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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3-01 05:34
[기타] 조선왕조실록 신미양요 관련자료
 글쓴이 : zzag
조회 : 3,814  


아래 글은 몇 일전 제가 올렸던 신미양요 글을 몇년전에 작성할때 미군기록과의 교차비교를 위해서 실록 중 신미양요 관련 부분만을 발췌 편집했던 자료인데 관심있는분께 도움이 되고자 올립니다.
기술로는 지금보다 못한 시대였지만 인간으로서는 지금보다 훌륭한 시대에 사셨던 분들 같아 존경스럽습니다.



4월6일(음)/5월24일(양)          수원 유수 신석희가 풍도와 배리도에 이양선이 나타났음을 보고하다

 

          수원 유수(水原留守) 신석희(申錫禧)가, ‘이달 3일 유시(酉時) 쯤에 이양선(異樣船) 5척이 풍도(楓島)의 뒷바다 북쪽 남양(南陽) 경계에 정박하였습니다. 특별히 감시하고 계속 치보(馳報)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또, ‘5일 신시(申時) 쯤에 이양선 4척이 남쪽 바다 배리도(排李島) 안에 와서 섰습니다. 이 섬은 풍도와 매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감시를 따로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따로 영리한 장교를 선정하여 두 곳에 나누어 보내 자세히 감시하고 계속 상세히 보고하게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4월7일(음)/5월25일(양)          영종 방어사는 이양선이 연흥도 앞바다에 정박했음을 보고하다

 

          영종 방어사(永宗防禦使)가, ‘오늘 미시(未時)에 이양선(異樣船)이 닻을 올리고 곧바로 팔미도(八尾島) 동남쪽 남양(南陽) 경계의 연흥도(延興島) 앞나루 방향으로 내려갔는데, 먼지바람에 가려 어느 곳에 정박하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4월8일(음)/5월26일(양)          영종 방어사가 이양선이 바닷물 깊이를 재고 있었음을 보고하다

 

          영종 방어사(永宗防禦使)가, ‘오늘 오시(午時) 쯤에 이양선(異樣船) 작은 배 4척을 시켜 동쪽과 서쪽의 물깊이를 재게 하였는데 무슨 목적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본영(本營) 관할구역 마지막 경계인 물류도(勿溜島)의 뒷바다를 지나 부평(富平) 경계에 정박하였습니다. 본영과의 거리는 7리(里)입니다.’라고 아뢰었다.

 

 

4월8일(음)/5월26일(양)          경기 감사 박영보가 이양선의 상황과 서양인의 모습을 보고하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박영보(朴永輔)가, ‘방금 남양 부사(南陽府使) 신철구(申轍求)의 첩보(牒報)를 받고 상황을 알아보기 위하여 오늘 화량 첨사(花粱僉使)와 함께 배를 타고 출발하였는데, 막 바다 가운데에 들어서자 세찬 바람이 크게 일어서 도무지 전진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는 수 없이 제부도(濟扶島)로 물러나와 정박하였는데, 양선(洋船)의 종선(從船) 3척(隻)이 떠오기에 손을 흔들어 불렀더니 배는 과연 잠깐 멎었습니다. 상황을 알아보기 위하여 왔다고 써서 보였더니 그들 서너 사람은 배에서 육지로 뛰어내렸습니다. 글을 써서 「너희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가?」라고 물었더니, 그들은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또 「어느 달 어느 날에 우리나라 지역에 왔으며, 배는 몇 척인가?」라고 물어보니, 그들은 서양글자를 써서 보여주었는데 모두 글자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무엇을 그리고 또 손을 들어 큰 배가 있는 곳을 가리켰는데 함께 가서 문답을 하자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연합(鉛盒) 1개(箇)와 소도(小刀) 1병(柄), 건병(乾餠) 1탁(橐)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환급(還給)하였더니 빵 주머니는 받지 않고 그냥 큰 배 쪽으로 가버렸습니다. 그 사람들의 얼굴 모양은 눈이 움푹하고 콧마루는 높으며 눈썹과 머리털은 누르스름하였고 옷은 모두 검은 색깔로 확실히 서양 사람이었습니다. 자세히 알아보지 못하였으니 내일 다시 상황을 알아보려고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4월9일(음)/5월27일(양)          이양선에서 남양부로 편지를 보내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박영보(朴永輔)가, ‘오늘 사시(巳時)에 조수(潮水)를 이용하여 남양 부사(南陽府使)와 화량 첨사(花梁僉使)가 같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으나, 양선(洋船)이 있는 곳까지 채 가지도 전에 어제처럼 사나운 바람이 불어 할 수 없이 돌아와 정박하였습니다. 양선의 종선(從船) 3척(隻)이 바람을 무릅쓰고 와서 정박하므로 급히 가서 보니 서양사람 3명(名)이 뛰어내렸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얼굴 생김새나 말씨가 틀림없이 우리나라 사람이었습니다.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가?」하고 글로 써서 물었더니, 그들은 「글을 모르므로 글로 대답할 수 없다.」라고 하고는 한 통의 편지를 주고는 이어, 「혹 중국말을 아는 사람이 있느냐?」라고 물으므로 없다고 대답하니, 그들은, 「장사하러 여기에 왔으니 사람을 죽이는 사단은 전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배는 몇 척이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5척이다.」라고 말하였으며, 또, 「어느 날에 돌아가느냐?」고 물으니, 그는, 「며칠 내에 북쪽으로 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돼지, 닭, 계란, 물고기를 살 수 있느냐?」라고 하기에,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다시 물으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뿌리치고 배를 돌려 가버렸습니다.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잠시 살펴보니, 3척의 배에 있는 서양사람들은 47명이었습니다. 저 무리들이 바닷가를 거침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매우 걱정되어 방어대책에 대하여 특별히 신칙하고, 그들이 보낸 편지 한 통을 베껴서 올려 보냅니다.’라고 아뢰었다.

