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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시중에 알려진 박상희의 대구폭동 관련 혐의에 대해서는, 주로 박정희의 작은 누이 즉, 박상희의 여형제인 박재희가 한 말이 전해져 온다. 경찰가족을 피신시켜 주었는데 나중에 대치가 해지되고 난 후 박상희가 경찰을 도와준 줄 몰랐던 다른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만 읽으면, 박상희는 마치 의인인 일을 하였다가 오인저격 당한 걸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또, 박상희가 죽은 후 남로당이 결성되었기에 박상희는 남로당과 관련없고 단지 여운형에 연결된, 온건민족주의자 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오늘은 이런 시중에 나도는 이야기가 얼마나 착각인지를 당시 대구폭동의 전후 및 남로당의 발기문 작성일 등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1945년 소련은 북한에 11개 사단(최대 20여만명?)을 진주시킨 이래 그해 10월 대규모 평양대회(10.14)를 통해, 조만식의 소개를 통해 김일성을 새로운 북한의 지도자로 그 인상을 확고히 내세웠으며, 이어 조만식에게 정당창당을 독려하였고 이에 속아넘어간 조만식이 11월3일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자 바로 그 이틀 후, 조만식의 수족같았던 현준혁을 저격, 살해하고, 조만식은 구금하면서 조선민주당은 자동적으로 북조선노동당 산하로 들어갔다. 1946년2월에는 김두봉 등 연안계가 주축이 되어 시작된 조선신민당도 창당, 외견상으론 -- 미국의 의혹불식을 위해 -- 민주체제의 기본인 다당체제를 갖춘 듯 했으나 이면은 철저한 일당독재와 북한전역에 공산독재체제 확립에 들어갔고 그조차 그 해 9월 북조선노동당으로 합당하게 되었다.
1946년10월29일 대구치안총사령관 한종건에 의해 발표된 경북지역 반란 전모에 의하면, 경북지역에서 가장 폭동이 심했던 지역 중 하나에 박상희가 활동하던 선산을 꼽았다. 한종건은 경찰대를 데리고 3일에 파견 나왔으며 그가 왔을 때도 폭동은 확산중이었고 6일에서야 경북도내 경찰서를 겨우 수복하였다고 하였다. 박상희가 있던 선산이 5일에 치안회복된 것으로 볼 때,박상희의 선산은 가장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지역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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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말, 김정일장군은 약속 대부분 지키는 믿을 만한 파트너>
박근혜는 27일 서울 외신기자클럽 기자회견에서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언급을 해 눈길을 끌었다.
박근혜는 이날 회견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믿을 만한 협상대상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지난 2002년 5월 탈당하여 미래연합당 창당 중 방북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여러가지 약속을 한 사항이 있었다"면서 "이산가족상봉 상설면회소, 국군포로 생사확인문제, 남북 축구대회 등 약속이 거의 다 지켜졌고, 약속을 지키려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께서 상당히 노력했다"고 답변했다.
2002-5-14일 박근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받은 인상은 매우 긍정적이었다고 말하고 한국미래연합 창당준비위 사무실에 가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인상을 묻는 질문에 "대화하기 편했다"라며 특히 "내 제의에 대해 시원시원하게 답변했다"고 밝혔다.
박근혜는 이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전달한 '선물' 내용도 공개했다. 그는 "김정일 위원장이 'it분야'에 관심이 남다르다고 해서 우리나라에 개발한 최첨단 비디오기기를 선물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판문점 귀환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제안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자랑하였다.
박근혜는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경우 ‘북한판 마샬플랜’이라고 할 만한 대담한 인센티브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방미중인 박근혜는 현지시각으로 18일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가진 연설을 통해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경우 얼마나 미래가 희망적인가를 보여줘야 한다”며 “북한 경제 재건을 위해 북한판 마샬플랜이라고 할 만한 대담한 인센티브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근혜, 김정일 면담 앞서 “가슴이 뛰었다”
[‘박근혜 방북기’를 읽고서] 적절히 감추고 적절히 드러낸 주마간산식 ‘북한 인상기’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의 2002년 ‘방북’ 건을 놓고 정치권 안팎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북한’이라면 앞뒤 안가리고 적대시부터 하는 보수진영에서 보자면 박근혜 의원은 ‘적국’을 방문해 ‘적국의 수괴’와 만나 ‘비밀회담’을 하고 왔기 때문이다. 대략적인 일정 등은 알려진 바 있지만 박근혜-김정일 두 사람의 ‘비밀회담’은 구체적인 발언내용 등 전모가 일반에 공개된 바는 없다. ‘보수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박 의원의 방북은 ‘종북좌파’ 의원 제명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문제가 될 만도 하다.
