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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7-27 10:00
[한국사] 수구리님 참조부탁드려요
 글쓴이 : 지누짱
조회 : 394  

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제2장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중 발췌.

4. 고조선의 西邊(서변)

앞에서 고조선의 서쪽 경계는 대체로 확인되었다. 즉 전국시대로부터 서한 초에 이르기까지 고조선의 서쪽 국경은 지금의 난하 상류와 중류에 의하여 그 북부가 형성 되었고, 그 남부는 난하의 중하류 서부연안에 있었던 영자새로부터 난하의 하류 동부연안에 있었던 창려 갈석에 이르는 선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국경선상에 연 장성이 축조되었고 그것이 후에는 진 장성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그런데 고조선의 西邊(서변)을 보다 더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하여 그 지리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고조선으로부터 위만조선에 이르기까지의 국경선의 변화와 그 주변 지리를 전하여 주는 “사기”“조선열전”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왕인 滿(만)은 옛날 燕國人(연국인)이었다. 연국이 전성기로부터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기 위하여 鄣塞(장새)를 축조하였다. 진국이 연국을 멸망시킴에 따라 그것이 遼東外오에 속하게 되었다. 서한이 흥기하였으나 그것이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 故塞(고새)를 다시 수리 하였고 浿水(패수)까지를 경계로 삼아 연국(서한의 侯國(후국))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 노관이 서한에 반항하여 흉노로 들어가니 滿(만)도 망명하였는데 1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 상투머리에 蠻夷(만이)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도주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넜다. 그는 진국의 옛 공지인 上下鄣(상하장)에 거주하면서 겨우 변방을 지키며 진번. 조선에 속해 있었는데 蠻夷(만이)및 옛 연국. 제국의 망명자들이 그를 왕으로 삼으니 王險(왕험)에 도읍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서 진번. 조선. 장새. 요동외요. 요동고새. 패수. 상하장 등이 고조선의 서쪽 변경지대에 있었던 여러 명칭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하나하나 검토하여 봄으로써 보다 더 구체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진번과 조선은 순서에 따르면 진번을 먼저 고찰 하여야 겠지만 편의상 조선의 위치부터 확인 하고저 한다. 종래에는 이 조선이 고조선을 의미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이 기록을 해석 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만약 이 조선이 고조선 이라면 전국시대의 연국이 전성기에 고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켰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조선은 고조선을 지칭하는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있었던 일개 지명이었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하여는 “삼국지”“위서”“오환선비동이전”의 주석으로 실린 “魏略(위략)”의 내용을 보면 “연국이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그(고조선) 서방을 공략하여 2천여리의 땅을 얻고 滿.番汗(만.번한)까지로 경계를 삼으니 조선은 마침내 약화 되었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앞의 “사기”“조선열전”에서 소개된 전국시대의 연국이 전성기에 진번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켰다는 내용을 좀더 자세히 전하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사기” “조선열전”에는 조선이 연국에게 공략당하여 복속된 것으로 나타나고 “위략”에는 조선이 그 서방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긴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연국에 복속된 조선과 서방의 땅 2천여 리를 빼앗긴 조선이 동일할 수 없는 것이다. 전자는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있었던 지명이고 후자는 고조선인 것이다. “한서” “西 南夷兩*朝鮮傳(서남이양*조선전)”에서 안사고는 조선에 대해서 주석하기를 “전국시대에 연국이 공략하여 이곳을 얻었다”고 했는데, 그 내용으로 보아 안사고가 말한 조선은 “사기”“조선열전”의 첫머리에 진번과 나란히 기록된 조선을 말하는 것으로 고조선 전 지역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조선이 전국시대에 완전히 연국에게 병합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시대적인 배경은 다르지만 이와 유사한 내용이 “鹽鐵論(염철론)”“誅秦(주진)”편에서도 발견 된다. 거기에는 “진국이 천하를 병합한 후에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조선을 멸망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조선도 고조선 전지역일 수가 없다. 고조선이 진국에게 멸망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된 조선을 어떻게 인식하여야 하는가?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조선이 언급된 사건을 면밀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한서”에서 안사고가 주석한 조선이 나오는 본문은 “사기”‘ 조선열전“을 옮겨온 것으로 전국시대의 연국이 전성기에 고조선을 침략했던 사실을 적은 것인데 이것은 ”위략“이 전하는 진개전쟁을 말하고 있음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진개는 고조선의 서부를 침략한 사실은 있지만 고조선을 복속시킨 일은 없다. 종래에는 진개가 서부 2천여 리를 침략하였다는 ”위략“의 기록에 따라 이 시기에 고조선의 서쪽 국경이 크게 후퇴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진개의 침략으로 고조선은 크게 피해는 입었겠지만 오래지 않아 진개는 후퇴를 했었고 국경선은 크게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확인된다.

