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고구려 백제 등을 세운 예맥족은 유목민족이 아니었습니다.
만주를 호령했던 강대국 고구려에 대한 향수에 빠져
고구려의 정체성을 대흥안령 산맥 서쪽 초원지대에 살던 흉노 몽골처럼
유목민족이었다 착각하시는 분들 많으신데...
이는 명백한 오해입니다.
우리민족 최초의 국가라 일컬어지는 고조선.
그리고 우리민족 시원이라 여겨지는 홍산문명 모두
유목적인 문화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농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문명이었습니다.
홍산문명의 태동지인 적봉지역은 내몽골에 위치하고 있고
이지역은 본래 기원전 4~5천년 전까지만해도
기후가 지금과는 판이하게 틀려
지금보다 기후가 훨씬 온난하고 강수량도 풍부하여
농경을 일구기에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자연환경의 혜택을 입어 홍산문명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죠.
바로 이 홍산문명을 이어받은 적장자가 바로 고조선이었습니다.
고조선은 그 시초부터 농경을 주된 경제활동으로 삼고 있던 나라였구요.
고조선의 뒤를 이은 부여와 삼한 모두 자연스레 농업이 주된 생활기반이
된것도 당연합니다.
고조선 중심부였던 요서, 요동지방에서 출토되는
고조선 문화의 표지유물인 비파형동검, 빗살무늬토기, 청동제 제기유물 등등이
부여의 중심지던 만주 송화강유역과 한반도 남부에서 거의 동시에 발결되고
있는 사실은 고조선인들이 중심부던 요서 요동의 요하지역에서 좀더 북으로는
인접한 송화강유역과 남으로는 평안도 지역을 거쳐 지금의 전라도 경상도 해안지대
까지 이르는 한반도 전역에까지 널리 퍼져나갔음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곧 북방계로 인식되는 부여나, 부여와는 다른 남방계 종족이라 치부되는
삼한이 모두 고조선 사람들이 주류가 되어 만주와 한반도에 확산된 같은 계통의
종족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여나 삼한 모두 고조선의 문화를 이어받아 농경이 주된 경제활동이 되었다면
어째서 우리민족은 옛부터 '기마문화'가 발달했던 것일까?하는 궁금증을 갖게
되는것도 당연할 겁니다.
고조선의 주된 경제기반이 농경이었다고 하여
그당시 선조들이 중국 양쯔강의 농경인들처럼 말을 탈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고조선과 바로 인접한 대흥안령 산맥 서쪽지역에선
기후 지형적인 차이로 유목이 성행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유목적 경제, 생활 문화가 자연스레 바로 인접한 고조선에 전해지고
반대급부로 고조선의 농경생산물이 유목지역에 전해지는 교류가 활발했던것은
당연합니다.
즉, 고조선 부여 등 요하유역과 만주지역에 살던 예맥족들은
주된 경제기반이 농경이었다 하더라도 바로 인접한 내몽골, 대흥안령 부근의
유목지역과의 활발한 교류로 일찍부터 목축 또한 발달했던 겁니다.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목축과 유목은 가축을 기른다는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유목은 장소적인 이동이 이루어진다는점에서 동일한, 한정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목축과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라는 겁니다.
즉, 고조선과 부여는 농경도 번성했지만 이와 함께 목축도 활발히 이루어졌던
반농반목의 경제로 운영되던 종족이라는 얘기죠.
부여의 마가 우가 저가 등등의 가축명의 귀족명은 그 예이고
이와함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부여에서 풍부한 농경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바로 부여가 반농반목의 경제였음을 보여준다 할 것입니다.
따라서 부여에서 갈라진 고구려도 한반도 중북부의 소국들도
모두 반농반목의 경제를 영위해나갔던것은 당연합니다.
가령 동예의 경우
동예가 전형적인 농업중심의 부족국가였으나
동예에서 '과하마'라는 말이 생산되었다는 것도
고조선 부여에 뿌리를 둔 예맥족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이었다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