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이순신 장군에 대한 번역글이 종종 올라왔었는데요. 이번 영상은 최근 자료로 지난 29일부터 시리즈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전체적인 스토리를 다루고 있는 유튜브 영상입니다. 주로 해외에 이순신 장군의 업적 위주로 소개가 되었다면, 이순신장군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들을 포함하여 전기 형식의 내용을 요약하여 만화와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개의 에피소드로 나누어져 있는데, 현재는 에피소드 2까지 영상이 올라왔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무관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좌절 그리고 에피소드 2에는 일본 침략의 서막에 대한 내용입니다.
(*번역 이후에 3편이 올라왔네요.)
댓글:
Extra Credits(영상 제작자) 이순신 장군: 역사상 가장 훌륭한 해군 장군. 그의 성공은 쉽게 오지 않았다.
Krisna Siv (kastle09) 나는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2 망할 거북선때문에 이순신 장군을 알고있어.
ㄴExtra Credits 너 그 게임에서 거북선이 실제보다 약하게 표현된거라는거 믿을 수 있니? 게임에선 실제보다 느리고 현측대포를 모두 없애버렸지. 왜냐하면 그 배가 어처구니 없이 강했기 때문이야.
ㄴ seiji fujii 맞아, 아마 그 시대가 유일하게 동양이 서양을 전쟁무기로 압도했던 유일한 시기일꺼야. 그 남자는 말그대로 무시무시한 철갑선을 만들어냈지.
ㄴ Krisna Siv (kastle09) 맹포격 하는 거북들... 믿을 수가 없군
erttheking 영상 요약:
그리고 이순신은 젠장할 또 이겨냈다.
ㄴ erttheking 와우, 어떻게 저 남자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거지?
ㄴ uanime1 그 전에 조선을 세운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는 시스템을 미리 구축해놓았기 때문이지.
ㄴ Ryan harrelson 이 시리즈의 마지막에는 이순신 장군은 단지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마스터 이가 될꺼야.
Yasashi Tsu-Kun (YasashiTsuKun) 마침내 마스터 이가 엑스트라 히스토리에 등장했군! 일본! 어서 침략해!
ㄴ Tyler van de Ven 기록에는 그가 다가오는 적들에게 외친 첫마디가 “당신의 실력은 형편없소(LOL 마스터 이 대사)”라고 해. 그리고 그는 순식간에 적들에게 다가가 적 무리를 한방에 날려버렸지.
ㄴ Pedro Gusmão 그가 그렇게 외쳤다는걸 믿지 않겠어
ㄴ Tyler van de Ven 그냥 가벼운 리그오브레전드 농담이야. 솔직히 이(Yi)라는 이름은 굉장히 명예롭고 열정적이며 성실한 남자라는 느낌을 줘. 그에대해 더 알고싶어.
ㄴ Pedro Gusmão 나도 그런 농담이란거 알아. 그래서 이가 그렇게 소리치지 않았을꺼라고 말한거야. 그 말에는 이가 스킬이 필요한 챔프라는 뜻이 함축되어있지.
ㄴ Ecthelion00 아쉽게도 동아시아 정치계엔 이 불후의 남자를 위한 자리가 없었지...
grfrjiglstan 정말 특이하게도, 한국은 일본이랑 정말 가까이있는데, 군사적으론 정 반대의 정책을 펴는 것 처럼 보여.
ㄴ Jh5kRadio 지리적으론, 맞아. 정말 가깝지. 하지만 왜 한국이 그 시대에 왜 은둔의 왕국(Hermit Kingdom)이라고 불렸을지 생각해봐.
ㄴ Marquis Forneus 그건 그렇게 특이한 일이 아냐. 가까이 있는 유럽 국가들이 얼마나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봐.
ㄴ Mustachewarfare 일본과 한국이 다른 큰 이유중 하나는 일본이 동아시아 무대에서 격리되 있었다는거야. 한국은 중국하고 엄청나게 가까웠고. 이시기에 한국의 가장 큰 위협은 일본의 해적들과 만주족이었어.한국은 침략의 위협을 덜기위해 중국과 강한 유대관계를 형성했지.
mountedantman10 내가알기로 그시대에 한국이 일본에 끼친 영향이 일본이 한국에 끼친 영향보다 훨씬 컸어. 한국은 일본의 주된 학구적 영감의 원천이었어. 사실 많은 일본 침략자들이 한국의 문화때문에 한국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두려움 가졌지. 그래서9000명이 넘는 침략자들이 일본을 배반하고 한국쪽으로 넘어왔던거야. 심지어 한국이 전쟁에서 지고있을 때도 말이지.
