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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9-03 04:42
[한국사] (수정본)내가 배우고 정리한 조선 후기의 예송논쟁과 환국정치, 탕평책 그리고 17~18세기의 조선 정치사
 글쓴이 : 폭커
조회 : 1,504  

(직접 적어보다 보니 오타자가 너무 많아 새로 올립니다;;)


제가 예전에 배웠던 강의를 정리한 내용들을 업로드 해봅니다, 개인적으로 조선 후기 정치사에 관심이 많아서 제가 독자적으로 정리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는 조선 정치상황에 대한 제 생각을 적어봤습니다,




조선의 중후기 성리학자들의 '예'(유교적 예법)에 대한 인식은 인간사회에 실현되어야할 구체적 행위로써 일상에서 실천해야 하는것을 넘어 국가 운영과 인간 질서를 규정 하는 그 자체로 보았다. 특히 17세기 조선에서는 성리학적인 형이상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예'의 규정과 실천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예'에 대한 당파간의 해석이 달라졌고당파간의 예의 대한 해석 차이는 상대 당파를 몰아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써 활용되기 시작되었던 게 17세기 조선의 정치사회적 특수성이었다




현종시기


이러한 환경 속에서 예송 이라는 사건이 전개되는데 첫 예송은 기해예송으로 현종 즉위년에 벌어졌다현종의 부왕이었던 효종은 차남이었는데 적장자였던 소현세자가 죽음으로써 동복동생인 봉림대군 즉 효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소현세자의 세 명의 아들 중 한명은 여전히 살아있는 상황이었다이런 상황에서 효종은 10년간 재위 끝에 사망하였는데 여기서 문제가 촉발되었다바로 효종을 계모였던 장렬왕후가 상복을 몇 년 간 입느냐의 문제였다조선의 가족제인 오복제에서는 적장자 사망 시 어머니가 3년간 상복을 입고 차남이 죽으면 어머니가 1년 간 상복을 입어야 했다문제는 효종은 차남으로 왕위에 즉위하였고 소현세자의 가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과거 태종은 태조 이성계가 이자춘의 세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삼남이라는 취약한 정통성이 장차 왕권약화를 불러올것을 우려해(적장자계승원칙) 태조의 이복형제의 어머니들을 노비로 격하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였으나(사실상 태조의 이복형들을 서자로 만들어 정통성 확보) 이 시대에서는 조선 초기와 여러 가지로 크게 달라져있었다(무엇보다 효종과 소현세자는 동복형제이다). 17세기 조선은 예의 규정에 대해 지배층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고 있었다그렇기에 필연적으로 효종의 계모인 장렬왕후가 입을 상복의 등급을 가지고 당파 간에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은 천하동례를 주장하며 하늘의 이치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으로 예는 왕이나 신분의 귀천이 없이 똑같이 적용됨으로써 계모인 장렬왕후가 효종의 장례 상복을 1년 동안 입어야한다 주장하였고 이에 반에 남인은 왕자례부동사서를 주장하며 왕은 특별하여 일반적인 예의 규정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계모인 장렬왕후는 죽은 효종에 대해 적장자의 예로써 3년간 상복을 입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여기서 현종은 서인의 의견을 수용한다왜냐하면 당시 송시열의 권위는 매우 높았고 조정은 서인이 장악한데다가 사대부들의 입장에서 서인의 입장이 더 타당해보였다기해예송이 끝난 후 윤선도는 상소문을 올려 서인들의 효종 차자설을 주장하는 것은 정통성을 저해하고 군왕의 힘을 꺾으려는 정치적 야심이 있다고 주장하다 귀양을 갔다 현종은 왜 윤선도를 귀양 보내었을까국왕에게 있어 충 과역에서 역은 성리학적으로 죽여야 하는 대상이었고 이에 따라 역에 해당되는 집단들에게 피의 숙청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이렇게 되면 한쪽 세력의 너무나도 커져 국왕의 권위마저 위협할 수 있는 상황이 올 수 있기 때문에 현종은 윤선도를 귀양 보내었던 것이다이로부터 15년 후에 현종의 모후이자 효종의 정비인 인선왕후가 죽자 예송문제가 또 다시 촉발 되고 말았는데 갑인예송이었다갑인예송이 일어 난 이유는 여전히 효종의 계모인 장렬왕후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이다오복친제(성리학의 전통적 상복제도)에서 적장자의 며느리가 죽으면 시어머니는 1년간 상복을 입어야하였고 차자의 며느리가 사망 시에는 9개월간 상복을 입어야했다여기서 서인과 남인은 또 팽팽히 맞서게 되었는데 서인은 원칙을 주장하며 9개월 남인은 이전처럼 왕권을 옹호하며 1년을 주장하였다여기서 현종은 남인의 손을 들어주었는데 이것이 가능하였던 이유는 소현세자의 아들이 후계 없이 사망하였다즉 소현세자의 혈통은 완전히 단절되었다그렇기에 효종도 이제 적장자의 위치에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 갑인예송의 계기와 당파간의 중재자였던 현종이 1674년에 사망하자 예를 수단화시키는 환국 정치가 시작되었다그리고 이 환국 시대에는 이전과는 달리 예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사약이 양측으로 오가며 서로의 정적을 죽이는 무서운 시대였다송시열과 서인은 주희의 말이 옳다며 옹호하며 매우 원칙론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이에 대해 남인은 주희이전의 고대 유교경전을 통해 대항하고자 하였다주희도 어디까지나 고대 유교경전을 해석한 것으로 100프로 옳게 해석하였다 말할 수 없다라는 것이 이들의 주 골자였다서인과 송시열은 남인과 이 주장의 중심인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규정하며 기본적인 학자로써의 교류나 통혼마저 끊어버렸다