박근혜 의원은 방북하고 돌아와서 ‘방북기’를 남겼다. 이 ‘방북기’는 현재도 박 의원 공식 홈페이지(http://www.parkgeunhye.or.kr/Site/) 고스란히 실려 있다. 이 ‘방북기’는 그가 북한에서 돌아온 지 이틀 뒤인 2002년 5월 16일 00시 00분에 입력한 걸로 돼 있다. 홈페이지 안내문에 따르면, “박근혜 의원이 방북기간에 체험한 분단의 현실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에서 느낀 소회 등을 피력한 방북기”로 “박 위원장이 15일 오후 <연합뉴스> 기자에게 상세히 구술하였는데, 그 내용을 토대로 연합뉴스에 게재된 기사내용”이라고 한다.
박 의원의 방북기는 지난 3일 박용진 민주통합당 대변인이 ‘논평’을 통해 박 의원의 ‘국가관’을 거론하면서 인용해 새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박 대변인은 박근혜 의원을 향해 “박근혜 의원은 두 가지로 우리 국민을 불안을 주고 있다.”며 말문을 연 뒤 “2002년 방북 당시 했었던 행적에 대해 뭔가 깔끔하지 못한 해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만경대에 갔고 왜 주체사상탑에 방문하였는지에 대해 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경대’는 김일성 주석의 생가가 있는 곳이며, ‘주체사상탑’은 북한의 주체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만든 세계 최대의 석탑이다.
박 대변인은 3일 논평을 내면서 본문 하단에 박 의원의 ‘방북기’ 일부를 캡쳐 해서 실었다. 여기에는 “오찬 뒤 `평양 8경'중 2경이 있는 모란봉과 김일성 주석 생가가 있는 만경대 관광길에 나섰다.”는 내용이 분명히 보인다. 그런데 박 의원 홈페이지에 실린 ‘방북기’ 하단에는 ‘관리자 주’를 통해 박 의원이 만경대에는 들르지 않았다고 해명하고 있다. 내용인즉, 박 의원의 구술을 기록하던 연합뉴스 기자가 잘못 받아 적어 이를 수정했는데 관리자가 수정본 대신 고치지 않은 원본을 퍼와 그리 됐다는 것이다. 수정일자는 ‘2006. 11. 7’로 나와 있다. 해명글 전문은 다음과 같다.
(* 관리자 주 : 위의 내용 중 논란이 되었던, “오찬 뒤 ‘평양 8경’ 중 2경이 있는 모란봉과 과 김일성 주석 생가가 있는 만경대 관광길에 나섰다.”라고 되어있던 기사는 잘못 작성되었던 기사였습니다. 기자에 의해 당일 수정되었던 (수정)기사의 내용으로 수정하였습니다. 관리자가 처음 작성되었던 기사를 그대로 인용하였는데, 수정된 기사의 내용을 반영하지 못해 논란을 제공한 점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2006. 11. 7)
“이번 북한 방문을 앞두고 많은 기대와 설렘이 교차했다.”로 시작하는 ‘박근혜 방북기’는 별 특이사항은 없다. 그냥 순차적으로 일정을 따라 소개하였고, 방문한 곳에서 느낀 소감과 풍경등을 스케치 식으로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비밀사항이 될만한 내용이나 처음 듣는 얘기는 하나도 없다. 물론 그런 내용은 구술을 정리한 <연합뉴스> 기자가 1차로 거르고, 2차로 <연합뉴스> 데스크가 거르고 또 3차로 박 의원 주변에서도 외부공개 전에 모니터를 했을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김정일 위원장과의 ‘밀담’ 같은 건 전혀 언급돼 있지 않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1946년 미군정 산하의 국방경비대에 입대 1946년 선산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인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 대구10.1사건 때, 미군정하에 식량란에 시달리던 2000여명의 군중과 함께 구미경찰서를 습격한 후 모든 기능을 '인민위원회'로 이양하라고 요구 및 무기탈취, 선산 면사무소 습격, 135가마 양곡 탈취, 선산 군청 습격, 선산 요인집들 파괴, 지원경찰에 쫒겨 도주 중, 경찰 총격에 사살당함, (10월 6일 오전)
1946년 사살당한 셋째 형 박상희에 뒤이어 남로당원이 됨(남로당 총책 이재복에 의해) 1948년 남로당 주도로 발생한 여순반란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 군내 적색분자 색출작업 전개 체포된 남로당 총책 이재복의 비서 겸, 군사연락책 김영식으로부터 박정희 소령이 남로당 이라고 지목되어 육군본부 정보장교로 근무하던 '고정간첩' 박정희 체포 (11월11일)
'사상논쟁'의 시작
