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처음으로 글올리네요,
역사학을 전공하고 있던 저로서는 가생이닷컴을 보면서 참,,, 역사적으로 모르는 분들이 많구나
라는 생각이 드네요,
도대체 근거도 불확실하고, 논리도 없고 사료에 근거한 비판이 아니라 우기기식으로
내생각은 이렇기 떄문에 이렇다, 이런 토론이 대체 어디있습니까....
제가 쓸 것은 가장 쟁점이 되는 고조선-고구려-발해사의 검토입니다.
전제를 깔겠습니다. 저는 민족주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민족에 관해서 궁금해하시니 참고하겠습니다.
먼저 고조선입니다.
1. 발생연도
고조선은 요령성에 있는 국가이지요, 거슬러 올라가보면 기원전 800년경부터 중국 사서에 나옵니다.
(요청하시면 사료 그대로 제공해드리겠습니다.)
요령성의 문화는 황하 문화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문화이지요,
그러나 고조선의 발생년도를 삼국유사의 기원전 2333년으로 잡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빨리 잡아야 기원전 800년 -100오차입니다.
2. 고조선의 한국사문제
고조선은 맨 처음은 요하 유역에서 시작한 국가라는 것이 현 학계의 정설입니다.
그곳에서 발굴된 비파형 동검과 큰 집터 등은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유물-유적이지요.
그러나 전국시대의 연나라와 싸워 서방 2000리땅을 빼앗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현 학계에서는 그 때부터 고조선은 한반도로 내려와서 평양 부근에 도읍을 잡고 망할때까지
그 곳에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지요, 비파형동검이 여기서 엄청나게 발굴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조선의 민족을 따지기에는 너무나도 그 시절은 민족의 개념, 더구나 국가의 개념도 안 잡힌
국가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국 사서에는 고조선을 중국으로 끌어들인 사료가 전혀 없습니다.
단, 한국에는 구전으로 계속 고조선을 최초로 치다가 결국 구전으로 엮인 삼국유사에 의해
기록화되고, (그 전에도 고조선에 관한 사료는 있었으나 소실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이 고조선을 본따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는 고조선은 우리역사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역사학을 할 때에 사료도 물론 중요하고, 유물-유적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인식이 어떠했는가? 라는 점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3. 위만은 한국사람이었는가?
위만 집단은 철기를 가진 이주집단입니다.
위만의 혈통에 대해서는 논쟁이 많지요.
그러나, 중요한 점은 당시는 민족의 개념이 잡혀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위만이 '어느민족'인가는 그 시대에서 중요치 않았습니다.
다 섞여사는 사회고 비슷비슷하게 생긴사람들끼리 민족구분지은 것은
다 현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게 아니라 위만이 한국사회로 들어와서 어떤 영향을 주었고
어떤 문화를 창조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고조선과 중국은 가까운데
영향을 안받을리가 없지요. 위만의 한국 진입은 신 문화의 한국전파. 정도로 이해를 하고
민족에 관한 점은 접어두는 편이 타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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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고구려입니다.
고구려 논쟁이 되지요. 그러나 이 나라를 중국이 무슨자신감으로
왜 동북공정에 포함시키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중국사라는 근거가 전혀 없어요.
고구려는 엄연한 우리역사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뇌리에 예전부터 고구려는 우리나라. 삼국중 일원이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은 고구려를 포함시킴으로써 우리나라의 인식을 강화시켜주고
후삼국시대 역시 고구려를 당연히 우리의 역사로 보았습니다.
삼국을 다룬 역사서마다 삼국을 다 다룹니다.
특히 김부식은 사대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고구려는 당연히 우리나라역사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왕건이 발해유민을 받은 명분도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명분입니다.
특히 고구려가 평양천도를 하면서 한반도역사에 적극적으로 진입한 그 순간 그 인식은 훨씬 강해졌습니다.
고구려는 뭐 더 말할 필요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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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발해는 우리역사라고 하기는 좀 많이 애매한 부분이 많습니다.
발해는 그러나 중국사도 더더욱 전혀 아닙니다.
<그 외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 나라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는 분쇄되야합니다.
1. 지배층이 대부분 고구려인이었다.
발해는 다민족국가이고 국가의 중요한 구성원은 전부 말갈인이었습니다.
발해는 주변국에 자신이 고구려의 후손임을 알리고자 했으나, 거란도 고구려의 후손을 칭했습니다.
그 이유는 고구려는 만주지방에서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었던 나라였다는 이야기이지요.
중국본토는 한나라를 정통으로 잡듯이 말입니다.
고구려의 후손을 칭하는 것은 국가의 정통성확보에 큰 역할을 합니다.
2. 중요합니다. 발해 이후 전혀 사람들의 인식속에 '발해'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어떤 사서에도 발해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며,
발해는 신라에서도 그냥 북국으로 칭해질 뿐 신라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발해에 대해서 최초로 조명한 사람은 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입니다.
그러나 이미 발해멸망후 1000년에 가까운 격차이지요.
그 전에 몰랐다가 유득공이 우겼다고 그게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후세사람들의 인식이 어떤가? 라는 점. 절대로 간과할수없이 중요합니다.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왕건의 발해유민포섭. 왕건은 전쟁을 치룬 후라
노동력이 필요했고 발해유민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명분은 그렇게 한 것이지요.
그러나 왕건이후 발해에 대해서 신경쓴사람은 아쉽게도 아무도 없습니다.
3. 발해의 무덤양식은 고구려스타일이다.
정혜공주, 정효공주묘에 관한 문제입니다.
한명은 중국양식무덤, 한명은 고구려양식무덤을 쓰고있지요.
고구려양식은 당연합니다. 뭐 무덤양식이 나라가 바뀐다고 달라질리 없죠.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당시 무덤을 그렇게 쓰는게 일반적이었으니까요.
중국양식무덤은. 일종의 유행이었습니다.
당나라는 당시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주변국들, 특히 지배층들은 당나라문화를 유행처럼 누립니다.
상경용천부도 장안성을 본따만든 것이지요.
발해는 중국사에 이 이유(중국양식)로 포함시켜야된다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한족은 발해에 거의 살고있지 않았고, 고대 만주의 국가들을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전부 배격되야하고 동북공정 자체가 없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발해를 우리민족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도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위험한 생각입니다.
몇가지 반박이 가능한 근거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면 우리도 중국과 똑같은게 되는겁니다.
물론 중국사보다는 한국사에 가깝겠지요.
그러나 가장 확실한 것은 발해는 <그 외의 역사>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반론이나 질문있으시면 댓글로 달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