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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D] 해외네티즌 "역사상 가장 훌륭한 해군 장군 이순신"
등록일 : 15-10-12 10:30  (조회 : 39,615) 글자확대/축소 확대 축소 | 프린트

그동안 이순신 장군에 대한 번역글이 종종 올라왔었는데요.
이번 영상은 최근 자료로 지난 29일부터 시리즈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전체적인 스토리를 다루고 있는 유튜브 영상입니다. 주로 해외에 이순신 장군의 업적 위주로 소개가 되었다면, 이순신장군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들을 포함하여 전기 형식의 내용을 요약하여 만화와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개의 에피소드로 나누어져 있는데, 현재는 에피소드 2까지 영상이 올라왔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무관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좌절 그리고 에피소드 2에는 일본 침략의 서막에 대한 내용입니다.
 
 
 
 


 
(*번역 이후에 3편이 올라왔네요.)
 
 
 
 
댓글:
 

Extra Credits(영상 제작자)
이순신 장군: 역사상 가장 훌륭한 해군 장군. 그의 성공은 쉽게 오지 않았다.
 
 

Krisna Siv (kastle09)
나는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2 망할 거북선때문에 이순신 장군을 알고있어.
 

 
ㄴExtra Credits
너 그 게임에서 거북선이 실제보다 약하게 표현된거라는거 믿을 수 있니? 게임에선 실제보다 느리고 현측대포를 모두 없애버렸지. 왜냐하면 그 배가 어처구니 없이 강했기 때문이야.
 
 

ㄴ seiji fujii
맞아, 아마 그 시대가 유일하게 동양이 서양을 전쟁무기로 압도했던 유일한 시기일꺼야. 그 남자는 말그대로 무시무시한 철갑선을 만들어냈지.
 

 
ㄴ Krisna Siv (kastle09)
맹포격 하는 거북들... 믿을 수가 없군
 
 

erttheking
영상 요약:
 
그리고 이순신은 젠장할 또 이겨냈다.
 

 
ㄴ erttheking
와우, 어떻게 저 남자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거지?
 

 
ㄴ uanime1
그 전에 조선을 세운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는 시스템을 미리 구축해놓았기 때문이지.
 

 
ㄴ Ryan harrelson
이 시리즈의 마지막에는 이순신 장군은 단지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마스터 이가 될꺼야.
 

 
Yasashi Tsu-Kun (YasashiTsuKun)
마침내 마스터 이가 엑스트라 히스토리에 등장했군!
일본! 어서 침략해!
 

 
ㄴ Tyler van de Ven
기록에는 그가 다가오는 적들에게 외친 첫마디가 “당신의 실력은 형편없소(LOL 마스터 이 대사)”라고 해. 그리고 그는 순식간에 적들에게 다가가 적 무리를 한방에 날려버렸지.
 

 
ㄴ Pedro Gusmão
그가 그렇게 외쳤다는걸 믿지 않겠어
 
 

ㄴ Tyler van de Ven
그냥 가벼운 리그오브레전드 농담이야. 솔직히 이(Yi)라는 이름은 굉장히 명예롭고 열정적이며 성실한 남자라는 느낌을 줘. 그에대해 더 알고싶어.
 
 

ㄴ Pedro Gusmão
나도 그런 농담이란거 알아. 그래서 이가 그렇게 소리치지 않았을꺼라고 말한거야. 그 말에는 이가 스킬이 필요한 챔프라는 뜻이 함축되어있지.
 
 

ㄴ Ecthelion00
아쉽게도 동아시아 정치계엔 이 불후의 남자를 위한 자리가 없었지...
 
 

grfrjiglstan
정말 특이하게도, 한국은 일본이랑 정말 가까이있는데, 군사적으론 정 반대의 정책을 펴는 것 처럼 보여.
 
 

ㄴ Jh5kRadio
지리적으론, 맞아. 정말 가깝지.
하지만 왜 한국이 그 시대에 왜 은둔의 왕국(Hermit Kingdom)이라고 불렸을지 생각해봐.
 

 
ㄴ Marquis Forneus
그건 그렇게 특이한 일이 아냐. 가까이 있는 유럽 국가들이 얼마나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봐.
 

 
ㄴ Mustachewarfare
일본과 한국이 다른 큰 이유중 하나는 일본이 동아시아 무대에서 격리되 있었다는거야. 한국은 중국하고 엄청나게 가까웠고. 이시기에 한국의 가장 큰 위협은 일본의 해적들과 만주족이었어.한국은 침략의 위협을 덜기위해 중국과 강한 유대관계를 형성했지.
 
 

mountedantman10
내가알기로 그시대에 한국이 일본에 끼친 영향이 일본이 한국에 끼친 영향보다 훨씬 컸어. 한국은 일본의 주된 학구적 영감의 원천이었어. 사실 많은 일본 침략자들이 한국의 문화때문에 한국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두려움 가졌지. 그래서9000명이 넘는 침략자들이 일본을 배반하고 한국쪽으로 넘어왔던거야. 심지어 한국이 전쟁에서 지고있을 때도 말이지.
 
 

ㄴ paranoidude
맞긴 한데, 한국의 학문과 아이디어는 대부분 중국 철학에서 유래한거야. 한국은 중국의 것들을 자기것으로 만들었지만 어쨌는 중국 > 한국 > 일본순으로 문물이 전해진건 확실해. 일본 문화는 그래서 세 국가중에 가장 원래의 문화색이 옅고 차이가 많이 나지. 원래 문화가 필수적으로 안좋은점이 있다는건 아니지만, 그냥 내가 말하려던건 그렇다구.
 

 
ㄴ GreyWolfLeaderTW
북한은 아직 은둔왕국으로 알려져있지.
 

 
putridspit
좋아! 이 시리즈 주제가 드디어 동양으로 돌아왔구나! 난 동양 역사에 호기심이 진짜 많다구.
 
 

tenlosol
왜 항상 이런 위대한 사람들이 부정부패를 마주해야하는건지, 정말 안타까워.
그게 그들의 전설을 더 위대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어떡해야 세계가 덕있는 사람들이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변화할 수 있는거지?
 
 

mestre12
진정한 마스터 이야. 나는 LOL의 마스터 이가 조금이라도 이순신 장군의 컨셉을 따왔으면 좋겠어.
 
 

Nathan Robinson
이순신 장군이 해전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도 활약했다는게 인상적이야.
 
 

TheHunterWolf
이순신에게 경의를.. 이 남자는 터무니없이 대단해. 그의 결단력과 불굴의 끈기는 진정한 장군감이야.
 

 
NakMuayify
이거 대박 흥미로운데!
 
 

Yomiel Shields
정말 놀라워! 그가 어떤 전략을 썼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까? 한니발처럼 말이야!
 
 

ㄴ Extra Credits
물론이야, 에피소드 3과 4에서 진짜 천재적인 움직임을 볼 수 있을꺼야
 

 
ㄴ Dave Quinn
영상 제작자를 사랑해!!!!
 
 

Tenebris_Preatoraie
“이녀석들 데리고 캐리하느라 등골이 다 휘겠어” – 이순신 장군
 
 

ㄴ juanma9511
이순신 장군은 최고의 도타 플레이어가 될 수 있을꺼야.
 

 
Kieron George
이런 젠장! 위인설(Great man theory; 리더쉽에 대한 이론중 하나. 리더가 된 사람에게는 천부적인 자질이 있다는 견해)에 대한 훌륭한 예를 찾고 싶다면, 이순신 장군을 보면 될꺼야!
 
 

Zachary Damascus
“이순신장군, 넌 정말 훌륭한 일을 했어”
 
이순신장군: “내가 ‘다’ 했지!!!”
 

 
Finn El Humano
그는 전체를 캐리하다가 등골 아파서 죽었어. 진짜루.
 
 

ㄴ Tumble Butt / Styx on Fire
기묘하게도, 그는 심지어 그가 죽은 전투에서도 이겼어!
 
 

Remicas
도요토미 히데요시 “자, 한국을 통해서 중국 정복하러 쳐들어가자! 무슨 문제있나?”
 
 

ㄴ Wei Jian Zhen
전부 문제인데요!
 
 

ㄴscienceguy8
나폴레옹: “겨울에 러시아를 정복하러가자! 무슨 문제있나?”
 
 

ㄴTridecalogism
히틀러: “겨울이 시작될 때 러시아를 정복하러가자! 무슨 문제있나?”
 
 

ㄴ DeepDuh
조지 부시: “사담을 제거하러가자! 거기 국민은 우릴 사랑하고 우린 뭐든 할 수 있을꺼야. 무슨 문제있나?”
 
 

ㄴ swarm 3003
역사는 반복되지. 언제나 전시에 책임을 가진 사람들은 ‘무슨 문제있냐’고 말하곤 해.
 

 
TheRexDark
에이지오브엠파이어가 다시 생각나는군.
한국 캠페인 정말 좋아했는데...
 
 

PINGPONGROCKSBRAH
여기 거북선 복제품의 사진링크가 있어. 혹시 거북선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 사람 보라구..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8/86/Korea-Seoul-War_Memorial_2618-06_Turtle_Ship.JPG
 
나도 어디선가 본 것 같아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에이지오브 엠파이어에서 본거였어.
 

 
ㄴ dragatus
내가 상상하던 모양이랑 매우 비슷해!
 
 

ㄴ scarfacemperor
나는 좀 더 클줄알았거든(AOE2에서 다른 배에 비해 커보여서)
 
근데, 이 크기를 보고 처음에 정말 이상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던 게 달라졌어. 뾰족뾰족한 윗부분은 적들이 올라타는걸 막을 수 있었을꺼야. 만약에 배가 더 컸으면 올라타기 더 쉬웠겠지.
 
 

ㄴ EmpireClique
여기 1:1사이즈 삽화가 있어.
http://i1053.photobucket.com/albums/s462/YummyTomatoesYay/f0095962_4d9fc5b86c41e.jpg
 
 

ㄴ Steam1901
뾰족뾰족한 스파이크는 별 기능 없었을꺼같은데...
 
