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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5-24 01:54
[일본] '동양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진창현 이야기
 글쓴이 : 아저씨아님
조회 : 3,868  

세계 최고의 바이올린 명장 '동양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진창현을 추모하며


끝내 한국국적(韓國國籍) 지킨 '동양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지난 5월 13일 별세하신 '세계 5명 뿐인 바이올린 명장' 재일(在日) 한국인 진창현씨를 추모합니다.


진창현의 바이올린은 전설적인 명기(名器)인 스트라디바리우스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경화와 강동석, 아이작스턴, 로스트로포비치, 헨릭 쉐링 같은 내로라하는 세계적 명연주자들이 그의 고객들이다. 그는 세계에서 감사(監査)를 받지 않고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만들 수 있는 5명 중 한 사람이다.


극한 상황에 부딪히면 저도 모르게 강한 힘이 생겨납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역경이 자기 힘이 되느냐고 하느냐, 터무니없는 이야기다’라고 하는데요, 저는 제 자신이 역경에 의해 길러지는 걸 체험했습니다. 재일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아 잃은 것이 많았지만, 그 역경 덕분에 얻은 다른 기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명실상부 현역 최고의 바이올린 제작자로 우뚝 선 진창현, 그 비결을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나를 그토록 서럽게 했던 일본 사회의 차별과 모진 역경”이라고 대답했다. 

경북 김천에서 태어난 진창현, 14살에 일본행을 결심하다
진 창현은 1929년 경북 김천의 이천마을에서 태어 났다. 조용하던 마을에 어느날 두꺼비기름을 팔러온 떠돌이 약장수가 나타난다. 손님을 끌기 위해 약장수는 바이올린을 킨다. 난생 처음 듣는 바이올린 소리. 창현은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다. 

소학교에 들어가게 된 창현. 담임 선생님으로 일본에서 아이카와 선생님이 부임하고 그 선생님이 창현네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되면서 창현과 바이올린의 깊은 인연이 시작된다. 아이카와 선생님은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한국에 올 때 바이올린을 가져온 그는 창현에게 시와 바이올린을 가르쳐 준다. 

시간은 흘러 일본의 패색은 점 점 짙어지고 한국으로 부임해 왔던 시골소학교 아이자와선생까지 징병할 만큼 상황은 나빠지기 시작한다. 정신적 지주를 그렇게 떠나보낸 창현. 그는 아이자와 선생님과 같은 선생님, 중학교 영어교사의 꿈을 키운다. 선생님이 떠나고 얼마 안지나 창현의 아버지는 빚더미만 남겨 놓은채 사망하고 창현은 어려운 형편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다. 꿈이 좌절되는가 싶던차에 일본 중학교는 학비를 받지 않는 다는 이야기를 들은 창현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14살 어린 나이에 홀로 일본행을 결심하게 된다.

바이올린 제작의 길을 가다
일본에 간 창현은 일본에서 힘겹고 고된 노동을 하며 학업에 정진한다. 그러는 사이 한국은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어렵게 공부하여 일본 메이지 대학 영문과에 들어가 교원자격까지 따지만, 그의 선생의 꿈은 재일교포,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좌절되고 만다.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시골의 소학교에서도 거절당하는 창현. 그의 일생의 목표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젊은 시절 저에게 가장 큰 역경을 안겨준 건 국적 차별이었습니다. 당시 재일한국인은 일본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어요. 바이올린을 깎게 된 동기요? 그저 먹고살려고 시작한 겁니다.” 

그러나 좌절해 있던 그에게 희망을 준 것은 놀랍게도 우연히 교정에서 강연회 문구였다. 그것은 바이올린과의 재회였다. 강연회 내용은 이토가와 교수의 바이올린 연구 성과 발표회였다. 전쟁시 전투기 제로센과 잠수함등을 디자인하던 이토가와교수는 패전 후 무기연구가 금지되자 바이올린을 연구하게 된 사람이다. 이 강연회에서 창현은 세계 최고의 명기 스트라디 바리우스를 알게 되었다. 방황하던 그는 이 강연회에서 "20세기 최첨단 기술로도 300년 전 바이올린 명기(名器)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를 재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에 자극받아 바이올린 제작 외길을 걷기 시작했다. 

28살의 진창현 : 젊은 시절 나가노(長野) 오두막의 어두운 석유램프 불빛 아래에서 바이올린을 깎았다.



