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비문에 보면 비려란 이름으로 거란이 등장하는데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유목을 하던 종족으로 추정됩니다.
(비문상에는 부산, 부산 한자로 적어야 하는데 귀찮아서 그냥 동음이지만 별개의 지역인
부산, 부산을 지나 유목과 약탈을 하는 종족으로 그려짐)
이들 비려가 고구려 변방에 나타나 고구려변망민 만여명을 빼앗아가자
광개토태왕이 친히 복수하기위해 고구려군을 이끌고 본거지를 친후
비려의 수많은 소,말,양떼를 빼앗아왔다는 기록이 있죠.
비문 속 비려는 고구려에 속민이라 불린 동부여 백제 신라와는 달리
그저 말안듣는 이민족이나 고구려 세력하에 두려하는 대상으로 그려집니다.
따라서 당시 고구려인들은 비려를 동족으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해볼순 있습니다.
다만, 고구려 멸망시까지 고구려가 거란을 자신의 휘하에 묶어두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게
사실이었죠.
제1차 고수전쟁의 발발원인도 요서지역에 있던 거란족에 대한 영유권을 두고 고구려와 수나라가
충돌한게 큰원인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계속 이어진 고수 고당전재에서 거란족은 고구려의 변병으로서 상당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고.
계속되는 당나라 침공으로 거란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이 쇠퇴하면서
거란족중 일부는 당나라에 붙어 고구려군을 공격하고
나중엔 나당전쟁에도 당나라의 기병전력으로 참전하여 한반도 깊숙히 들어와 삼한사람들과
싸우기도 했죠.
이후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각각 거란영역안에 있던 영주땅에서 고구려유민과 말갈족들을
이끌고 옛 고구려땅으로 회귀할때 고구려인과 말갈족은 하나로 뭉쳐 한 나라를 건설했지만
거란족과는 어떠한 종족적 유대를 보였다는 기록은 전무합니다.
따라서 삼국시대에는 거란족을 동족으로 여겼다느니 하는것은 근거가 희박한 과대망상적 주장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일단 거란족은 고구려인들 입장에서 자신들과 동류로 보기보다는
지배하고 활용하는 피지배종족으로 여겼다고 보는게 더 정확할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