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발달이 더디던 고대시대 기준으론 농경집단과 수렵유목 집단과의 개체(인구)차이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농업생산성이 유목채집을 완전히 앞지르는 시기는 생각보다 늦은 8~9세기 무렵부터입니다. 이유는 간단한데, 농경에 걸맞는 환경이 생각보다 드물기 때문입니다.
풍부한 용수와 2~3년에 걸친 돌려짓기에도 견딜 수 있는 토양, 평평한 토지와 온후하고 예측가능한 기후등이 필요한데. 이게 갖춰진 지역이 전세계적으로 흔히 말하는 4대 문명 발상지 정도뿐입니다. 그나마도 그 생산성이 유목채집집단을 넘어선 것이라 말하기도 어려웠고요.(축력을 이용하고, 종자를 대폭 개랑하는 2~3세기 시점이나 되야 유목민족에 대해 수적 우위를 가지게 됩니다. 생산성 우위가 아니라요. 이집트 같이 축복받은 경우가 아니면 대개가 그래서 수메르, 인더스 문명은 수시로 유목민족에게 부서지고 재생하는 경우는 몇십번이고 반복합니다.)
그나마도 자연적인 재해나 기후변화등에 무척이나 취약해서 흔히 말하는 소빙기나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라니냐, 엘니뇨 현상에 따른 가뭄과 홍수등의 재해에 무척 취약한게 농경문화입니다. 대표적으로 마야문명이 자연재해로 자가붕괴했고, 인도와 인도차이나 반도등의 여러 문명도 자연재해는 물론 말라리아에 의해 붕괴된 바 있습니다.(크메르 유적이 대표적)
농경문화의 생산성이 유목문화를 완전히 앞서게 된 건 딱 10세기 무렵부터입니다. 축력을 이용하고, 수력을 이용하며, 수운과 해운을 이용하고, 심경농법과 윤작법, 시비법과 구대륙의 여러종자들이 광범위하게 퍼지며 개량된 이후부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경우에 특정하면.
대동강 유역부턴 농경생산성이 떨어져 인구밀도가 희박해지고, 따라서 북방으로 밀고 올라가기 위한 추진력이 떨어지게끔 하는 요인이 됩니다. 특히 두만강 유역부턴 거친 산악지형 투성이라 더더욱 북방추진이 어려워지게 되죠.(물론 반대로 그 산악지대의 반유목민 역시 인구밀도가 떨어져 고려-조선에 생각보다 쉽사리 병합되지만.)
거기에 압록강 건너서부터는 유목에 유리한 초지가 퍼져 있어 여진족등이 힘을 비축하기 쉬운 인구밀도 높은 지역이 너르게 퍼져 있고, 그 동쪽엔 또 중원대륙이 힘을 뻗기 쉬운 요동반도가 있으니 어려워지죠.(요하와 발해를 이용한 수운과 해운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