'바이올린의 명기'라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를 재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 비쳐드는 것을 느꼈죠. '불가능'이라는 말이 도전정신을 일깨워준 겁니다.“

불가능’이란 단어와 ‘영원한 신비’라는 단어가 자극적인 울림이 되어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진창현을 뒤흔들었다. “아무 잘못도 없이 꿈을 좌절당하고 인생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그 당시의 나로서는 내 앞에 가로놓인 운명에 정면으로 맞서보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이상하게도 바이올린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지만, 그의 귀는 좋은 소리를 감별하는 데 유별났다. 그래서 자주 들렸던 악기상의 주인에게, 바이올린을 만들고 싶으니 장인을 소개해 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여든이 넘은 어느 장인을 찾아가 제자 되기를 청했다. 젊은 제자가 생긴 장인은 처음에는 숙식은 물론 도구까지 모두 물려주겠다며 기뻐했으나, 그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듣자 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그 일을 안타까워 한 악기상은 이후로, 동경에 있는 바이올린 장인들을 거의 다 소개해 주었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문전박대당했다. 그는 수제 바이올린 장인의 도제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바이올린을 만드는 공장에 들어가 기초적인 기술을 먼저 배우자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키소에 있는 스즈키 바이올린 공장을 찾아갔는데, 쉬울 줄 알았던 그것마저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때가 스물여덟 살이었고, 그동안에도 생계를 위해 온갖 일을 섭렵했다.

조선인에게는 바이올린 만드는 비법을 가르쳐 주지 않겠다고 일본 바이올린 장인에게 거절 당한 창현은 어렵게 얻은 스트라디 바리우스 도면을 가지고 독학으로 바이올린을 만들기 시작한다. 기술을 전수해줄 일본인 스승을 구하지 못해 외톨이가 되자, 그는 비로소 어떤 구애도 없이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무한히 펼칠 수 있게 됐다. 어떤 이가 건설현장에 내버려진 폐자재들을 바이올린 재료로 쓰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진창현은 그렇게 무모하게 바이올린 제작인생을 시작했다. 

그때는 하루에 3시간밖에 안 잤어요. 만드는 족족 오두막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올렸죠. 160대쯤 되니 앉을 자리조차 없는 겁니다. 먹을거리도 다 떨어지고 해서 바이올린을 팔기로 했어요.”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다


후지TV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海峽を渡るバイオリン)의 엔딩장면에 나온 진창현과 그의 아내. 

벌목 삼판장에서 인부로 지내며 변변한 주거공간 없이 허름한 판자집에서 연명하던 그는 마을의 만물상집 딸 나미코를 만나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나미코 또한 창현이 만든 바이올린을 보고 그를 믿게된다. 나미코의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그 둘은 결혼한다. 이리하여 창현의 허름한 바이올린 공방에는 바이올린 만드는 사람이 한 명이 아닌 두 사람이 된다.

홍난파 친구 시노자키 선생과의 인연 

그는 졸업 이후 한번도 발 딛지 않았던 동경으로 올라갔다. 악기상을 몇 군데 들러보았지만 바이올린을 사주겠다는 곳은 없었다. 그러다가 모교 근처에 있는 악기점에서 악기 브로커를 만났다. 그는 진창현의 바이올린을 세심하게 시험해보더니 “세공은 아직 부족”하지만 “소리는 상당히 좋”다면서, 악기점에 내놓고 팔기는 어렵지만 음질이 좋으니 바이올린 교습용으로 판로를 찾아보라고 권했다, 그러면서 일본 바이올린계의 세 거장 가운데 한 사람인 시노자키 히로구츠를 소개해주었다. 그날 시노자키는 진창현의 바이올린 열 점을 대당 3천 엔에 모두 샀다. 그러면서 진창현에게 동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집을 얻어 주겠다는 제의를 한다. 서른두 살에서야, 바이올린 장인의 길이 비로소 열린 것이다.

진창현은 이 만남을 계기로 시노자키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학교 근방으로 이사를 왔다. 선생이 자신이 가르치는 어린 학생용 바이올린을 만들어줄 것을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곳이 지금까지 50여 년간 살고 있는 센가와로 여기에서 진창현은 쓸모없는 폐자재를 명기로 탈바꿈시켰다. 

