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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0-19 03:09
[기타] 영,정조 때의 조선의 군사력이 어느정도인지 알 수 있을까요?
 글쓴이 : aosldkr
조회 : 4,458  

제 2의 조선의 부흥기를 이끈 두 군주때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인지 주변 나라와 비교해서 알고 싶어져서요.

정조는 장용영까지 만들 정도고 실제 활이 백발백중이었다는 기록도 있으니 조선의 국방 수준도 제법이었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실제로 무예도보통지 같은 것도 만들어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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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 14-10-19 06:32
   
솔직히 안타깝지만 시대에 뒤쳐져있는 쓰레기 군사력이죠.

 애당초 장용영은 군사력 강화 목적이 아니라, 단지 왕권강화를 위해 만들어진 겁니다.

 영정조 시대라고 해도 이웃 청은 말 그대로 강희-옹정-건륭으로 이어지는 청의 황금기이므로 우리는 상대가 안됩니다.

 청이 아까운 점도 건륭제가 노년에 들어서 영국과 교섭하게 되는데, 이게 안타까운 일이죠. 건륭제 말년부터 청은 내부모순이 심해지는 시기였고, 건륭제의 총기역시 쇠퇴해서 결국 개화를 제대로 하지 못하죠.

 군주제에서 군주의 자질은 국가의 흥망성쇠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데, 청이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시기가 안 좋았습니다. 청이 먼저 개방을 했으면 우리 역시 제대로 개화를 했을텐데 말이죠.

 이후 청은 아편전쟁으로 서양의 노리개감으로 전락하고 우리는 이에 대한 충격으로 더욱 쇄국에 열을 올리고 결국 왜놈에게 잡아 먹히죠.
     
shrekandy 14-10-19 10:52
   
아니 잠깐만요. 청나라한테 좀 뒤졌다고 군사력이 허접이란 논리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뇨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중에서 가장 근대화되어있던게 조선군 아닌가요? 제가 얼마전에 일본 도쿠가와 막부랑 조선 무기 비교한거 올렸었는데...
     
나와나 14-10-19 12:24
   
장용영이 본래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2000여 명의 국왕 친위부대였지만

나중에 12,000명에 달하는 조선의 최정예군이 됩니다
 
오스만 제국의 최정예 부대인 예니체리 부대도 약 15,000명이었고

처음 창설 목적도 '술탄의 친위부대' 정도였죠

장용영을 까려면 예니체리도 까야겠네요
     
전략설계 14-10-19 15:12
   
위 두사람은 세트인가??
하는 행태가,
조선에 대해서 조금만 안 좋은 얘기 나오면, 별 반박도 못하면서 댐비고보네..

반박은 해당 글에다 해야지..  글 쓴 사람이 댁 댓글 찾아가서 봐야되는거요.

12,000하고 15,000을 단순 비교해서
조선과 오스만투르크의 군사력을 평가하는 셈법이라면,
규슈 일개 다이묘에 불과한 임란때 가등이 18,000은 뭐요??

위에 위에 사람이 '조선까' 어쩌고 글 올리더만..
가만보니 '조선빠'가 이곳에 있나 봅니다.

답글은 해당 계시판에 하는 습관좀 기릅시다. 고게 예의요..
          
나와나 14-10-19 16:17
   
제 글 어디를 봐도 오스만과 조선의 군사력을 비교, 평가하는 말은 없습니다

전 장용영과 예니체리를 비교하면서 왕권 강화를 위해 세운 친위부대가 정예군으로 변하는 일은 다른 나라에도 있다는 걸 보여준 거일 뿐인데요
          
전략설계 14-10-19 18:50
   
--댓글 썼다 지운분에 대한 답글입니다. 쓰고 나니 지웠네. 쓴게 아까워 남깁니다--

칼리님이 장용영을 언급한 대목은..
<<장용영은 군사력 강화 목적이 아니라, 단지 왕권강화를 위해 만들어진 겁니다.>>
 
이거 한 줄 썼다고..
장용영을 깠다고 하고..
예니체리가 나오고..

장용영이  정조 친위대인건 세상이 다 아는데..
<왕권강화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멀쩡한 말 한마디 가지고,
12,000, 15,000에..
예니체리까지 까니마니 하니..

댓글 지운 분??
글 한줄 가지고 이러는게 댐비는게 아님 뭔가요??
               
aosldkr 14-10-19 19:32
   
칼리님도 제 요지를 못 이해하신 겁니다.
'저는 장용영까지 만들 정도고' 라고만 했지 이게 조선 군사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는 글은 쓴적이 없습니다. 애초에 제 요지는 '왕실 친위대까지 만들 정도니 국방에 어지간히 힘좀 썼겠네' 라는 건데 뜬금없이 왕권강화 드립치니 좀 웃겼습니다. 그런 상식 누가 모른다고.....
               