1963년 10월 13일. 육군대장 출신의 박정희 후보가 좌익혐의로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는 내용의 ▶동아일보 호외 200만장 발행과 배포 윤보선 후보측 2개의 증거자료 제시. 1949년 2월 17일자 경향신문과 1949년 2월 18일자 서울신문의 "박 후보가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은 사실을 소개한 기사" 자체적으로 입수한 '군사재판 관련 문건' "피고인은 단기 4279년(1946년) 7월경부터 4281년(1948년) 11월경에 이르는 동안 대한민국 서울 기타 등지에서 각각 남로당에 가입하고 군 내에 비밀세포를 조직하여 무력으로 합법적인 대한민국 정부를 반대하는 반란을 기도"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사상논쟁 시작은, 당사자이자 사상논쟁의 불을 지핀 박정희 그였다.
미국정부의 극비문서
박정희의 공산당 활동은 미국에서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아래는 최근에 비밀해제가 된 문서내용입니다.
미 메릴랜드주 소재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된 이 자료는 이제까지 나온 문서중 5.16 주체세력들의 좌익 전력을 가장 광범위하고 집요하게 추적한 것으로 평가된다.
수신 : 힐즈먼
발신 : 마샬 그린
주제 : 한국
본 건은 대한민국 군사정부 내 공산주의자의 영향력에 관한 그렉 헨더슨의 연구 초안입니다.
남한에서는 1947년 말에서 1948년 초까지 남로당 최고 사령부가 활동했다.
남로당 공산주의자들 중 이주하, 김삼룡과 긴밀한 관계에 있으면서 동일한 서열의 최고위간부로 이중업(李重業)이 있었다.
그는 서울대 법대 재학 중이던 1933년에 공산주의 활동으로 제적되었다.
그 후 이중업은 박헌영, 이주하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활동했고 해당 기간(47년말-48년초)동안에는 남로당의 조직부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가 지휘한 작전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한국 국방경비대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던 1945년에서 1948년 9월 사이 이 조직에 침투한 것이었다.
1948년 10월 19일에서 27일에 여수-순천 반란을 일으킨 건 이들이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1948년 4월에 제주도 제9연대에서 처음 발생한 소규모의 전복기도를 비롯해, 1948년 11월 2일에 발생한 대구 제6연대 사건,
1948년 10월 20일에 발생한 제4연대 사건, 1948년 11월에 발생한 대전 제2연대 사건에도 개입했다.
이 사건들의 결과, 많은 장교들이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처형당했으며, 많은 장교들이 여수 순천 반란에서 목숨을 잃었고박정희가 정체를 드러내고 1950년(1948년의 잘못인 듯) 11월에 체포된 것은 이들 사건들, 특히 여수 순천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작성한 한국 정부 전복 도표를 본 어느 한국군 장교는 거기에 박정희의 이름이 주요 군 장교로 나타나 있더라고 회상했다.
여수 순천 사건과 그 뒤를 이은 수사 결과 박정희 조직은 김창룡 중위(나중에 중장으로 진급)에 의해 전모가 드러나게 된다. “독사”란 별명을 가지고 있던 김창룡은 맹렬한 반공주의자로 일본군 시절에 헌병 사병을 지냈고, 그 자신 역시 육군 사관학교 제3기생이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생도들에게 접근하는 수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박정희는 1948년 11월에 체포되어 광범위한 조사를 받고 김창룡 수사대의 주무기인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1949년 2월에 열린 군법회의에서 박정희는 죄의 심각성에 근거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박정희는 자신이 참회했으며 사면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증거로 자신이 맡고 있던 조직망을 폭로하겠다고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그가 직접 폭로한 사람의 숫자와 신원은 현재 알려져 있지 않지만, 1000명이 넘을 것으로 보이며, 그 중에는 그의 부하 장교들도 있었다.