“위략”에 의하면 진개의 고조선 침략전쟁이 있은 후에 연국은 고조선과의 국경을 滿.番汗(만.번한)까지로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만.번한의 위치가 확인되면 국경선의 변화를 알수 있게 된다.. 만.번한의 위치는 “한서”“지리지”와 “수경주”의 기록을 통하여 입증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조”에는 文.番汗(문.번한)의 두 縣名(현명)이 보인다. 이 문.번한은 “위략”에 보이는 만.번한 이라는데 이론이 없는데, 동한시대에 이르면 文縣(문현)은 汶縣(문현)으로 바뀐다. 文. 汶. 滿(문.문. 만)은 중국의 동남부 지역에서 통용되는 吳音(오음)으로는 동일한 음이 된다. 古音(고음)이 주로 변경지역에서 오래 보존되어 내려온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때 이 세 문자는 고대에 동일한 음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文縣(문현)과 番汗縣(번한현)이 항상 나란히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연접되어 있었던 지역의 명칭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 번한현”의 반고 주석에는 그곳에 패수가 있다고 하였으며 응소의 주석에는 汗水(한수)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경주 유수조”를 보면 유수의 지류로 汗水(한수)가 있다. 그런데 유수는 지금의 난하의 옛 명칭이므로 결국 패수와 한수는 난하의 지류였을 것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만.번한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던 지명인 것이다.

반고와 응소는 패수와 한수의 흐르는 방향에 대해서 “塞(새) 밖으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앞에서 언급된 요수의 흐르는 방향과는 다르다. 요수는 동쪽 또는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 간다고 하였었다. 만약 고조선으로부터 위만조선에 이르기까지의 서쪽 경계였던 요수와 패수가 동일하게 지금의 난하였다면 그 흐르는 방향이 왜 다르게 기록되었는지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난하는 매우 긴 강 이다. 따라서 부분에 따라 흐르는 방향과 명칭이 다르게 되는데 요수의 경우는 그 하류 방향을 설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만.번한과 관계된 패수와 한수는 난하의 지류이므로 흐르는 방향이 다르게 되는 것이다. 현재 난하의 지류로써 서남으로 흐르는 강은 瀑河(폭하), 靑龍河(청룡하) 등이 있다.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후 후퇴했음은 당시 연국의 정황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하여진다.. "위략“의 기록을 ”사기 조선열전“과 연결시켜 보면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 시기는 연국의 전성기 였음을 알게된다. 연국의 전성기는 召王(소왕) 때로서 기원전 311년부터 기원전 279년 사이였으니 진개의 고조선 침략은 이 기간에 있었을 것이다. 연국은 기원전 284년에 秦國(진국), 楚國(초국), 趙國(조국), 魏國(위국), 韓國(한국) 등과 연합하여 강국인 齊國(제국)을 치고 70여개의 성과 제국의 도읍인 臨淄(임치)까지 점령 하였었다. 이 시기에 진개가 箕子國(기자국)과 고조선을 친 것인데 당시의 연국의 국력으로 보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5년 후인 기원전 279년에는 연국의 소왕이 사망하고 혜왕이 즉위하였는데 혜왕은 용렬한 군주여서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래서 연군은 제군에게 크게 패하고 철수 하여야만 했다. 그뿐만 아니라 기원전 273년에는 한국.위국.초국이 연합하여 연국을 정벌한 사태까지 일어났다 . 그후 연국은 멸망될 때까지 국력이 크게 쇠퇴되었다.

연국은 전성기를 맞은 것으로부터 불과 5년이 지난 후부터 국력이 크게 쇠퇴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조선을 친 진개만이 그 지역을 계속해서 확보하고 있었을 것으로는 생각할수 없다. 진개도 어쩔수 없이 후퇴했었을 것이다. “위략”의 기록에 진개가 기자국과 고조선의 땅 2천여 리를 빼앗았다고 말하고 그 다음에 국경을 만.번한으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만.번한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던 지명이었다. 즉 진개의 침략후에도 고조선과 연국의 국경은 그전과 크게 차이가 없이 지금의 나하 유역이었던 것이니, 이것은 진개가 후퇴 하였음을 입증하여 준다. 진개가 침략하였다는 2천여 리는 실제의 거리라기보다는 많은 땅을 침략하였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어떻든 고조선은 진개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래지 않아서 영토는 거의 회복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것은 전국시대에 연국만 일방적으로 고조선을 침략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도 연국을 침공한 사실이 있다는 점이다. “鹽鐵論(염철론)”“備胡(비호)”편을 보면 고조선이 요동에있던 연국의 傲(오)(국경초소)를 넘어 연국의 동부지역을 탈취한 일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요동에 있었던 연국의 傲(오)는 “사기 조선열전”에 나오는 요동외오를 지칭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동열전의 내용에 의하면 요동외오는 진개의 고조선 침략후에 설치되었다. 따라서 “염철론 비호”편의 기록은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후에 고조선도 연국을 침공한 사실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이로보아 고조선과 연국은 때때로 상호 침공이 있었으나 국경선에는 크게 변화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염철론”의 “伐功(벌공)”편에서는 “연국은 東胡(동호)를 물리치고 1천 리의 땅을 넓혔으며 요동을 지나 조선을 침공하였다. ”고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기 흉노열전”과 ‘위략“에 보이는 진개의 침략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만약 진개가 고조선의 영토를 침공하여 그것을 확보하고 있었다면 연국의 국경은 동쪽으로 크게 이동되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철론 험고“편에서는 연국의 국경은 碣石(갈석). 邪谷(사곡), 요수였다 고 밝히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진개의 전쟁이 일시적인 침략행위에 불과했고 다시 후퇴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전국시대에 연국시대에 연국보다는 제국이 강대국이었는데 제국은 지금의 산동성지역이었다. 그런데 종래의 통설처럼 연국이 압록강을 고조선과의 국경으로 삼고있었다면 연국은 제국의 두 배 정도의 대국 이어야 한다. 이것은 전국시대의 상황과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사마천은 ‘사기“에서 ”연국은 북쪽으로 蠻貊(만맥)의 압력을 받았고, 안으로는 제국. 진국과 국경을 함께하여 강국들 사이에 끼어 있던 변방의 가장 약하고 작은 나라로서 여러번 멸망할 위험을 겪었다“고 말하여 연국을 약소국으로만 표현하고 진개의 고조선 침략은 언급하지도 않았다는 점도 참고되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전국시대에 진개의 고조선 침략으로 연국에 복속되었다는 진번과 조선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던 지명일 수밖에 없게된다. 그리고 “염철론 주진”편에서 언급된 진국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패수(지금의 난하)를 건너 토벌하였다는 조선도 그 기록이 옳다면 지금의 난하 동부연안에 있어야 한다. 진국은 중국을 통일한후 도망한 연왕 희를 붙잡기 위하여 장수 왕분의 인솔 아래 요동을 친 일이 있으며, 장수 蒙恬(몽념)의 지휘아래 요동에 장성을 축조한바 있다. 그러나 고조선을 크게 침공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진국이 토멸하였다는 조선은 국경지역에 있었던 지명일 수밖에 없게 된다.


