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은 우리 한민족사처럼 외세와의 전쟁으로 얼룩진 역사를 가진 나라다.
우리들이 이순신장군을 숭배하는 것처럼 누란의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들이 숱하게 교과서에 등장한다.
국가의 면모를 갖춘 최초의 장수 왕조는 리씨왕조로써 우리 역사로 치면 고구려라할까, 부여라할까, 우리들처럼 베트남 국민들이 애착을 갖고 있는 그런 왕조다.
11세기에 건국한 안남왕국 리씨왕조는 외세를 물리치고 세운 베트남 최초의 완전한 독립국가였으며 200여년간 지속된 강력한 왕조였다.
외세를 물리침은 물론 많은 문물을 발전시킨 왕조였기에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우리의 고구려 광개토대왕처럼..
13세기에 쩐씨왕조를 세운 쩐두도장군의 궁중 쿠데타로 망하는데 쩐씨 왕실 측의 리씨 전멸작전에 따라 왕족 리씨들은 멸족되었다.
베트남 정부는 안남왕국에 대한 애틋한 국민들의 여망을 모아 왕국의 수도였던 고대도시 탕룽(昇龍)에 사당을 세우고,
매년 안남왕국 건국일인 3월15일이면 제사를 드린다. 왕손 리씨를 제사장으로 세우려 했으나
베트남 안에서 왕손을 찾을 수 없어 탕룽 시장으로 하여금 제사장을 대행토록 하고 있었다.
그런데 리씨왕조의 후손이 이역만리 한국에 살고 있다는 소식에 접한다. 그들이 한국의 花山 李氏..
花山 李氏 시조는 13세기 초 고려 고종 때 안남왕국 리(Li)씨 왕조의 마지막 왕자 이용상이다.
이왕자는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바다로 탈출,필사의 항해 끝에 지금의 황해도 옹진군 화산에 상륙한다.
당시 고려 조정은 한자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용상 왕자와 필담을 나눈 끝에 그가 안남국 왕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를 화산君으로 봉하고 고려 여인과 결혼시켜 고려에 정착하도록 도왔다.
화산 이씨 가문을 빛낸 대표적 인물은 시조 용상의 6세 손 맹운이 공민왕 때 호조전서를 역임한 후
국운이 기울자 해주 원통리에 은거하면서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으며 이태조가 세 차례에 걸쳐 한성판윤의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 모두 거절했다.
맹운의 장남은 사헌부 감찰을 거쳐 재령군수를 역임했으며 차남은 송화현감,벽동군수를 지냈다.
지금도 종친회장은 이렇게 교육을 시키고 있다. "우리는 안남왕국 왕손이다.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화산 이씨는 1985년 현재 남한에 258가구, 1,31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구 달성군에 집성촌을 이루어 모여 살고 있다.
1990년대 초 한국과 국교 수립을 앞두고 있던 베트남 정부는 13세기 초 멸족된 줄로만 알고 있던 옛 리씨 왕족의 후손들이
한국에서 상당한 가문을 이루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베트남 정부는 이들을 왕손으로 예우하고, 매년 화산 이씨 종친회장을 특별히 초청, 탕룽의 제주로써 제사를 드리도록 하고있다.
베트남 정부는 한국 화산 이씨의 종친회장이 호찌민시의 탄손넛 공항에 도착, 탕룽으로 이동,
종묘제사를 지내기까지의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TV에 방송했고 , 그 광경을 시청한 베트남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베트남을 건국한 시조로 모시고 있던 리씨왕조의 후예들이 멸족되지 않고 이역만리에서 혈통을 이어왔고
마침내 그 종손이 돌아와 직접 제례를 지내게 되었으니 그 감격이 얼마나 컸을까..미루어 짐작 할만 하다.
화산 리씨와 같이 된 우리 한민족사의 왕족, 그 후예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서북쪽 고마현에 고구려현을 세운 고구려 마지막 황제 보장왕의 아들 약광왕자와 고구려 유민들,
왕손 중 한분이 "고구려는 망하지 않았다. 살아있다. 고구려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고 절규했으며,
또 만주 여진족을 규합 金나라와 後金(淸)을 세운 신라 마지막 황제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와 이를 따르던 신라 김씨의 후예들,
청 왕조 신라 김씨의 왕손 중 한분이 자기의 姓은 金씨라고 크게 써 보이며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들은 살아있는 우리 한민족사의 산 증인, 베트남 정부처럼 그들을 찾아 세움이 어떨지..중국과의 역사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도..
(KBS 역사 스페샬에 의견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