 

ㄴ JSQuareD
만약 네가 저 사이로 다닐수 있다면 소용 없었겠지. 근데 일본군이 배 위로 점프해야할때 저 바늘 사이로 떨어지길 빌어야만 했던걸 생각하면 훨씬 효과있었다는걸 알게될꺼야.
 
 

ㄴ scarfacemperor
만약 그게 아무 효과 없었다면, 그냥 디자인일 뿐이었나(무엇보다, 저 용머리가 진짜 필요 없었을꺼같아. 그냥 좀 더 위협적으로 보이지). 저 뾰족한 지붕은 배에 올라타는걸 확실히 더 어렵게 만들었을 꺼 같은데...
 
 

ㄴ Aerunn Allado
진짜 꼭 필요한건 아니었을꺼야. 용머리처럼 보이는건, 별로 유용하진 않지만 거기 달아놨네.
 

 
ㄴ Steam1901
맞아. 그래도 그 당시에 그 모습이 꽤 위협적으로 보이긴 했을꺼야. 화염탑이 실제로 위협적인 무기였을수도 있지만 뭐 :P
 
 

ㄴ scarfacemperor
화염탑이 아냐. 그냥 연기가 새어나왔을 뿐이야. 스타일을 위해서 말이지.
 

 
ㄴ mountedantman10
일본군의 주된 전략이 배에 올라타는거였어. 그래서 한국 선박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게 중요했지. 근데 거북선의 등장으로, 적 선박으로 돌진해서 박아 부숴버리는 전략이 가능했던거야. 스파이크는 엄청나게 유용해. 왜냐면 스파이크가 없다면, 일본군은 배에 올라타서 도끼로 껍질을 부숴버릴 수 있었을테니까. 그리고 머리에서 나오는 유황 연기는 마치 최루탄처럼 적의 사기를 꺽고  혼란시키지.
 
 

Peace Ribbon
와우... 그 누구도 운에 기대지 않고 43척의 배를 침몰시킬 순 없을꺼야. 와우..
 
 

ㄴ Andrew Meyer
맞아, 하지만 그는 짜임새있게 운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지.
 
 

ㄴ hagamapama
그는 운을 바라지 않았어. 전황을 관찰하고 그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이점을 활용한거야.
 

 
hagamapama
내가 인상적이었던건, 당시 한국이 매우 약하고 부패하고 무너져가는 나라였다는거야. 이순신같은 사람을 제대로 대우하지도 못하는. 그 영웅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지만,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어.
 
 

Jan
이순신 장군. 그 당시에 한국에서 유일하게 유능했던 사람.
 
 

ㄴpreventor333
그리고 자원한 병사들은 소작농이나, 스님이나, 자리를 뜰 수 없는 내관직이었어. 그들은 게릴라 전략으로 자신들의 자리를 지켜냈지.
 
 
Matt
정말 재밌는게, 지금 남한은 육군에 주력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공군과 해군에 초점을 맞추고있지. 왜냐하면 남한은 북한과 중국의 육지전에 대비해야하는 반면, 일본은은 해전과 공중전이 중요하기 때문이야. 남한은 예전보다 훨씬 나은 육군 전력을 갖추고 있지만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해군과 공군을 가지고있지. 시대에 따라 이런 양상이 바뀌는게 재미있어.


번역기자: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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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든감자 15-10-12 10:33
   
영상제작자가 외국인이가봐요? 감사한 일이네요..
만화로 제작해서 아이들도 접근하기 쉽겠네요,,
잘보고갑니다..
캬릉캬릉 15-10-12 10:42
   
잘 봤습니다. 정독하고보니 두번째 댓글이네요.
     
멍든감자 15-10-12 10:46
   
영상 조금 보다가 못알아들어서 댓글들만 보고 댓글 남겼는데..영상도 다보셨나봐요? 대단~
똥꼬간질 15-10-12 10:58
   
성웅 이순신
도서관지기 15-10-12 11:23
   
거북선 자료만 있다면 참 완벽할텐데
도핑 15-10-12 11:36
   
한국이 공군이 쌘건데 마지막 글은 인정 불가
     
타샤 15-10-12 12:55
   
미군 전력을 제외하면, 일본은 숫자만으로 우리의 3~5배에 달하고
세대로 보면 1세대 앞섭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F5 제공호 기반일때(팬텀도 있었지만) 일본은 F15 이글 개량형이었어요.

그러니 마지막 줄은 맞아요.
일본이 아시아 최강의 공군과 해군을 보유하고 있어요.

물론 실제 전술 능력은 어떻게 되는지 알 바 없지만...


아 이건 자위대일때 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죠.
          
굿잡스 15-10-12 16:06
   
미군 전력을 제외하면, 일본은 숫자만으로 우리의 3~5배에 달하고
세대로 보면 1세대 앞섭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F5 제공호 기반일때(팬텀도 있었지만) 일본은 F15 이글 개량형이었어요.>??

타샤> 뭘 진짜 근거를 가지고 알고 이런 헛소리를 떠드시는지? 숫자만 잽이 3~5배

많다?? 이정도면 헛소리도 풍년이군요

2015 세계 공군력 비교_Combat Capability Index(CCI)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military&wr_id=183100&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84%B8%EA%B3%84+%EA%B3%B5%EA%B5%B0%EB%A0%A5&sop=and

윗 링크 보면 알겠지만

세계 공군력 순위에서

대한민국 -5위(전술기 438대)

쨉 -6위 (전술기 288대)


          3세대  4세대 4세대 이상 비율 전술기총수량  공대공  공대지  공대공비율  전력지수합
1.  US    508    2289  81.8%              2797          97190  122994    44.1%    220184
 2. RUS    806      648  44.6%              1454          19400    26665    42.1%      46065
 3.  CH    843      611  42.0%              1454          17526    11232    60.9%      28758
 4. IND    467      251  32.9%              762          10770    14725    42.2%      25495
 5.  KR    219      219  50.0%              438            8373    12297    40.5%      20670
 6.  JP    71      217  75.3%              288          11681    7707    60.2%    19388
 7.  SA    81      155  65.7%              236          10187    8848    53.5%      19035
 11. TW    23      265  92.0%              288            7041    7505    48.4%      14546
 18.DPRK  539      35    6.1%                574            3417    2147    61.4%        5564
 ....

도대체 뭘 보고 쨉이 울보다 3~5배 많다는 헛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떠드시남요?
          
ahaWkd7 15-10-12 16:12
   
똑같은 개소리 댓글 며칠전에 본거같은데....
          
뚜리뚜바 15-10-12 21:48
   
개소리도 정도껏해야지; 2배도아니고 3~5배라니; 해군을 잘못알고 있는건가;;
     
굿잡스 15-10-12 16:16
   
타샤> 그리고 본인이 떠드는 쨉의 항자대 주력  F-15J 총 190 중

 60,70여대 정도만 개량된 상황이고  이외 130여대는 30년이 지난 노후기에(1980년대 기종)

성능도  F-15C 급임.  그에 비해 울나라 주력  F-15K 60대는 F-15J와 비교해서

 F-15E의 훨씬 업그레이드 기종에 아직 생생하고. 거기에 또다른 울나라 주력 

KF-16도1990년대에 항속거리 빼고는 쨉의 하이급보다 울나라 미들급 KF-16의 성능이

더 우수. 이것도 지금 KF-16은 140대 업그레이드 사업 진행중이고.

그기에 쨉의 KC-767J 구형 공중급유기는  쨉 조종사가 직접 눈으로  보면서 1대씩

공급해야 하는 기계식 아나로그 방식이지만 울나라 차세대 4대 공중급여 도입은 성능에서

훨씬 앞서는 기종.


잽이 그나마 먹어주는게 공대공 미사일 전력이나 전자전에서 우수함에서 어쩌고지

기본 전술기 숫자부터 울나라의 공대지 지상 타격 미사일전력등은 압도적 상황이고

하이급 전투기도 연식부터 성능이고 잽은 업글 일부 빼고는 우리가 앞서는 상황.

이때문에 공군력에서 한쨉간에는 서로 그나마 비슷한 수준으로 보지 어디서 무식한

헛소리로 숫자부터 뭔 성능에서 어쩌고 어디가서 되지도 않는 이런 헛소리는

본인 나라 본인 일기장에.
          
모나 15-10-12 23:59
   
지금은 그런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왜놈들이..아베를 필두로 개헌을 통해서
전쟁이 가능한 나라
징병이 가능한 나라
선제공격이 가능한 나라
침략이 가능한 나라로 가는 과정에서
시간이 걸리겠지만 무기체계 질과  수량에서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레벨업을 할듯한데요

그에따른 우리의 전력 업은 어떻게 될지..좀 걱정됨
               
굿잡스 15-10-13 01:42
   
기본적으로 호랑이가 토끼를 상대할때도 방심은

금물에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그걸 떠나서

아베의 군사보통국가 어쩌고 해도 마냥 쉽지는

않을겁니다.

우선 올해도 쨉 자위대 예산이 최고 어쩌고해도

인건비 빼고 실질 무기 조달금액은 이미

우리가 11조대로 쨉의 10조대에 비해 높군요.

여기에 쨉은 이미 세계 최악의 부채국에 해마다

천문학적 부채가 쌓이는 상황에서 현대의 전쟁

억지력 차원 빼고는 막대한 비용만 소모되는

국방비를 지금 축소해도 뭐할 판에 급등시키는건

그냥 저기 그리스꼴 자폭지름길이죠.

지금 국가신용등급도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

그기에 이미 중장거리 탄도탄등에 공대지 지대지

함대지 잠대지등 잽 본토를 직타할 수 있는 실전배치 상황에서

전범국이 다시금 무력 도발을 해온다면 잽 본토

부터 아작날걸 각오해야하는 시대 상황.
Joker 15-10-12 11:53
   
에효...
Iimagine 15-10-12 12:02
   
해군은 아니겠지만 일본 공군이 그리 쏐나?
sunnylee 15-10-12 12:23
   
정독, 유트브 동영상 정독...
나린사나래 15-10-12 12:25
   
우리나라도 만화산업이 컸으면 거북선을 주제로 변신로봇이라던지 을지문덕,강감찬,이순신같은 위인들로 어벤져스같은 만화를 만들어서 뭔가 멋있게 나올텐데...