 

          【서양사람의 편지에서, ‘회답을 올립니다. 어제 영업선에서 편지를 받아보니, 「우리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여기에 온 것은 무슨 일 때문이냐?」고 하였고, 「여기로 온 경위를 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등의 내용이었는데, 이미 이 문제들을 우리 흠차대인(欽差大人)과 제독대인(提督大人)에게 편지로 알렸고, 회답을 해주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 배는 대아메리카합중국[大亞美理駕合衆國] 즉, 대미국(大美國)의 배이며 여기에 온 것은 우리 흠차대인이 조선의 높은 관리와 협상할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약을 체결하려면 아직도 날짜가 필요하므로 우리 배는 이 바다 한 지역에서 정박하고 있으면서 조약이 체결되기를 기다렸다가 돌아가겠습니다. 배에 머물러 있는 두 대인은 다 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4월10일(음)/5월28일(양)          남양부 앞바다에 이양선이 정박한 이유를 알기 위해 통역관을 보내기로 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이양선(異樣船)이 근해에서 머물고 있은 지 벌써 여러 날이 됩니다. 어제 경기 감영(京畿監營)의 장계(狀啓)를 보니, ‘남양 부사(南陽府使)가 가서 사유를 물어보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나라 배가 무슨 일로 와서 정박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곡절을 상세히 묻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사역원(司譯院)에서 일에 밝은 역관(譯官)을 몇 사람 선정하여 하직 인사는 그만두게 하고 내려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4월10일(음)/5월28일(양)          이양선이 인천과 안산 경계에서 수심을 재고 있다는 보고를 받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박영보(朴永輔)가, ‘방금 인천 부사(仁川府使)의 첩보(牒報)를 보니,

「오늘 진시(辰時)에 그들의 배가 팔미도(八尾島) 앞바다에 내려가 닻을 내리고는 작은 배 4척이 일제히 인천부 경계의 바다로 떠오므로 부사가 언덕에 올라가 살펴보니 인천과 안산(安山) 경계에서 수심을 재고 있었다고 하였으며, 사나운 바람과 파도에도 거침없이 오가는 것을 보아 매우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또 ‘인천 부사의 첩보에, 「그들의 배 5척(隻)이 오늘 유시(酉時)에도 부평(富平) 경계의 호도(虎島) 앞바다에 그대로 정박하고 있었는데 배의 모양은 이범선(二帆船)이 2척이고 삼범선(三帆船) 3척이며, 삼범선이 제일 컸다고 합니다.

배에 대해서 의주(義州)사람들이 목격한 바 있는데, 내부는 4층으로 만들고 층마다 15칸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는 4장(丈)이나 된다고 합니다.」 하였습니다. 내려온 의주 통사(義州通事) 3인(人)이 본읍(本邑)의 아전 김진성(金振聲)과 함께 문정(問情)한 다음 그들이 답변한 사연과 받아온 물건 이름은 모두 성책(成冊)을 만들어 올려 보내며, 물건은 문정관(問情官)이 직접 운현궁(雲峴宮)에 가져다 바쳤고, 통보해온 성책은 별지(別紙)에 베껴서 밀봉하여 올려 보냅니다.’라고 아뢰었다.