숙종시기


현종시기 말에 갑인예송에서 이긴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였다이러한 상황에서 현종이 죽기 직전 무렵과 숙종이 즉위 할 무렵에는 남인과 서인이 치열한 당쟁을 전개하며 왕권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른다한편 현종 말에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였는데 이들은 효종시기에 효종의 북벌에 찬동하며 실제 북벌을 주장하는데 앞장섰고 이러한 남인의 실천과 남인의 왕권옹호론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신뢰한 효종과 현종은 병조판서를 비롯한 주요 군권과 관련된 지위에 남인들을 임명하였다. 이 때문에 이당시에 실질적으로 남인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이러한 상황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숙종은 서인의 부추김과 고변을 빌미로 남인들을 조정에서 몰아내고 남인의 영수였던 윤휴와 허적을 사사하기에 이른다서인과 남인은 서로에 대해 돌이 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고 이를 통해 서인이 다시 조정을 장악하였다이 사건이 경신환국이었다이후 9년이 지난 후 또 한 차례 환국이 터졌는데 그것은 바로 숙종의 후계에 대한 문제였다숙종은 총애하는 후궁인 희빈 장씨에게서 아들을 보았고 숙종은 이 아들을 왕세자에 책봉하려하였으나 서인은 원칙론을 내걸며 이 왕자가 적장자가 아니고 인현왕후가 젊으니 왕세자 책봉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세자책봉을 반대하였다여기에는 장희빈의 집안이 역관가문으로 남인과 매우 가깝다는 점도 한 몫 하였던 것 같다이에 숙종은 신하가 군주를 선택하는가군주의 일은 군주가 알아서 한다 말하며 왕실의 일은 국왕이 결정할 문제다.라며(숙종실록에 나와있는 실제 숙종의 발언) 서인들의 반발에 대해 불쾌감을 나타내며 서인을 조정에서 몰아내고 송시열을 사사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숙종은 왕자를 세자로 삼고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희빈 장씨를 중전으로 삼았다이 사건이 기사환국이었다. 5년 후에 또 다시 환국이 벌어지는데 중전 장씨가 투기와 여러 가지 이유로 숙종의 총애를 잃고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았다하지만 결국 인현왕후는 후사 없이 사망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희빈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한 죄목으로 사사당한다. 그리고 이 환국과정에서 남인은 또 다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렇게 갑술환국 이후 서인은 남인에 복수하여 조정의 중심세력으로 다시 등장하는데 여기서 왕세자는 사사당한 희빈의 아들이므로 왕위 계승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하였고 여기에 대해 서인 내부에서는 왕세자와 타 당파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주장하는 소론과  원리주의적이고 강경적인 입장을 지닌 강경파 노론으로(소론은 상대적으로 서인의 젊은 대신들이 주축 노론은 서인 원로 대신들이 주축) 대립하여 나뉘게 되었다여기에 대해 숙종은 강경파인 노론이 우세한 상황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론을 밀어주었고 1704년까지 소론이 정국을 주도하였다그러나 점점 더 원리주의가 기세를 떨치게 되었고 노론은 명분을 앞세우며 원리주의적인 노론은 소론의 행실이 잘못되었다는 숙종의 처분을 1716년에 이끌어 내어 정국을 주도하였고 여기에 휩쓸린 소론은 결국 소수파가 되고 남인은 재기불능 상태로 몰락하고 만다(이는 사실 폐위당하여 사사당한 모후로 인해 폭주한 연산군의 전례를 우려한 숙종의 판단도 있었기에 둘째아들 연잉군(영조)의 지지기반이었던 노론을 밀어준 까닭도있었다. 실제로 숙종은 세자폐위도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하였다>숙종은 여러 차례 환국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굳혔는데 이 과정에 수많은 신하들이 희생당하였다숙종에게는 아들이 두 명이 있었는데 한명은 세자(경종)와 연잉군(영조)이 있었다숙종은 적장자였기에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으나 노론의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었다한마디로 신하가 왕을 선택하는 시대가 온것이었다소론은 세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였고 세자도 소론을 밀어주었다이러한 상태에서 숙종이 사망하고 세자가 즉 경종이 즉위하였다