자신의 체포가 바로 조직 지도자(박정희)의 배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은 다른 사람을 폭로했고,그들은 또 다른 사람을 폭로했다.
박정희에 대한 보상으로 채병덕 참모총장과 정일권 부참모총장, 특히 G-2(정보국)의 백선엽 장군은 박정희 구명을 탄원했고, 그 결과 박정희는 징역 10년으로 감형을 받고 군복을 벗었다.
박정희는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됐으며, 그 후 백선엽 장군은 박정희를 G-2 분야의 문관으로 고용했다
그러나 과거 엄청난 공산당 음모를 꾸미었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부하에게 고문과 죽음을 안겨준 그의 성격 역시 드러났다.
음모에 깊이 관여한 사람들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박정희 한 사람 뿐이었지만,박정희는 그 음모를 주도한 실질적인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박정희 형 박상희는 대구 경북 남로당 총책으로 빨치산 활동 하다가 경찰에 쫒기다 결국 경찰 총에 맞아 뒈진다.
대구는 일제강점기, 해방정국 미군정기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릴만큼 사회주의, 공산주의운동이 왕성하던 곳이었다
조선공산당에서 주도하여 9월 총파업을 전개했을때, 대구에서는 전평 지도부에서 9월 23일부터 총파업에 돌입, 10월 1일까지 파업과 시위가 계속되었다.[8] 10월 1일 대구지역에서 노동단체들이 모여 메이데이 행사를 개최했다.
노동자들이 시내에 집결하기 시작했고 굶주린 일반 시민들과 학생들도 시위에 합세했다. 만여명의 군중에 포위된 대구경찰서장은 스스로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유치장 열쇠를 건네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하게 했다. 조선공산당 지도부의 통제를 받는 노동자들은 질서 있게 경찰권을 인수하려 했다
분노한 군중들은 폭도로 변했다. 군중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동향을 살피던 정사복 경찰관들을 구타하거나 경찰 무기고를 털어 총기로 무장했다
군중들은 부잣집과 가옥을 털어 생필품이나 식량등을 약탈
미군정은 이튿날인 10월 2일에 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그러나 미군 개입으로 시위가 대구 인근인 경산군, 성주군, 영천군 200만명
경상남도 함양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경상도 함양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같은반친구를 1년넘게 노예로 부리고 노예각서를 쓰게 한 충격적인사건입니다. 더욱 충격적인건 이미 범죄가해자가 2학년때에도 학교폭력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학교에서는 3학년때 피해학생과 가해학생을 같은반에 배정하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한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번 함양 노예각서 사건은 피해학생이 xx을 하려는 이상징후를 가족들이 눈치채면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총풍 사건(銃風事件)은 1997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당시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회창 측에서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당시 청와대 행정관등 3명이 베이징에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참사 박충을 만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휴전선 인근에서 무력 시위를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대구폭동과 박상희 - 인민재판을 유일하게 벌인 폭동지역
특히 1948년10월 경북일원에서 벌어진 각 지역 대폭동에서 유독 박상희가 지휘했던 선산이 '인민재판'이 유일
하게 벌어졌던 반란지역임에도
1946년10월29일 대구치안총사령관 한종건에 의해 발표된 경북지역 반란 전모에 의하면, 경북지역에서 가장 폭동이 심했던 지역 중 하나에 박상희가 활동하던 선산을 꼽았다
한민족 최대 인권유린 사건 경상도홀로코스트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형제복지원 사건, 알려진 것보다 더 잔혹하고 광범위…한국 정부가 조직적으로 은폐" AP통신
부산=AP/뉴시스】이수지 기자 = AP통신이 19일(현지시간) 1980년대 부산에서 발생한 형제복지원 사건 관련 정부 문건을 단독 입수해 당시 원생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확인한 결과, 복지원 내에서의 인권 침해가 이미 알려진 사실보다 훨씬 더 잔혹하고 광범위하게 벌어졌다고 폭로했다.
또 당시 정부 고위급 인사들이 형제복지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조직적으로 은폐했으며, 그 결과 지금까지 복지관에서 벌어진 성폭행과 살해 사건 등으로 처벌받은 사람이 없다고 지적했다.
