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 전기 여진족은 발해 부흥세력 + 발해 지방민 + 발해 피복속 소수종족
2. 10세기 중후반 고려는 혼하 일대까지 진출하였으며 이 때에는 거란과 여진 사이에 끼여 있는 형국이라 거란이 여진을 정벌하고자 할 때에 고려의 허락, 또는 묵인을 받아야 했다. 970년대의 거란에 의한 여진 정벌 시에 고려가 거란의 영토를 경유한 정벌을 묵인한 것을 여진족(발해부흥세력)이 송나라에 하소연함으로써 큰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3. 고려는 특히 성종 시기에 압록강, 즉 혼하 중상류 지역에 대한 성보 축성 및 정지 작업을 실시하여 이 지역에 근거한 여진족과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986년 거란에 의한 대대적 여진족 정벌 작업으로 이 일대 여진족이 파괴됨으로써 고려는 어부지리 격의 이득을 얻으며 991 년에 여진족 무리를 지금의 길림합달령인 장백산 북쪽으로 쫓아버린다
4. 거란과 고려에 의해 본래의 근거지를 상실한 여진족은 하얼빈에 근거하면서 개원/요원 일대에 이르는 지역에서 활동한다 그러나 993 거란의 고려 침략과 강화협정에 따라 개원/요원 지역이 고려에 소위 강동 6주로서 할양됨으로써 여진족은 고려에 의해 완전하게 이 지역에서 소개되어 하얼빈, 목단강 일대로 그 입지가 좁아지게 된다
5. 11세기에 들어 여진족 대부분은 고려에 직간접적으로 복속되는데 고려 문종 때에는 지금의 흑룡강과 연해주 지역의 여진족들이 고려에 대거 귀화하였고, 그들 지역이 고려의 행정지역으로 대거 편입되는데 이 지역의 정확한 위치와 범위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다
6. 여진족의 고려 귀화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자 하얼빈에 근거를 둔, 고려의 귀덕장군인 영가, 즉 완안아골타의 막내숙부되는 영가가 목단강 일대의 고려 귀화 여진족을 충동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나 고려에 의해 제압된다
7. 그러나 영가에 의한 여진족의 반란은 이후 예종 때의 대규모 고-여 전쟁의 전초전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