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동영상이 좀 지난 뉴스인데 링크 타고 함 보시길.
아래 보니 잘 모르시는 분이 계신데
우리 대한제국이 간도를 실효지배할 당시 청이 이미 지배했다는 식은
전혀 사실이 아님.
청내부 문서인 <동삼성정략>의 기록을 보면
잽은 1909년 엄연히 앞서 실효지배하고 있든 대한제국을 제외시키고 청과
간도협약을 맺는 국제법을 위반한 불법을 강행했고 이후 1910년에 가서야
청은 장백부를 설치하고 본격적 관할 입장을 보였단 말이죠(이는 대한제국
이 앞서 호구조사 및 세금을 거두고 치안유지등 실효지배하고 있었던 것과
는 엄연히 다름)
그리고 아래에서도 누누히 이야기 했지만 동만주 일대의 간도격인 두만강
700리 넘어의 공험진은 고려 이후 조명간에도 명확히 관철시킨 부분이고 고
려말 요동정벌과정에서 요동에서 압록 이서 지역에서도 고려는
이미 팔참로의 병영기지를 설치하여 운영했던 관계로 조명 초기에도 고려가
심양왕을 겸하듯 그 연장격으로 요동 봉성 이남은 조선의 내지격으로 인식
되고 있었음. 그러니 명보다 조선의 내지와 매우 밀접하고 직접적 관할 세
력권에 있던 여진족세력이 임진왜란의 대전을 틈타 세력을 키우고 조선이
약해진 틈을 타서 청을 건국하고 서토를 정벌하면서 이후 백두산일대등이
서로가 신성시했던 관계로(한편에서는 애초에 이 장백산이 만주족이 보
든 위치랑 우리가 아는 백두산이랑 다르다는 견해도 있음) 서로의 충돌
뿐 아니라 보호를 위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일종의 봉금지대화 된 것이죠.
어떤 분은 숙종 기록을 들먹입니다만 이런식이면 과연 애초에
오늘날 중공 이후 짱국과 정복왕조인 이민족 만주족 청이 어떤 명확한 통일
적 역사계승 관계를 말할 수 있는지 등으로 논한다면 상당히 복잡해지면서
단순한게 전혀 아님.
향후 근대적 영토개념과 국제법적 차원에서 이 간도 문제에 대해 시간나면
심도 깊은 이야기를 하겠지만 우선적으로 청은 이 간도내지에 대해 우리의
대한제국보다 영토의 실효적 지배에서 밀렸고 이후 일제와의 불법적, 일방
적 협약 이후에나 본격적 관부가 들어섰다는 사실을 주지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