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의 덕장으로 빨래를 수확하러 갔다
여린 상추쌈에 싸인 것 같은 도봉산의 색채와 절정으로 치달리는 봄의
성징(性徵)이 망막에 아찔하다.
오전과 오후의 DMZ에 놓인 일상은 살바도르달리Salvador Dali의 그림처럼 축 늘어진
조감도의 군락, 그것의 표면에 태양의 분말이 투명한 폭포처럼 쏟아졌다.
아침에 널어둔 빨래들에게서는 잘 건조된 명태나 오징어의 냄새가 풍겼다.
물고 있는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앙다문 집게의 주둥이를 비집어 빨래를 수확했다.
거실에 던져진 빨래의 틈에서 잘 건조된 시간이 또르르 굴렀다.
고1짜리 딸아이의 체육복 바지는 벌떡 일어나 달릴 것만 같고
누나에게 눌려 지내는 아들의 티셔츠가 칭얼거리며 안긴다.
아내의 블라우스는 제발 쉬고 싶다며 갈라진 비명을 지르며 오래전에 죽어버린 짐승의 가죽같은 나의
러닝셔츠 위에 널브러졌다.
자신의 위에서 벌어졌던 에로틱의 절정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불은 그저 씨줄날줄이
겹쳐진 직조물에 지나지 않을 뿐.
삶의 외피(外皮)들을 하나씩 개어 접었다.
윗도리는 팔을 접어 4등분 했고 바지는 절반으로 각을 잡았다.
잘 건조된 삶이 부위별로 또박또박 접힐 때마다 생존의 파편들이 잘게 바스러졌다.
깨끗이 세탁되어 건조된 삶의 과정들이
밥물 끓는 냄새를 풍기며 거실 그득 흐트러지고,
이태껏 경유했던 고통의 비중과 두께가 앨범 속의 사진들처럼
차곡차곡 누적되었다.
노숙자도 받아주지 않을 것 같은 청바지가 눈에 밟힌다.
방금 생성된 남해의 바닷물로 염색한 것처럼 푸르고
싱싱했지만 이제는 칙칙하고 후줄근한 자투리에 지나지 않는 그섯에 목이 메인다.
갓 나온 청바지처럼 푸르고 시원했던 젊음은 백만 년 전의 암각화처럼 빛이 바랬으며,
그저 입을 것의 기능 밖에 가지지 못한 그것과 나는 그리 다르지 않다.
다시 빨래를 갠다. 마흔을 훨씬 초과한 삶도 개어 접었다.
유통기한이 다 된 중년의 살갗에 무미(無味)한 햇살이 무당이 집어던진 쌀알처럼
무작위한 점뿌림으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