경종시기


경종은 상당히 유약하였으나 연잉군 즉 영조는 그 반대였다노론은 경종의 병약함을 들어 이복동생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고자 하였다그리고 노론과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던 경종 역시 자신의 혈육이 연잉군 밖에 없었기에 이에 동의한다하지만 이어 노론은 무리수를 두고 마는데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제기한것이었다(대리청정 거론은 경우에 따라 왕조국가에서는 역모로 규정 될 수 있음) 이에 소론은 이것을 기회로 잡아 노론이 역모를 획책하고 있다고 몰아버리고, 경종은 기존에도 노론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지만 이 계기로 노론에게 더더욱 깊은 불신과 불쾌감을 나타내며 왕권을 휘둘러 노론의 4대신을 사사하였고 소론은 잠시동안 정국을 장악하였다이러 할 때 노론의 자제들이 경종을 독살하려고 하였다는 고변이 발생하였다. 고변의 내용은 노론파에 가담한 상궁이 경종을 독살하고자 하였고 이미 한차례 시험도 하였다는 것이다실제로 경종은 이 무렵에 심각한 복통을 호소 하는 등 몸이 좋지 않았다그리고 소론측에서는 노론들이 경종의 독살하여 자신들이 지지하는 왕세제를 옹립하고자 한다는 합리적인 의심들이 있었다소론은 이를 빌미로 왕세제를 폐위하고자 하려 시도하는 중에 경종이 의심스러운 상황속에서 사망하였고 이어 즉위한 것이 왕세제 즉 영조였다,




