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묘하게 중국쉴드치는 사람이 보이는군요 무슨 고대부터 쭈욱 중국이 강대국이었다고 하면서 주변국가들이 식민지는 아니었다라는 식으로 ㅎㅎㅎ 중국이 영토가 지금 넓다고 원래 넓었나요? 지금 중국인들이 전부 지나족일까요? 왜 중국 남부와 북부는 유전학적으로 완전히 다를까요? 그냥 정신건강에 해로워서 댓글에는 답안하겠습니다 이제 ..사람의 글에만 신경써야겠네요
왕건장 즉 왕건마을이라는 지명이 북경의 동쪽인 보저현에 있었다.
왕건장이라는 마을 옆에 쌍성하라는 지명이 있다.
평양(平壤)과
쌍성(
雙城)에 봉사(奉使)하였을 적에는 완악한 사람들이 함부로 속이지 못하였다
익재난고 제7권
유원 고려국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참리 상호군(都僉議參理上護軍) 춘헌선생(春軒先生) 최 양경공(崔良敬公)의 묘지명
고려사에는 왕건이 궁예의 명령으로 평양을 수복했음을 알수 있다. 왕건장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그것과 연관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위의 기록에서 쌍성과 평양이 근처임을 알수 있다. 즉 왕건장이라는 마을은 왕건의 평양점령때 생겨난 지명일 것이고 마침 근처에 쌍성이라는 지명도 있는 것이다.
목은시고 제34권
고려말의 목은이색이 쓴 지리설명과 모두 들어맞다.
원(元)의
요동(遼東) 함주로(咸州路) 부근인 심주(瀋州)에 쌍성현(雙城縣)이 있음을 들어 알고, 본국 함주 근처인 화주에, 옛날에 쌓았던 조그마한 성 둘이 있음을 인하여 모호하게 주청(奏請)하므로, 드디어 화주를
쌍성으로 그릇 일컬어 조휘를
쌍성총관(
雙城摠官)으로, 탁청을
쌍성천호(
雙城千戶)로 삼아 인민을 관할하였는데, 지정 16년에 이르러 원(元) 나라에 주달하여 총관과 천호 등의 직을 혁파하고 화주 이북의 땅을 다시 본국에 소속시켜, 지금까지 주현의 관원을 제수하고 인민을 관할하게 되었으니, 반적으로 말미암아 빼앗겼던 땅을 대국에 호소하여 다시 찾아낸 것입니다. 이제 받들건대 “철령의 이북ㆍ이동ㆍ이서는 원래 개원로(開原路)에 속한 것이니, 관하 인민을 그대로 요동에 붙이라.” 하셨는데,
철령의 산은 왕경(王京)과 겨우 3백 리의 거리이며 공험의 진은 변방의 경계로 한정된 것이 한두 해가 아닙니다.
양촌선생문집 제24권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21년(1388, 우왕14) 2월
쌍성의 지명유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쌍성 개원 철령은 모두 근처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철령에서 고려말 수도 개경의 거리는 3백리이다.
지도제공 향고도님 1884년 제작된 청나라고지도(철령이라는 지명이 계주위에 표기되어 있다.)
철령즉 백하동쪽이자 계주근처에서 300리정도면 천진에서 그 남쪽 대성현과 청현정도이다. 실제 고려말 고려궁궐의 위치는 청현에서 조금 북쪽으로 지금 대성현과 천진근처로 추정되었다. 고려는 궁궐을 수도근처로 여러군데에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아마도 원나라공주들이 자기본거지인 북경성으로 가기 편하기 위해 궁궐을 처음 개경이던 청현에서 조금 북쪽으로 옮겨 지었을 것으로 본다
원은 합라란부(合懶蘭府)를 함흥에,
쌍성총관부(
雙城摠管府)를 영흥(永興)에 두었다.
임하필기 제11권
중국학자들이 그린 중국역사지도에도 합라는 난하일대로 나온다. KBS역사스폐셜에서 일본학자가 소장한 조선지도에도 조선의 함흥은 난하근처로 나온다. 즉 태조이성계의 고향 쌍성은 바로 보저현의 쌍성하가 있는 곳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