ㄴ paranoidude 맞긴 한데, 한국의 학문과 아이디어는 대부분 중국 철학에서 유래한거야. 한국은 중국의 것들을 자기것으로 만들었지만 어쨌는 중국 > 한국 > 일본순으로 문물이 전해진건 확실해. 일본 문화는 그래서 세 국가중에 가장 원래의 문화색이 옅고 차이가 많이 나지. 원래 문화가 필수적으로 안좋은점이 있다는건 아니지만, 그냥 내가 말하려던건 그렇다구.
ㄴ GreyWolfLeaderTW 북한은 아직 은둔왕국으로 알려져있지.
putridspit 좋아! 이 시리즈 주제가 드디어 동양으로 돌아왔구나! 난 동양 역사에 호기심이 진짜 많다구.
tenlosol 왜 항상 이런 위대한 사람들이 부정부패를 마주해야하는건지, 정말 안타까워. 그게 그들의 전설을 더 위대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어떡해야 세계가 덕있는 사람들이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변화할 수 있는거지?
mestre12 진정한 마스터 이야. 나는 LOL의 마스터 이가 조금이라도 이순신 장군의 컨셉을 따왔으면 좋겠어.
Nathan Robinson 이순신 장군이 해전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도 활약했다는게 인상적이야.
TheHunterWolf 이순신에게 경의를.. 이 남자는 터무니없이 대단해. 그의 결단력과 불굴의 끈기는 진정한 장군감이야.
NakMuayify 이거 대박 흥미로운데!
Yomiel Shields 정말 놀라워! 그가 어떤 전략을 썼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까? 한니발처럼 말이야!
ㄴ Extra Credits 물론이야, 에피소드 3과 4에서 진짜 천재적인 움직임을 볼 수 있을꺼야
ㄴ Dave Quinn 영상 제작자를 사랑해!!!!
Tenebris_Preatoraie “이녀석들 데리고 캐리하느라 등골이 다 휘겠어” – 이순신 장군
ㄴ juanma9511 이순신 장군은 최고의 도타 플레이어가 될 수 있을꺼야.
Kieron George 이런 젠장! 위인설(Great man theory; 리더쉽에 대한 이론중 하나. 리더가 된 사람에게는 천부적인 자질이 있다는 견해)에 대한 훌륭한 예를 찾고 싶다면, 이순신 장군을 보면 될꺼야!
Zachary Damascus “이순신장군, 넌 정말 훌륭한 일을 했어”
이순신장군: “내가 ‘다’ 했지!!!”
Finn El Humano 그는 전체를 캐리하다가 등골 아파서 죽었어. 진짜루.
ㄴ Tumble Butt / Styx on Fire 기묘하게도, 그는 심지어 그가 죽은 전투에서도 이겼어!
Remicas 도요토미 히데요시 “자, 한국을 통해서 중국 정복하러 쳐들어가자! 무슨 문제있나?”
ㄴ Wei Jian Zhen 전부 문제인데요!
ㄴscienceguy8 나폴레옹: “겨울에 러시아를 정복하러가자! 무슨 문제있나?”
ㄴTridecalogism 히틀러: “겨울이 시작될 때 러시아를 정복하러가자! 무슨 문제있나?”
ㄴ DeepDuh 조지 부시: “사담을 제거하러가자! 거기 국민은 우릴 사랑하고 우린 뭐든 할 수 있을꺼야. 무슨 문제있나?”
ㄴ swarm 3003 역사는 반복되지. 언제나 전시에 책임을 가진 사람들은 ‘무슨 문제있냐’고 말하곤 해.
TheRexDark 에이지오브엠파이어가 다시 생각나는군. 한국 캠페인 정말 좋아했는데...
ㄴ JSQuareD 만약 네가 저 사이로 다닐수 있다면 소용 없었겠지. 근데 일본군이 배 위로 점프해야할때 저 바늘 사이로 떨어지길 빌어야만 했던걸 생각하면 훨씬 효과있었다는걸 알게될꺼야.