영조시기


영조가 왕이 되자 자연스럽게 균형추는 영조를 지지하였던 노론으로 밖에 쏠릴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다그러나 영조는 당파간의 싸움을 무마시키고 왕권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였다영조 시기는 노론이 주도하였고 노론 측에서 4대신이 영조를 위해 사사 당하였고 충역이 뒤 바뀐 것을 회복해달라고 요청하였던 것을 받아들였다하지만 한편으로는 여러 당에서 인물을 골고루 쓰게 하는 탕평책을 실시하게 된다그래서 소론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던 노론 100여명을 파직하고 소론을 등용하는 등 소론정국으로 이동하였으나 실각한 소론과 지방의 남인이 연합하여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분을 들추어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주장하며 영조를 국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반란을 일으켰는데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데다 국왕의 태생적 한계를 들추며 일어난 반란은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영조뿐만 아니라 조선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중종반정과 인조반정에서 조차 폐위당한 왕의 태생을 거론한 전례가 없었음). 하지만 영조는 이를 무사히 진압하였고 영조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던 온건적인 소론과 남인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며 정국 안정을 기도하였다그러나 영조의 탕평론의 효과는 그다지 높지 않았고 오히려 국왕파 즉 영조의 사적 정치 친위조직을 만들어내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오히려 당파싸움이 격해지는 결과가 벌어졌다그리고 영조가 충역시비를 공정하게 하고자 하여도 영조자체가 노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고 자신의 왕위 계승 정통성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노론의 편을 들 수 밖에 없었다노론은 이러한 형세에 기대어 문벌이라는 특수집권층을 형성하였으며 왕실 친인척과 관계를 맺었고 그렇기 때문에 점차 세도정치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게다가 영조의 조정에 들어간 사람들은 각 당파에서 온건한 사람으로 자기의 당파안에서 큰 비난을 받았다.(영조의 탕평정치를 완론 탕평이라한다), 영조는 탕평책으로 왕권을 어느 정도 구축하고 강화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노론은 일당전제를 달성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당파싸움에 승리하게 된다. 노론 자체는 탕평책을 반대하였으나 이들 중 일부는 탕평파를 형성하게 된다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이 파탄나고 노론의 전제화가 이뤄지는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사건이 터진 것이다임오화변 이었다사건의 발단은 사도세자의 장인인 노론 대신 홍봉한이었다. 그는 세자를 보호하는데 앞장섰었는데 문제는 사도세자가 노론을 싫어하여 노론을 멀리하고 소론을 가까이하였던 것이었다. 이로인해 노론과 세자의 사이가 크게 틀어지고 말았다.게다가 사도세자와 영조와의 사이도 사도세자의 일탈과 이일로 매우 나빠졌다이러 한 때에 역모 고변이 발생하여 영조를 분노하게 만들었다결국 영조는 사도세자를 서인으로 폐위하고 자결을 명하였으나 사도세자는 이를 거부하였고 결국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였던 것이다한편 일각에서는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하였으나 홍봉한에게 죄를 물으며 영조 자신도 책임을 피할 수 없으므로 오히려 홍봉한 반대파들을 대거 축출하였다그리고 세월이 지나며 영조는 고령으로 인해 점차 판단력이 흐려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소수척신이 정치를 주도하는 시대로 이어진다사도세자 사후 왕위계승자로 지목 되는 이는 세손 즉 영조의 손자였다영조는 사도세자로 인해 정통성의 하자가 생긴 세손을 위해 오래전에 죽은 자신의 적장자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여 주었다하지만 노론들에게 있어 세손의 존재는 큰 걱정거리였다때문에 정조는 세손시절에 대단히 불안한 생활을 하였다이런 세손의 불안한 생활을 홍국영이 활약하여 보호하여주었다한편 이럴 때 노론은 친세손파(시파반세손파(벽파)가 대립하였다이런 때 홍국영은 세손에게 정보를 독점으로 제공하여 새손을 절대적 신임을 받았다홍인한 정후겸 등은 세손을 견제하고 일부는 세손을 제거하려까지 하였다그러나 세손은 처신을 잘하여 공적으로는 영조의 의리를 따르며 사적으로는 사도세자에 대한 효를 적극적으로 표현하였다이때에 영조와 세손 그리고 노론대신들은 약속을 한다. 세손은 사도세자에 대한 죽음을 공적으로 일체 거론하지 않게 한다는 조건이었다이러한 합의하에 세손은 영조의 신임을 얻어 대리청정을 하였고 영조는 대리청정을 시작한지 3개월 만에 죽었고 정조가 왕이 되었다