지금까지 소개된 조선에 관한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 조선은 고조선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난하 유역에 있었던 지명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 일개 지명이었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기록들에 의하여 입증된다. “한서 지리지 낙랑군조”를 보면 낙랑군에 속해있던 25개의 현 가운데 조선현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응소는 주석하기를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위서 지형지 평주 북평군조”를 보면 북평군에는 조선과 창신(신창?) 두 개의 현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현의 주석에는 “서한. 동한을 거쳐 진시대에 이르기까지는 낙랑군에 속해있다가 그후 폐지되었다. 북위의 연화 원년(서기 432)에 조선현의 거주민을 비여현으로 이주시키고 다시 설치하여 북평군에 속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현의 위치는 진시대까지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므로 진시대까지의 기록에서 조선현의 위치를 확인해 내면 그곳이 서한.동한 이래의 조선현의 위치가 된다. 그런데 “晉書(진서) 지리지 평주낙랑군조”를 보면 진시대의 낙랑군은 한시대에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 朝鮮(조선), 屯有(둔유), 渾彌(혼미), 遂城(수성), 누방, 駟望(사망) 등 6개의 현이 있었는데 조선현은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고, 수성형은 秦(진)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서 조선현의 위치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수성현은 진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하였으므로 그 위치가 확인된다. 앞에서 이미 확인된 바와 같이 진 장성의 동단은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있는 창려 갈석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수성현의 위치는 이 지역이 된다. 수성현이 창려 갈석 지역이었다면 같은 군에 속해있었던 조선현은 이 지역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하고 수성현과 조선현을 포괄한 지역이 낙랑군 지역이 되어야 한다. 晉(진)시대의 낙랑군은 서한시대에 설치되었고 조선현도 그 위치가 서한시대로부터 진시대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없었으므로 서한의 무제가 설치했던 漢四郡(한사군)은 이 지역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을 것임을 알게 된다

“漢書(한서)”“嚴朱吾丘主父徐嚴終王賈傳(엄주오구주부서엄종왕고전)” “賈捐傳(고연전)”에는 西漢(서한) 武帝(무제)의 업적을 말하면서 “동쪽으로 갈석을 지나 현토와 낙랑으로써 郡(군)을 삼았다” 고 했는데 이 표현은 매우 정확한 것이다.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갈석을 기준으로 하여 그 위치를 표현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된 北魏(북위) 延和(연화) 원년 (서기 432)에 移置(이치)된 조선현의 위치를 분명하게 해 주는 기록은 “隋書(수서)”“지리지 북평군조”에서 확인된다. 수시대의 북평군에는 노령현이 있었을 뿐인데 노령현에 대한 주석에는

옛날에 북평군을 설치하여 신창. 조선 두현을 統領(통령)하였는데 後齊(후제)(북제)시대에 이르러 조선현을 폐하고 신창현에 편입시켰으며 또 요서군을 폐하게 됨에 따라 해양현을 비여현에 편입시켜 통령하게 되었다. 개황 6년(서기 586)에는 또 비여현을 폐하여 신창에 편입시켰고, 개황 18년(서기 598)에는 노령현으로 개명 하였다. (중략) 長城(장성)이 있고 關官(관관)이 있고 臨渝宮(임유궁)이 있고 覆舟山(복주산)이 있고 갈석이 있고 玄水(현수), 盧水(노수), 溫水(온수), 閨水(규수), 龍鮮水(용선수), 巨梁水(거량수)가 있고 바다가 있다

고 하였다. 이 기록에 나오는 현수,노수,용선수 등은 난하의 지류이며 비여현,장성,갈석 등이 난하의 하류 동부연안에 있었음은 앞에서 이미 확인된바 있다. 따라서 북위시대에 이치된 조선현도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있었는데 후에 노령현으로 편입되었음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앞에서 언급된 북위 연화 원년(서기 432)에 있었던 조선현의 비여현 지역에로의 이치는 조선현이 본래 있었던 곳으로부터 가까운 지역으로 이루어졌던 것임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고찰에서 분명하여진 것은 난하 하류의 동부연안 즉 고조선의 서쪽변경에 조선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후에 그 지역에 조선현이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문헌에서 조선에 관한 기록이 나타날 경우에는 그것이 고조선 전체에 관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분별해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수 있다.

