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어그로님의 발자취를 통해서
645년 1차 고당 전쟁에서 당측이 3대 전투로 불리는 건안성,신성, 주필산 전
투(안시성) 중 주필산에 대해 사료를 통해서 왜 고연수, 고혜진이
급파한 15만 대군(각 성에 주둔한 몇만 단위의 병력 외에 급파한 병
력수로는 드러난 기록상에선 고구려 역대 최대를 보이는)의 지휘자가 될 수 없는지
그래서 왜 주필산 1차 고연수의 실패가 주필산 전투의 전체 실패도 고구려의
일방적 피해가 아니였음을 차근 차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략설계 14-09-15 11:38 너 고연수 가지고 자꾸 헷소리할래??
니가 15만을 봤어??
고연수군 15만이 역사서 어디서 나온줄 알어??
고구려는 책이 없고 다 중국역사서여..
구당서에 "고연수군 15만6천8백명 항복"
멀 붙잡긴 붙잡어 항복이라 나오는데..
실제 전투에서, 고구려군 1만 전사.. 산 위의 고연수군 3만6천800명 죄다 항복이고..
이중 고연수를 비롯해서 군 간부 3,500명 당으로 압송이고..
말갈병은 생매장이고..
도망간 병사 포함해서 실병력을 임용한님 저서 "전쟁과역사" 6만 정도로 보고 있어..
고연수군 "전멸이다"
깨져도 이렇게 깨진 전투가 없는데.. 멀 붙잡어??
당태종이 뭐란 줄 알어??
"한번으로 싸움으로 고구려를 깨뜨렸다"고 해..
"깨뜨렸다"고..
이 패전으로 "석황성, 은성의 군사가 성을 버리고 도망가고, 사방 수백 리에
인가가 비었다"고 하는데.. 멀 붙잡어??
인터넷 다니면서 패전을 미화하는 특이한 습관있냐??
한번 싸움으로 군대가 사라졌는데 고연수는 당태중한테 무릎꿇고 항복하고,
멀 붙잡어??
6만이 사라지고 6만을 없애는 과정도 니 눈깔엔 죄다 붙잡은걸로 보이냐..
아는건 쥐뿔도 고구려밖에 없는지 고구려 얘기만 하면서
고구려도 헷소리를 해대고 모르면 어뜩하냐??
앞으로 먼 얘기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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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그로님은 구당서 하나만 신기하게도 철썩같이 의지해서리
(이외 삼국사기. 신당서, 자치통감, 책부원귀, 삼국사절요,전당문, 당회요,
책부원구등 여러 사서에서 이관련 기록들이 많은데 말이죠)
고구려군 15만은 전멸해니 6만은 사라지고 6만은 없애고 어쩌고
신나게 어그로짓을 열심히 해댑니다.(그리고 이 답번을 보라고 여기 저기 주
제와 상관 없는 곳에까지 따라와서 댓글을 열심히 답니다.)
본격적 사료로 들어가죠.
6월 2일 백암성을 항복받은 당나라 이세민은 약해진 건안성을 먼저 치자고
하고 이세적은 북쪽에 있는 안시성이 식량 요충지인 요동성을 공략해 버리면
보급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안시성 공략을 대대적으로 먼저하는 의견을 내
면서 당의 주력이 안시성으로 몰리게 됩니다.
(윗 링크는 요동 일대 고구려 성곽 배치도)
이런 가운데 고구려는 15만 대군을 급히 안시성 일대로 보내게 되는 것이죠.
이러면서 그 일대 주필산에서의 전투가 시작됩니다.
아래 기록은 이런 15만 고구려군이 안시성과 연계된 공략에 이세민이
우려를 보내고 있는 내용입니다.
○[太宗이] 安市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에 高[句]麗의 北部傉薩 高延壽와 南部傉薩高惠眞이 [그들의] 군대 및 靺鞨의 무리 15만을 이끌고 와서 [安市城을] 구원하였다. 太宗은 이렇게 말하였다.“저들이 만약 군사를 정비하여 安市[城]과 연합을 하여 城壁을 쌓고, 높은 산에 의거하여 城中의 곡식을 날라다 먹으면서, 靺鞨의 무리를 풀어 우리의 牛馬를 약탈하여 간다면, [우리가] 공격을 하여도 함락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上策이다. 城中의 무리를 이끌고 밤에 도망가는 것이 中策이다. 우리와 싸움을 벌이면 사로 잡힐 것이다.”
이런 가운데 15만 대군을 이끈 총사령관 대대로(大對盧)인 고정의가 당군에
대한 전략적 대치법을 아래 사료에서 이야기 합니다.
지구전과 보급 차단을 이야기 하지만 고연수는 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는 게 아래 기록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죠.