ㄴ scarfacemperor 만약 그게 아무 효과 없었다면, 그냥 디자인일 뿐이었나(무엇보다, 저 용머리가 진짜 필요 없었을꺼같아. 그냥 좀 더 위협적으로 보이지). 저 뾰족한 지붕은 배에 올라타는걸 확실히 더 어렵게 만들었을 꺼 같은데...
ㄴ Aerunn Allado 진짜 꼭 필요한건 아니었을꺼야. 용머리처럼 보이는건, 별로 유용하진 않지만 거기 달아놨네.
ㄴ Steam1901 맞아. 그래도 그 당시에 그 모습이 꽤 위협적으로 보이긴 했을꺼야. 화염탑이 실제로 위협적인 무기였을수도 있지만 뭐 :P
ㄴ scarfacemperor 화염탑이 아냐. 그냥 연기가 새어나왔을 뿐이야. 스타일을 위해서 말이지.
ㄴ mountedantman10 일본군의 주된 전략이 배에 올라타는거였어. 그래서 한국 선박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게 중요했지. 근데 거북선의 등장으로, 적 선박으로 돌진해서 박아 부숴버리는 전략이 가능했던거야. 스파이크는 엄청나게 유용해. 왜냐면 스파이크가 없다면, 일본군은 배에 올라타서 도끼로 껍질을 부숴버릴 수 있었을테니까. 그리고 머리에서 나오는 유황 연기는 마치 최루탄처럼 적의 사기를 꺽고 혼란시키지.
Peace Ribbon 와우... 그 누구도 운에 기대지 않고 43척의 배를 침몰시킬 순 없을꺼야. 와우..
ㄴ Andrew Meyer 맞아, 하지만 그는 짜임새있게 운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지.
ㄴ hagamapama 그는 운을 바라지 않았어. 전황을 관찰하고 그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이점을 활용한거야.
hagamapama 내가 인상적이었던건, 당시 한국이 매우 약하고 부패하고 무너져가는 나라였다는거야. 이순신같은 사람을 제대로 대우하지도 못하는. 그 영웅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지만,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어.
Jan 이순신 장군. 그 당시에 한국에서 유일하게 유능했던 사람.
ㄴpreventor333 그리고 자원한 병사들은 소작농이나, 스님이나, 자리를 뜰 수 없는 내관직이었어. 그들은 게릴라 전략으로 자신들의 자리를 지켜냈지.
Matt 정말 재밌는게, 지금 남한은 육군에 주력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공군과 해군에 초점을 맞추고있지. 왜냐하면 남한은 북한과 중국의 육지전에 대비해야하는 반면, 일본은은 해전과 공중전이 중요하기 때문이야. 남한은 예전보다 훨씬 나은 육군 전력을 갖추고 있지만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해군과 공군을 가지고있지. 시대에 따라 이런 양상이 바뀌는게 재미있어.
물론 선조가 왕이라는 직위에서 광해군한테 왕권줄듯말듯하며 나라를 버리고 제 몸살고자 명으로 넘어가려다가 잘싸우는 의병장들을 좀 죽이거나 곽재우처럼 빡쳐서 더 이상 활동안하개한 점과 너무 잘싸우는 무장들에 대한 견제나 임진왜란 끝나서 안가고 광해군한태 있는 왕권을 다시 내노라며 진상부리다가 정유재란 때 다시 징징거린건 분명 안좋게 보여도
선조가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을 고속승진시킨 점이라던지
임진왜란전까지 나름 전쟁대비한건 좋게 봐야되는 것도 사실이죠...
그래도 전쟁중에 약한 정통성때문에 뭔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 광해군,신하,의병들 견제하거나 왕이니까 살아야된다고 수도를 버린거까진 억지로 이해해도 명으로 가겠다는 트롤짓은 너무 나갔으니...
홍순구 교수는 논문에서 통제영,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분석과 3D 컴퓨터그래픽 시뮬레이션으로 2층의 높이를 구성하는 현란, 횡량, 멍에, 방패, 패란의 부재들에 대한 결구방법 해석에서 "통제영 거북선은 현란과 멍에를 고정하는 맞춤이 '걸침턱맞춤'으로 되어 있고, 4.3척의 높이는 특수 설계된 방패높이의 치수일 뿐이며 거북선은 결국 3층 구조"라는 근거를 제시했다.