시노자키 선생과의 인연이 시작되고 2년쯤 지난 어느 날 선생은 뜬금없이 진창현에게 물었다. 

“기미 코란하 싯테루노?(君, 洪蘭坡 知ってるの. 자네 홍난파 아는가?)” 


<홍난파 1898년 - 1941년>

그때 진창현은 홍난파가 조국 한국과 일본에서 이름을 날린 천재 작곡가인 줄 모르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진창현에게 선생은 도쿄음악대학 동기생 홍난파에 관한 일화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함께 하숙을 했을 정도로 절친한 친구 사이로 선생은 홍난파가 지은 곡을 들고 아사쿠사(淺草)로 나가 바이올린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솔직히 선생처럼 고명한 일본인이 왜 보잘것없는 나에게 잘해줄까 의아했습니다. 사연을 듣고 보니 선생은 대학시절 만난 조선학생들과의 교류로 조선인에게 친밀감과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고 애환까지도 알고 계셨던 겁니다. 제 바이올린 제작의 운명을 바꿔준 인연은 선배 재일동포들이 맺어주신 것이더군요.”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지독한 가난의 늪에서 탈출하고, 시노자키 선생과 대당 3000엔으로 시작한 바이올린 가격은 7000엔까지 올랐다. 생활이 정상궤도에 오르면서 2남1녀의 자식도 태어났다



한국 국가인 애국가(愛國歌) 작곡가인 안익태(安益泰) 선생(사진)도 시노자키 선생과 음대 동창으로 교분을 나누고 있었다. 스페인에서 활동하던 안 선생은 일본으로 연주회 지휘를 하러 올 때면 진창현의 집을 찾았다. 그때마다 망가진 현악기들을 맡겼고 진창현은 정성을 들여 고쳤다. 

“훗날 고향 어머니를 만나니 ‘넌 대체 일본에서 무슨 일을 하길래 외국에서 온 지체 높은 양반이 나에게 그렇게 큰돈을 쥐어주느냐’고 말씀하시더군요. 안 선생은 아무 내색 않고 저를 도와주셨던 겁니다. 당시엔 한일 간에 국교가 수립되기 전이라 한국으로 송금하기 힘들었거든요.” 

알고 보니 안 선생은 서울에 들를 때마다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본점)로 진창현의 모친을 불러 사례를 했던 것이다. 그의 바이올린 제작 인생은 탄탄대로를 달리는 듯 보였다. 

간첩 혐의로 끌려가 고문 받다 

그러나 거칠 것 없을 것 같던 그에게 다시 한번 큰 시련이 찾아왔다. 사건은 한일 국교가 수립된 뒤 조국을 찾았을 때 벌어졌다. 1968년 5월 도일 25년 만에 고향인 경북 김천의 이천(梨川)마을을 찾아간 진창현을, 이복형이 북한 스파이로 밀고한 것이다. 

그땐 참 운이 없었어요. 그해 초 북한공비들이 청와대로 침투(1·21사태)하고 푸에블로호 사건이 있어 정국이 뒤숭숭했잖아요. 하지만 고문을 받으며 겪은 신비한 체험은 제 바이올린 제작의 전기가 되었습니다. 의식이 흐릿해지며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 여태껏 살아온 풍경들이 필름처럼 떠올라 지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살고 싶다’는 의욕이 솟구치는 거예요.” 

진창현은 얼굴이 물속에 거듭 처박히고 온몸에 전기가 관통되는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가 끔찍한 고통의 기억을 대수롭지 않은 듯 이야기하자 곁에 있던 부인 이남이(李南伊) 여사가 손사래를 치며 그의 말문을 가로막았다. 

말도 마세요.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에요. 무혐의로 풀려나 일본행 비행기를 타고 있을 때에도 무서워서 안절부절못했습니다. 둘이서 손을 꼭 붙잡고서 ‘제발 빨리 이륙해라’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다시 붙들려 갈까 봐서….” 

‘차라리 일본으로 국적을 바꿨더라면 이런 수난은 겪지 않았을 텐데….’ 일본에서 온갖 서러움과 조롱을 당하며 한국 국적을 지켜온 그에게 조국은 잊지 못할 상처를 안겨줬다. 일본으로 돌아온 진창현은 매일 밤 악몽과 환청에 시달렸다. 정신병원을 다녀야 할 정도로 심신이 쇠약해졌다. 그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던 바이올린 작업도 중단했다. 그렇게 삶의 정체기를 1년 가깝게 보냈다. 