나와나 14-10-19 19:58
   
칼리님이 말하신

'조선은 시대에 뒤쳐진 쓰레기 군사력'

에 대한 근거로 쓰인 장용영 등에 대해 제 생각을 말했을 뿐

여기서 조선빠니 별 반박도 못 하고 댐빈다느니 답글은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게 예의라는 둥

왜 이리 상대방을 폄하하지 못해 안달이실까요?
 
여기는 말 그대로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일종의 토론 게시판입니다

그런데 혹시 댓글 지운 분이라는 게 저인가요?

저는 댓글을 썼다 지운 적 없는데요
칼리 14-10-20 01:17
   
장용영이든 뭐든 조선 내부에서의 군사력 강화는 별 효용이 없습니다.

 조선의 영정조시기가 평화로웠던 건 청의 황금기와도 겹치기 때문입니다. 장용영의 군사력은 애당초 남을 어찌할 수 있는 군사력이 안됩니다. 이웃 청과는 비교도 안되고, 이웃 일본땅에 가기도 힘든 수준입니다. 즉 비교할 건덕지도 없습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을 통한 서양의 발전시기에 겨우 활 가지고 이런 논쟁을 한다는 거 자체가 우습습니다.

 조선의 영정조 시대가 평화로웠던건 조선의 군사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동양에서 청의 군사력이 워낙 막강해서 분쟁이 생길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동아시아 국가라고 해봐야 청, 조선, 왜 3국인데, 뭔 비교할게 있겠습니까? 장용영은 대단한 군대가 아닙니다.
     
aosldkr 14-10-20 23:55
   
그렇게 제시하시더라도 정확한 통계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제시하시면 좀 더 신뢰와 정감이 갔을텐데요. 아쉽네요.
     
굿잡스 14-10-22 11:51
   
조선의 영정조시기가 평화로웠던 건 청의 황금기와도 겹치기 때문입니다. 장용영의 군사력은 애당초 남을 어찌할 수 있는 군사력이 안됩니다. 이웃 청과는 비교도 안되고, 이웃 일본땅에 가기도 힘든 수준입니다. 즉 비교할 건덕지도 없습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을 통한 서양의 발전시기에 겨우 활 가지고 이런 논쟁을 한다는 거 자체가 우습습니다>??

윗글에서부터 뭔가 제대로된 데이타를 가지고 나온 논거가 아니라

대뜸 쓰레기 어쩌고에 산업혁명 어쩌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좀 그렇군요.

기본적으로 장용영은 국왕 호위친위부대죠. 최대 1만 2천명으로 규모가 큰편이지만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청와대 경호원들임.(넓게는 수도 방위도 담당) 이들이 전쟁에서 외

세에 맞서 1차로 싸울 부대는 전혀 아닐 것이고.

님은 정말 조선이 마냥 쓰레기 군사력 어쩌고라고 생각하심??

중고딩 시간에 나선정벌 1,2차 전투는 배운적 없습니까??

러샤가 동진하면서 흑룡강 일대에 성을 쌓고 청군과 충돌하면서 청군이 연일 패배를

거듭하자 그들의 낙후된 무기 수준에서 조선의 조총부대를 요청 1654년과 1658년

1,2차 나선정벌에서 조선 총수병의 거듭된 활약으로 러샤 총병들을 전멸시킨 사건은 모

르심?(물론 여기에는 활도 보조로 활약을 했고.)


우리가 말하는 개인 화기의 실제 위력적 시대는 다름 아닌 독일 프로이센의 드라이제에

의해 19세기에 가서야 나온 후장식 총이 개발되고 분당 30발 가까운 연사와 정확도를 가

지게 된 총이 나와서 부터임. 이게 이후 19세기 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전면

적으로 활약하면서 유럽 주변국들이 앞다투어 후장식 총 개발이 붐을 이루었고.

그 이전까지 즉 님이 말하는 산업혁명 어쩌고 시기 즉 17,8세기 그리고 19세기 중엽까지

도 수석총 즉 나선정벌에서 러샤 총수병이 가지고 있든 게 유럽 주력 총기였고.

조선은 임진시기 이미 항왜 세력인 김충선등 조총부대들이 귀화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본격적 조총부대가 주력 부대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그런 조총보다 더 우수한 자체 개발

까지 한게 숙종시기 박영준의 천보총으로 사거리가 천보에(1800미터 1.8킬로) 달할 정도

로 우수했음. 이후 거듭개발되며서 1737년에 대량생산에 들어갈 정도에 10만정을 보유했

던게 당시 18세기 조선의 조총부대와 전력이였음.

여기서 보면 조선의 주 총은 화승총이고 유럽의 주력 총은 19세기 중엽까지 사용된

게 수석총인데 이게 딱히 전시에서 그렇게 엄청난 차이를 가져 온게 아닙니다.

