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청뽕이라는 말을 보고 처음엔 좀 기분이 나빴습니다만,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그냥 젊은 일본애니덕후가 내뱉은 말 정도로 생각하니 굳이 그럴 필요도 없겠다 싶더군요.
길게 쓰자면 한없이 길어지겠지만, 아주 간단히 말하면 현재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가 일본 하청으로 먹고사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가생이에서도 화제가 되는(?) 아베노믹스 때문에 원화기준 단가가 너무 내려가서 예전같지 않구요, 차라리 미국이나 중국 하청이라면 또 모르겠네요. 여기서 실명을 거론하기는 좀 그렇지만 하청을 전문으로 하던 대형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경영난에 휘청인지 오래됐습니다. 이런 상황을 미리 내다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ㄷㅇ의 경우 하청으로만 수십억 이상 벌던 1,20년 전에 하청 작업을 중단해 버린 지 오래입니다.
어쨌든 지금은 상당수의 애니메이션 회사들이 자체기획물 위주로 생각하지, 하청을 주모델로 삼지는 않습니다. 그런 자체 기획물의 대부분이 초등 저학년 이하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게 문제일 수는 있으나, 현 시점에서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이 하청을 주수입으로 하고 자체기획&제작을 등한시한다는 건 그냥 까기 위해 갖다붙이는 말일 뿐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입니다. "한국 애니메이션은 (일본) 하청에 빠져 있고 자체 기획은 등한시하고 있거나 잘 못하고 있다"라는 말을 업계 사람들 앞에서 해보세요. 뭐지 이X끼는...? 하면서 다들 어리둥절해할 겁니다.
물론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씩의 하청을 받아서 하는 경우는 많지만, 이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중국 등의 프리프로덕션 일을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주 작은 작업팀이 정말 먹고살기 위해 하는 경우입니다. 일본 하청일은 원래 하던 곳들이 계속 돌리기는 하겠지만, 이들은 이미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의 주류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설령 하청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독립된 하나의 업종이라고 볼 수 있으며, 자랑스러워하면 모를까 부끄러워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아앙의 전설을 한국 업체가 작업했을 때와 일본 업체가 작업했을 때의 퀄리티 차이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죠? 그만큼 만드는 능력이 있다는 건 긍정적인 것이지 굳이 왜 그걸 비하하는지 모르겠네요. 호주나 뉴질랜드, 캐나다 등에서 헐리우드 하청받아서 제작하는 제작사들이라든지, 중국 실사영화 특수효과 작업을 많이 하는 한국 포스트 업체들도 하청을 받아서 제작합니다만 그걸 부끄러워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폭스콘이 애플 하청이라고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가요?
애니메이션을 발주하는 PD, 감독, 작감 등의 헤드급 인력들은 창조적이고 훌륭하고, 그들의 지시를 받는 실무 작업자들은 부하직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저런 식의 발언이 안 나올 것 같은데요, 참 천박한 인식이고 실무를 전혀 모르는 소치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네요.
더 할 말은 많지만 마지막으로, 일본을 숭배하는 자들을 일뽕이라고 비하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한국인이 한국을 빤다(?)고 해서 그걸 국뽕이니 뭐니 하고 부르는 건 웃기는 소리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건 국뽕이 아니라 애국심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안중근, 김구, 이순신도 국뽕인가요? 물론 과도한 자부심은 경계해야겠지만, 무분별한 일뽕들이 반발심으로 만들어낸 국뽕(여기서는 하청뽕)이라는 말은 지양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