이런 좋은 소재들로 만든거라고는 김치전사에 나오는 거북선전투함...  그렇게 돈을 갖다버리다니...
스코티쉬 15-10-12 12:33
   
Jan
이순신 장군. 그 당시에 한국에서 유일하게 유능했던 사람.

-------------------------

선조 당시 명장에 명재상에 인재풀은 넘쳐났었죠.
일본 가부키에 모쿠시로 등장하는 김시민 장군도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물론 군주가 병크 터트리면 얼마나 국가운영이 힘들어지는지 여실히 보여주긴 합니다만
     
나린사나래 15-10-12 13:12
   
그렇죠 선조 당시인재들이 세종시절 다음으로 제일 많다고 했을 정도로 인재가 넘쳐났죠

물론 선조가 왕이라는 직위에서 광해군한테 왕권줄듯말듯하며 나라를 버리고 제 몸살고자 명으로 넘어가려다가 잘싸우는 의병장들을 좀 죽이거나 곽재우처럼 빡쳐서 더 이상 활동안하개한 점과 너무 잘싸우는 무장들에 대한 견제나 임진왜란 끝나서 안가고 광해군한태 있는 왕권을 다시 내노라며 진상부리다가 정유재란 때 다시 징징거린건 분명 안좋게 보여도

선조가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을 고속승진시킨 점이라던지
임진왜란전까지 나름 전쟁대비한건 좋게 봐야되는 것도 사실이죠...

그래도 전쟁중에 약한 정통성때문에 뭔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 광해군,신하,의병들 견제하거나 왕이니까 살아야된다고 수도를 버린거까진 억지로 이해해도 명으로 가겠다는 트롤짓은 너무 나갔으니...
     
NEXUS 15-10-12 15:33
   
원래 인재는 난리통에 생겨나죠 대부분 평화적인 시대에는 일상에 안주하느라 평범한 날을 보냅니다 그래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들은 대체로 파란만장한 시대에서 태어나죠... 역사는 흐름을 크게 바꾼 인물을 기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가장 위인을 기억하기 좋죠
     
굿잡스 15-10-12 16:38
   
이순신 제독도 대단했지만 그만큼 조선의 기술과 문명수준이 훨씬 앞섰기 때문에

해전사에서도 이미 세계에서 가장 앞선 임진왜란 전쟁 초기부터 말기까지

근대적 함포해전이 가능했음도 주지의 사실이죠.


16세기 쨉이야 당시 협소한 창구를 통해 서구와 교류하고 있었다고 해도 당시 제대로된

교환상품이 없다보니 수십만 자국 여성을 인신매매 노예 수출로 조총 수입해서 전쟁질

쳐할만큼 사회, 의식, 정치 수준이 미개했던 수준이였고

단지 전국시대 칼질 쳐하고 힘이 남아 돈 점이 전쟁질하기에는

유리했던 것이고  임진왜란 이전 조선은 근 200여년간

별 다른 큰 전쟁없이 평화로 내치 안정화에 주력하며 문화적으로 발달한 나라였으니 군사력

에 쨉처럼 대군을 운용할 명분도 이유도 없던 상황.(조선도 초기는 3,40만 정예 대군을

운용. 세조는 대놓고 왜와 여진은 조선의 신민(臣民)으로 부르고 주변 여진, 왜, 류큐, 동남아

등에 독자적 황제적 지위에서 놀고 있었던)

그럼에도 초기에 쨉의 대규모 기습전에 밀렸지만 이런 이순신등이 해상을 완전히 장악하고

육군에서 1달 정도의 왜의 파죽지세 외에는 점차 전황이 우리쪽으로 돌아온 배경에는 그만큼

조선의 발달한 문명 수준과 기술력이 바탕했기 때문이죠.

이미 고려시대 세계최초의 함포 탑재로 고려말에 역시다 들끓든 왜구 500여척을

함포 탑재의 화약 무기를 통해 궤멸시킨 진포대첩사를 필두로 육지에서 이성계가

왜구세력을 황산대첩에서 궤멸시키면서 이성계가 고려 말기 혼란기에 영웅으로 등장했고

이후 조선을 개국.

그리고 이미 세계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도 고려시대에 그 원형이 만들어져 초기에 활용되고

있었군요. 그러다 조선 명조10년(1555년)에  새로운 전함인 이층 대형 판옥선이 개발

건조 되기 시작했고

이런 가운데 조선의 발달한 조선술과 화약기술, 함포제작, 그기에 함포해전술등을  바탕으로

이순신의 뛰어난 리스쉽이 더해져

조선의 해군병력을 정예화 시키고 임진왜란에 뛰어난 기술력에 바탕한

근대적 발달한  함포 해전술을 바탕으로 당시 여전히 백병전을 하던 왜구를 철저히 발라 버렸던 것이죠.

그기에 육지에서는 세계최초의 시한폭탄의 원조격인 비격진천뢰를 통해 경주성 탈환이나

진주,행주대첩등에서의 세계최초의 2단 로켓인 신기전등 다양한 화포술과 대포술에

민관 합심으로 적은 인원에서도 대승을 거두면서 전황을 반전.
          
진로소주 15-10-12 20:32
   
그좋은 기술가지고도 맨날 지던 병.×도 있었죠
          
뚜리뚜바 15-10-12 21:52
   
어? 명조에요? 명종아니고?
               
굿잡스 15-10-12 23:04
   
명종.
     
굿잡스 15-10-12 16:45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은 모두 3층 구조"

순천향대 홍순구 교수 "기존 2층 추정은 해석 오류 탓" 주장
 

홍순구 교수는 논문에서 통제영,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분석과 3D 컴퓨터그래픽 시뮬레이션으로 2층의 높이를 구성하는 현란, 횡량, 멍에, 방패, 패란의 부재들에 대한 결구방법 해석에서 "통제영 거북선은 현란과 멍에를 고정하는 맞춤이 '걸침턱맞춤'으로 되어 있고, 4.3척의 높이는 특수 설계된 방패높이의 치수일 뿐이며 거북선은 결국 3층 구조"라는 근거를 제시했다.
 
기존 연구에서는 문헌기록상 4.3척(약 130cm)의 치수를 방패 높이로 해석하고 2층 높이를 추정했다.
 
약 130cm의 방패높이는 신장이 160cm 정도 되는 조선시대 노군이 서 있기도 어려운 낮은 2층 높이다.
 
홍 교수는 관련 문헌의 4.3척의 기록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치수'로 해석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었고 왜 낮은 치수로 설계되었는지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 1795년(정조 19년)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 등장하는 두 거북선을 2층 구조로 해석한 연구자들이 현란에서 패란까지 높이 4.3척을 '이해하기 어려운 낮은 치수'라고 본 이유는 현란과 멍에를 고정하는 맞춤을 고려하지 않고 현란 위에 얹어지는 방패의 높이만을 고려했기 때문이며, 장부맞춤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현란 위에 4.3척 높이의 방패와 패란을 위로 얹어 2층을 해석한 탓이라고 지적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8/18/0200000000AKR20150818053900063.HTML?input=1179m

그리고 최근 연구를 보면

거북선은 2층이 아닌 3층 구조임에 어느 정도 더 무게감이 나가는 주장으로 보이군요.


(조선)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수(壽)가 남산(南山)처럼 높고, 덕(德)은 동해(東海)에 젖으시어...

 
성종 28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3월 13일(계묘) 3번째기사
일본국 경극전 경조윤 좌좌목씨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624145&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A1%B0%EC%84%A0+%ED%99%A9%EC%A0%9C&sop=and
 

에도막부, 조선통신사 일행에 극빈 대접

“한해 쌀 수확량 12% 접대비로 사용”

옥스퍼드大 루이스 교수 논문

“일본이 조선통신사의 한 차례 방문에 쓴 접대비용은 (일본의) 한 해 쌀 수확량의 12%를 넘었다.”


http://news.donga.com/3/all/20090202/8690797/1
 

(5월 3일) 술시(戌時) 조선의 도읍 동대문으로 진입, 거기서 황성(皇城)의 모습을 바라보니 옥루금전(玉樓■x殿) 늘어선 기와집, 널따란 성벽들의 조형미는 극치에 달하고 수천만 헌(軒)과 늘어선 대문들, 보귀로운 모습은 이루 말로 다할 길이 없다. 그런데도 막아 싸우려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고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온통 적막하였다. (중략) 내리(內裏)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전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있었다. 그제야 전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궁궐은 구름위에 솟아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궁(秦宮)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중략) 후궁(後宮)에는 화장품 향기가 감돌고 산호의 대상(臺上)에는 화려한 거울이 덧없이 남아있다. 난 향기는 전각 밖까지 풍기고 사람 살던 자취도 그렇거니와 하염없는 구슬로 장식한 침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건물마다 문이 열려 있고 궁문을 지키는 자 없으니 어디를 보아도 처량하기 짝이 없다. 그토록 용맹한 고니시도 천자(天子)의 옥좌(玉座)에 절을 하고 신성하고 고아한 분위기에 휩싸여 두 눈에 눈물이 괴니 소오스시마, 아리마, 오무라도 따라 눈물을 흘리었다.
 
-에도시대의 문헌 "조선정벌기 (朝鮮征伐記)"에서-

天順三年,邊將奏,有建州三衛都督私與朝鮮結,恐為中國患

명사

천순3년(1459년 조선세조 제위당시) 변경장수가 보고하길 건주삼위의 도독이 몰래 조선과 결탁하였습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중국이 병이 나다.