AP통신이 만난 최승우(46) 씨는 14세 때인 1982년, 빵을 훔친 누명을 쓰고 경찰에 잡혀갔다. 최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AP통신과 인터뷰 중 흐느껴 울면서 당시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경찰은 취조 과정에서 최씨의 바지를 벗기고, 저지르지도 않은 절도죄 자백을 강요하며 담배불로 최씨의 생식기 주변을 지졌다. 그 후 최 씨는 남성 2명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한국 역사상 최악의 인권 유린이 벌어진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다.
경상도판 홀로코스트 극악범죄 경상도 정부-경상도 경찰 경상도 지역주민이 한통속 -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 제3회 ④ 욕망의 끝
[토요판] 커버스토리
형제복지원 대하3부작 제3회-박인근 출소, 그 뒤
박인근은 복지 시설을 최소로 유지하면서 수익 사업을 다각화하는 운영 방식을 정한다. 1996년 5월7일, 박인근은 이사회를 열어 법인이 소유한 전 재산을 매각하겠다고 밝힌다. “현재 법인 소유 대지 총면적 43만6816㎡(13만2136평)로 시가 기준 전체 금액은 379억3717만7000원입니다. 주례2동 239번지에 수익용 레저센터를 건립할 부지 3305㎡(약 1000평)를 제외한 전 재산을 정리하여 사회사업에 실질적으로 사용되는 목적용 재산과 실제적 수익성을 갖춘 수익용 재산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박인근의 의지는 1980년대부터 오스트레일리아(호주)를 오가며 보고 배운 것에서 나왔다. 그는 복지법인과 별개로 호주에서 개인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사업비의 출처는 확인되지 않는다. 1995년 6월22일 비상장회사인 잡스타운(JOB’S TOWN PTY LTD)을 사들여 레포츠센터와 실외 골프연습장을 운영했다. 회사가 소유한 부지는 2만3000평(7만9080㎡)으로 2013년 기준 공시지가는 220만달러(23억6000여만원). 박인근과 아내 임아무개(72), 딸과 사위가 돌아가며 대표를 지내다 2011년 1월10일부터 사위와 딸이 공동대표를 맡았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죗값은 제대로 치러야 한다. 그래야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다. 군사 정권 시절 형제복지원은 현실에 존재한 지옥이었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했다. 부랑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에게 그곳은 악마의 소굴이나 다름없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잔혹함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하지만 죄를 지은 이들에게 제대로 된 벌이 내려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형제복지원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박인근 원장 일가는 세간의 비난을 뒤로한 채 부활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시사저널은 복지 재벌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꼼수를 부리고 있는 형제복지원의 오늘을 취재했다.
군사정권 시절 천인공노할 만행이 자행된 ‘형제복지원’의 박인근 원장 일가가 부활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시사저널의 단독 취재 결과 이들은 부산시 기장군에 위치한 ‘실로암의 집’을 매각한 후 부산시 북구 덕촌동 산 30-1번지 임야(2만6087㎡)와 20-4번지 대지(1252㎡)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서를 지난해 4월 부산시에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두 필지 모두 2만7339㎡(약 8285평) 규모다. 실로암의 집은 형제복지원의 후신인 ‘느헤미야’(재단)가 운영하는 복지시설이다.
경상도 홀로코스트 부산 형제복지원 - 수사 중단 압박 받아'..형제복지원 비공개문서 첫 공개
1980년대, 부랑인을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장애인이나 고아들을 불법 감금하고 강제 노역시킨 것으로 드러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기억하시는지요. 최근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 지원을 규정하는 특별법이 국회에 상정되기도 했는데요. 오늘(4일) 형제복지원 피해자 대책위원회가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과거 문서들을 처음으로 공개했습니다. 당시 정부가 복지원 내부 상황을 알고도 덮으려 한 것 아닌가 의문이 제기되는 대목이 꽤 많습니다.
홍상지 기자입니다.
[기자]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대책위원회가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과거 문서들을 오늘 처음으로 공개했습니다.
[조영선/형제복지원 대책위 집행위원장 : 많은 사람들이 (형제복지원이) 과연 국가 책임이냐, 박OO 원장이 한 게 아니냐, 이런 근본적인 의문점을 갖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자료 공개와 토론회를 통해 밝히려는 건 이것이 '명백한 국가 책임이다'
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