정조시기

정조는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외척을 제거하였고(다만 정조는 자신의 외조부인 홍봉한은 끝까지 대우하였음)이러한 정조의 즉위에 희망을 품은 세력들은 소수 남아있었던 소론이었다. 이들은 충역시비를 벌여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섰던 인물들을 제거하고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주자 주장하였으나 정조는 노론에게 빌미를 줄 것을 우려하여 이것을 주장한 소론들을 모두 사형시켰다
한편 정조는 홍국영의 세력이 커지자 척신정치의 발호와 왕권에 대한 위협을 우려하여 측근인 홍국영을 강릉으로 귀양 보냄으로써 왕권안정화를 공고히하였다한편 정조는 조부인 영조를 이어 탕평책을 썼으나 그 방식이 달랐다정조는 영조의 온건파의 중심인 완론탕평과는 달리 너도 옳은점이 있고 나도 옳은점이 있으니 서로 용인하는게 좋지 않는 가라며 가장 원리주의적이고 강경적인 각 당파 사람들을 조정의 중신에 기용하여 이들로 하여금 치열한 토론을 벌이게 하고 그 중간에서 정조가 판결하여 정치적 사상적 방향성을 잡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일방적으로 시비와 충역을 조장하여 서로 싸우는 것을 방지하였다그리고 한편으로는 정조는 각 영수들과 편지를 교류하여 적절히 각 당파의 의견들을 조율 하였다.(정조는 벽파의 영수 심환지와 남인이자 시파의 영수 체제공과 편지를 활발히 교류하였다)(이를 준론 탕평이라 한다,)  정조는 규장각이라는 학술기관을 세워 경연을 주관하고 비실과 문한 정책 입안 기능까지 부여하고 규장각 각신을 청직으로 격상시키고 초계문신제도를 통해 젊은 문신들로 하여금 친위세력을 형성하게 하였다또한 정조는 자신의 신변을 걱정하여 경호부대인 장용위를 설치하고 점차 장용영으로 규모를 확대하였고 국왕의 친위부대적인 성격을 띄었다또한 정조는 지방의 농민들 중 장용영 군병으로 임명하고 임명된 사람은 장용영에 근무하는 대신에 포를 내게하여 장용영 재정을 유지하게 되었고 이는 곧 국왕의 내탕금으로 이어졌다(정조는 자신의 왕도정치와 민생안정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왕실의 재정이 튼튼해야 한다 생각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정조의 내탕금은 결론적으로 백성들에게 흉년시 대규모 구휼미 형태로 혜택이 돌아갔다)그리고 정조는 여기서 얻은 내탕금을 이용해 수원화성을 짓게 하였다또한 사회가 변함에 따라 등장한 집권 노론의 소장파에서 나온 북학론을 일부 수용하였고 이들 중 일부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하였다또한 서얼허통정책을 실시하였다한편 상업적인 면에 변화가 있었는데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을 철폐하고 개인의 상업행위를 보장하였는데 이는 사실 정조의 정치자금을 위한 것이었다.그러나 한편으로는 조선중화사상을 재확인하였고 병자호란 때 죽은이들을 친명의리에 결부시켜 높이는 모습도 보였다



