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모순되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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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이 한반도에?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6323&sca=&sfl=wr_name%2C1&stx=%EA%BC%AC%EB%A7%88%EB%9F%AC%EB%B8%8C&sop=and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을까?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6298&sca=&sfl=wr_name%2C1&stx=%EA%BC%AC%EB%A7%88%EB%9F%AC%EB%B8%8C&sop=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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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을 보면 아시겠지만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모순되는 기록이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 한사군의 위치는 어디일까요? 일단 저는 한사군의 위치를 찾기 전에 만리장성의 위치를 알아보자 합니다.
<만리장성 지도>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길이는 지도에서 보시다시피 자위관에서 산해관까지 총 6352km입니다. 그리고 지도를 보시면 또 아시겠지만 중국은 2009년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만리장성의 길이를 계속 늘리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중국에서 발표된 만리장성의 길이는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길이의 거의 4배가 됩니다. 과연 중국의 발표처럼 만리장성의 길이가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길이의 거의 4배가량 길었을까요...
참고로 만리장성의 동쪽끝은 북경 인근에 있는 갈석산으로 알려져 있으나 명나라 서달장군때 산해관까지 중축이 됩니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 산해관>
갈석산이라...갈석산은 진시황과 한무제를 비롯해서 9명의 황제가 올랐다는 유명한 산입니다.중국 공산당 간부의 여름휴양지로 유명한 북대하가 이 근처에 있죠..그리고 이 갈석산 근처에는 갈석궁이 있는데 이 갈석궁은 진시황재위32년에 와서 세웠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이 갈석궁 인근 바닷가에는 맹강녀동상이 있는데요 이 동상에는 얽혀진 전설이 있습니다.. 이 전설은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나오는데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면
<열하일기 강녀묘기>
강녀(姜女)는 성이 허씨(許氏) 이름이 맹강(孟姜)이며, 섬서(陝西) 동관(同官) 사람이다. 범칠랑(范七郞)에게 시집갔는데, 진나라 장군 몽염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 남편이 부역하다가 육라산 밑에서 죽었다. 남편이 아내 맹강의 꿈에 나타났다. 맹강이 손수 옷을 지어 혼자 천 리를 걸어 남편의 생사를 탐문했다. 두루 다니다가 여기까지 도착해 쉬며 장안을 바라보며 울다가 이내 돌로 변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맹강녀전설은 송나라시기 문천상이 쓴 시에도 나옵니다
秦皇安在哉 萬里長城築怨/ 姜女不死也 千年片石留貞
진시황은 어디 있나? 만리장성엔 원망이 쌓였네./ 강녀는 죽지 않아 천년 조각돌에 정절을 남겼네
위 전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만리장성 건설에 민초들의 원망과 죽음이 쌓였다는 것이죠.. 그릇된 정치와 전쟁으로 인한 가족 이산과 사별의 아픔은 늘 민초의 몫이죠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더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만리장성이 중국의 발표처럼 압록강 중류 혹은 흑룡간 무단장이였다면 강녀가 갈석궁 인근 바닷가에서 죽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이처럼 만리장성의 끝이 갈석산 또는 산해관이였다는 것은 쉽게 반박이 가능합니다.. 또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갈석산이라는 것은중국측 사료에도 나옵니다.
갈석산의 여러 암벽들 중 하나입니다. 갈석이라 크게 써져있네요
<수경-하수주> 始皇令太子扶蘇與蒙恬築長城,起自臨洮,至於碣石
진시황은 태자 부소와 몽염을 시켜서 장성을 축조하게 하였다. 임조에서 시작하여 갈석에 이르렀다.
중국의 고대 역사서인 수경을 보면 아시겠지만 고대 장성은 임조에서 시작해 갈석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사기의 기록을 보면
<사기> 始皇二十六年,使蒙恬將三十萬眾北逐戎、狄,收河南,築長城,因地形用險制塞,起臨洮至遼東,延袤萬余里
진시황 26년, 몽염을 시켜 30만명을 이끌고 북쪽에서 융과 적을 내쫒고, 하남을 회복하게 하였으며, 장성을 축조하게 하였다. 지형을 따라 험준한 곳에 요새를 세워 임조에서 요동에 까지 이르렀으며, 전체 길이가 만여리였다
사기의 기록을 보면 장성이 임조에서 시작됬다는 것은 일치하나 갈석과 요동이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일까요? 사기의 기록을 계속 살펴 보면..
<사기> 太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 又水經云在遼西臨渝縣南水中.
태강지리지에 전하기를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장성이 여기서 시작한다" 또 수경에 전하기를 “요서 임유현 남쪽 물에 있다
음? 방금은 분명이 임조에서 요동까지라 했는데 이번에는 또 갈석산까지라고 하네요.. 같은 책에서 장성의 동쪽 끝을 서로 다르게 서술했을까요? 아니요... 그런 정황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기록으로 유추해볼때 갈석산 = 요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난하요수설의 증거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근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갈석산이 바로 낙랑 수성현에 있다고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죠.. 그렇다면 낙랑은 만리장성 동쪽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걸까요? 다른 기록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통전-고구려전> 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한다. 지금 장성의 동쪽 끝은 요수를 넘어 고구려로 들어가는데, 그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진서지리지> 樂浪郡, 漢置. 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 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 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1)朝鮮縣 - 周封箕子地,...4)遂城縣- 秦築長成之所起
낙랑군, 한나라에서 설치하였다. 6개의 현을 다스린다. 가구수는 3700이다.
1) 조선현,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땅이다. 2,3 생략 수성현 -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진서-당빈전> 復秦長城塞, 自溫城洎于碣石, 綿亘山谷且三千里
진장성(만리장성)의 요새를 온성에서부터 갈석까지 3천여리를 수리했다.
위 기록들 모두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갈석산이 낙랑 수성현에 있다고 합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여 볼 때 낙랑의 위치는 만리장성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러면 한가지 더 의문점이 생깁니다. 현 우리나라 주류사학계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왜곡된 만리장성 지도>
바로 만리장성의 길이를 늘려 왜곡하는 것입니다. 만리장성의 길이를 동쪽으로 쭉 늘리면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노태돈과 송호정을 포함한 주류사학계들을 현재의 만리장성은 과거 진나라 떄의 만리장성이 아니며 훨씬 먼 지역까지 뻗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현 중국의 동북공정의 빌미가 되어 중국은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으로 만리장성의 길이를 늘려 왜곡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심각하죠 애초에 진나라의 만리장성이 그렇게 길었다면 명나라시기 만리장성을 다시 복원할 떄 뭐하러 산해관까지만 증축,복원시키겠습니까.. 당시 정황을 보면 전혀 알 수 없는 대목입니다.
과연 진나라의 만리장성은 중국의 발표처럼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길이의 거의 4배가 되었을까요??
글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