기존 연구에서는 문헌기록상 4.3척(약 130cm)의 치수를 방패 높이로 해석하고 2층 높이를 추정했다.
약 130cm의 방패높이는 신장이 160cm 정도 되는 조선시대 노군이 서 있기도 어려운 낮은 2층 높이다.
홍 교수는 관련 문헌의 4.3척의 기록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치수'로 해석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었고 왜 낮은 치수로 설계되었는지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 1795년(정조 19년)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 등장하는 두 거북선을 2층 구조로 해석한 연구자들이 현란에서 패란까지 높이 4.3척을 '이해하기 어려운 낮은 치수'라고 본 이유는 현란과 멍에를 고정하는 맞춤을 고려하지 않고 현란 위에 얹어지는 방패의 높이만을 고려했기 때문이며, 장부맞춤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현란 위에 4.3척 높이의 방패와 패란을 위로 얹어 2층을 해석한 탓이라고 지적했다
(5월 3일) 술시(戌時) 조선의 도읍 동대문으로 진입, 거기서 황성(皇城)의 모습을 바라보니 옥루금전(玉樓■x殿) 늘어선 기와집, 널따란 성벽들의 조형미는 극치에 달하고 수천만 헌(軒)과 늘어선 대문들, 보귀로운 모습은 이루 말로 다할 길이 없다. 그런데도 막아 싸우려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고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온통 적막하였다. (중략) 내리(內裏)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전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있었다. 그제야 전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궁궐은 구름위에 솟아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궁(秦宮)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중략) 후궁(後宮)에는 화장품 향기가 감돌고 산호의 대상(臺上)에는 화려한 거울이 덧없이 남아있다. 난 향기는 전각 밖까지 풍기고 사람 살던 자취도 그렇거니와 하염없는 구슬로 장식한 침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건물마다 문이 열려 있고 궁문을 지키는 자 없으니 어디를 보아도 처량하기 짝이 없다. 그토록 용맹한 고니시도 천자(天子)의 옥좌(玉座)에 절을 하고 신성하고 고아한 분위기에 휩싸여 두 눈에 눈물이 괴니 소오스시마, 아리마, 오무라도 따라 눈물을 흘리었다.
-에도시대의 문헌 "조선정벌기 (朝鮮征伐記)"에서-
天順三年,邊將奏,有建州三衛都督私與朝鮮結,恐為中國患
명사
천순3년(1459년 조선세조 제위당시) 변경장수가 보고하길 건주삼위의 도독이 몰래 조선과 결탁하였습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중국이 병이 나다.
세조실록
야인과 왜인들은 모두 우리의 번리이고 우리의 신민(臣民)이니 왕된 자는 똑같이 대우하고 차별을 없이 하여 혹은 무력을 사용기도하고, 내가 즉위한 이후에 남만, 북적, 이것은 하늘의 끌어들이는 바이지, 나의 슬기와 힘이아니다. 흑룡강, 속평강, 건주위, 올량합, 이만주 동창등 심처 야인과 삼위 달자가 관문을 두드리고 입조하기를 청하거든, 그 종인을 줄여서 후대하여 올려보내라
세조 40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11월 2일(경오) 3번째기사
솔까 서양이 동양을 앞선 것은 1776년부터죠. 대다수 역사학자들도 서양이 동양을 뛰어넘은 시점을 그 해로 봅니다. 그 해에 국부론이 출간되어 고전 자본주의가 확립되고 미국이 독립선언을 함으로써 서양 현대 민주주의가 시작되었죠. 현재 세계 모든 국가가 그 질서를 기반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즉 경제, 정치 면에서 동양을 앞서게 된 해라고 보는 거죠.
