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 나당연합군이 기습공격하자 백제의 좌평 흥수는 “평원(平原)에서 싸우지 말고 험준한 요새인 탄현(炭峴)과 백강의 상류 지벌포(伎伐浦)에서 굳게 지켜야한다”고 충고했으나, 다른 대신들은 당나라 병사들이 백강 상류로 들어오더라도 물길을 따라 종대로 내려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때 공격하면 마치 그물 속 물고기 잡는 격이라고 건의하자 의자왕이 이에 따랐다.
그러나 백제가 설왕설래하며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나당연합군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나 백제의 도읍인 사비성으로 쳐들어가고 있었다. 급보를 접한 의자왕은 계백(堦伯) 장군에게 5천 명의 결사대를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가서 신라군을 막으라고 했다. 마치 임진왜란 때 천혜의 요새인 조령 대신에 신립장군이 탄금대에서 왜적을 막는 경우처럼 되어버렸다.
여기서의 백강과 탄현과 황산은 과연 어디일까. 식민사학계는 백강을 충남 부여시 앞을 흐르는 금강, 기벌포를 금강 하구인 충남 서천군 장항읍, 탄현을 대전시 동구에 있는 마도령(馬道嶺, 598m), 황산을 충남 논산으로 비정했다. 이는 모두 백제의 도읍을 충남 부여시로 미리 정해놓고 억지로 끼워 맞춘 지명비정인 것이다. 그렇게 단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당나라 배들이 백강 상류(기벌포)로 들어왔다고 말했는데, 금강은 배가 상류로 들어올 수가 없다. ② 장항은 해발 100m 미만의 낮은 구릉지여서 험준한 요새인 기벌포가 될 수가 없다. ③ 마도령은 험준한 요새로 보기 미흡하지만 그렇다 치고, 나당연합군이 백제 남쪽에서 만나 공격하기로 했는데 신라군의 공격방향은 옥천→논산→부여로 반대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 대륙의 어디냐고 반문하면 현재 탄현(침현)과 기벌포(지벌포) 등 백제패망전쟁 당시 지명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말문이 막힌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신라 태자와 만난 덕물도(德勿島)에 관한 자료도 없기는 매한가지이다. 단지 진시황 때 황하를 덕수(德水)로 개명했다는 기록을 토대로 水의 뜻이 물이므로 ‘덕물=덕수’로 풀어 덕물도를 황하에 있는 지명으로 추상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하북성과의 경계에 있는 산동성 덕주(德州)에 대해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는 “한나라 때 안덕현으로 수나라 때 덕주 평원군으로 개명되었다”고 설명돼 있다. 지금의 산동성 능현으로 바로 평원현 북쪽에 있어 덕주가 덕물도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지금 능현은 황하변이 아니나 황하의 흐름이 시대별로 유동적이었기에 당시는 현재의 물길과 충분히 다를 수 있다.
황산(黄山)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누런 황토산으로 해석될 수도 있어, 누런 산은 대륙에 무수히 존재하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찾기가 쉽지 않다. 단지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에 봉해진 김춘추의 직함에서 백제 도읍이 위치하고 있을 산동성에 있는 황산이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다.
그런데 청나라 때 그려진 ‘대청광여도’에 산동성 제남시 동남쪽 추평(鄒平)현에 해발 168m의 황산이 그려져 있는데 백제의 황산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공교롭게도 덕물도(덕주)→평원→탄현→황산(추평)→백제 도성으로 가는 신라군의 축선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소정방이 들어온 백제의 백강은 어디인가
먼저 백강수(白江水)를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찾으면 “호남성 기양현 동쪽 60리에 있고 백수라고도 부른다. 모두 영원현에서 나오는 근원이 다른 두 강이 합쳐졌다가 동정호로 들어가는 상수(湘水)로 들어간다”는 설명이 있는데, 이 강을 백제의 백강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는 백제의 중심인 산동성에서 너무 멀어 당시의 백강이 아닐 것으로 판단된다.