세조실록
 
야인과 왜인들은 모두 우리의 번리이고 우리의 신민(臣民)이니 왕된 자는 똑같이 대우하고 차별을 없이 하여 혹은 무력을 사용기도하고, 내가 즉위한 이후에 남만, 북적, 이것은 하늘의 끌어들이는 바이지, 나의 슬기와 힘이아니다. 흑룡강, 속평강, 건주위, 올량합, 이만주 동창등 심처 야인과 삼위 달자가 관문을 두드리고 입조하기를 청하거든, 그 종인을 줄여서 후대하여 올려보내라
 

세조 40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11월 2일(경오) 3번째기사
 
시무8조에 관한 대사헌 양성지의 상소문
 
우리 나라의 인민(人民)은 무려 1백만 호(戶)나 되는데 그 중에서 활을 잘 쏘는
 
병졸이 30만 명이고, 정예(精銳)한 병졸이 10만 명이며, 용감한 군사가 3만 명입
 
니다.
50드론러쉬 15-10-12 13:06
   
ㄴ seiji fujii
맞아, 아마 그 시대가 유일하게 동양이 서양을 전쟁무기로 압도했던 유일한 시기일꺼야. 그 남자는 말그대로 무시무시한 철갑선을 만들어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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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안 배운 듯

17-18세기 동서 문명 역전 현상 일어나기 이전의 유럽은 안타까운 동네였는데
     
나린사나래 15-10-12 13:27
   
총 때문에 저러는듯하네요..ㅋㅋㅋ

서양이 병법,무기,위생 등등 거의 전체적으로 밀린게 사실인데 말이죠ㅋㅋㅋ
     
카타 15-10-13 01:06
   
솔까 서양이 동양을 앞선 것은 1776년부터죠. 대다수 역사학자들도 서양이 동양을 뛰어넘은 시점을 그 해로 봅니다. 그 해에 국부론이 출간되어 고전 자본주의가 확립되고 미국이 독립선언을 함으로써 서양 현대 민주주의가 시작되었죠. 현재 세계 모든 국가가 그 질서를 기반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즉 경제, 정치 면에서 동양을 앞서게 된 해라고 보는 거죠.
하지만 그 이전 수천년간은 서양은 그저 촌뜨기 동네였을 뿐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콜롬버스등등의 그 수많은 탐험가들이 목숨을 걸고 대항해시대를 연 건, 동양에서는 길거리에 널려있던 향신료를 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서양인들은 소금이외에는 조미료를 거의 몰랐던 겁니다. 당시 동양입장에서는 서양은 정말 미개한 지역이었습니다. 도자기 같은 것도 그렇죠. 한중일에서는 싸구려 음식 담을 때 쓰던 용기도 서양인들은 부자만이 가질 수 있는 물품이었고, 그걸 보호하기 위해 엄청 튼튼한 성을 세워서 보관했죠. <아리스토텔레스의 아이들>의 저자인 리처드 루빈스타인은 스페인이 동양권인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그들의 땅에서 동양 문화를 만나게 된 순간을 "격리된 한 시골지역에 불과했던 유럽을 유럽 대륙으로 격상시킨 사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만큼 서양과 동양은 수준차이가 났던 겁니다.  동양인들이 되도 않으면서 서양을 무시해서 결국 지배를 당하게 된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가 당시에 살았어도 그렇게 무시했을지도 모르죠. 동양입장에서는 당시 서양은 정말 암만봐도 미개한 지역이었으니까요...
콩쥐 15-10-12 13:15
   
내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은 세종대왕으로 만원이다, 그 다음으로  이순신 장군인데 안타깝게 백원이다.
     
자바커피 15-10-12 14:18
   
메탈 무시하시는 겁니까?
     
NEXUS 15-10-12 15:29
   
원래 가장 존경받는 사람으로 가장 작은 화폐 단위에 넣는다고 합니다, 유통이 쉽다고 해서 그렇게 된거라거 하네요.... 만원짜리도 가장 큰 화폐 단위 였기 때문에 세종대왕님을 넣은 겁니다
     
ahaWkd7 15-10-12 16:17
   
미국 링컨이 얼마에 박혀있는지 보고 안타까워하세요.
     
할게없음 15-10-12 16:44
   
원래 동전이 가장 많이 쓰이죠. 그래서 제일 뛰어난 인물을 넣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고 전세꼐 어딜가도 지폐보다 동전이 더 유명한 인물인 경우가 많음.
     
타샤 15-10-12 16:49
   
미국 1달러 지폐와 1달러 동전에는 워싱턴이 있습니다.
프랭클린이 100달러던가 200달러던가?

프랭클린, 워싱턴 누가 더 알기 쉬운 사람일까요?
     
카타 15-10-13 11:01
   
당초 동전에 위인을 새기는 이유를 생각해보세요. 화폐를 볼 때마다 위인을 기리기 위함입니다. 즉 국가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본래 가장 낮은 화폐에 새기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심지어 꼬맹이들까지도-그를 보며 기릴 수 있을테니까요. 즉 이순신 장군님이 100원에 새겨진 건 그만큼 한국인들이 존경한다는 의미입니다. 애시당초 화폐에 새겨진 위인들을 어찌 돈가치로 따지겠습니까??
달나라사과 15-10-12 14:29
   
13 vs 333  어마무시한 전력을 가지고 있기에 해군을 늘리지 않는거지  일본 따위 훗.. 뭐 이런느낌?

전쟁은 숫자로 하는게 아니라고 하셨다 장군님께서
소리넋 15-10-12 14:34
   
이런걸 볼때 마다
거북선에 관련된 제대로 된 사료가 없다는게 너무 맘 아프네요.
     
NEXUS 15-10-12 15:30
   
대체로 그림으로만 남아있어서... 일본과 한국에 남아있는 그림만 있을뿐 실제 설계도는 없으니...
OOOOO 15-10-12 14:44
   
난 대단하다 싶은게 저때 당시 배와 배끼리 현대 무전장비없이 저런 전술 했다는게 놀랍다...
그만큼 체계나 여러방법이 있었겠지만 만약 지금 현대전에서도 무전 장비없이 저렇게 할 수 있는 지휘관이나 함장들이 있을까..?
     
바람노래방 15-10-12 14:55
   
그런 이유로 절대 원양까지 진출하지 못했고, 항상 근해에서만 전투를 벌입니다.
배와의 간격 및 진형이 훈련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해상에서의 명령은 오로지 진형 변경, 전후진 명령 체계밖에 없죠.
진형에 따른 각 함선의 위치가 각 함선의 임무가 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이런 체계 자체는 고대로 부터 계속 있어 왔습니다.
바람노래방 15-10-12 14:51
   
지금 남아 있는 거북선의 모형들은 숙종때 계량된 모형이라고 들었습니다.
임란때 거북선은 노 를 젓는 층과 포각 층이 별도의 층이였는데, 숙종때 계량되면서 합쳐지고 더 사이즈가 작아졌다고 하더군요.
계량의 주된 원인은 건조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이고요..

뿐만 아니라 판옥선도 같은 이유로 크기를 줄이는 형태로 계량되었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형들은 대부분이 숙종때의 계량 버전이라는 것이죠..
바스터즈 15-10-12 15:24
   
시사다큐에서 본거 같은데 거북선이 원래 저 모양하곤 전혀 다르게 생긴 육각형 형태라던데..
나는갈맥 15-10-12 16:38
   
이런 번역글들을 보면 서양의 흔한 역덕들은 이순신장군의 전공에만 관심이 있어서 쬐끔 아깝(?)네요... 이순신장군의 매력은 성품에서도 나오는데 말이죠ㅎㅎ
     
STYLE 15-10-12 17:19
   
공감합니다.
이순신 장군님의 민심을 향한 행보에도
초점이 맞춰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할게없음 15-10-12 16:45
   
ㄴExtra Credits
너 그 게임에서 거북선이 실제보다 약하게 표현된거라는거 믿을 수 있니? 게임에선 실제보다 느리고 현측대포를 모두 없애버렸지. 왜냐하면 그 배가 어처구니 없이 강했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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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말대로 실제 성능의 거북선이 게임에서 나오면 무슨 게임이든 오버밸런스임. 거북선 한척으로 일본 배 100척도 부술 위력이었음. 애초에 철갑선을 목조에 대포 싫어놓은 허접한 배로 어케 이겨..
     
카타 15-10-13 10:53
   
당초 그당시 일본 배가 너무 날림이라서... 대포를 장착해서 쏘면 넘어질 지경이었으니. 하기사 걔네들 배가 다 속도에만 조첨을 맞춘 왜구 해적배라서 가벼운 건 당연한 걸지도. 그런 배는 히트앤런을 하는 해적질에서는 유리하지만 정면대결하는 전쟁에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함. 또 오랫동안 해적과 싸우며 막강한 해전 실력을 가진 당시 한국과는 달리 지들끼리 100여년간 육상전투에만 골몰한 일본이 한국을 해전에서 이길 수 없는 건 당연지사. 해전에서만큼은 이미 한국은 일본을 싸우기도 전에 이기고 있었던 것. 거기에 일본이 바다를 통해 물자를 조달하지 않으면 안되는 섬나라라는 것을 생각해봤을 때, 임진왜란은 이미 한국의 승리였음. 무능한 관료들 때문에 초반에 바다에서 막지 못했지만. 만약 초반에 바다에서 상륙자체를 저지할 수 있었다면 임진왜란은 정말 간단한 왜란으로 끝났을 것임...
굿잡스 15-10-12 17:16
   
ㄴ paranoidude
맞긴 한데, 한국의 학문과 아이디어는 대부분 중국 철학에서 유래한거야. 한국은 중국의 것들을 자기것으로 만들었지만 어쨌는 중국 > 한국 > 일본순으로 문물이 전해진건 확실해. 일본 문화는 그래서 세 국가중에 가장 원래의 문화색이 옅고 차이가 많이 나지. 원래 문화가 필수적으로 안좋은점이 있다는건 아니지만, 그냥 내가 말하려던건 그렇다구.
 
 >>>??? ㅋ 정말 알고 이런 소리 하남요?

지금의 짱국 수도인 북경만 해도 서토 소위 한족이 지배한 것보다 이민 정복사가 훨씬 더 길구만.