하지만 그 이전 수천년간은 서양은 그저 촌뜨기 동네였을 뿐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콜롬버스등등의 그 수많은 탐험가들이 목숨을 걸고 대항해시대를 연 건, 동양에서는 길거리에 널려있던 향신료를 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서양인들은 소금이외에는 조미료를 거의 몰랐던 겁니다. 당시 동양입장에서는 서양은 정말 미개한 지역이었습니다. 도자기 같은 것도 그렇죠. 한중일에서는 싸구려 음식 담을 때 쓰던 용기도 서양인들은 부자만이 가질 수 있는 물품이었고, 그걸 보호하기 위해 엄청 튼튼한 성을 세워서 보관했죠. <아리스토텔레스의 아이들>의 저자인 리처드 루빈스타인은 스페인이 동양권인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그들의 땅에서 동양 문화를 만나게 된 순간을 "격리된 한 시골지역에 불과했던 유럽을 유럽 대륙으로 격상시킨 사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만큼 서양과 동양은 수준차이가 났던 겁니다. 동양인들이 되도 않으면서 서양을 무시해서 결국 지배를 당하게 된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가 당시에 살았어도 그렇게 무시했을지도 모르죠. 동양입장에서는 당시 서양은 정말 암만봐도 미개한 지역이었으니까요...
당초 동전에 위인을 새기는 이유를 생각해보세요. 화폐를 볼 때마다 위인을 기리기 위함입니다. 즉 국가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본래 가장 낮은 화폐에 새기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심지어 꼬맹이들까지도-그를 보며 기릴 수 있을테니까요. 즉 이순신 장군님이 100원에 새겨진 건 그만큼 한국인들이 존경한다는 의미입니다. 애시당초 화폐에 새겨진 위인들을 어찌 돈가치로 따지겠습니까??
그런 이유로 절대 원양까지 진출하지 못했고, 항상 근해에서만 전투를 벌입니다.
배와의 간격 및 진형이 훈련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해상에서의 명령은 오로지 진형 변경, 전후진 명령 체계밖에 없죠.
진형에 따른 각 함선의 위치가 각 함선의 임무가 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이런 체계 자체는 고대로 부터 계속 있어 왔습니다.
당초 그당시 일본 배가 너무 날림이라서... 대포를 장착해서 쏘면 넘어질 지경이었으니. 하기사 걔네들 배가 다 속도에만 조첨을 맞춘 왜구 해적배라서 가벼운 건 당연한 걸지도. 그런 배는 히트앤런을 하는 해적질에서는 유리하지만 정면대결하는 전쟁에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함. 또 오랫동안 해적과 싸우며 막강한 해전 실력을 가진 당시 한국과는 달리 지들끼리 100여년간 육상전투에만 골몰한 일본이 한국을 해전에서 이길 수 없는 건 당연지사. 해전에서만큼은 이미 한국은 일본을 싸우기도 전에 이기고 있었던 것. 거기에 일본이 바다를 통해 물자를 조달하지 않으면 안되는 섬나라라는 것을 생각해봤을 때, 임진왜란은 이미 한국의 승리였음. 무능한 관료들 때문에 초반에 바다에서 막지 못했지만. 만약 초반에 바다에서 상륙자체를 저지할 수 있었다면 임진왜란은 정말 간단한 왜란으로 끝났을 것임...
ㄴ paranoidude
맞긴 한데, 한국의 학문과 아이디어는 대부분 중국 철학에서 유래한거야. 한국은 중국의 것들을 자기것으로 만들었지만 어쨌는 중국 > 한국 > 일본순으로 문물이 전해진건 확실해. 일본 문화는 그래서 세 국가중에 가장 원래의 문화색이 옅고 차이가 많이 나지. 원래 문화가 필수적으로 안좋은점이 있다는건 아니지만, 그냥 내가 말하려던건 그렇다구.
>>>??? ㅋ 정말 알고 이런 소리 하남요?
지금의 짱국 수도인 북경만 해도 서토 소위 한족이 지배한 것보다 이민 정복사가 훨씬 더 길구만.
거란 요나라가 발해 5경 문명의 영향을 받아 5경체재로 이미 북경이 남경으로 다스려지기 100여년에
이후 우리 신라계황제와 발해민 연합의 금나라에 국무총리격인 고구려계 장호가 북경에 중도를 직접
건설하면서 본격화 이후 이런 우리가 건설한 도시 기반 위에 북방유목민족인 몽골에 의해
다시 100여년을 지배 그러다 명나라 영락제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이주하면서
자금성 짓고 200여년 다시 반서토적 요동 권역 중심의 만주족이라는 아이텐티를 정립한 만주족(본래
여진족 역시 신라계가 발해민이였던 흑수부 일대를 통합하고 일부에서 부르든게 이후 발해 멸망후
범칭되어 여진족으로 불린 족명임)
산해관에 입성해서 청으로 다스린게 300여년. 서토 소위 한족이 북경을 지배한게 200여년에 비해
우리부터 북방, 동이족등 외세 이민족 왕조가 북경을 개발하고 지배한게 600여년임.