백수(白水)로 검색하면 섬서성 백수현과 산서성 진성현을 흐르는 강들이 나온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백강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 부여시를 흐르는 금강의 이름인 백마강(白馬江) 또는 백마하(白馬河)로 찾으면 아래와 같이 2군데가 나온다.
①하북성 요양현 남쪽에 있고, 동남류해 무강현 경계로 들어간다. <수경주> 백마하수는 상류에서 호타하로 이어져 동쪽으로 낙향현 북쪽 요양현 남쪽을 지나 동남쪽으로 무읍군 북쪽을 지나 동쪽 형수(衡水)로 들어간다.
②산동성 추(鄒)현 동북쪽 구룡산 녹계호에서 나와 료(蓼)하와 합쳐져 서남류해 현 서쪽을 지나 대소하(大小河)와 만나 사수(泗水)로 들어간다.
필자는 산동성 제녕시 추성현으로 흐르다가 남양호로 들어가는 강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사수는 현재 제녕시에 속해 있는 사수현 배미(蛇)산에서 나와 곡부(曲阜)시를 지나 남양호(南陽湖)로 들어갔다가 나와서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기수(沂水)로 들어갔다가 회하(淮河)로 흘러들어가는 긴 강이다. <수경주>에 설명된 물길에 의하면, 예전에는 호수로 들어가지 않고 육지로만 흘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수의 지류라는 백마하는 구룡산에서 발원해 사수 바로 옆을 흐르다가 역시 남양호로 들어가는 작은 강이다. 지류라는 표현과 백마하의 상류와 사수 사이에 생태습지가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서로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발원지인 구룡산이 있어 기벌포처럼 요새일 가능성도 높다. 만일 그렇다면 위에서 흥수와 반대의견인 대신들이 말한 “백강 상류로 들어오더라도 물길을 따라 종대로 내려올 수밖에 없다”는 기록이 성립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황하의 물줄기는 산악지대인 하남성 낙양 동쪽에 있는 정주(鄭州)를 지나 평야지대로 나오면서 범람할 경우 물길이 마구 바뀌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옛 역사기록을 지금의 물길과 대조해보면 어느 정도 오차는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백마하 주변에서 사비성의 흔적이 있을만한 곳을 찾아본다면, 제왕성(齊王城)이 있는 산동성 제녕시 추성현 또는 바로 그 북쪽에 있는 곡부이다. 제나라 왕성은 산동성이 아니라 강태공의 고향인 하남성 위휘현에서 찾아야한다. 특히 곡부에는 현재 공자의 사당(孔廟)이 있는데 유독 도성만큼이나 큰데다가, 사수(泗水)변에 있기 때문에 같은 글자를 쓰는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사비성(泗沘城)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든다.
상류에서 당나라 배가 올 수 있는 강은 <대청광여도>에서 보듯이 현 산동성의 성도 제남(濟南)시를 흐르는 제하(濟河)와 산동성 백마하 둘 뿐으로 그 주변에 백제 도성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곡부와 추성이 속해있는 제녕(濟寧)도 백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왜 유독 산동성에는 백제의 제(濟)자와 삼수변을 뺀 제(齊)자가 들어간 지명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곡부로 추정해놓고 앞뒤를 맞춰보면 백제의 마지막 방어선이라는 황산과 백마하와의 거리가 꽤 멀다는 점이 발목을 잡는다. 백마하와 황산 중간에 있는 태안(泰安)이나 사수현이라면 거리적으로 맞는데 그곳 강은 상류에서 당나라 배들이 내려올만한 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추평 황산이 백제의 황산이 아니라는 것일까.
만일 사비성을 제남 또는 청주부(靑州府)였던 임치(臨淄)로 비정하려면 제하가 백강이라는 근거를 찾아야 한다. 풀릴 듯한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성을 찾는 일은 언젠가는 퍼즐이 열려 밝혀지겠지만 아직도 오리무중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심증은 있으나 확정지으려면 보다 치밀한 연구와 현장답사가 필요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