고조선지역 안에 국명과 동일한 지명이 존재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고대 중국의 예가 참고로 제시 될수 있다. 중국 최초의 국가였던 商王國(상왕국)의통 경우 국명과동일한 商(상)이라는 명칭의 邑(읍)이 존재했음이 甲骨文(갑골문)과 문헌의 기록에서 확인되며, 西周王國(서주왕국)에서는 정치적 중심지를 周(주)라 불렀는데 도읍인 鎬京(호경)을 宗周(종주), 東京(동경)인 洛邑(낙읍)을 成周(성주)라고 불러 그 명칭이 국명과 동일했음은 주지된 사실이다.

조선이라는 지명이 어떤 연유로 붙여졌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가 없으나 적어도 고대 중국인들에게 그 지역이 고조선을 상징하는 지역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곳을 도읍지로 보기에는 너무 변방에 치우쳐 있고 고조선 세력이 집중되어 있던 곳으로 보기에는 그 규모가 노무 작다. “大明一統志(대명일통지)”에는 “조선성이 영평부 경내에 있는데 기자가 봉해졌던 곳으로 전해온다”고 하였는데, 명시대의 영평부에는 난주, 노령현, 천안현, 무녕현, 창려현, 낙정현 등이 속해 있었으며 난하 하류유역에 있었다. 이로보아 영평부에 있었던 조선성은 앞에서 언급된 조선에 있었던 성일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성은 아마도 고조선에서 국경지대에 방어용으로 축조했을 것인데 그 위치로 보아 令疵塞(영자새)를 의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큰 성이 있었고 그러했기 때문에 변경의 고조선인들이 그곳에 비교적 욵비해서 살았을 것인데, 중국인들의 눈에 그 지역이 고조선의 상징으로 보여 조선이라는 명칭이 붙여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부연해 둘 것은 중국의 西周(서주) 초에 동북지역으로 이동을 했던 기자 일행이 난하의 서부연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진시대에 중국의 통일 세력에 밀려 난하의 동부연안 즉 고조선의 서쪽변경에 있었던 조선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기자국의 준왕은 위만에게 정권을 탈취당하였던 것이다. 그러했기 때문에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었다는 기록을 옛 문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이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있었던 지명이라면 “사기 조선열전”에 조선과 나란히 기록된 진번의 위치는 어디였는가? 이것은 동열전에 주석으로 실린 “사기집해”의 기록이 해결하여 준다. 거기에는 진번에 대해서 주석하여 “요동에 番汗縣(번한현)이 있다”고 하였다

즉 요동의 번한현 지역이 진번이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확인된 바와 같이 번한현은 지금의 난하 연안에 있었다. 따라서 진번은 난하 연안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로써 조선과 병기된 진번은 조선과 근접하여 난하의 동부연안에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 지역의 명칭에 따라 한사군의 진번군이 설치되었을 것이다. 진번이 난하의 동부연안에 있었음은 다음에 국경선의 변화가 확인됨으로써 더욱 분명하여질 것이다.

앞에서 이미 인용하였듯이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전국시대에 연국이 진개전쟁의 결과로 난하의 동부연안, 즉 고조선의 서부 변경지대에 있었던 진번과 조선을 복속시키고 그 지역에 鄣塞(장새)를 설치하였는데 진시대에 이르러는 그것을 요동외오에 속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장새와 요동외오는 어떻게 해석 되어져야 하는가? 이 점은 “사기색은”이 밝혀준다. “사기”“ 黥布列傳(경포열전)”에 나오는 “오”에 대해서 “사기색은”은 주석하기를 “오라고 하는 것은 변경에 있는 亭(정)과 塞(새)를 말한다. 오 로써 변방을 둘러싸고 항상 그것을 지킨다”고 하였다. 이것은 오와 鄣(장)을 매우 명료하게 설명하여 주고 있다.

오와 장은 다 같이 초소를 말하는데 특히 변경에 있는것을 오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기 조선열전” 에 나오는 전국시대의 연국이 고조선과의 경계에 축조했던 鄣塞(장새)는 국경선에 있었던 초소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진국이 연국을 멸망시킴에 따라 장새가 속하게 된 요동외오는 요동에 있었던 외곽의 초소를 지칭한 것임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요동외오는 진개전쟁 후에 요동의 국경지대에 설치하였던 최전방 초소였는데 연국이 진국에 멸망 됨으로써 그것도 진국에 속하게 되었고 장새를 행적적으로 이 요동의 외오에 소속 시켰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사기 조선열전”에서 연국이 조선을 친 후에 장새를 축조한 사실을 특별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라든가 “위략”에서 진개전쟁후에 국경이 만.번한 이었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국경선에 변화가 있었음을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후 연국의 내부 사정의 악화로 인하여 퇴각을 함으로서 고조선과 연국의 국경은 그 전과 대체로 비슷하게 되었지만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고 다소 고조선 지역으로 이동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만.번한 지역에 설치된 장새라는 국경의 요새를 축조하여야만 했고 만.번한 이라는 새로운 지역이 국경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보아야한다.

그런데 장새나 요동외오가 모두 진개전쟁후에 설치된 국경의 초소 또는 요새라면 서로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새와 오의 차이를 확인함으로서 분명하여질 것이다.