거란 요나라가 발해 5경 문명의 영향을 받아 5경체재로 이미 북경이 남경으로 다스려지기 100여년에

이후 우리 신라계황제와 발해민 연합의 금나라에 국무총리격인 고구려계 장호가 북경에 중도를 직접

건설하면서 본격화 이후 이런 우리가 건설한 도시 기반 위에 북방유목민족인 몽골에 의해

다시 100여년을 지배 그러다 명나라 영락제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이주하면서

자금성 짓고 200여년 다시 반서토적 요동 권역 중심의 만주족이라는 아이텐티를 정립한 만주족(본래

여진족 역시 신라계가 발해민이였던 흑수부 일대를 통합하고 일부에서 부르든게 이후 발해 멸망후

범칭되어 여진족으로 불린 족명임)

산해관에 입성해서 청으로 다스린게 300여년. 서토 소위 한족이 북경을 지배한게 200여년에 비해

우리부터 북방, 동이족등 외세 이민족 왕조가 북경을 개발하고 지배한게 600여년임.

지금 북경에 있는 이화원도 금나라 시기에 만들어져 확장된 것이고 원명원,피서산장같은 것도

이민 왕조인 만주족 청에 의해서 다 건립된 시설들.

그기에 지금의 짱국어에는 상당한 몽골, 만주족어에 영향을 받았고 지금의 북경어 자체가 당시 서토인들은

제대로 알아 듣지도 못하던 만다린어가 표준어가 된 것외에도 몽골 풍습이나 만주족의 머리인 변발, 치파오같은

의상이고 만주족에 의해 강제 이를 어길시에는 도륙해 버리면서 이민왕조가 들어설때마다 의복이고 문화가

급격히 강제 바뀌었던게 서토의 실상이구만.

그외 이뿐인가요?


신석기,청동기문화

서토<- 선대 우리 요하 발해문명과 고조선-> 열도

신석기 우리 고조선 선대  중심지인 만리장성 밖 요하일대 발해 문명의 5백여년 앞선 채색토기가 일명

Y벨트를 타고 서토 황하 내륙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는게 서토 짱국의 쑤빙치 학자의 견해구만.

그기에 서토의 단순 흙을 파서 묻는 토광묘와는 달리 이곳 만주 요하는

삼국시대 우리의 석곽묘, 석관묘, 적석총등

돌을 이용한 우리만의 매장 풍습에 이미 신석기 발해시대에 나오면서 훨씬 발달한 청동문화와 기원전

20세기 이미 요서의 하가점 하층문화부터 요동과 요서를 연계 아우르는 고태산문화와 압록강 일대 마성자

문화가 거의 동시기에 초기 청동기문화를 아우러면서 나오고 있고 여기에 우리 고유의

성곽 특징인 치와 옹성등의 원형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는 국가적 규모의 완연한 방어형

산성이나 토성들이 밀집되어 나오고 있는 상태군요.


기원전 20세기 하가점 하층 문화의 삼좌점 고구려 치의 원형 석성으
 
로 보이는 방어형 성곽.(사진)

http://daily.hankooki.com/lpage/culture/201410/dh20141025100423138640.htm

그기에 만리장성 밖 고조선 선대 문명지인 만주 요하 일대는 이미 기원전 7200년 경으로

소급되는 정주취락인 신락문화가 발견된 상황이며  신석기 시대 조양 북쪽의

대릉하 근처의 서쪽 적봉일대의 홍산문화보다 앞선 흥룡와 문화(기원전 6000년~5200

년)만 봐도 이미 해자까지 두르고 온돌 아궁이에 정교한 도시형 밀집 취락

정주문화로 그기에 이런 발해문명의 홍산문화는 기원전 3500-2000년 경

의 소하연문화로 이어져 고조선 건국 연대와 비슷한 기원전 20세기 하가점 하층문화

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내포.


하여튼 이후 노노아호산맥을 경계로

대릉하 일대의 고조선 대표적 서토의 단순 동검보다 훨씬 발달한 정밀 합금조합의 비파형동검이라는

릉하문화로 하가점 하층문화가 이어져 나오고 있고. 오늘날 철기문화도 서토의 연나라보다 훨씬 발달한

독자적 문화가 연해주와 두만강일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루트가 확인된 상황.

동아시아 최초의 청동단추형 금속갑옷도 다름 아닌 우리 고조선에서 출토되는 발달한 청동문화이군요.


출토 유물로 본 고조선 영역

http://blog.daum.net/joo119114/1550
 
동아시아 최초의 금속 갑옷인

고조선의 갑옷과 장화에 붙이든 청동단추 출토 분포지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narva11&logNo=220279301580
 
삼국시대 고(구)려 영역.
http://cafe.daum.net/alhc/4xOO/11341?q=%B0%ED%B1%B8%B7%C1&re=1
 

東海之內 北海之偶 有國名曰 朝鮮

동해지내 북해지우 유국명왈 조선

"동해(서토 동해안 즉 서해) 안쪽, 북해(발해) 모퉁이에 조선이란 나라가 있었다”

-산해경(춘추전국시절 편찬된 지리서)


태평환우기를 봐도

(平州 盧龍縣) 朝鮮城, 卽箕子受封之地.-太平寰宇記 卷一百七十 河北道 一十九

은나라의 후예인 기자가 달아난 곳에 주 무왕이 하다 안되니

무슨 봉해줬니 어쩌고 하던 조선성이 노룡현 즉 지금의 산해관 요서

일대 진황도 근처에 있음을 기록.

오늘날 요동반도를 따라 이서를 요서로 정하고 있지만 이런 춘추전국시대의

요수의 기준을 보면 산해경에서 동남쪽으로 흘러서 발해로 들어간다고 기록한

반면에 지금의 요수는 서남쪽으로 흘러감(요란 고대에 서토왕조에서 그들의 먼

변경을 부르던 명칭으로 특정 지속적 고정화된게 아니라 시대별로 이런 요서,요동을

나누던 물길의 위치가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다시 말하면 춘추전국시대등 당시의 서토에서 보던 요하는 지금보다 훨씬 서쪽의

물길을 요의 경계로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군요.

그외

요서에서 발견된 두로영은(豆盧永恩)의 비문에

조선건국 고죽위군朝鮮建國 孤竹爲君’(조선이 건국을 하고 고죽이 임금이 되었다)


<1968년 역사학자 천판(陳槃)이 펴낸 ‘춘추대사표열국작성급존멸선이(春秋大事表列國爵姓及存滅선異)’라는 책이었다. 기존 사서를 근거로 중국 중원에 산재했던 춘추시대 170여 소국의 역사를 비정한 역사책인데, 바로 선우라는 항목이 있다.
 
“선우는 일명 중산이라 한다. 회남자는 우(虞)는 혹 우(于)라 했다. 선우(鮮于)는 그 선조가 자성인데(其先子姓), 기자는 조선에 봉하고(以箕子封朝鮮), 기자의 둘째 아들은 우(于·핑산으로 추정)에 봉했다. 여기서 자손들은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따서 선우(鮮于)씨라 했다.(子孫因合 ‘鮮于’爲氏)”(천판)>
 
은나라의 후예 어쩌고 금석문이 발견되었고 여기에 기자의 후예

어쩌고로 이 선우씨의 유래가 참 재미있고 눈에 확띄는 대목이 선자가 조선의 선자와 봉지의 우자가

합쳐서 나오는 말이라는.  자세한 내용과 선우중산국의 위치까지 확인 바람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5021738135&code=210000
 
그외 고죽국의 경우도 눈여겨 볼 부분인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4041710515&code=210000
     
굿잡스 15-10-12 17:19
   
그외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병이 100만이고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연,제,노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수(隨) 왕조의 멸망도 요동 정벌에 의한 것입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隋皇失馭 由於征遼

-삼국사기 <최치원전>

겨울 12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그때 그의 나이는 98세였다. 임금의 호를 장수왕(長壽王)이라 하였다. 위나라의 효문(孝文)이 이 소식을 듣고, 흰색의 위모관(委貌冠)과 베로 만든 심의(深衣)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七十九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王薨 年九十八歲 號長壽王 魏孝文聞之 制素委貌布深衣 擧哀於東郊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장수왕 79년(서기 491)


28년(서기 519), 임금이 돌아가셨다. 호를 문자명왕(文咨明王)이라 하였다. 위나라의 영태후(靈太后)가 동당(東堂)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했다.
 
二十八年 王薨 號爲文咨明王 魏靈太后擧哀於東堂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28년(서기 519)

서토 낙양을 장악한 북조사 북위 대국의 통치자들이 고구려 태왕이 승하하자 상복을 입고

애도식을 행함.


“예군 묘지명에 적힌 ‘日本’은 ‘百濟’지칭”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3042301032430074011
 

“일본은 원래 백제땅 일컫는 말이었다”

일 교수, 678년 ‘예군 묘지명’ 근거
“실제 일본은 해좌·영동으로 표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6435.html
 

칠지도 (七枝刀)

백제 어라하(황제)가 열도 제후 왜왕에게 하사
 

<앞> 泰○四年 ○月十六日 丙午正陽 造百鍊[銅] 七支刀 生辟百兵 宜供供侯王○○○○作
태○사년 ○월십육일 병오정양 조백련[동] 칠지도 생벽백병 의공공후왕○○○○작

<뒤>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 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선세이래 미유차도 백제왕세○ 기생성음 고위왜왕지련 전시후세

(국립부여박물관 전시 내용)



태화 4년 5월 16일 병오일의 한낮에 백 번이나 단련한 철로 된 칠지도를 ○○○○가 만들었다.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侯王)에게 주기에 알맞다. 지금까지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이나리야마”에 새겨진 백제의 열도 지배


이두로 이 글을 다시 풀어보니 놀랍게도 이것은 고구려가 남침한 369년 당시 백제 땅이던 하동에서 후왕으로 있던 장수 집안이 동경까지 망명온 뒤 이곳에서 다시 백제 후왕으로 책봉된 내용을 담은 집안 이야기 였던 것이다.
 