 

          【성책의 내용에, ‘인천 수령에게 회답을 올리니 개봉해 볼 것입니다. 얼마 전에 물어온 편지를 받아보니, 우리나라 배가 경내에 들어온 까닭을 물으려 한다고 하였으므로 우리 군주가 흠차(欽差)대인과 제독에게 이미 올려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군주가 파견한 관리의 명령을 받고 회답합니다. 이 배는 우리 군주가 흠차한 대인을 태우고 와서 귀 조정과 중요한 문제를 협상하려고 합니다. 

군주가 흠차한 우리 관리는 귀 조정에서 반드시 높은 관리를 파견하여 함께 토의하리라고 깊이 믿고 있으므로 특별히 파견하는 높은 관리가 오기를 기다려서 군주가 파견한 우리 관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말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여러 날 동안 배를 머물러두고 귀 조정에서 무슨 소식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간에 모선에 딸린 배들을 위쪽으로 올려 보내어 시험 삼아 바다의 형세를 조사하여 큰 배가 올라갈 수 있겠는가를 판단하는데 편의를 보려고 합니다. 바닷가의 백성들에게 알려주어 놀라지 않게 하며 피차간에 예의로써 서로 대우하고 절대로 해칠 생각을 가지지 않게 하며 사단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를 아울러 바라는 바입니다. 이렇게 회답합니다.’ 라고 하였다. 

받아 온 물건으로써 의주(義州)사람 3인에게는 각각 백랍초 2자루, 금물을 칠하여 장식한 작은 걸개거울 3면(面)을 주었으며 뱃사공들에게는 각각 천보통보(天保通寶)와 당백전(當百錢) 1엽(葉)씩을 주었다.】

 

 

4월12일(음)/5월30일(양)          이양선 5척이 호도 앞바다에 닻을 내리다

 

          영종 방어사(永宗防禦使)가, ‘오늘 미시(未時)쯤에 양선(洋船) 5척(隻)이 일제히 닻을 올리고 올라왔는데,

본영(本營) 경계를 지날 때에 자세히 살펴보니 맨 앞에 선 이범선(二帆船) 1척은 길이가 거의 40파(把)에 가까웠고 그 다음의 이범선은 전날 다니던 배였으며 세 번째의 삼범선은 길이가 50파에 가까울 듯하였으며, 물위로 드러난 좌우 삼판(杉板)의 높이는 4장(丈) 가량 되었습니다. 네 번째의 삼범선은 세 번째의 삼범선과 거의 같았으며, 다섯 번째의 삼범선은 길이와 물위에 드러난 높이가 네 번째 배보다 약간 길고 높았는데, 배 위에 오가는 사람들이 늘어서서 그 길이를 자세히 살필 수 없었습니다. 배의 돛 사이에는 층층으로 깃발과 북을 매달았는데 바람에 흔들거렸습니다.

맨 앞에 선 배는 부평부(富平府)의 끝 경계선인 호도(虎島) 앞바다에 정박하였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의 배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정박하였으며 다섯 번째 배는 본영 경계의 끝 경계선인 물류도(勿溜島)와 부평부의 첫 경계에 정박하였습니다. 첫 배로부터 다섯 번째 배가 정박한 곳까지의 사이는 불과 2리쯤 되었습니다. 다섯 번째 배가 닻을 내릴 때부터 한방의 대포소리가 났습니다.’라고 아뢰었다.

 

 

4월14일(음)/6월1일(양)          어재연을 진무 중군에 임명하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진무 중군(鎭撫中軍) 자리가 지금 났습니다. 이런 때에 이 벼슬자리에 특별히 선발하여 임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행 호군(行護軍) 어재연(魚在淵)을 특별히 차하(差下)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4월14일(음)/6월1일(양)          이양선이 강화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와서 정박하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양선(洋船)이 강화도(江華島)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와서 정박하였습니다.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방어 문제에 대하여 더욱더 주의를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사와 군량을 더 보내줄 방도에 대해서 본부(本府)가 적당히 조치를 취하여 제때에 내려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강화도에 군사와 군량을 더 보내줄 데 대해서는 방금 품의하여 아뢰었습니다.

훈련 도감(訓鍊都監)에서 보군(步軍) 2초(哨), 화약 1,000근(斤), 쇠뇌〔手弩弓〕 10장(張)과 거기에 딸린 화살 300지(枝), 별파진(別破陣) 300명(名)을 보내고,

금위영(禁衛營)에서 보군 1초, 화약 1,000근, 쇠뇌 10장과 거기에 딸린 화살 300지, 별파진 10명을 보내며

어영청(御營廳)에서 보군 1초, 화약 1천근, 쇠뇌 10장과 거기에 딸린 화살 300개, 별파진 10명을 보내고,

총융청(總戎廳)에서 아병(牙兵) 1초, 불랑기(佛狠機) 30문(門)과 거기에 딸린 탄환 2,000개(箇), 대포 3좌(坐), 화약 1,000근을 이제 내려보내려고 합니다.

