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바님이 거듭하여 진(4세기) 시대에 낙랑군이 진황도 지역으로 교치되지 않았고 모용선비의 동쪽에 있었다는 댓글을 다셨기에
1. 진서 지리지와 태강 지리지는 동일 시대 지리 정보를 담고 있다 즉 태강 지리지는 태강 연호가 붙었다고 하여 3세기 말 지리정보를 담은 게 아니라는 말
2. 진서 지리지와 태강 지리지의 낙랑군 기술에 전대 사서에는 없던 갈석산, 진장성 정보가 삽입되었다 즉 낙랑군이 이 일대로 교치되었다는 뜻
ㅡ 그런데 삼바님은 북위 시절의 교치정보가 진서/태강 지리지 기술에 역산된 것이라고 주장
3. 위가 공손씨를 고구려와의 협공으로 깨뜨리고 그 관할지역을 호동이교위로, 또 군국으로 개편하였고 진이 그것을 계승
4. 그런데 공손씨가 거세되자 그 자리에 모용씨가 난입하여 세를 잡음
5. 낙랑군을 위시한 옛 한군현 인구와 그 속현의 수가 위진을 거치며 급격히 줄었고 북위/수 시대에 이르면 대부분 폐지되거나 지리멸렬해짐
6. 장통이 왕준의 설득으로 모용씨에게 낙랑 1,000여 호를 데리고 귀부했다고 자치통감은 적고 있으나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는 모용씨의 장수 장통이 고구려를 침략하여 고구려인 1,000여 호를 빼앗아 데리고 가서 모용씨에게 붙인 것으로 나타난다
ㅡ 즉 낙랑 사람 장통이 낙랑주민 1000여 호를 데리고 고구려를 뚫고 1천 수백 리를 이동한 것이 아니라 저 1000여 호는 모용씨 장수 장통이 고구려를 침략해 빼앗은 고구려 주민들
[미천왕 20년(서기 319)
겨울 12월, 진(晉)나라 평주자사(平州刺使) 최비(崔毖)가 도망쳐왔다. (그후 최비가 단씨, 우문씨, 고구려와 함께 연의 극성을 공격하려다 실패) 우리나라 장수 여노(如孥)가 하성(河城)을 막아 지키고 있었는데, 모용외가 장군 장통(張統)을 보내 공격하여 그를 사로잡고, 그 무리 천여 가(家)를 포로로 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임금은 자주 병사를 보내 요동을 침공하였다. 모용외는 모용한(慕容翰)과 모용인(慕容仁)을 보내 우리를 치게 하였는데, 임금이 동맹을 구하자 모용한과 모용인이 곧 돌아갔다.]
7. 고구려는 낙랑군을 축출한 적이 없음 미천왕은 낙랑군 주민을 빼앗아 왔지 거기를 점령하여 차지하지 않았음 311 년 서안평은 '빼앗았다'라고 적고 있다 즉 빼앗은 것과 깨뜨린 것, 약탈한 것 등을 분명히 구분하여 적고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