진창현이 재기의 발판으로 삼은 건 고문 경험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었다. 그는 조국에서 당한 고문이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줬다고 마인드컨트롤을 했다. 이상하게도 생사가 갈리는 듯한 극한 체험을 한 다음, 어린아이처럼 왕성한 호기심이 발동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더 좋은 소리, 더 아름다운 모양을 가진 바이올린을 만들겠다는 의욕을 갖고 온갖 실험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후지티비 특집 드라마에서 진창현 역을 맡은 초난강>

실험의 모토는 ‘감각 기능을 최대한 키우자’였어요. 눈과 귀, 손과 코로 물질을 탐구하고 그것도 안 되면 혀를 썼습니다. 그런 게 무슨 소용이냐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자꾸 반복하다 보면 오감(五感)이 예민하게 발달합니다.” 

진창현은 괴이한 실험을 거듭했다. 모유만 먹는 큰아들의 황금색 변을 보고 ‘이것이야말로 자연의 빛깔’이라 생각해 바이올린에 똥칠을 했고, 석유에서 나는 특유의 붉은 빛깔을 추출하려고 실험하다 폭발사고도 일으켰다. 그리고 전신에 화상을 입은 채 거리로 뛰쳐나오는 바람에 자폭 테러범으로 오인을 받기도 했다. 

남들로부터 ‘미친 놈’이라고 손가락질도 숱하게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이런 무모한 듯한 시행착오들은 진창현 바이올린이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수수께끼에 다가가는 열쇠가 되었다. 

아름다운 소리는 공기의 진동이 강하고 물리적 운동량이 많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초음파라고 불리는 것이죠. 여름철 매미가 날개를 비비며 내는 소리,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바로 초음파가 담겨 있습니다. 바다 게들은 등딱지를 부딪쳐 초음파를 발산하죠. 키토산이란 분자덩어리가 초음파를 내는 매개물질이에요. 저는 이런 자연의 소리들을 찾아내면 곧바로 바이올린 제작에 응용해봅니다. 가령 게딱지를 잘게 쪼개서 바이올린에 발라보는 것이죠.” 

새벽 3시에 시작하는 일과 

그는 비록 인간 스승을 만나는 데는 실패했지만 대자연이라는 더없이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 아침에 일어나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저 아름다운 소리를 바이올린에 담아낼 수 있다면…’ 하고 고민했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주저하지 않고 그날로 실험을 했다. 

진창현 바이올린은 장인의 숙련된 기능으로 다듬어진 것도 아니고 우연히 발견한 비법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경험만으로는 좋은 바이올린을 만들기 힘듭니다. 명기를 마주할 때면 함수와 기하학, 물리학과 화학, 예술적 센스에 절로 감탄사가 터집니다. 그야말로 과학이 총집결된 예술 작품이에요. 저는 바이올린을 만들 때 ‘한 송이 튤립’처럼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느끼도록 정성을 다해 제작합니다.” 

팔순 노인이 된 지금도 진창현은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일에 일과의 대부분을 쏟고 있다. 취침 저녁 8시, 기상 새벽 3시. 그의 기획은 모두 새벽녘에 이뤄진다. 시작은 포근한 이불 속에서 상상하는 것이다. 하루 20분씩 이불 속에서 하는 상상은 좋은 아이디어들을 생산해내는 보물창고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센가와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운동을 하고, 다음엔 거실 의자에 앉아 독서를 한다. 상상력 키우기와 운동, 그리고 이론 공부를 소화한 다음에야 비로소 빵과 요구르트로 아침식사를 한다. 

비록 중학교 영어교사는 못 됐지만, 대학시절 익힌 영어는 두고두고 제 인생에 도움이 되고 있어요. 아시다시피 바이올린은 서양악기잖아요. 바이올린의 역사와 연구서, 신간 책자들은 거의가 영어로 씌어 있습니다. 이탈리아나 독일에서 나온 책들도 영어 번역판은 구하기 쉽지요. 그 책들을 구해 이론공부를 하고 공업신문과 외국의 과학 잡지들을 뒤적이며 신기술과 아이디어를 찾습니다.” 