이두로 풀이한 칼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기 471년에 “고” 확고는 조상이름을 적어 둔다. “오호 비꼬”어르신, 그 아들 “다가리 쪽니”어르신, 그 아들 “고리 확고”, 그 아들 “다사기 확고”. 그 아들 “바라 고비”, 그 아들 “가사 비리”, 그리고 그 아들은 “고 확고”이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장수로서 대대로 섬긴바 그 임금님은 사기궁에 마실을 차리고 천하를 다스리시는 크신 확가 개로 대왕이시니라. 온 번 불리고 달구어 만든 이 칼에 우리 집안 내력과 뿌리를 적어두는 바이다
 
...................


이렇듯이 이나리야마 쇠칼의 글은 5세기 가운데 즈음에 옛 일본의 관동, 관서, 규슈 등 세 곳에 백제가 다무로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왜 왕실은 백제 왕실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밝혀주는 귀중한 역사자료인 것이다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168467§ion=sc1§ion2
 


백제인들이 열도를 지배하고 생활하기 위해 건설한 협산지(狹山池:사야마이케)저수지(사진)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56291&page=0&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98%A4%EC%82%AC%EC%B9%B4+%EC%A0%80%EC%88%98%EC%A7%80&sst=&sod=&spt=0&page=0
 

열도내 우리 유적 -신롱석산성(神籠石山城:고고이시산성)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76931&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A%B3%A0%EA%B3%A0%EC%9D%B4%EC%8B%9C%EC%82%B0%EC%84%B1&sop=and
 

고송총 고분(高松塚 古墳: 다카마쓰즈카 고분)

1972년 발굴된 고분으로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엽의 우리나라할때의 나라

현에서 발굴된 벽화 고분으로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고구려 양식의 고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특유의 주름 치마 여인복장이 그려져 있음. (그외

평양의 고구려 강서대묘에서 보이는 사신도(현무등)의 그림도 그려져 있는.)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74179&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95%9C%EB%B3%B5+%EB%8B%B9%ED%92%8D&sop=and
 

백제가 열도에 건설한 아스카(飛鳥:비조) 문명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o1026&logNo=150180089525
 
http://blog
 

남북국시대(해동성국 대발해- 신국의 신라)

동북아 해상무역을 장악한 신국(神國)의 신라.

성덕왕(聖德王) 30년,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 제대로 상륙도 하지 못하고 박살난 일본, 결국 용서를 빌기 위해 서기 742년에 사신을 파견하지만‥

애장왕(哀莊王)
5년 여름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와 황금 300량을 바쳤다. (五年夏五月, 日本國遣使, 進黃金三百兩.)

- 이를 기특하게 여긴 신라는 드디어 일본을 용서하고 속국으로서 인정한다. 서기 806년 속국에게 하교하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7년,
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조원전(朝元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절을 새로 짓는 것을 금하되, 다만 수리하는 것은 허락한다. 또 수놓은 비단을 불교 행사에 사용하는 것과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의 사용을 금한다.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이를 널리 알려 시행하도록 하라.』(七年春三月, 日本國使至, 引見朝元殿. 下敎禁新創佛寺, 唯許修葺. 又禁以錦繡爲佛事, 金銀爲器用, 宜令所司, 普告施行.)
 
- 사찰을 수리하는 것조차 '종주국' 신라의 허락이 없으면 감히 하지 못했던 일본. 이후 '속국' 일본에 대한 종주국 신라의 사랑은 계속되고… 신라의 어버이와 같은 사랑에 감동한 일본은 서기 882년, 보답한다.
 
헌강왕(憲康王) 8년,
여름 4월에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량과 야광주[明珠] 10개를 바쳤다. (八年夏四月, 日本國王遣使, 進黃金三百兩·明珠一十箇.)




근자에 사신이 그곳에 가서 물어보고 알았지마는, 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는데 역시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 4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다.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횡사(黌舍 학교를 말함)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위로는 조정의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 자기 고장의 글 가르치는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1123년의 내용)-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옛 사서(역사책)에 따르면 고려의 풍속은 사람들이 모두 깨끗 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들은 항상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고려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한 뒤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한다.”  -고려도경


倭國乃日本國也. 本名倭旣恥其名. 又自以在極東因號日本也. 今則臣屬高麗也 - 郭若虛.『圖畵見聞志』 卷6. 高麗國
왜국은 일본국이다. 倭라는 원래 이름을 부끄러워했는데, 극동에 있다고 해서 스스로가 일본이라고 부른다. 고려의 속국이다


(조선)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수(壽)가 남산(南山)처럼 높고, 덕(德)은 동해(東海)에 젖으시어...

 
성종 28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3월 13일(계묘) 3번째기사
일본국 경극전 경조윤 좌좌목씨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624145&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A1%B0%EC%84%A0+%ED%99%A9%EC%A0%9C&sop=and
 

에도막부, 조선통신사 일행에 극빈 대접

“한해 쌀 수확량 12% 접대비로 사용”

옥스퍼드大 루이스 교수 논문

“일본이 조선통신사의 한 차례 방문에 쓴 접대비용은 (일본의) 한 해 쌀 수확량의 12%를 넘었다.”


http://news.donga.com/3/all/20090202/8690797/1
굿잡스 15-10-12 17:21
   
7세기 서토 당나라 장안성 총길이 16㎞

6세기 우리 고구려 장안성(평양성) 총길이 23㎞

(성안의 넓이는 자그만치 1,185만㎡. 그중 내성은 130만㎡, 중성은 300만㎡, 외성은

730만㎡에,북성 25만㎡)

그에 앞서 인근에 안학궁과 셋트형의 도시형 대성산성 축조.

자세한 내용은 아래 참조하시길.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11385



고구려 초기 2대 유리왕시절 축조되기 시작한 환도성

앞 궁궐 건물지 무려 90미터.

http://mnews.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otal_Id=343393
 


고구려  5세기
 
<안학궁 남삼문(南三門) 중 남중문(南中門) 38m 앞면 7칸

안학궁 남궁 1궁전(정전) 62m 앞면 11칸

안학궁 중궁 1궁전(편전) 87m.  앞면 19칸 >
 
 
7세기에 세워지고 확장된 당나라의 최대궁전인 대명궁의 정전인 함원전 정면 길이가 67.33m
 
북경  자금성에서 가장 큰 건물 태화전 정면 64m


동대사 크기는 높이 48m, 가로 57m, 세로 50m라오. 안의 대불은 15미터  =>백제인에 의해 건립.



인도의 타지마할의 기단 크기 94m, 건물 크기 57m

남북국시대 발해의 상경용천부 제2궁전 기단 크기 120m, 건물 크기 93.5m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56234&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83%80%EC%A7%80%EB%A7%88%ED%95%A0&sop=and
 

 
고구려는 안학궁으로부터 750m 떨어져 있는 유사시를 대비한 배후 산성이
 
대성산성으로 전체 9km가 넘고 둘레는 7km가 넘으며 남문이 있는 골 안에서는 2
 
중으로,주작봉과 국사봉 골 안에서는 3중의 겹성에 내부에는 연못이 자그만
 
치 170여개가 존재.
 
http://blog.naver.com/bestchoi21/20018007630 -> 대성산성 사진



조선 내성(內城)(경복궁 +창덕궁 +경희궁+창경궁+경운궁)

43만㎡+ 43만㎡+ 23만㎡ +21만㎡+6만㎡ (아래 단위는 생략)
=136만㎡

자금성(내성(內城)) 면적
72만㎡


조선 내성(內城: 조선5궁)>>자금성(내성(內城)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11385


서토의 대중적 민간 신앙인 불로장생등 기복적 도교 신앙 역시 그 원류를 보면

사마천 사기 진시황 본기에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위해 산둥의 우사(도사)를 찾아 가는데

이런 불로장생의 술법이 발해만일대(산해경,태평환우기등 서토 사서에서 이런 발해만

일대에 고조선 위치 언급)에서 흘러 나온 것으로 기록.(공자가 우리쪽보고

불사 군사국 어쩌고 떠들기도 했고)


유교 역시 공자가 새롭게 창시했다기 보다는 당시 동이족 상나라의 후예로

이런 동이족의 예법과 제례에 밝은 공자가 춘추전국시대에 도덕이 무너지는

혼란기에 이런 동이족 예법을 다시금 회복 주장하면서 이후 송,명시기에 가서

강제적 규범과 신분 계층화의 도그마적 성격을 띤 정치적 이데올로기화 된 것으로

이미 우리쪽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에서 밝혔던 우리쪽에 유,불,선을 아우러는 오랜

현묘지도가 있음을 밝힘

자세한 내용은 아래 참조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6880&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A%B3%B5%EC%9E%90%EC%84%B8%EA%B0%80&sop=and


즉 우리와 서토의 문화는

우리<->서토간 상호작용이 맞는 것이지

무슨 일방적 서토->우리로 온게 전혀 아닐 뿐더러

도리어 우리는 반만년 여러 외세의 침입도 있었지만 이것도 대부분 북방 유목쪽 일부였지

서토와의 대전에서는 우리가 대승을 거두거나 지배했거나 그와 더불어 북방 유목과 연계해서

같이 협력 지배하기도 했던 식으로 줄기차게 우리 왕조로 이어져 왔지만

서토야 말로 우리와 북방 동이족등 외세 왕조사의 강점 지배로

점철되면서 문화적으로 강제 변혁의 시대상을 수천년간 이어온 역사였군요.

열도는 수천년간 동아시아에서 존재감도 없었고 심지어 에도말기 시기 조선의 은 제련술을

배워 무분별한 은 수출로 인해 화폐의 질이 나빠지면서 고인플레이션에 자작농 붕괴등으로

농민 반란이 급격히 일어 난데다 미흑선 대포 몇방에 불평등 문호 개방으로 더욱 막장화되면서

극도의 내부 불만으로 지들끼리 칼질하고 나온 메이지 시대에도 꼭두각시 왜왕을 세우기

전까지 열도의 일반 왜인들은 자기 왜왕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던 시기였군요.