단지 수석총은 화승총이 가진 우천시나 격발시 부싯돌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지

여전히 분당 1발 정도의 연사에 정확도도 떨어지고 무엇보다 화승총에 비해 성능이

높지도 않으면서 제작 단가는 더 비싸음. 이때문에 화승총이고 수석총이고 기본

밀집 사격에 2,3단으로 돌아가면서 연사 체계를 갖추었던 이유이고.

나선정벌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런 조선의 화승총과 러샤의 수석총과의 대결에서

조선 정예총병의 활약으로 얼마든지 러샤를 궤멸시켰던 것만 봐도 당대

조선 총수병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고 무슨 유럽의 총기가 조선에 비해

마냥 우월하니 어저고 할 소리 못할 이야기에 더구나 무슨 조선 정도의 인구덩치와 군사

력을 갖춘 국가가 당대에 유럽이고 세계사에 그렇게 많은지 부터 함 공부해 보시길 바랍

니다.
     
굿잡스 14-10-22 12:22
   
그리고 좀더 첨부하자면 님은 당시 활을 대단히 무시하시는 경향이 있는데

본격적 후장식 분당 30발 정도의 연사와 정확도의 위력을 가진 개인화기가 나오기전의

화승총이나 수석총은 그 나름의 장점도 있지만 어떤 장소에서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당시 고전적 즉 기마술이나 기사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명청 교체기의 분기점이 된 샤르후 전투에서 광해군이

명의 요청에 의해 1만 5천명의 나름 대군을 파병했지만 먼 거리의 원정에 지치고 굶주림

속에 제대로된 방어 시설 없이 외부에 노출되자 연사가 떨어진 우리의 조총부대(항왜세력도

참가)의 위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기동력을 앞세운 후금의 기마병에 쓸려 버리는 형태가

나타난 것임. 즉 전쟁이라는 것이 아무리 스펙 어쩌고 해도 육군과 공군의 싸움등 차원

다른 급이 아닌 이상은 지형 지물 군세나 야간 기습 기후등 다양한 조건과 적의 여러

전술적 운용에 따라 얼마든지 객관적 우수한 무기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당하거나

전멸할 수 도 있는게 전쟁 양상이라는 기본적 이해는 깔고 봐야 할 것이고.(도리어 주변

창수병이 제대로 호위를 못해주면서 총병이 기마병에 썰려 나감)

병자호란 역시도 인조반정후 이괄의 난으로 주력 정예조총부대가 상당한 타격을 입고

북방이 약세진 틈을 알고는 청군의 기습적 남하때문에 유효했던 거지 마냥 조선부대가

허약했다고 봐서도 곤란합니다. 이런 수모를 알얐기에 효종 이후 계속해서 여러

고전적 무기부터 방진 체계에 개인 화약무기고 포병도 더욱 진화되고 자체 노력을

거듭했던게 조선 후기의 군사력이였고. 그외 에도시대의 화포를 장착한 선박이 우리

내로 기어 들어와서 저항하자 조선 수군이 발빠르게 대처해서 납포한 사건만 봐도

조선의 전반적 군사력을 무슨 쓰레기 수준으로 묘사한다는 건 웃기군요.

님의 논리식이면 오늘날 울나라가 잽을 점령 하지 못하기에 군사력이 허약한 좃밥 수준

이라고 이야기 하는 거나 별 다르지 않을 것임.

그리고 현대에도 어느 나라고 지금의 미국 정도 아니면 대외 원정은 늘 무리과 부담을

주는건 당연한 이치이고 저 서유럽 프랑스 영국이 전군을 데리고 조선을 치러 오기 힘든건

마찬가지. 단지 유럽은 이런 서로간의 인접 국간에 무기 교류가 빈번해지다 보니

후장식 총기로 나아갈 수 있게된 것이지 우리도 유럽과 가까운 거리였다면 어떻게든

발빠르게 흡수했겠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동북아쪽에서 나름 주변 수준에 맞는

상응하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무시할 수준은 전혀 아니였다는 점을 알아서면 하군요.

이후 대한제국이 들어서 연대급 군편제가 1903년 완료되고 당시 기관총도 들어온 상태에

본격적 징병제의 대규모 군편제로 이어질 부분이였으나 러샤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영,미의 지원을 등에 업은 잽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후 1904년부터 본격적 대한제

국의 근대 조세권을 강탈하고 1907년 군 해산의 치욕으로 이어지지만 이때 저항했던

대한제국의 일부 군병들이 결코 호락하지 않았던게 당시 서양인의 목격담에 만약 당시 매국

파가 대한제국 군대의 기관총과 탄약고에 미리 빼돌리는 손을 써지 않았다면 당시 잽병사들

이 참패했을 정도로 호락한 수준은 아니였음(물론 이후 이런 본격적 전투 훈련을

받은 이들에 의해 항일 투쟁이 본격화 된 계기였고.국권 강탈의 어려운 시기에도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2500명과 여러 독립 항일병들이 잽 5만 대군을 물리친 청산리

대첩의 전과도 기억해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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