그가 일본 내 바이올린 제작자 500명 가운데 ‘넘버원’으로 인정받고 세계에서 다섯 명밖에 없는 무감사(無監査) 장인의 반열에 오른 건 부단한 학습과 연구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는 더 많은 책을 읽을 욕심에 ‘속독법 교본’을 수차례 독파했다. 진창현의 독서는 화학, 물리학, 수학, 미술, 영문학, 일본 고전, 수필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박학다식형 학습가인 것이다. 지금도 매달 도서구입비로 3만엔을 지출하고 있다. 

만약 남이 만든 것과 비슷한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을 만들었다면 저 같은 재일동포는 경쟁력을 갖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차원이 다른 월등한 악기여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 길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남보다 폭넓고 앞선 지식들을 축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실험도 해볼 수 있고 남이 따라오지 못하는 새로운 기술도 연마할 수 있는 겁니다.” 


5관왕으로 ‘마스터 메이커’ 되다 

시간이 흘러 1976년. 그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세계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자 콩쿨에 초대된다. 

“The Winner is Mister 진, 찬, 휸.” 

오랜 시간 여행에 피로로 졸고 있던 그는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마지막 4번 째 그의 이름 진창현이 불려졌을 때 그는 당황한다. 각 악기의 음색과 세공으로 2부문씩 총 6개의 시상이 거행되는 콩쿨에서 바이올린 음색만을 제외한 5개부문의 수상자가 되었다. 

“무명이었던 제가 수상하리라고는…겨우 팔리기 시작한 제 바이올린이 그런 평가를 받으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 했어요.”

시상식을 마친 진창현은 그 길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고향 어머니 묘소를 찾아 2개의 금메달을 묻었다. 


후지TV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의 엔딩장면에 나온 진창현과 어머니.


1984년 미국바이올린제작자협회는 이러한 진창현에게 무감사 제작자의 영예인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란 칭호를 부여했다

....그의 집 문패에는 ‘진창현’ 이란 이름 석 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름을 물려준 부모님이 자랑스럽고 재일한국인이란 정체성을 당당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본국에서는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냐 싶겠지만 재일동포들이 ‘나는 한국인’이라고 밝히고 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거나 편견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 ‘너는 재일한국인이며, 진씨 가문의 아들임을 잊지 말라’고 상기시킵니다. 재일동포는 보통의 본국사람이나 일본인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살아남으려면 부단히 자기 연마를 해야 하고 차별은 환경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일류가 되어야 합니다.” 

바이올린 소리를 찾아 110여개국 전세계를 누비다



‘동양의 스트라디바리’라 불리는 바이올린 제작 기술을 독학으로 일궈 냈다는 데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굳이 스승을 찾는다면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그의 정신적인 스승이자 목표였다.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다. 지금까지 방문한 나라만도 유럽, 남미에 이르기까지 110여 개국에 달한다. 여행을 하던 도중 바이올린 소식을 들으면 박물관이든 개인 집이든 찾아가서 보여 달라고 졸랐고, 손에 쥐고 음을 탐구했다.

2004년 일본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지다



지난 2004년 11월 한 남자의 일대기를 다룬 한 단편 드라마가 일본 열도에서 큰 이슈가 된다. 이 드라마는 다름아닌 후지TV 개국 45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3시간짜리 특집극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海峽を渡るバイオリン)>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친숙한 배우인 쿠사나기 쯔요시(초난강)가 주연으로 한 이 드라마의 원작은 실존 인물 진창현(陳昌鉉, 79)씨가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글로 옮긴 동명 논픽션이다. 한국에서는 '천상의 바이올린'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드라마가 일본에서 큰 이목을 받고 한국 서울 드라마 어워즈에서 3관왕을 수상한 것은 다양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세계적인 바이올린 제작자로 성장한 실존하는 재일한국인의 반생이 말 그대로 감동적인 한 편의 드라마였기 때문이지 않을까.

2007년 일본 영어교과서에 실리다 

진창현은 일본인들도 존경하는 재일동포다. 그의 삶은 일본에서 책과 만화, TV드라마로 만들어졌고, 지난해에는 한국 국적자로는 최초로 일본 고등학교 영어교과서(三友社 간행 ‘COSMOS Ⅱ’)에 ‘바이올린의 수수께끼(The Mystery of the Violin)’라는 제목으로 12쪽에 걸쳐 소개됐다. 