지금 북경에 있는 이화원도 금나라 시기에 만들어져 확장된 것이고 원명원,피서산장같은 것도
이민 왕조인 만주족 청에 의해서 다 건립된 시설들.
그기에 지금의 짱국어에는 상당한 몽골, 만주족어에 영향을 받았고 지금의 북경어 자체가 당시 서토인들은
제대로 알아 듣지도 못하던 만다린어가 표준어가 된 것외에도 몽골 풍습이나 만주족의 머리인 변발, 치파오같은
의상이고 만주족에 의해 강제 이를 어길시에는 도륙해 버리면서 이민왕조가 들어설때마다 의복이고 문화가
급격히 강제 바뀌었던게 서토의 실상이구만.
그외 이뿐인가요?
신석기,청동기문화
서토<- 선대 우리 요하 발해문명과 고조선-> 열도
신석기 우리 고조선 선대 중심지인 만리장성 밖 요하일대 발해 문명의 5백여년 앞선 채색토기가 일명
Y벨트를 타고 서토 황하 내륙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는게 서토 짱국의 쑤빙치 학자의 견해구만.
그기에 서토의 단순 흙을 파서 묻는 토광묘와는 달리 이곳 만주 요하는
삼국시대 우리의 석곽묘, 석관묘, 적석총등
돌을 이용한 우리만의 매장 풍습에 이미 신석기 발해시대에 나오면서 훨씬 발달한 청동문화와 기원전
20세기 이미 요서의 하가점 하층문화부터 요동과 요서를 연계 아우르는 고태산문화와 압록강 일대 마성자
<1968년 역사학자 천판(陳槃)이 펴낸 ‘춘추대사표열국작성급존멸선이(春秋大事表列國爵姓及存滅선異)’라는 책이었다. 기존 사서를 근거로 중국 중원에 산재했던 춘추시대 170여 소국의 역사를 비정한 역사책인데, 바로 선우라는 항목이 있다.
“선우는 일명 중산이라 한다. 회남자는 우(虞)는 혹 우(于)라 했다. 선우(鮮于)는 그 선조가 자성인데(其先子姓), 기자는 조선에 봉하고(以箕子封朝鮮), 기자의 둘째 아들은 우(于·핑산으로 추정)에 봉했다. 여기서 자손들은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따서 선우(鮮于)씨라 했다.(子孫因合 ‘鮮于’爲氏)”(천판)>
은나라의 후예 어쩌고 금석문이 발견되었고 여기에 기자의 후예
어쩌고로 이 선우씨의 유래가 참 재미있고 눈에 확띄는 대목이 선자가 조선의 선자와 봉지의 우자가
태화 4년 5월 16일 병오일의 한낮에 백 번이나 단련한 철로 된 칠지도를 ○○○○가 만들었다.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侯王)에게 주기에 알맞다. 지금까지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이나리야마”에 새겨진 백제의 열도 지배
이두로 이 글을 다시 풀어보니 놀랍게도 이것은 고구려가 남침한 369년 당시 백제 땅이던 하동에서 후왕으로 있던 장수 집안이 동경까지 망명온 뒤 이곳에서 다시 백제 후왕으로 책봉된 내용을 담은 집안 이야기 였던 것이다.
이두로 풀이한 칼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기 471년에 “고” 확고는 조상이름을 적어 둔다. “오호 비꼬”어르신, 그 아들 “다가리 쪽니”어르신, 그 아들 “고리 확고”, 그 아들 “다사기 확고”. 그 아들 “바라 고비”, 그 아들 “가사 비리”, 그리고 그 아들은 “고 확고”이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장수로서 대대로 섬긴바 그 임금님은 사기궁에 마실을 차리고 천하를 다스리시는 크신 확가 개로 대왕이시니라. 온 번 불리고 달구어 만든 이 칼에 우리 집안 내력과 뿌리를 적어두는 바이다
...................