(그리고 열도의 지금 면적은 독립국인 류쿡(오키나와)와 원주민들 살던

홋가이도를 근대 시기에 무력으로 복속하면서야 나온 것이지 그 이전에는 우리 본토 백제

의자왕과의 형제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부여교기가 서열도에 이미 잡고 있던 아스카 도시

문명의 백제 세력을 바탕으로 천지천황에 오르면서 본토 백제가 망하다 일부 도래인에

의해 우리나라 할때 나라 헤이안 시대를 열면서 도성 체재가 나오고 본격적으로 백제의

지리명사인 일본이라는 국호가 나온 것입니다. 그당시에도 관동 일대는 원주 수렵 에조가

있어 계속해서 싸움이 나고 있어 방어하고 있었고.  토요토미가 임진왜란에서 패망하고

그들 가신이고 주력이 죽어나가면서 힘이 약해지자 대외에

참여하지 않고 있던 도쿠가와에 의해 이들을 정벌하고 17세기

들어가서야 뻘진창의 관동평야가 본격적으로 개발이 점차 되기 시작한 것임.

당연히  15,6세기 이당시 왜는 전국시대에 교토를 수도로 하고 있어 서열도 정도의

지배지에 농업생산력이나 문화 수준도 미개했고 단지 전국시대 100여년의 칼질로 단련된

실전 병력과 수십만 자국 여성 인신매매로 수출하면서 서구 조총수입을 통해 이를 통합하고

나온게 도요토미지만 이때도 제대로된 문치의 중앙 집권화를 할 문명 수준이 없다보니

반란이 우려되면서 이런 무력을 소진할겸 전쟁을 이르킨게 임진왜란.

당연히 이당시에는 이런 전국시대의 여러 영주들 사이에는 조선대국관(朝鮮大國観 을 가지지 않

을 수 없던 시대배경이군요. 후기 에도시대에도 대외적으로 정치적

정당적을 인정받고 조선의 발달한 선진 관료 문화를 배우기 위해 조선통신사에 극진히 대접하면

서 선진문화를 받아 들였던 시기)


실질 여진족은 명보다 이런 조선의 통제 세력권 아래에 놀고 있었고. 명 역시 비록

원세력이 물러났지만 북원이 견제해서 매번 충돌에 후방의 여진족 세력의 발호 견제부터 조선의

군사력에 위협을 느끼고 있어 일반적 3년에 한번 공무역하자는 걸 조선이 땡깡부려

1년에 3번이라는 파격적으로 막대한 무역 이득을 안기면서 여진족의

발호를 조선과의 협력을 통해 후방 안정화를 꾀했고 조선은 명에 체면 치레를

해준게 다름 아닌 조공무역의 실상임(정도전이 이런 조선의 요구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으면

여차하고 요동정벌을 획책하고 있었던 상황이였고)

조명간의 당시 명의 내지는 산해관 이서였고 요동변경의 실질적 관할지역도 압록강 바로

넘어서가 아니라 요동 고구려 봉황성 이서였군요. 앞선 우리가 요동을 수천년 지배하다

고려가 다시 70여년간 자치권으로 차지하면서 고려인들이 3,4만에서 최대 8,9만정도의

상당한 인구가 흘러들어갔다고 보는데 이를 통해 요동일대가 다시 개발되었고 이때문에

이후 공민왕이 요동의 고려 백성을 안녕케 하기 위해 이성계등을 통해 중앙정부에서

요동의 원 세력 소탕 작전으로 출정한게 1차 요동정벌.

비록 조선시대에 와서 조선이 요동을 완전 장악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조선은 이런 동만주

일대는 조선의 세력권 아래 여진족이 복속 신민으로 따르고 있었고 명도 이를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던 시기에 요동에서 압록강 사이에도 조선인들이 요동 인구의 3할을 차지하고

있던 상황(그에 앞서 요나라 시절부터 상경용천부의 발해민 수십만이 요동 일대로 이치되면서

이들이 숙여진족으로 범칭되어 불렸던)

반서토적 요동 중심의 만주족이 정립되고 청이 산해관에 입관하면서

이 요동일대는 한족 봉금화로 인해 조선은 두만강을 따라 연해주 흑룡강 일대도 이미

17세기에 제집 드나들듯 하고 있었군요.





《续资治通鉴 卷二百一十四 元纪三十二》记载:“后亦多畜高丽美人,大臣有权者,辄以此遗之,京师达官贵人,必得高丽女然后为名家。自至正以来,宫中给事使令,大半高丽女,以故四方衣服、靴帽、器物,皆仿高丽,举世若狂。”

 

"황후도 역시 고려미인으로 삼아, 대신유권자는 곧 이를 귀하게 여겨, 수도

고관귀인은 반드시 고려여자를 얻은 후에야 명가가 된다. 그렇게 된 이래,

궁중급사사령, 대반이 고려여자이며, 이런 이유로 사방의 의복, 신발과 모
 
자, 기물 모든것을 고려를 모방해, 온 세상이 미친 것 같다.

[속자치통감 제이백일십사 원기삼십이]

 

《菽园杂记》::“马尾裙始于朝鲜国,流入京师……于是无贵无贱,服者日盛。至成化末年,朝臣多服之者矣。阁老万公安冬夏不脱……。大臣不服者惟黎吏侍淳一人而已。此服妖也,弘治初始有禁例。”

마미군은 조선국(고려)에서 시작되어, 수도로 유입됬으며......귀천을 가리
 
지 않고 복식이 날로 성했다. 성화말년에 이르러, 조정 신하들도 입게 되었
 
다. 각로만공안이 겨울에도 여름에도 벗지 않았다.....이 복식은 요사하므로,

홍치 초시에 금지되었다. 

[숙원잡기]

 《寓圃笔记》:"发裙之制,以马尾编成,系于衬衣之内。体肥者一裙,瘦削者或二三,使外衣之张,俨若一伞。",

치마를 넓히는 제도는, 말꼬리를 옷안에 엮어서 만든다. 몸을 비대하게 만든

하나의 치마로, 마른사람은 혹 두개 세개를 입는다, 옷을 바깥으로 넓게 퍼
 
지게 만드는데 쓰는데, 우산과 같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74179&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A%B3%A0%EB%A0%A4%ED%92%8D&sop=and
굿잡스 15-10-12 18:11
   
이순신 제독이 분명 뛰어난 리드쉽과 불패의 전술 그리고 불굴의 정신까지

두말이 필요없은 우리의 성웅이지만 이런 이순신 제독의 불패의 신화와 근대적 함포해전사가 가능했던 건

조선의 발달한 문명수준과 사회상 및 민관 협력이 기반되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것이면

이점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 내부적으로 일부는 여전히

서토가 도리어 수천년간 외세에 밥먹듯 지배 강점되면서 문화변혁을 거듭 했음에도 마치

일방적으로 중국-> 한국 어쩌고 이런 도식은 전혀 상식적으로 맞지 않고 실체하지 않는 역사관이군요.

(전형적 동북공정식 해괴한 역사관임)


앞서도 언급했지만 유교라는 자체도 공자가 직접 창안한게 아니라 당시 춘추전국 혼란기에 공자는 당시

상나라 후예 출신이다 보니 이런 정복왕조 동이족 상나라 예법과 제례에 익숙하고 밝았고

이를 당시 회복 주장한 이입니다.

이후 송시기 주자의 주자학등이 대두되면서 점차 도그마적 정치화되면서

조선도 이런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받아

들었지만 실제 유교의 공론 정치 즉 단순히 왕의 일방적 명령이 아니라 신하와 군주간에 오늘날 의회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토론하는 제대로된 공론 정치는 명이 아니라 조선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왜는

당시도 여전히 미개한 칼질로 정치하던 곳이였군요.


그외 근세 조선이 세계 최초로 독자적으로 발명하고 이룩한 앞선 선진적 사회 문화들과 경국대전으로

법치화 법치주의로 다스리고 다양한 의견과 견제의 당파등을 통한 공론 정치등은 조선이 어떤 사회와

철학을 가진 나라였는지 새삼 자각했으면 하군요.


울나라가 귀족 교육기관 만이 아니라 1600년 전 이미 세계 최초의 서민 교육

기관인 경당을 이어 고등 교육 기관인 성균관부터 전국적인 향교 사학 및 초등 교육기관이

서당(오늘날 같은 미국식 묻고 답하고 스스로 생각해서 작문하는 수업방식)등에 전국적

행정력이나 오늘날 공무원 승진같은 차등 고과제를 통해 능력

선발인 과거제의 임용 이후에도 승진에 엄격히

적용하던건 기본.

그리고 서구의 종교개혁과 계몽사상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금속활자의 종주 발명국으로 쿠텐 베르크보다 200여년 앞선 고려시대 금속활자가

조선시대에 주조소 개설로 더욱 발전 편찬한 주조기술과 이에 따른 방대한 인쇄량하며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실시간 사관이 가감없이 엄청하고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 일기같은 엄청난 기록유산 정도는 조선에선 별거 아닌 당연한 일상.


앞선 고려시대의 세계최초 근대적 함포함대 탑재와

진포대첩 해전사를 통해 세계최초로 근대적 해전사를 초기부터 말기까지

보여준 임진왜란시대의  철갑선인 거북선과 판옥선하며, 세계 최초의 시한폭탄의

원조격인 비격진천뢰,  우리 고유의 온돌난방의 보급 확대부터

고려 시대 5배의 생산량의 면포 생산량, 서토보다 인구대비 5배에 이르는

곡물저장 수준의 세계적 탑레벨에  고려시대 상감청자 기법을 이어 조선시대

백자도 조선만이 가진 독특한 철화백자의 탄생하며

세계 최초의 온실재배 및 이미 현대적 소방관 개념의 24시간 멸화군,

세계 최초의 측우기,자격루,천문관측기 혼천의, 세계 최초의 신문인 조선의 조보, 만화 컷,

동양 최초, 세계 2대 유량악보(음의 높이와 길이를 나타낼 수 있는 현대적 개념의 악보)인

조선의 정간보, 서구보다 200년 앞선 현대 회계 복식부기법인 송도사개 치부법,

세계 최초 공중보건의서인 동의보감 및 동아시아 최초의 청동단추형 금속갑옷 고조선

출토 유물을 이어 세계 최초의 방탄복인 면제배갑

그외 세계최초비행기 비거,세계최초 2단 추진 로켓인 신기전등

그리고 오늘날 외국인도 놀라는 울나라 음식배달이 이미 18세기에 나오군요.