4개의 영(營)의 보군 각각 1초는 새로 임명된 중군에게 맡기고 훈련 도감의 보군 1초는 새로 임명된 판관에게 맡겨서

이제 곧 출발시키되 각기 단단히 통솔해서 임기응변하도록 하며,

군량 1,000석(石)은 호조(戶曹)의 창고에 있는 미(米)에서 획송(劃送)하되 주교사(舟橋司)에서 배로 운반하도록 명령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4월14일(음)/6월1일(양)          이양선이 포를 쏘면서 손돌목을 지나가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박영보(朴永輔)가, ‘통진 부사(通津府使)의 보고에, 「좀 작은 이양선(異樣船) 2척(隻)이 4척의 종선(從船)을 거느리고 오늘 미시(未時)쯤에 곧바로 손돌목〔孫石項〕쪽으로 향하였으므로 광성진(廣城津)에서 먼저 대포를 쏘았습니다. 그러므로 부사가 약속대로 그에 호응하여 크고 작은 모든 대포를 일제히 쏘니, 그 배들도 이 대포소리를 듣고 대포를 마구 쏘면서 거침없이 손돌목을 지나갔습니다. 이번에 방어한 일을 돌이켜보면 매우 송구스럽고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하였습니다. 

요해지의 길목으로는 손돌목 만한 데가 없고 방어대책도 미리 세웠건만 초기에 격침시키지 못하고 결국 놓쳐버렸으니

군사 지휘체계를 놓고 볼 때 대단히 해괴한 일입니다. 해당 부사 홍재신(洪在愼)을 우선 파출(罷黜)시키소서.’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우선 용서하여 죄명을 지닌 채 거행하라.” 하였다.

 

 

4월15일(음)/6월2일(양)          이양선을 경계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게 하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인천(仁川)은 양선(洋船)이 정박해 있는 곳에서 직통길이므로 여기에 군사를 더 늘여 방어하고 계엄 상태도 한층 더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군사 1초(哨)와 수어영(守禦營)의 별파진(別破陣) 50명(名)을 인천 부사(仁川府使) 구완식(具完植)에게 넘겨줄 것입니다. 서울의 군영들에 대해서는 본 삼군부에서 비밀 계(啓)를 가지고 군사를 동원시키며, 지방의 군영들에 대해서는 병부(兵符)를 발송하거나 병부를 맞추어볼 때에도 비밀리에 거행하게 할 것입니다.

화약 1,000근(斤)과 탄환 1만 5,000개에 대해서는 각 군영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분배하여 내려 보낼 것입니다.

듣자니, 통진(通津)에 군량이 넉넉하지 못하다고 하니 호조(戶曹)의 저류미(儲留米) 300석(石)을 주교사(舟橋司)에서 운반해가도록 분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병부를 발송할 필요 없이 지금은 비밀 보고서를 가지고 본 삼군부에서 조용히 군사를 동원시키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4월15일(음)/6월2일(양)          이양선이 포를 쏘아 포군 오삼록이 졸하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박영보(朴永輔)가, ‘통진 부사(通津府使)의 보고에,

「저들의 배들이 광성진(廣城津)에 와서 닿자마자 모두 닻을 내리고 이 진의 성(城)을 향하여 대포를 수없이 마구 쏘아댔으며 얼마 있다가 모든 배가 도로 내려가다 손돌목〔孫石項〕에 이르러 또 대포와 조총을 쏘아댔는데 날아오는 탄환이 빗발치듯하였습니다. 덕포(德浦)의 포군(砲軍) 오삼록(吳三祿)이 대포에 맞아 부상을 입고 이어 죽었습니다. 그 배들은 차츰 도로 내려가 모두 전과 다름없이 호도 앞바다에 가서 닻을 내렸습니다.」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4월16일(음)/6월3일(양)          이양선에서 쏜 포에 맞아 죽은 오삼록을 위로하고 다른 군사들을 격려하다

 

          전교하기를, “일전에 양선(洋船)이 덕포(德浦)에 들어왔을 때, 포군(砲軍) 오삼록(吳三祿)이 그 놈들의 포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돌보아주었는지 알 수 없다. 소식을 듣고 불쌍한 생각을 금할 수 없다. 그리고 각처(各處)의 사졸(士卒)들이 진을 치고 계엄 상태에 있은 지 벌써 며칠이 된다. 밖에서 생활하면서 앓지나 않는지 그 근심스러운 생각이 음식을 들거나 잠잘 때에도 잊혀지지 않는다. 