이렇듯이 이나리야마 쇠칼의 글은 5세기 가운데 즈음에 옛 일본의 관동, 관서, 규슈 등 세 곳에 백제가 다무로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왜 왕실은 백제 왕실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밝혀주는 귀중한 역사자료인 것이다
성덕왕(聖德王) 30년,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 제대로 상륙도 하지 못하고 박살난 일본, 결국 용서를 빌기 위해 서기 742년에 사신을 파견하지만‥
애장왕(哀莊王)
5년 여름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와 황금 300량을 바쳤다. (五年夏五月, 日本國遣使, 進黃金三百兩.)
- 이를 기특하게 여긴 신라는 드디어 일본을 용서하고 속국으로서 인정한다. 서기 806년 속국에게 하교하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7년,
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조원전(朝元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절을 새로 짓는 것을 금하되, 다만 수리하는 것은 허락한다. 또 수놓은 비단을 불교 행사에 사용하는 것과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의 사용을 금한다.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이를 널리 알려 시행하도록 하라.』(七年春三月, 日本國使至, 引見朝元殿. 下敎禁新創佛寺, 唯許修葺. 又禁以錦繡爲佛事, 金銀爲器用, 宜令所司, 普告施行.)
- 사찰을 수리하는 것조차 '종주국' 신라의 허락이 없으면 감히 하지 못했던 일본. 이후 '속국' 일본에 대한 종주국 신라의 사랑은 계속되고… 신라의 어버이와 같은 사랑에 감동한 일본은 서기 882년, 보답한다.
헌강왕(憲康王) 8년,
여름 4월에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량과 야광주[明珠] 10개를 바쳤다. (八年夏四月, 日本國王遣使, 進黃金三百兩·明珠一十箇.)
근자에 사신이 그곳에 가서 물어보고 알았지마는, 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는데 역시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 4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다.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횡사(黌舍 학교를 말함)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위로는 조정의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 자기 고장의 글 가르치는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1123년의 내용)-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옛 사서(역사책)에 따르면 고려의 풍속은 사람들이 모두 깨끗 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들은 항상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고려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한 뒤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한다.” -고려도경
倭國乃日本國也. 本名倭旣恥其名. 又自以在極東因號日本也. 今則臣屬高麗也 - 郭若虛.『圖畵見聞志』 卷6. 高麗國
왜국은 일본국이다. 倭라는 원래 이름을 부끄러워했는데, 극동에 있다고 해서 스스로가 일본이라고 부른다. 고려의 속국이다
(조선)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수(壽)가 남산(南山)처럼 높고, 덕(德)은 동해(東海)에 젖으시어...
성종 28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3월 13일(계묘) 3번째기사
일본국 경극전 경조윤 좌좌목씨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보물 제1085호 동의보감은 1597년 허준이 펴낸 우리나라 한의학의 귀중한 자료로 의학사에 필수적인 문헌 중의 하나입니다. 처음 펴낸 이후 그 가치가 알려지자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다투어 펴냈으며 17세기 이후 동양에서 널리 활용된 의서이지요. 특히 중국은 건륭(乾隆)·가경(嘉慶)·광서판(光緖版), 민국상해석인본(民國上海石印本), 대만영인본이 있고, 일본은 1724년 경도서림(京都書林) 초간본과 1799년 대판서림(大阪書林) 훈점(訓點) 재간본 등이 있습니다.
순천향대 박현규 교수는 허준의 <동의보감>이 17세기 전반기 중국과 일본에, 19세기 중반에는 베트남까지 전파되었다는 점을 밝혔다. 그는 “전통 시기 이 의서가 동아시아 사람들로부터 ‘천하의 보물’이라는 극찬을 받을 정도로 인민 의료보급과 의학 발전에 끼친 공헌도가 실로 대단했다”고 분석했다. 김문경 일본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는 한중일 3국이 서로 ‘대국’임을 강조하는 자아중심적 면모를 가져왔음을 밝히고 “동아시아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 한중일 대국주의와 자아중심 세계관의 상호 충돌이 가장 큰 난제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1613년 정식 발간 이후 수백 년 동안 중국과 일본에까지 지속적으로 소개되며 온갖 찬사를 불러 모은 책이다. 18세기 조선 정조 임금은 “고금의 의서를 통틀어 진실로 우리나라의 쓰임새에 적절함으로 판단하면 이 책에 견줄 만한 것이 없다”고 극찬했다. 1723년 일본의 후지와라 노부아스(藤原信篤)는 “이 책은 지금까지 떠돌던 이야기를 손으로 잡히도록 설명했으니 의학의 가르침과 바로잡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추켜세웠다.