잠시 고구려의 관등명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대대로 고정의는 1관등이고
당측 기록으로 일부 남아있는 이름인 고연수는
5관등인 위두대형이고 위로는 태대사자, 울절, 막리지 그리고
대대로가 있습니다. 최고회의라는 대로회의 중 고연수라는 5관등은 최고
말단이고 고혜진은 아예 회의에 참석 불가라는 말이죠.(기록에는 없지만
이런 15만 대군을 이끌는데는 이런 고연수 외에도 여러 5관등과 상위
관등의 지휘자들이 존재했을 것임) 당연히 이 15만대군을 이끄는 최고 사령관
이 누구인지는 불문가지일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이 고연수가 15만 대군을 이끌고 가서 6월 21일~6월 23일까지의
주필산 전투에서 이세민의 유인책으로 전멸했다는 식의 구당서는 누가
봐도 의심될 수 밖에 없죠. 무엇보다 아래 이런 구당서의 오기를
바로 잡은 신당서의 기록인 이세민의
1차로 불리는 주필산 3일간의 전투의 결과와 이후 다시 이세민이 포위되는
[高句麗의] 어떤 大對盧가 [高]延壽에게,“내가 들으니 中國이 어지러우면 英雄들이 모두 일어난다고 한다. 秦王은 총명하고 용감하여 무너지지 않는 敵이 없고 싸움에 상대할 적이 없으므로, 드디어 天下를 평정하고 皇帝의 자리에 군림하니, 北狄이나 西戎에서 稱臣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지금은 온 나라를 쓸어 와서 謀臣·重將이 다 [이곳에] 몰려 있으니, 그 銳鋒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군사를 돈좌시켜 날짜를 끄는 한편, 몰래 奇兵을 보내어 그들의 饟道를 끊는 것보다 더 나은 계책이 없다. 한달이 못되어 군량이 떨어져 싸우려 하여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하여도 길이 없게 되니, 그때에 탈취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계책을 세워 주었으나, [高]延壽는 듣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安市[城]에서 40리 떨어진 곳에 주둔하였다.
아래 신당서 기록은 이런 고연수의 선발진인 군사병력수가
대략 5만(최대6만)정도임을 드러내놓고 있습니다.
기존 대대로 고정의의 책략과는 달리 고연수는 이세민의 유인책에 걸려 이
후 전사가 2만(신당서뿐 아니라 자치통감, 책부원귀, 삼국사절요에 다 2만으
로 기록할 만큼 압도적임) 생포가 3만 6천5백명중 3천 5백은 당 경내로 3천 말
갈은 죽여버렸다는 기록입니다(생매장). 그런데 재미난건 나머지 3만을 돌려
보냈다는기록이죠. 생매장까지 시키고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적군, 그
것도 무려 3만을 그냥 돌려 보냈다??
여기에는 순순히가 아니라 이세민이 3만을 돌려 보내지 않을 수 없는 후속타
가 존재합니다.
이게 바로 5,6만의 선발대 성격인 고연수외에 고정의 최고 사령관이 이끄는
9,10만의 본진 후속병력이라는 것이죠.
이세민은 이런 고연수를 항복시키면서 전세가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 보였지만
곧 이세민 친위 6군과 이적의 흑군이 재자 고구려에 포위되어 버리면서
고위급인 왕군악이 전사했고, 후방의 양홍례와 유흥기가 이끄는 병력과도 계
속해서 주필산에 전쟁을 이어갑니다. 이런 후속병력과 급박한 재전세 역전는
다름 아닌 항복한 일부 고연수 선발대가 아니라 최고 사령관인 고정의군 9,10
만 규모에 의해 재차 포위되는 상황속에 당측도 위협을 느끼면서
3만 고구려 병력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 어글로님은 재차 무슨 이런 고정의와 합세한 대략
11만 병력이 버티는데 안시성 공략은 어떻게 했니 어쩌고 반론을 펴기 시작합
니다.
이는 6월 20일 안시성에 도착한 이세민 본대는 이후 급파한 15만 고구려군을
상대하는 한편 요동도제1군총관인 장사귀를 먼저 안시성에 보내어 공략을 주
도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런 가운데에 이세민은 주필산에 최고 사령관이 이끄는 고정의 본대
의 장기 지구전 계책에 휘말리면서 계속해서 지루한 소모전 양상속
에서 고구려 내지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50여일간 발이 묶기는 형태가 계
속된 것이죠. 그리고 이세민이 친정 나온 전투에 수성전이 탁월한 고구려에
육박전도 즐겨하는 걸 뻔히 아는데 수나라 300만도 대패하고 돌아간
상황에서 수성전을 격파하기 위해 최소 3배의 공격 병력는 병법의 달인
이라는 당 이세민이 모른채 황제가 친정나온 병력수가
11만 정도의 병력을 맞으면서 안시성 공략의 동시 작전을
펴지 못할 정도의 적은 병력수를 데러왔다고 생각하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사고이겠죠.