교과서를 만드는 三友 출판사는 교과서에 한국인이 실리는 건 최초였다고 했다. 산유샤가 지금껏 내놓은 영어 읽기 부교재의 인물은 헬렌 켈러, 테레사 수녀, 일본 여자마라토너 다카하시 나오코, 록밴드 비틀스뿐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진창현
일본에서 그는 재일교포 사회를 넘어 일본 열도를 대표하는 입지적인 위치의 바이올린 거장이다. 일본에서 갖은 역경과 차별을 겪고 성공하여 세계적인 바이올린 제작자가 되었다는 한 조선인의 이야기는 단순한 감동을 넘어 한국인으로서 뜨거운 자부심이 느껴진다. 

진창현이 세계적 명성을 얻자 일본 사회는 그에게 끈질기게 국적 변경을 권유했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본인으로 귀화하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는 행위라는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귀화한다고 제가 일본인이 될 수 있습니까? 저를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 아버지를 부정한다고 그 사실을 지울 수는 없는 법입니다. 부모가 물려준 유전자, 한민족 DNA의 힘을 믿고 악착같이 살아야 합니다. 그게 일본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재일동포들의 운명이자 생존방법이라고 믿습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은 진창현씨(맨 오른쪽)>


2008년 10월 한국 정부는 진창현에게 일반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영예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열네 살 때 혼자 몸으로 일본으로 떠난 지 65년 만에…. 스파이 누명을 씌워 고문의 고통을 안겨줬던 40년 전의 조국이 비로소 그를 따뜻이 환대한 것이다. 

"재일교포로서 경제인이 아닌 장인(匠人)이 모국(母國)에서 훈장을 받는 것은 기쁘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됩니다. 충격(衝擊)입니다"

수상식이 있은 후 진창현은 기자와 인터뷰를 하며 “꿈만 같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러던 그를 두 달 뒤 센가와에서 만나 보니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훈장을 받자 도일 후 그를 한 번도 찾지 않던 김천중학 친구들이 동창회에 참석해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왔다는 것이다. 해마다 성묘하러 고향에 들렀지만 번번이 외면하던 친구들이 비로소 그에 대한 경계를 푼 것이다. 정부가 수여한 훈장은 그에게 꼬리표처럼 붙어다니던 굴레를 벗겨주었다. 

2012년 2월 26일 병원에서 갑자기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진씨는 이후 병세가 급속도로 악화됐다. 며칠 전 “바이올린 제작을 못해 참 슬프다.”며 어렵게 얘기한 게 마지막 의사표현이었다는 게 부인 이남이(72)씨의 전언이다. 5월 13일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진씨의 큰아들 창호(50)씨는 바이올린 제작을, 둘째 아들 창룡(46)씨는 현악기에 사용하는 현을 제작하는 등 가업을 물려받았다.

진창현(陳昌鉉) 
● 1929년 경상북도 김천 출생. 
● 1955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영문과 졸업. 
● 1957년 일본 나가노(長野)에서 바이올린 제작 독습 시작. 
● 1974년 미국 ‘다이제스트’지의 영·일·한국어판에 그의 바이올린 제작 인생 소개. 
● 1976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국제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자 콩쿠르’에서 6개 종목 중 5개 종목에서 금메달 수상. 
● 1984년 미국 바이올린제작자협회로부터 무감사(無監査) 제작자의 특별인정을 받고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 칭호를 받음. 
● 1998년 일본 문화진흥회로부터 국제예술문화상 수상. 
● 2001년 일본 방송협회 종합 TV의 ‘작은 여행’에 출연 
● 2001년 일본 도쿄도 조후(調布)시 시민문화상 수상 
● 2008년 1월 한국인 최초로 일본 고교 영어교과서인 ‘COSMOS 영어2’(三友社)에 진창현 이야기가 한 챕터(Chapter)에 걸쳐 게재됨. 
● 2008년 10월 제2회 세계한인의 날 기념식에서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상 

참고 및 종합 : 2009.02.01. 신동아, 책 천상의 바이올린 ,장정일의 독서일기 등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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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다다다 12-05-24 03:44
   
존경할만한 분이군여.
헬롱멜롱 12-05-24 14:14
   
참으로 감동적이고 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내용입니다.
뒤늦게 알게되었지만 진창현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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