“漢書(한서)”“ 佞幸傳(영행전)”에서 안사고는 오에 대해서 주석하기를 “오는 새와같은 것이다. 동북에 있는 것을 새라 하고, 서남에 있는 것을 오라고 부른다. 새라는 명칭은 鄣塞(장새)에서 온 것이고, 오는 ”오遮(오차)“의 뜻을 취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새와 오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닌데 단지 그 위치하는 방향에 따라 달리 불리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조선과 연국의 사이에 있었던 새와 오의 경우는 발해에서 가까운 지역, 즉 난하 하류 동부유역은 요동의 서남쪽이 되므로 이 지역에 있었던 국경 초소는 오라고 불리어졌고, 그보다 북쪽인 난하 상류나 중류 동부 유역에 있었던 초소는 새라고 불리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추정에 불과한 것이므로 이 점을 좀더 명확히 하기 위하여는 당시에 위치가 분명한 새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위치가 분명하게 학인되는 연국의 새로는 令疵塞(영자새)가 있다. 이 영자새는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난하 중하류의 서부연안에 있었다,

그리고 영자새를 서북쪽의 기점으로 하여 창려 갈석에 이르는 자연적 장벽을 이용한 長城(장성)을 경계로 하여 서쪽으로는 난하에 의하여 제한되고 동남쪽은 발해에 잇닿은 지역이 전국시대 연국의 요동이었음은 앞에서 확인된 바 있다. 그러므로 영자새는 바로 연국 요동의 서북부에 있었으며 강에 의하여 형성된 국경선이 장성에 의하여 형성된 국경선과 만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대체로 이 지역이나 그 보다 북쪽에 있었던 국경의 초소가 새로 불리어 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장새는 영자새가 있었던 지역에서 약간 동쪽으로 이동된 지점에 있었을 것이고 요동외오는 그보다 남쪽의 위치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지점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한 초에 이르러 장새와 요동외오가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그것을 버리고 장새와 요동외오를 설치하기 이전의 국경 초소를 수리하여 다시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수리해서 사용한 遼東故塞(요동고새)는 영자새와 장성에 있었던 초소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되어 고조선과의 국경성에 있었던 서한의 초소는 난하의 서부연안과 장성에 위치하게 되었고 鄣塞(장새)가 있었던 난하의 동부연안과 요동외오가 있었던 장성의 동부지역은 다시 고조선과 기자국에 속하게 되었다. 위만이 서한으로부터 기자국으로 망명할 때 塞(새)를 나와 패수를 건넜다고 한것은 이상과 같은 지리적 관계를 잘 설명해 준다. 즉 국경 초소인 새가 패수의 서부연안에 있었음을 알게 하는데, 패수는 난하의 한 부분이거나 지류에 대한 명칭 이었다. 이 사실은 이미 소개된 “한서 지리지 요동군 번한현”의 반고의 주석에서 “그곳에 패수가있다” 고 한 기록과 번한현이 난하 동부연안에 있었던 사실을 연결시켜 보면 분명해진다.

서한 초에 국경으로 삼았던 패수가 전국시대의 진개전쟁 이전의 국경과 동일했음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위만은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후 서한에 그 外臣(외신)이 될 것을 약속하고 서한으로부터 군사와 경제의 원조를 받아 주변을 소읍을 쳐서 항복을 받았으며 진번과 임둔도 복속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것은 진번이다. 동열전의 첫머리에 의하면 전국시대의 연국은 전성기에 진번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 시켰다. 이것은 “위략”이 전하는 진개의 고조선 침략을 말하는데 이때 이미 진번이 연국의 영역으로 소속된후 변화가 없었다면 서한시대에는 진번이 서한의 영역에 속해 있어야 하므로 서한의 지원을 받은 위만이 진번을 복속시켰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없다

그렇다면 위만이 진번을 복속시켰다는 기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 기록은 서한 초에 진번이 고조선 영역에 속해 있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전국시대에 징개의 고조선 침략으로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있었던 조선과 진번이 일시 연국에 복속된 일이 있었으나 그후 다시 고조선의 영역이 되었고 그 조선지역에는 진시대 이후 기자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한 초에 서한으로부터 기자국으로 망명한 위만이 준왕으로부터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하였으므로 위만조선도 초기에는 고조선의 서쪽 변경인 조선지역에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위만이 서한의 외신이 되는 것을 조건으로 서한으로부터 군사와 경제의 원조를 받아 고조선의 서부를 잠식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주변의 소읍을 공략하여 항복을 받았고 고조선의 大邑(대읍)이었던 진번과 임둔도 복속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위만이 진번과 임둔을 복속시켰다는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은 위만조선이 바로 조선의 뒤를 이은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서부변경에서 출발하여 고조선의 서부를 잠식하면서 동쪽으로 영역을 확장한 정치세력이라는 점과 서한 초에 있어서의 고조선의 서쪽 국경은 진개의 고조선 침략 이전과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고조선과 서한 사이의 국경선이었던 패수는 진개의 고조선 침략 이전에는 고조선과 연국 사이의 국경선 이었던 지금의 난하나 그 지류였음을 알게 하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옛 문헌에 여러개의 패수가 등장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하는 점이다. “한서 지리지”에는 앞에서 언급된 요동군 번한현의 패수 외에 낙랑군 패수현의 주석에도 패수가 보인다. 패수현의 패수에 대해서 반고는 주석 하기를 “서쪽으로 흘러 증지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이강은 위치하는 지역이 다르므로 번한현의 패수와는 분명히 다른 강인 것이다. 이 패수와 구별하기 위하여 번한현의 패수에는 음이 같은 沛(패)字(자)를 사용 했을 것으로 생각 된다.