太宗은 ‘오랑캐가 나의 계책에 빠져 들었다’ 하고, 左衛大將軍 阿史那社尔에게 명하여 突厥의 騎兵 1천을 이끌고 가서 유인하게 하였다. 고구려가 늘 靺鞨의 銳兵을 앞세우므로, 社尔의 군사가 싸우다가 패하여 달아났다. [高]延壽는 ‘唐[兵]은 상대하기가 쉽다’ 하고 30리 진격하여 산기슭에 진을 쳤다. 太宗이,“내가 너의 나라에 强暴한 臣下가 있어 제 임금을 죽였기에 그 죄를 물으러 왔은즉, 交戰을 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하니, [高]延壽도 그렇다 하며 행동을 멈추고 기다렸다.太宗이 밤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 李勣으로 하여금 步·騎兵 1만 5천을 거느리고 서쪽 산고개에 진을 쳐서 賊과 대적케 하였다. 長孫无忌와 牛進達로 하여금 精兵 1만을 거느리고 [高]句麗의 후면 狹谷으로 나가게 하였다. 太宗 [자신은] 騎兵 4천을 이끌고 깃발을 눕히고 高[句]麗 [陣營의] 북쪽 산 위로 올라 갔다. 그리고 모든 군사에게 ‘鼓角 소리가 들리면 돌격하라’고 하였다. 이어 朝堂에다 장막을 설치하고 말하기를,“내일 한낮에 이곳에서 오랑캐의 항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날 밤에 [高]延壽의 진영에 流星이 떨어졌다.
○ 이튿날 고구려가 [李]勣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바로 싸움을 벌였다. 太宗은 [長孫]无忌의 군사가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바라보고, 鼓角을 불고 兵幟를 사방에서 함께 들게 하였다. 고구려가 당혹하여 군사를 나누어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무리가 이미 어지러워졌다. [李]勣은 창을 든 보병을 이끌고 공격하여 그들을 무너뜨리고, 无忌는 그 후미를 쳤다. 太宗이 산에서 달려 내려오니, 고구려군은 크게 와해되어 2만급의 머리를 베었다.[高]延壽는 남은 무리들을 수습하여 산을 등지고 굳게 지켰다. 无忌와 勣은 [군대를] 합세하여 포위하고, 냇물의 다리를 철거하여 歸路를 차단하였다.太宗은 말고삐를 잡고 고구려의 營壘를 살펴 보고,“高[句]麗가 온 나라를 기울여서 왔으나, [大將旗를] 한번 흔들어 깨뜨렸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도운 것이다.”하고, 말에서 내려 하늘에 두번 절을 올려 감사하였다.[高]延壽 등이 事勢가 궁함을 헤아리고 바로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轅門에 들어 와서 무릎으로 기어 앞에 나아가 절을 올리고 命을 청하였다. 太宗이,“이 뒤에도 감히 天子와 싸우겠는가?”하자, 두려워서 땀을 흘리며 대답을 못하였다.
○ 太宗은 酋長 3천 5백명을 가려내어 모두 벼슬을 주어서 內地로 들여 보내고, 나머지 3만명은 [그 나라로] 돌려 보냈다. 靺鞨 사람 3천여명은 목을 베었다. 노획물은 牛馬 십만필과 明光鎧 1만벌이었다. 高[句]麗가 크게 놀라서 后黃과 銀의 두 城이 스스로 빠져 달아나니, 수백리에 人家의 연기가 끊겼다.이에 驛을 통하여 太子에게 [소식을] 전하고, 아울러 여러 신하들에게 글을 내려,“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니 이와 같다. 어떻게 보는가?”하였다. 거동하였던 산을 駐蹕山이라 이름하고, 破陣圖를 그렸으며, 전공을 기념하는 글을 돌에 새겼다. 그리고 [高]延壽에게는 鴻臚卿을 제수하고, [高]惠眞에게는 司農卿을 제수하였다.斥候를 하던 騎兵이 [高句麗의] 諜者를 잡아 왔는데, 太宗은 그 포박을 풀어 주었다. 그가 사흘동안 밥을 먹지 못하였다고 하자, 밥을 먹여 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신발까지 주어서 보내며,“돌아가거든 莫離支에게 전하라. 만약 군사의 동정을 알려거든 부디 내가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 가라.”고 하였다. 太宗은 모든 營壘에 참호를 파지 않고 斥候만 근엄히 할 뿐이었으나, 군사들이 군량을 운반할 적에 비록 單騎일지라도 고구려는 감히 약탈을 하지 못하였다.
<신당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