정조와 탕평책의 최후 그리고 정조의 조급한 결정이 일으킨 조선말기의 세도정치 폭풍

그리고 정조는 재위10년째 어느정도 왕권이 안정되자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해 효를 지나칠 정도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정조는 어린세자가 어느정도 장성하면(세자가 14살이 되면)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화성으로 거처를 옮겨 근처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돌보며 그동안 못다한 효를 행하고자 하였으며 수원화성에서 왕세자가 완전히 장성할때까지 실질적인 섭정정치를 시행 하여 중앙대신들의 권력을 약화시켜 왕권을 매우 강력하게 강화하고자 하였다(혜경궁홍씨가 쓴 한중록과 여기에 대한 해석에 따르면) 그러나 정조의 건강은 즉위 24년째 봄에 나기 시작한 종기가 커지기 시작하여 빠르게 악화되었고 악화되는 종기로 인한 고통 때문에 자기가 죽고 난 후 왕위에 동극할 11살의 어린세자가 걱정되는데다가 너무 빨리 건강이 악화되어 몹시 초조해졌던 정조는 세자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필요하다 여겨 자신의 최측근이자 자신과 학문적성향을 같이하고 학풍과 인품이 모두 뛰어난 시파의 젊은 대신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받아들이고 김조순에게 세자의 실질적인 후견인이 되어줄것을 부탁했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정조가 그렇게도 혐오하던 세도정치의 발호로 이어졌다.1800년 여름에 등에 있는 종기들은 매우커져 이로 인해 정조는 목숨의 위기를 느낄정도의 극심한 고통을 겪었고 6월 말에 종기가 터져 차도가 보이는듯 하였으나 결국 종기들이 터져서 생긴 피고름과 같은 과다출혈로 기력은 더더욱 악화되어 사망하고 만다. 이후 순조가 즉위하였고 초기형태의 세도정치의 시기로 넘어가게 된다. 정조의 재위기간 24년은 조선왕들의 평균재위기간을 고려하면 결코 짧은기간은 아니다. 이런 정조의 짧지 않은 재위기간이 남긴 정치적 유산은 무엇인가? 실학? 왕도정치? 아니면 강력한왕권?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평소 역사에서 조선의 멸망의 길로 이끄는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다고 인식하는 안동김씨60년 세도정치가 바로 정조가 조선말에 남긴 역설적인 정치적 유산이었다. 물론 이는 자신의 건강이 빠르게 악화되자 자신의 사후 어린아들이 걱정되어 차마 눈을 감을수 없었던 한 아버지가 남긴 조급한 결정이기도 하였다.

정조가 원하였던 시대적 사회상은 현실적으로 문무와 과학기술이 고루 발전했던 조선조 세종시대였다. 또한 정조 본인은 실학적인 요소보다는 성리학적인 요소를 더많이 띤 군주로써 매우 뛰어난 성리학자였다 그리고 그 스스로가 생각한 이상향 역시 유교적 군자들과 강력한 왕권을 가진 군주가 주축이 되어 유교적 예법으로 통치하는 만민이 풍족하여 민생이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성리학 국가였다. 이는 성리학을 신봉한 모든 조선의 역대국왕들에게 해당되는 공통된 사항이자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향이었고 정조 역시도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정조는 철저한 성리학 이론가로써 "왕권과 군주 즉 국왕 아래 만민이 평등"하다는 성리학의 가장 기본원칙과 강력한 왕권을 옹호하는 인물이었다.《실제로 성리학 창안자인 주희는 노비제에 반대하였고 문치주의가 고도로 심화되고 성리학적 질서가 잘 자리잡은 송나라 시기 중국에는 노비제가 없었고 대신 하류층인 소작농과 가난한 상인 잡역부 기생 그리고 일반계층으로써 자신의 토지를 가진 자연농과 소규모 상점을 보유한 상인계층 그리고 상위계층인 막대한 토지를 가진 지주농과 상단을 이끄는 대상인 그리고 지주들이나 일반농민들 중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막대한 토지를 거느린 어느정도 지식을 가진 관료들과 지역 사족집단이 존재하며 이들은 법적인 '신분'이 아닌 '경제적계층'만으로만 구분된다(물론 이후에 중국에서 노비제는 다시생기지만)》(성리학적 요소를 가진 조선사회에 왜 노비계층이 존재하였는지는 이후 설명)