이 강들과는 다른 패수가 “수경주”에서도 발견된다 . ‘수경주“의 본문을 보면 패수에 대해서 ”낙랑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임패현을 통과하여 동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이 패수는 그 흐르는 방향이 번한현의 패수나 패수현의 패수와 다른 도 하나의 패수인 것이다. 그런데 酈道元(력도원)은 ”수경주“의 패수에 대해서 주석하기를 본문에 패수가 동남쪽으로 흐른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며 패수는 서쪽으로 흐른다고 하였다. 그것은 력도원 자신의 주석에서 확인되듯이 그는 한사군의 낙랑군을 지금의 평양으로 인식하고 패수를 대동강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패수는 앞의 패수들과는 또 다른 강인 것이다.

“遼史(요사)” “지리지”에는 요양현의 패수가 소개되어 있는데 그곳은 한시대의 패수현이었다고 적고 있으며 “盛京通志(성경통지)”에서는 이 강이 淤泥河(어니하, 진흙강의 뜻)라고 하였다. 이 강은 “한서 지리지” 낙랑군 패수현조에 보이는 패수와 동일한 강인 것처럼 기록되었지만 한시대의 영역은 지금의 요하까지 였으므로 이 지역이 한시대의 패수현이 될수 없으므로 또 다른 패수인 것이다. 이 외에도 정약용은 압록강을 고조선의 경계였던 패수로 본바있다. 이상과 같이 패수가 여러 강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그것이 원래 고유명사가 아니었고 일반적으로 강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에서 연원하였기 때문이었다. 퉁구스 계통 종족의 언어를 보면 강을 만주어로는 畢拉(필납)(중국음으로 삘라), 쏠론(索倫 , 색륜)어로는 必拉(필납, 삘라), 오로촌어로는 必雅拉(필아납, 삐알라)라고하는데, 고대 한국어로는 펴라, 피라, 벌라 등이었다. 강에 대한 이러한 언어의 어원이 같은 것임을 알게 되는데 고대에 고조선족이 살던 지역의 강들의 보통명사인 펴라, 피라, 벌라가 鄕札(향찰)식으로 기록됨으로써 후에 여러 강들이 浿水(패수)라는 동일한 명칭으로 나타나게 되어 혼란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 결론을 말하면, 고조선의 서쪽 경계였던 패수는 지금의 난하나 그 지류였는데 후에 위만조선의 성장, 한사군의 설치 등에 의하여 한의 세력과 문화가 팽창됨에 따라 고조선 지역에 있었던 여러 강들이 패수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고찰한 과정에서 아직 충분하게 설명되지 못한 부분이 남아 있다. 그것은 서한시대에 이르러 국경의 초소가 진시대보다 후퇴된 지역에 설치되어야 했던 이유가 충분하게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기 조선열전”에서는 진시대의 초소가 너무 멀어서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만 전하고 있는데, 이것을 뒷받침할 만한 설득력있는 보충설명이 필요 할 것같다. 그것은 서한 초의 정국을 살펴보면 분명하여질 것이다.

기원전 202년에 서한의 통일전쟁은 종결을 보게 되지만 오랜 기간의 전쟁에 의한 피해로 경제와 사회는 크게 파괴되었다. “사기 평준서”와 “한서 식화지”의 기록에 따르면 조정을 출입하는 將相(장상)들이 마차를 사용하지 못하고 우차를 사용하는 형편이었고, 민중은 극도의 기근에 처하여 인구가 줄어 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 권력은 아직 충분하게 강화되지 못하였고 지방에서 빈번히 반란이 일어났다. 기록에 나타난 것만 하더라도 기원전 202년부터 기원전 154년까지 약 반세기 동안에 무려 13차례의 반란을 겪게 되었다. 국내의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서한 정부는 우선 지방의 세력을 약회시키는 정책의 실천이 급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국시대 이래 지방의 귀족세력과 각국의 왕실 후예및 토호들을 장안으로 대거 이주 시키는 정책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지방의 봉지를 받고 候(후)가 된 공신들이 현지로 가지않고 장안에 거주하고 있는 현상의 개선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실천을 위하여 문제는 후들에게 봉지로 돌아가도록 명령을 내렸고 승상인 주발도 해임시켜 봉지로 가도록 하였다. 이와같이 국내정치가 안정되지 못하였던 서한 정권은 미처 주변의 이민족에 대해서 강력한 정책을 실행할 능력이 없었다. 그 결과 閩越(민월)은 절강 남부를 침략했고 南越(남월)은 내지 깊숙이까지 쳐들어왔으며, 북쪽의 흉노를 비롯한 이민족들이 변경지역을 소란시켰다.