황윤석(1729~1791)의 '이재일기'에  1768년 7월에 과거 시험을 본 다음 점심때 냉면을 배달

시켜 먹었다는 기록.

그외에도

조선시대의 맛집소개서 / 미슐랭 가이드 ‘효전산고’

http://news.donga.com/3/07/20150424/70884905/1
 

조선의 빈민구제소 수준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4630&sca=&sfl=mb_id%2C1&stx=shrekandy&page=2
 

조선시대 한양의 무상의료 정책, '한증소'

http://www.humanrights.go.kr/hrmonthly/view.jsp?no_idx=22871&article_idx=22962&category=D&sub_category=CC
 
조선시대 초등 교육 기관인 서당 교육 수준 (물론 이외에 향교 및 학당, 성균관 같은 중,고등 교육기관이

전국적인 인프라로 구축)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5079&sca=&sfl=mb_id%2C1&stx=shrekandy&page=2
 
조선의 과학수사 수준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5129&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A1%B0%EC%84%A0%EC%9D%98+%EA%B3%BC%ED%95%99%EC%88%98%EC%82%AC&sop=and
 

조선시대 다양한 술집

http://egloos.zum.com/Idealist/v/3298907


세계 최초 공중 보건의서 '동의보감'


동의보감, 중국에서도 다투어 펴냈다

보물 제1085호 동의보감은 1597년 허준이 펴낸 우리나라 한의학의 귀중한 자료로 의학사에 필수적인 문헌 중의 하나입니다. 처음 펴낸 이후 그 가치가 알려지자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다투어 펴냈으며 17세기 이후 동양에서 널리 활용된 의서이지요. 특히 중국은 건륭(乾隆)·가경(嘉慶)·광서판(光緖版), 민국상해석인본(民國上海石印本), 대만영인본이 있고, 일본은 1724년 경도서림(京都書林) 초간본과 1799년 대판서림(大阪書林) 훈점(訓點) 재간본 등이 있습니다.
 
http://www.mhj21.com/sub_read.html?uid=9567


순천향대 박현규 교수는 허준의 <동의보감>이 17세기 전반기 중국과 일본에, 19세기 중반에는 베트남까지 전파되었다는 점을 밝혔다. 그는 “전통 시기 이 의서가 동아시아 사람들로부터 ‘천하의 보물’이라는 극찬을 받을 정도로 인민 의료보급과 의학 발전에 끼친 공헌도가 실로 대단했다”고 분석했다. 김문경 일본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는 한중일 3국이 서로 ‘대국’임을 강조하는 자아중심적 면모를 가져왔음을 밝히고 “동아시아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 한중일 대국주의와 자아중심 세계관의 상호 충돌이 가장 큰 난제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63784.html
 

동의보감, 400년 동안 찬사 받는 이유

1613년 정식 발간 이후 수백 년 동안 중국과 일본에까지 지속적으로 소개되며 온갖 찬사를 불러 모은 책이다. 18세기 조선 정조 임금은 “고금의 의서를 통틀어 진실로 우리나라의 쓰임새에 적절함으로 판단하면 이 책에 견줄 만한 것이 없다”고 극찬했다. 1723년 일본의 후지와라 노부아스(藤原信篤)는 “이 책은 지금까지 떠돌던 이야기를 손으로 잡히도록 설명했으니 의학의 가르침과 바로잡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추켜세웠다.
 

1747년 중국 학자 왕여존(王如尊)은 “이 책은 병세와 병증을 상세하게 설명해서 치료법을 적었고 그 원리를 밝혀놓으니 그야말로 의서의 대작”이라 평가했다. 1766년 능어(凌魚)는 “이 책은 이미 황제에게 올려져 명의임을 인정받았지만 아직도 비각에 갇혀 있어 사람들이 엿보기 어렵다”며 “천하의 보배는 마땅히 천하가 함께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다시 중국어 본을 펴냈다. ‘열하일기’를 지은 연암 박지원도 중국 땅에서 동의보감을 만나고 기쁨과 자랑의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이 책에 대한 찬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1995년 중국 장쩌민 주석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한·중 문화교류의 아름다운 역사를 빛낸 작품”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지난 2009년에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고 2013년 탄생 400주년을 맞았다. 이쯤이면 ‘이 책’이 무엇인지 다들 짐작했을 것이다. 조선의 어의 허준이 지은 불후의 명작 ‘동의보감(東醫寶鑑)’이 그 주인공이다.
 
http://www.hani.co.kr/arti/science/kistiscience/598640.html
 

 

사실 알고보면 놀랍게도 지금 현대 우리가 누리는 상당수의 사회, 문화 생활이

현대와 조선 근세의 질적 수준 차이지 이미 조선시대에 그 개념과 활용 보편화가 다되고 있던

상황일 정도로 조선의 문화 사회 수준이 어떠한지 공부를 해보시길.(조선 시대 오늘날

책방 대여점인 세책점에는 이미 오늘날 넷에서의 댓글문화가 책 뒤에 아녀자들까지

소감으로 감회나 불평을 적고 놀만큼 세계적으로 앞선 문명률을 보였던게 조선의 시대상.

이는 우리의 자랑스럽고 독창적 독자적 명확한 문자 창제원리를 알 수 있는 한글로 인해

후기 한글 대중 소설의 서민 문학의 발달이 가속화되면서 나온 사회상에

당시나 지금도 각광받은 현대의 바이오의약품에 해당하면서 동북아뿐 아니라 태국등

동남아에도 금값으로 팔리던 인삼 개발 재배 성공등)
가출한술래 15-10-12 20:49
   
잘 보고 갑니다,.
♡레이나♡ 15-10-12 23:06
   
잘봤습니다
자기자신 15-10-13 02:25
   
우리민족에 위대한성웅 이순신장군
싸대기 15-10-13 10:48
   
잘 보고 갑니다
부분모델 15-10-13 11:07
   
잡스띠가 맘먹고 댓글쓰면 잘 보고 갔다는 인사 댓글 쓰려해도 마우스 스크롤을 한참 내려야해서 힘들어용... >_<
잘 보고 갑니다아~
카타 15-10-13 11:17
   
Steam1901
뾰족뾰족한 스파이크는 별 기능 없었을꺼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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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들 당시 해전술에 대해 전혀 모르는군요. 당시는 해군력이 지금처럼 발전한 시기가 아니라서, 그저 육지의 싸움을 바다에 대입시킨 것에 불과했죠. 즉 그 시기 해상 전투의 기본은 백병전이었습니다. 상대와 나의 배를 서로 연결해 서로 배로 넘어가서 싸우는, 지금으로 보면 원시인 수준의 전쟁이었죠. 하지만 16C는 그 해전술의 판도가 뒤집어진 해 입니다. 서양에서는 우리도 잘 아는 영국-네덜란드 연합 함대가 스페인의 아르마다를 쓰러뜨릴 때 이 백병전을 깨는 방법을 사용했죠.
동양에서는 이순신 장군님이 이 백병전을 깨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양쪽 다 공통적으로 사용한 건 배에 화포를 실는 거였죠. 그러면 백병전을 치르려고 다가오기도 전에 화포로 파선 시킬 수 있으니까요.
허나 이순신 장군님은 더 나아갔습니다. 일본인들이 해전 때는 해적들이 쓰는 방법을 애용한다는 것을 간파, 빠르게 다가와 배 위로 뛰어들 것을 예상했죠. 그 전술을 막을 방법은 배 위에 뚜껑을 덮는 거였습니다. 물론 나무로 덮는 건 의미가 없었습니다. 불태우거나 부수면 끝이니까요. 그래서 쇠판을 덮었던 겁니다. 거기에 뾰족한 창살까지 달아놓으면 올라온 적들이 찔려 죽게할 수 있었죠. 물론 이 창살을 본 일본군사가 뛰어들지 않을 거라는 건 당연했죠. 그래서 전투시에는 위를 천으로 덮어놓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천 때문에 창살이 가려져 일본군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들었다가 창살에 찔려 죽게된 것이죠. 스파이크가 필요 없었다니...
원형 15-10-13 19:24
   
거북선의 등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네.

그런데 이게 거북선이 아니라 바다가 어떤건지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정확할거다.

거북선은 배고 배는 물위에 있지

강물도 아닌 바닷물을 파도에 흔들리지 더군다나 배끼리 충돌하면 더 흔들리겠지.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뾰족한 못들이 가득한 곳에 올라가 선다고 해보자.

흔들 흔들 쿵쿵 이런단 말이지.

이때 발을 잘못 디딘다면!

혹 넘어진다면

몸에 구멍이 아주 많이날거야.

더군다나 거북선은 돌격선이고 충각을 한다는 거지. 뭐 거북선의 등에 시체를 깔고서 덤빈다면 이야기는 좀 다르겠지만 그래봤자 물컹거리는 사람을 밟고서 흔들리고 충격에 전해지는 거북선의 등에서 멀쩡히 서있을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
그런에 이런 글을 어디서든 볼수없다는 것이 더 문제.

하긴 임진란 이순신장군의 해전을 표현한 글들을 보면 이게 바단지 아니면 땅위에서 싸우는건지 모르겠다는 거지.

하다하다 용머리가 들어왔다 나갔다고 하는 미xx들도 있다니까. 해전중에 그짓을 한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제정신이 아닌듯.

돗단배타고 (현대적인 철선말고) 바다에 나가봐야 상황이 어떤지 알텐데 방구석에 처박혀서 상상속에서 써대니 해전이 뭔지나 알까.
다주겄삼 15-10-14 09:25
   
다 떠나서 지금 우리가 들여오려는 차세대 전투기는 일본에서 만들고 as도 일본에서 해야합니다
미국하고 일본하고 짝짝궁 해서 이런 사태를 만들었는데 앞으로 공군력은 끝났음 ㅡㅡ
다주겄삼 15-10-14 09:28
   
금속으로 만든 용머리는 충돌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고 들었던거 같은데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