오삼록을 장사지내고 그의 처자들을 돌보아주며 각처의 사졸들에게 음식을 먹이는 등 문제에 대해 모두 경기 감영(京畿監營)에서 넉넉하게 제급(題給)하고 물자는 공전(公錢)으로 회감(會減)하라. 그리고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이 교서(敎書)의 내용을 가지고 일일이 위로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4월16일(음)/6월3일(양)          진무영의 군사들이 이양선을 포격하다

 

          진무사(鎭撫使) 정기원(鄭岐源)이, ‘이양선(異樣船) 이범선(二帆船) 2척(隻)과 작은 배 4척이 항산도(項山島)로 물러간 경위에 대해 벌써 치계(馳啓)하였는데, 방금 전 중군(中軍) 이봉억(李鳳億)의 치보(馳報)를 받아보니, 「14일 술시(戌時)경에 이양선이 우리의 조사도 거치지 않고 손돌목〔孫石項〕으로 갑자기 들이닥쳤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나라에 대한 침입입니다. 그러므로 부득이 무력을 써서 방어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무사들에게 명령하여 일제히 포를 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탄환이 소낙비 쏟아지는 듯하였는데 이양선에 명중한 그 탄환수는 알 수 없고, 이양선의 내부가 얼마나 파손되었지는【배의 판자가 파손된 것이 서너 조각이라고 합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진지를 옮겨 앞으로 나아가 나포하려고 할 무렵에 이양선은 대포를 쏘면서 곧 퇴각하였는데 아마도 겁이 나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경내에 침입한 적들을 소멸해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하였습니다. 이양선이 항산도(項山島)로 곧바로 내려갔다가 도로 응도(鷹島) 앞바다에 정박하였습니다. 이양선이 탄환을 무릅쓰고 드나들면서 이처럼 날뛰는 조건에서 지금은 비록 퇴각했다 하더라도 다시 침범할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파수(把守)보는 여러 곳을 더욱 단단히 단속하도록 엄격히 신칙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4월17일(음)/6월4일(양)          경기의 4개 군에 포군을 두다

 

          삼군부(三軍府)에서, ‘남양부(南陽府)에 별포군(別砲軍) 100명(名), 장단부(長湍府)에 별포무사(別砲武士) 200명, 고양군(高陽郡)에 포수(砲手) 70명, 가평군(加平郡)에 포군(砲軍) 20명,  양천현(陽川縣)에 포수(砲手) 43명, 문경현(聞慶縣)에 포군 50명을 설치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4월17일(음)/6월4일(양)          대원군이 이양선에 글을 보냈고 미국 제독 대리가 회답하다

 

          진무사(鎭撫使) 정기원(鄭岐源)이, ‘본 군영(軍營)의 중군(中軍)을 교대시킬 적에 소루한 점들이 없지 않으므로 새로 임명된 중군(中軍)은 군영에 가서 부임하지 말고 곧장 광성(廣城)의 찰주소(札駐所)에 가서 직접 서로 교대하도록 중도에 명령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중군 어재연(魚在淵)은 위경군(衛京軍)을 거느리고 16일 광성보(廣城堡)에 도착하여 진지로 나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대원군(大院君)이 진무사(鎭撫使)를 시켜 양선(洋船)에 편지를 보내기를,

“올봄에 북경(北京) 예부(禮部)에서 자문(咨文)을 보내어 귀국 사신의 편지를 전해왔기에 우리 조정에서는 이미 의논하고 회답 자문을 보낸 동시에 귀 대인에게 전해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또 생각건대 귀국은 예의를 숭상하는 풍속이 본래 이름난 나라로 다른 나라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귀 대인은 아마도 사리에 밝아서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을 터인데, 이번에 어찌하여 멀리 바다를 건너와서 남의 나라에 깊이 들어왔습니까?

설사 서로 살해하는 일은 없었다고 하지만 누구인들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요새지에 갑자기 외선(外船)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모든 나라의 일반적 규범으로써 처지를 바꾸어놓고 보아도 모두 그러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귀선(貴船)이 바닷가 요새지를 거슬러 올라와서 피차간에 대포를 쏘며 서로 경계하는 조치까지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미 호의로 대하자고 말하고서도 한바탕 이런 사단이 있게 되었으니 매우 개탄할 노릇입니다. 