그 가운데 특히 흉노는 세력이 강성하여 장성내에까지 진출하였고 기원전 200년의 백등산전쟁에서는 서한의 고조를 참패시킴으로써 서한정권으로 하여금 흉노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도록 만들었다. 당시에 흉노는 장안의 북방 7백리 지역에까지 세력을 뻗치었고 운중, 압문, 연, 대 등의 북방 지역을 거의 매년 쳐들어와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서한의 도읍인 장안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서한으로서는 장성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보 할수 없는 형편이어서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당면한 최대의 염원이었다. 이상과 같은 서한 초의 정황을 살펴볼 때 고조선과의 국경선에 있었던 초소를 경영하기에 비교적 유리한 난하의 서부연안과 장성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서한정권의 고심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조선과 서한의 국경선이 전국시대의 진개전쟁 이전과 동일해지게 되었는데 진개전쟁 이후에 설치되었던 鄣塞(장새)와 요동외오가 있었던 지역은 고조선과 기자국에 속하게 되었으나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空地(공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위만이 서한으로부터 기자국에 망명하여 거주하였던 진의 옛 공지 上(상).下(하)鄣(장)은 바로 장새가 있었던 지역인 것이다. 장새는 국경에 있었던 초소이므로 여러 곳에 설치되었을 것인데 그 가운데 上鄣(상장)과 下鄣(하장)이 있었던 공지에 위만이 거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조선의 서쪽 국경 변화에 대한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고조선의 서쪽 국경은 원래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의 상류와 중류 그리고 그 중하류 서부얀안에 있었던 令疵塞(영자새)를 기점으로 하여 난하의 하류 동부연안에 있는 창려 갈석에 이르는 선으로 형성 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전국시대인 기원전 311년부터 기원전 279년 사이에 일어난 진개의 침략전쟁 후에 국경선은 종전보다 약간 동쪽으로 이동하여 난하의 동부연안이 되었다. 그후 서한 초인 기원전 205년경에 이르러 국경선은 다시 진개전쟁 이전과 동일한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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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리 21-07-27 10:04
   
잘 보았습니다

제가 사마천 사기를 통해 춘추시대부터 파악한 내용으로 보면..
윤내현 교수는 기준점을 엉터리로 잡아서..
엉터리 기준점으로부터 위치를 결정했으니
모든 위치가 엉터리입니다

제가 사마천 사기를 통해 파악한 내용을 기준으로 윤내현 교수 주장을 이야기 한 것이니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누짱 21-07-27 10:14
   
오해한다라고 하기보단
1. 요수란 고대 지나인들이 동쪽경계를 이루는 강을 뜻한다는 수구리님의 주장과 윤교수의 주장은 일치한다.
2. 윤교수는 전국시대 연을 중심으로 연이 현재 산동성 위쪽 난하서쪽의 조그마한 국가로서 고조선과 경계를 난하 서부연안에서 이루고 있었다라고 본다.

이런 차이를 보여주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름 석학인데 엉터리라고 규정짓지말고 최소한 윤교수의 논문집인 한국고대사신론을 살펴보시고 쓰셨으면 합니다.

실컷 시간들여 찾아서 참조하시라 게시하였더니 단칼에 볼 가치도 없다고 자르니 다시는 님글을 보고 싶지도 않아지네요.
     
수구리 21-07-27 10:18
   
제가 판단하기에
윤내현 교수의 난하설의 가장큰 문제점은 중국 동북공정에 이용당할 수 있고 강단사학계의 고구려 영토를 공공히 해줄 수 있습니다

이유를 말씀드리면..
윤내현 교수 주장이라면 하북성과 산동성이 고조선 영토인적이 없기에

고고학 유물로 보면 연하도 문화가 연문화가 되고
연하도 문화가 동쪽으로 요하까지 진출하기에
 고구려 영역은 서쪽으로 요하를 넘어가기 쉽지 않습니다 고구려는 요동반도라는 설을 주장한 결과가 됩니다

윤내현 교수 주장이 왜 이런결과를 만들 수 밖에 없는 가 하면
고조선 문화는 산악문화 유목문화라는 착각이고, 평야에는 고조선이 영토를 갖지 않았다는
잘못된 전제 때문입니다

첫째) 은나라가 동이족이고 고조선의 거수국에 준하고, 은의 유민들이 하북성 북부로 이동했는데
고보선 문화에서 평야문화가 없을 수 있는지요
둘째) 고조선 주 세력은 유목민족이 아니라 농경에 정착하여 정착생활을 했고요(한반도 가 대표적인 사례임, 평양 고조선 유물에서 평야문화인 전차 유물이 나온 것도 있고요)
유목민족은 고조선의 거수국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셰째) 하북성은 연나라를 포함한 주나라 제후국들이 진출한 사료가 없으니 당연히 하북성은 고조선의 주활동 영역이었습니다
사마천 사기를 통해 제가 파악한 내용은
연나라가 동호땅 1천여리를 빼았았지만 하북성 중부인 호타하를 넘지 못했습니다
          
지누짱 21-07-27 10:25
   
이건 님의 설이고 님의 설이 옳다 그르다 라고 판단할 능력이 제겐 없습니다. 하지만 님의 태도는 판단할 능력이 있네요. 연구란게 다양한 설이 존재하는 것인데 타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자설의 옳음을 주장하는게 맞는 자세입니다만 남의 연구를 첨부터 자세히 살피지 않고 버리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도서관에 한국고대사신론이란 책이 있습니다. 제가 능력이 안되서 일부만 발췌했으니 부디 전체를 다 보시고 님견해를 설파하셨으면 합니다.
     
수구리 21-07-27 10: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내현 교수 주장은 제가 다시 면밀히 검토해 보겠습니다
수고하셨고 감사드립니다
수구리 21-07-27 13:49
   
"그는 진국의 옛 공지인 上下鄣(상하장)에 거주하면서 겨우 변방을 지키며 진번. 조선에 속해 있었는데 蠻夷(만이)및 옛 연국. 제국의 망명자들이 그를 왕으로 삼으니 王險(왕험)에 도읍하였다.'
로 했석했는데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와 옛 연나라와 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그들의 왕이 되어 왕험(王險:왕검)을 도읍으로 정했다.'
로 보는 것이 한국사 데이타베이스 해설입니다

이차이는 많은 다른 차이를 발생시킬 것 같습니다
     
지누짱 21-07-27 14:11
   
원문ㅇ은

稍役屬真番(초역속진번)、朝鮮蠻夷及故燕(조선만이급고연)、齊亡命者王之(제망명자왕지),都王險(도왕험)。

해석은
1.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와 옛 연나라와 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그들의 왕이 되어 왕험(王險:왕검)을 도읍으로 정했다.
2. 진번. 조선에 속해 있었는데 蠻夷(만이)및 옛 연국. 제국의 망명자들이 그를 왕으로 삼으니 王險(왕험)에 도읍하였다.

