉 현 조하 수계)을 약탈하여 북위가 연주(현 장가구시), 유주(현 북경시), 영주(미상, 현 북경시 밀운, 또는 창편구~연경구 지역으로 본인은 추정) 등의 군사로 소탕한 바 있다.
즉 태화 연간의 북적이라 함은 고막해와 지두우의 약탈 및 침략 활동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북적(고막해, 지두우)의 활동으로 인하여 독석 어이진은 보다 남쪽으로 교치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후로성 어이진이다.
후로성 어이진은 수경주에 따르면 본래 어이진이 아닌데 태화 연간에 후로성의 이름을 바꿔서 어이진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최초의 어이진인 태무제 어이진은 유원, 즉 현 펑닝만족자치현 소량산 일대에 설치되었고, 후로성 어이진과 태무제 어이진 사이에 독석 어이진이 분명히 존재하므로
후로성 어이진은 독석 어이진이 고막해 및 지두우와 전투를 벌이면서 교치되어 내려온 어이진으로 판단할 수 있다.
북위는 효문제 태화 연간인 493년에 현 산서성 대동시에 있던 수도 평성(대도)을 버리고 낙양으로 천도를 하였다. 이 바로 전 해인 492년에 승천한 장수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문자명왕에게 북위 효문제는 사지절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령호동이중랑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책봉하였고, 또 이듬 해인 494년에 남제(齊)는 사지절산기상시도독영평이주정동대장군낙랑공(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征東大將軍樂浪公)으로 책봉하였다.
특히 '도독영평이주'라는 지위는 494년에 처음 제수되는데 이는 제 3자인 남제가 보기에 고구려가 북위의 영주와 평주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고 판단함에 따른 것이고
이에 본인은 북위의 영주가 모처에서 북경시 연경구 일대로 이치된 것이 이 시기를 전후한 때인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북위가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하여 3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지극한 한화 정책을 실시하였고 이에 북방 군진의 불만이 심화돼 이것이 6진의 란을 촉발, 북위의 분열과 멸망으로 이어진 것이다.
후로성 어이진이 현 산서성 진중시 일대로 이치돼 회황진과 함께 울주로 편성된 것은 앞에서 설명하였고 어이진이 산서성 영구현에 연고를 남기게 된 것은 북위가 아니라 북주 시대부터라는 것도 앞에서 설명하였다.
어이진의 연혁을 요약 정리하면
① 북위 태무제 ㅡ 현 펑닝만족자치현 소량산(유원) 인근
② 북위 효문제 태화 연간 ㅡ 현 장가구시 적성현 독석구진 남쪽 '독석'의 남쪽 인근
③ 북위 효문제 태화 연간 ㅡ 어이진을 후로성(현 적성현 서쪽)으로 후퇴하여 설치
④ 북위 효장제 영안 연간 ㅡ 회황진과 어이진을 묶어서 현 산서성 진중시 평요현에 울주 설치
상세한 고찰 내용은 아래 글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