귀선이 오고부터 연해의 관리들과 무관들에게 절대로 사단을 일으켜 사이가 나빠지게 하지 말라고 경계하여 타일렀습니다. 그렇지만 귀선이 다른 나라의 규례를 아랑곳하지 않고 요새지 어구까지 깊이 들어온 이상 변경을 방비하는 신하들로 말하면 그 임무가 방어인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일에 대해 괴이하게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혹시 북경 예부에서 우리의 회답 자문을 미처 전하지 못하여 귀 대인이 우리나라의 제반 사정을 잘 알지 못하여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닙니까? 이제 회답 자문 부본을 보내니 한번 보게 되면 남김없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외국과 서로 교통(交通)하지 않는 것은 바로 500년 동안 조종(祖宗)이 지켜온 확고한 법으로서 천하가 다 아는 바이며, 청나라 황제도 옛 법을 파괴할 수는 없다는 데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귀국 사신이 협상하려고 하는 문제로 말하면 어떤 일이나 어떤 문제이거나를 막론하고 애초에 협상할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높은 관리와 서로 만날 것을 기다리겠습니까? 넓은 천지에서 만방의 생명들이 그 안에서 살면서 다 제대로 자기의 생활을 이루어가니 동방이나 서양은 각기 자기의 정치를 잘하고 자기의 백성들을 안정시켜 화목하게 살아가며 서로 침략하고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니, 이것은 바로 천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혹시 그렇지 못해서 위로 하늘을 노하게 한다면 더없이 상서롭지 못할 것입니다. 귀 대인이 어찌 이 이치를 모르겠습니까? 풍파만리에 고생하였으리라 생각하면서 변변치 못한 물품으로 여행의 음식물로 쓰도록 도와주는 것은 주인의 예절이니 거절하지 말고 받아주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하니, 양함(洋艦)에서 회답하기를,【22일에 온 것이다.】

 

          대아메리카합중국[大亞美理駕合衆國〕 찬리(贊理) 흠차(欽差)인 영어, 한어 문건을 맡아보는 총판두(總辦杜)는【이름은 덕수(德綏), 중국인이다.】 회답합니다.

며칠 전에 군주가 파견한 우리나라 관리에게 보내온 공문과 대청(大淸) 나라 예부(禮部)에 회답한 자문 부본에 대해

다 같이 군주가 파견한 우리 제헌(提憲)에게 전하였으며 명령을 받들어 이렇게 회답합니다.

당신들에게서 온 편지에서 언급한 내용에 의하면 귀 조정이 우리나라 군주가 파견한 관리와 그가 와서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에 대하여 우의를 가지고 협상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군주가 파견한 우리 제헌이 매우 안타까워하는 문제입니다. 까닭 없이 공격한 문제에 대해서는 잘못을 책망하지 않고 도리어 비호하면서 변경을 책임진 신하의 직책으로서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제헌은 원래 포를 쏜 행위는 군사와 백성들의 망동에서 생긴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귀 조정에서 이것을 알고 꼭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높은 관리를 파견하여 협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서둘러 행동하지 않고 기일을 늦추어가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만일 귀 조정에서 3, 4일내에 만나서 협상할 의사가 없이 기한이 되기만 기다린다면 전적으로 군주가 파견한 우리 제헌이 처리하는 대로 할 것입니다. 기일이 매우 촉박하므로 대략 이와 같이 적습니다.

보내준 많은 진귀한 물건들을 받고 은혜와 사랑을 충분히 알 수 있으며 무엇이라 감사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보내온 예물을 돌려보냅니다. 이와 같이 회답합니다.” 하였다.

 

 

4월23일(음)/6월10일(양)          출전한 군사, 포병 등을 위로하여 먹을 것을 제급하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출정(出征)한 군사들과 각 해당 고을의 포병(砲兵)인 경우에는 위로하여 먹여주었지만, 그들의 부모와 처자의 생활 또한 곤란하다. 서울의 군사는 각 해당 군영에서, 지방의 군사는 각 해당 고을에서 미(米)와 육(肉)을 넉넉히 제급(題給)하도록 삼군부(三軍府)에서 행회(行會)하라.”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방금 진무사(鎭撫使)의 장계(狀啓)를 보니, 전 중군(中軍) 조상준(曺尙俊) 등이 군수물자를 바치겠다고 하였다. 이런 때에 의리를 내세우는 것은 특별히 가상한 일이니 뜻을 보이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군부로 하여금 군사들이 돌아온 다음에 상을 주고 등문(登聞)하게 하라.” 하였다.