어느게 옳은지는 모르갰네요
          
지누짱 21-07-27 14:12
   
다만 윤교수는 중국상고사 전공이라 그리 틀렸다고 보기는 어려울듯요
     
수구리 21-07-27 14:13
   
이제 부터는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1) 윤교수의 "진번. 조선에 속해 있었는데' 는
 위만조선이 있고, 진번과 조선이 있는 것으로 보이고
2)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와 ... 복속시켜" 는
  진번인, 조선인 등의 만이로 --> 상하장에 있는 진번사람, 조선사람을 복속시켰다는 주장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위만조선인 상하장에 있는 사람 또는 조그마한 현 정도를 복속시킨 것이 되겠지요

원문은 '稍役屬真番" 인데 첫자인 稍(점정 초)로 보아서
 한국사데이터베이스가 맞다고 봅니다
     
수구리 21-07-27 14:25
   
제 의견과 같이 윤교수의 해석이 정확하지 않다면
이후에 전개되는 논리는 상당한 문제를 내포할 수 있습니다

저와 해석의 차이가 있기에  이후의 내용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하지 않겠습니다
(참조로만 읽겠습니다)
          
지누짱 21-07-27 14:56
   
稍役屬真番(초역속진번)、朝鮮蠻夷及故燕(조선만이급고연)、齊亡命者王之(제망명자왕지),都王險(도왕험)。이부분을 그렇게 해석하게 되면 전구절과 모순이 됩니다.

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자시전연시상략속진번조선),즉 연이 이미 진번과 조선을 복속시켰는데 뭘 또 복속시키나요?

윤교수해석처럼 처음에 위만이 진번과 조선(이 조선은 조선현이라는 지명임)에서 활동하다가 만이와 옛 연 제 망명자들을 모아서 왕이되었다가 맞다고 봅니다
               
감방친구 21-07-27 15:00
   
윤내현 선생의 탁월한 견해는 님이 이미 공들여 옮겨와 소개하신 바대로

두 개의 조선 가운데에 서쪽 조선을 연이 건드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연은 지배력을 상실하고, 그 서쪽 조선은 스스로 회복하였다 하는 것입니다
                    
지누짱 21-07-27 15:27
   
두개의 조선은 금시초문이나 침략은 받았으나 다시 회복했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감방친구 21-07-27 15:49
   
금시초문이시라뇨

----

여기서 연국에 복속된 조선과 서방의 땅 2천여 리를 빼앗긴 조선이 동일할 수 없는 것이다. 전자는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있었던 지명이고 후자는 고조선인 것이다. “한서” “西 南夷兩*朝鮮傳(서남이양*조선전)”에서 안사고는 조선에 대해서 주석하기를 “전국시대에 연국이 공략하여 이곳을 얻었다”고 했는데, 그 내용으로 보아 안사고가 말한 조선은 “사기”“조선열전”의 첫머리에 진번과 나란히 기록된 조선을 말하는 것으로 고조선 전 지역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조선이 전국시대에 완전히 연국에게 병합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시대적인 배경은 다르지만 이와 유사한 내용이 “鹽鐵論(염철론)”“誅秦(주진)”편에서도 발견 된다. 거기에는 “진국이 천하를 병합한 후에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조선을 멸망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조선도 고조선 전지역일 수가 없다. 고조선이 진국에게 멸망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지누짱 21-07-27 15:00
   
님의 견해는 진번과 조선을 지명으로 안보고 족속이나 나라로 보는것 같네요.
윤교수는 앞에서 진번과 조선을 지명이라고 고증하고 진나라가 통일후 조선지역ㅡ조선현ㅡ을 버려두었는데 서한초 망명자들이 거기에 모여 고조선의 변방을 지키다가 위만을 왕으로 추대해 위만정권을 세웠고 당시 고조선은 그들과 상관없이 존재했다고 보네요
               
감방친구 21-07-27 15:01
   
그러니까 그런 내용의 말로 성을 내실 일은 아니죠
                    
지누짱 21-07-27 15:30
   
알겠습니다. 성을 내는건 아니었어요. 해석이 완전히 틀렸다는 말이 잘못되었다고 보기에 한마디 했습니다. 초라는 글자가 중요치않으니까요
               
수구리 21-07-27 15:09
   
저는 상하장에 있는 진번출신 사람들, 조선 출신 사람들 또는 진버조선 사람들로 봅니다

조금더 확대해석하면
 진짜 한나라 변방에 있는 조선출신 사람들과 만이 사람들로 볼 수도 있습니다
                    
지누짱 21-07-27 15:29
   
예 해석의 차이이니 차이는 그대로 두고 수구리님의 위치비정을 정교히 하시되 여러견해를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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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2 [한국사] 조선시대 압록강 북쪽에도 영토가 있었음을 알려주… (21) 보리스진 08-02 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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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0 [한국사] 고조선 영토와 삼진三晉시대의 주周나라 영토[ 기… (3) 수구리 08-01 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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