1747년 중국 학자 왕여존(王如尊)은 “이 책은 병세와 병증을 상세하게 설명해서 치료법을 적었고 그 원리를 밝혀놓으니 그야말로 의서의 대작”이라 평가했다. 1766년 능어(凌魚)는 “이 책은 이미 황제에게 올려져 명의임을 인정받았지만 아직도 비각에 갇혀 있어 사람들이 엿보기 어렵다”며 “천하의 보배는 마땅히 천하가 함께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다시 중국어 본을 펴냈다. ‘열하일기’를 지은 연암 박지원도 중국 땅에서 동의보감을 만나고 기쁨과 자랑의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이 책에 대한 찬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1995년 중국 장쩌민 주석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한·중 문화교류의 아름다운 역사를 빛낸 작품”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지난 2009년에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고 2013년 탄생 400주년을 맞았다. 이쯤이면 ‘이 책’이 무엇인지 다들 짐작했을 것이다. 조선의 어의 허준이 지은 불후의 명작 ‘동의보감(東醫寶鑑)’이 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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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들 당시 해전술에 대해 전혀 모르는군요. 당시는 해군력이 지금처럼 발전한 시기가 아니라서, 그저 육지의 싸움을 바다에 대입시킨 것에 불과했죠. 즉 그 시기 해상 전투의 기본은 백병전이었습니다. 상대와 나의 배를 서로 연결해 서로 배로 넘어가서 싸우는, 지금으로 보면 원시인 수준의 전쟁이었죠. 하지만 16C는 그 해전술의 판도가 뒤집어진 해 입니다. 서양에서는 우리도 잘 아는 영국-네덜란드 연합 함대가 스페인의 아르마다를 쓰러뜨릴 때 이 백병전을 깨는 방법을 사용했죠.
동양에서는 이순신 장군님이 이 백병전을 깨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양쪽 다 공통적으로 사용한 건 배에 화포를 실는 거였죠. 그러면 백병전을 치르려고 다가오기도 전에 화포로 파선 시킬 수 있으니까요.
허나 이순신 장군님은 더 나아갔습니다. 일본인들이 해전 때는 해적들이 쓰는 방법을 애용한다는 것을 간파, 빠르게 다가와 배 위로 뛰어들 것을 예상했죠. 그 전술을 막을 방법은 배 위에 뚜껑을 덮는 거였습니다. 물론 나무로 덮는 건 의미가 없었습니다. 불태우거나 부수면 끝이니까요. 그래서 쇠판을 덮었던 겁니다. 거기에 뾰족한 창살까지 달아놓으면 올라온 적들이 찔려 죽게할 수 있었죠. 물론 이 창살을 본 일본군사가 뛰어들지 않을 거라는 건 당연했죠. 그래서 전투시에는 위를 천으로 덮어놓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천 때문에 창살이 가려져 일본군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들었다가 창살에 찔려 죽게된 것이죠. 스파이크가 필요 없었다니...
더군다나 거북선은 돌격선이고 충각을 한다는 거지. 뭐 거북선의 등에 시체를 깔고서 덤빈다면 이야기는 좀 다르겠지만 그래봤자 물컹거리는 사람을 밟고서 흔들리고 충격에 전해지는 거북선의 등에서 멀쩡히 서있을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
그런에 이런 글을 어디서든 볼수없다는 것이 더 문제.
하긴 임진란 이순신장군의 해전을 표현한 글들을 보면 이게 바단지 아니면 땅위에서 싸우는건지 모르겠다는 거지.
하다하다 용머리가 들어왔다 나갔다고 하는 미xx들도 있다니까. 해전중에 그짓을 한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제정신이 아닌듯.
돗단배타고 (현대적인 철선말고) 바다에 나가봐야 상황이 어떤지 알텐데 방구석에 처박혀서 상상속에서 써대니 해전이 뭔지나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