 

 

4월24일(음)/6월11일(양)          강화도를 서양인들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군사들을 동원시키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양이(洋夷)들이 초지진(草芝鎭)에 갑자기 침입한 데 대해서는 어제 경기 감영(京畿監營)에서 치계(馳啓)가 있었습니다. 심부(沁府)의 해상과 육지에 대한 비상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서북면(西北面)의 별부료군(別付料軍) 70인(人)에게 활과 화살을 갖추어 주고, 해당 병방 승지(兵房承旨)가 영솔하여 즉시 내려오도록 하며, 별초군(別抄軍) 1초(哨)는 초관(哨官)이 영솔하고 밤낮을 가리지 말고 싸움터로 나가게 하고, 군향미(軍餉米) 1,000석(石)에 대해서는 또 태창(太倉)에서 급히 내려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심부에 내려 보낼 별초군 1초를 방금 선발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1초의 군사들도 모두 의기충천하여 저마다 앞을 다투어 함께 갈 것을 원하므로 힘으로는 막아낼 수 없습니다. 그들도 다 같이 동원시켜 힘을 합쳐 함께 가서 돕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4월24일(음)/6월11일(양)          서양인들과 광성진에서 교전하였으나 아군이 이기지 못하고 광성진을 잃다

 

          진무사(鎭撫使) 정기원(鄭岐源)이, ‘통진(通津)의 진지에서 보고한 내용 중, 「적의 괴수가 북쪽으로 대모산(大母山) 꼭대기에 올라가면서 육지로 대포를 실어다가 앞에서 길을 인도하며 마구 쏘아대고 소총으로도 일제히 쏘아댔습니다. 그리고 미시(未時)에는 적의 괴수가 광성진(廣城津)으로 꺾어 들어가서 성과 돈대(墩臺)를 포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광성진에서 일제히 조총을 쏘아대어 한바탕 혼전을 벌였는데 한참 뒤에 광성진은 붕괴되고 적들이 광성진의 위아래 돈대를 차지하였습니다. 덕진(德津)에 정박하고 있던 적선(賊船)도 광성진을 향하여 기동하므로 손돌목〔孫石項〕 남성두(南星頭)에서 연이어 대포를 쏘니 적선도 그대로 닻을 내리고 대포를 무수히 난발하여 손돌목의 성이 거의 파괴되었습니다. 적들은 광선진을 탈취하고 그곳 진사(鎭舍)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벙거지를 실어갔습니다. 그리고 손돌목을 내려다보니 성안에서도 대포를 쏘았습니다.

바다와 육지로 공격해오니 적은 수의 군사가 의지하여 무기를 사용할 곳이 없었고, 좌우가 이미 서로 의탁할 형편이 못된 조건에서 막아낼 길이 전혀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덕포진(德浦鎭)에다 진지를 옮겼습니다.」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4월24일(음)/6월11일(양)          광성진의 사정을 보고받다

 

           ‘오늘 오시(午時)쯤에 광성진(廣城津)에 주재하면서 양곡을 맡아본 담당아전 전용묵(田容默)이 급히 와서 한 보고 내용 중, 「오늘 묘시(卯時)에 서양놈들 4, 5백명(名)이 덕진진(德津鎭)으로부터 곧장 광성진에 침입하였으므로 중군(中軍)이 어영군(御營軍)과 본 군영의 별무사(別武士)들을 동원해 보내어 중도에서 방어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양선에서 쏘아대는 대포알은 비 오듯 날아왔고, 육지의 적들이 쏘아대는 조총알은 우박 쏟아지듯 마구 떨어졌습니다. 좌우로 적들이 달려드는 바람에 우리 군사들은 막아내지 못하여 선두 부대가 곧 패하게 되었고, 뒤의 부대도 이어 패하였습니다. 서양놈들은 이 기세를 타서 곧바로 올라와 장대(將臺)를 포위하였는데 그 형세는 철통같았습니다.

우리 큰 진지에서의 대포소리는 여전히 끊어졌으니 지금 이때의 군사형세로 말하면 그 위험이 경각에 다달았습니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라는 뜻으로 각 파수장들에게 일제히 삼현령(三縣鈴)의 급보를 보내도록 지휘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4월25일(음)/6월12일(양)          경성과 각 도회지에 척화비를 세우다

 

          진강(進講)을 마쳤다. 하교하기를, “양이(洋夷)들이 우리의 영역을 침범한 것은 매우 통분할 노릇이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이 오랑캐들은 원래 사나운 만큼 그 수효는 그다지 많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세는 미칠 듯 날뛰며 계속 불리한 형편에 처한 보고만 오니 더욱 통분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 오랑캐들이 화친하려고 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수천 년 동안 예의의 나라로 이름난 우리가 어찌 금수 같은 놈들과 화친할 수 있단 말인가?