나의 생각


조선후기의 당쟁이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며 조선초기에 비해 왕권이 약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과거 왕권이 매우 강하였던 태종 시기와 이후 한명회를 비롯한 훈구의 세력이 강해지는 세조 이후나 중종시기와 비교해 보아도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이다하지만 한편으로는 조선후기의 국왕들은 매우 노련한 정치가로써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인상 깊었다북벌이라는 키워드로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상쇄하려고 했던 효종이나 적절한 중재로 당파간의 균등을 추구하며 치열한 예송 중에도 신하 한명 죽이지 않고 국정 안정에 주력하였던 현종환국과 자신의 왕비를 권력의 한축이자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보았던 숙종과 이후 탕평으로 대표되는 영정조의 정치를 보면 후기 즉 17세기~18세기 조선국왕의 정치적 역량은 생각보다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던 대목이다그리고 나는 환국이 비단 붕당간의 예에 의한 대립으로 이뤄진 게 아닌 숙종 본인의 성리학적으로 강력한 정통성에 기반으로 숙종 본인이 주도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숙종은 효종의 유일한 장손이자 현종의 적장자였고 왕위 즉위 시에는 정치적으로 매우 치밀했던 모후 헌렬왕대비도 살아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혈통이 완벽했는데도 삼촌인 세조에 의해 폐위 당하였던 단종과는 달리 자신의 왕위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형제와 사촌들도 없었기에 숙종은 성리학적 명분론으로 역대 조선임금들 중 가장 강력한 정통성과 권력을 가진 임금이었다그렇기에 나는 환국을 숙종이 직접 주도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표격 인물이자 효종 현종시기에 산당과 서인의 영수로써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송시열을 세자책봉 문제로 손쉽게 사사하였던 것만 보더라도 숙종의 왕권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알 수있음)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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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5 [한국사] 단군조선 도읍 변천4ㅡ도읍의 위치 하이시윤 10-09 1139
5024 [한국사] 단군조선 도읍 변천3ㅡ세번째와 첫번째 천도의 사유 하이시윤 10-09 939
5023 [한국사] 단군조선 도읍 변천3ㅡ두번째 천도의 사유 하이시윤 10-09 950
5022 [한국사] 단군조선 도읍 변천3ㅡ삼국유사에 나타난 천도 사유 하이시윤 10-09 1045
5021 [한국사] 단군조선 도읍 변천2ㅡ중국사료분석3 하이시윤 10-09 927
5020 [한국사] 단군조선 도읍 변천2ㅡ중국사료분석2 하이시윤 10-09 915
5019 [한국사] 단군조선 도읍 변천2ㅡ중국사료분석1 하이시윤 10-09 929
5018 [한국사] 단군조선 도읍 변천1ㅡ한국사료분석 하이시윤 10-09 1046
5017 [한국사] 환단고기가 처음 전해준 충격 (3) 구름위하늘 10-07 1580
5016 [한국사] 환단고기를 보는 갠적인 관점 (11) 하이시윤 10-03 1982
5015 [한국사] 역사학과 고고학의 관계ㅡ개천절을 맞아 (2) 하이시윤 10-03 974
5014 [한국사] 진개전쟁의 진실3ㅡ연국의 실체 하이시윤 10-02 956
5013 [한국사] 진개전쟁의 진실2/2ㅡ연국이 복속시킨 조선의 실체 하이시윤 10-02 850
5012 [한국사] 진개전쟁의 진실2/1ㅡ연국이 복속시킨 조선의 실체 하이시윤 10-02 902
5011 [한국사] 진개전쟁의 진실1.ㅡ진개전쟁후 연과 고조선의 경계 … 하이시윤 10-02 950
5010 [한국사] 9월27일 평양낙랑(국)박물관 개장 (1) 하이시윤 09-30 1005
5009 [한국사] 청동기시대 시대구분 - 학계 동향 (15) 흥무대왕a 09-27 1382
5008 [한국사] 최태영박사님 이병도를 꾸짖다 (1) 유위자 09-07 1714
5007 [한국사] 개인적으로 역사에서 현실드립치는것을 싫어하는이… (1) Marauder 09-06 955
5006 [한국사] 진한의 근원에 대한 연구 글 주소 위구르 08-21 1266
5005 [한국사] 명도전은 어느 나라의 화폐였는가 위구르 08-20 1451
5004 [한국사] 낙랑 위치에 대한 고찰 (16) 파스크란 08-20 1570
5003 [한국사] 시대별 한사군 현과 인구수의 변화 위구르 08-19 1206
5002 [한국사] . (11) 흥무대왕a 08-18 1158
5001 [한국사] 요수와 위만조선의 위치 탐구 위구르 08-16 1087
5000 [한국사] 고구려 요동성의 실제 위치 (3) 파스크란 08-16 1602
4999 [한국사] 단군의 어원 분석 (단군왕검의 아들 부루를 기준으로… (4) 보리스진 08-16 1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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