설사 몇 해 동안 서로 버티더라도 단연 거절하고야 말 것이다. 만일 화친하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나라를 팔아먹은 율(律)을 시행하라.”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우리나라가 예의의 나라라는 데 대해서는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일종의 불순한 기운이 온 세상에 해독을 끼치고 있으나, 오직 우리나라만이 유독 순결성을 보존하는 것은 바로 예의를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병인년(1866) 이후로부터 서양놈들을 배척한 것은 온 세상에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지금 이 오랑캐들이 이처럼 침범하고 있지만 화친에 대해서는 절대로 논의할 수 없습니다. 만약 억지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나라가 어찌 하루인들 나라 구실을 하며, 사람이 어찌 하루인들 사람 구실을 하겠습니까? 이번에 성상의 하교가 엄정한 만큼 먼저 정벌하는 위엄을 보이면 모든 사람들이 다 타고난 떳떳한 의리를 가지고 있는 이상 불순한 것을 배척하는 전하의 큰 의리에 대해 누군들 우러러 받들지 않겠습니까? 또한 저 적들이 이 소리를 듣는다면 간담이 서늘해질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오늘 경연(經筵)에서 한 이야기를 조지(朝紙)에 낼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종로(鐘路)거리와 각 도회지(都會地)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그 비문에, ‘오랑캐들이 침범하니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4월25일(음)/6월12일(양)          경기 중군 김선필을 진무 중군으로 임명하기로 하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진무사(鎭撫使) 정기원(鄭岐源)의 장계(狀啓)를 보니, ‘양이(洋夷)들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날뛰고 광성진(廣城鎭)이 이미 함락된 조건에서 심도(沁都) 일대가 대단히 우려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경기 중군(京畿中軍) 김선필(金善弼)을 진무 중군(鎭撫中軍)으로 차하(差下)하여 하직 인사는 그만두고 당일로 군사를 거느리고 진지에 나가게 해서 앞뒤에서 서로 호응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풍덕(豐德)은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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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노 15-03-01 06:50
   
조선왕조실록에서 고종실록은 사료적 가치가 낮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문화유산으로 인정하는 조선왕조실록은 철종까지예요.
zzag 15-03-01 15:31
   
실록은 왕의 사후 편찬위원회가 만들어져 통치기간중의 사료와 기록 일지 등을 취합하여 기록하게 됩니다.
고종이 승하한뒤가 일본의 영향권아래 들었을때라 고종말기 기록이 누락등의 영향을 받았을지는 모르더라도
세계기록유산에 든 일지(daily)형식의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디노 15-03-01 15:37
   
조선왕조실록이야 당연히 세계 최고의 기록물이죠...
고종실록과 순종실록만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가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할때는 철종실록까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고종, 순종 실록은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것이라 조선왕조실록으로 인정해 주지 않아요.
본문의 제목을 조선왕조실록의 신미양요가 아닌 고종태황제실록의 신미양요 기록이라고 해야 맞는 겁니다.
          
zzag 15-03-01 16:29
   
실록 홈페이지에 오기 수정까지 했던 제가 몰라서 그러는것이 아닙니다.
고종실록은 40여년 이상의 기록 중 말기의 일제침탈과 관련된 부분이 편찬에 간여했던 일인들의 영향을 받았을 공산이 크므로 별도로 취급하는 것이지 왕조실록이 아닌게 아닙니다.
말씀하신 고종태황제실록은 왕조실록중 각 제왕별 제목이 다 그렇게 나갑니다. 단, 제국칭호를 붙이기 전이라 황제 대신 대왕이 붙는게 다르죠.
               
디노 15-03-01 16:52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철종까지라고 규정하고 있어요.
유네스코에 등록된 것도 철종까지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 가치가 있는 것은 엄격한 규정에 의해 선발된 사관들이
매일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는데, 그걸 사초라고 합니다.
이걸 집에 가져가서 정리하죠...이 가장사초를 잃어버리거나 누구한테 새나가면 목숨을 내 놓아야 했습니다.
왕의 사후에 실록청이 서면 보관하고 있던 사초를 제출해, 여러 사초와 시정기 등을 종합해 실록을 만들었어요...
한데 고종, 순종 실록은 일제 강점기 때 재위했고, 춘추관이 폐지되어 없어졌을 때 일제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zzag 15-03-01 18:08
   
고종재위 초중반에 있었던 신미양요에 대한 조선의 공식기록이 고종실록이기에 왕조의 실록으로서 조선왕조실록으로 언급한거지 고종실록이 왕조실록으로써 적자냐 서자냐를 따지려고 언급한것이 아닙니다.
제가 작성할 글의 1차사료로 쓰기위해 1871년 음력 4월6일부터 5월26일까지의 그 많은 기록들을 제가 직접 일일히 확인하고 정리해서 그 중 신미양요 관련자료들만 발췌정리한 자료이기에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제가 더 잘알지 않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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