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진섭세가에'한漢나라 2세 원년(기원전 209년) 7월, 빈민가 백성들을 징발하여 수자리를 보내 어양(漁陽)을 지키게 하여 900명이 대택향(大澤鄕)에 주둔하게 되었다.'
--> 어양군에 대택향이라는 고을이있고, 대택향은 대륙택 근처의 고을로 보이고 대륙택은
형수시 북부인 거록현과 융효현 서쪽과 북쪽지역이다
말씀하신 내용에서 어양이 산서성에 있으려면 로현이 산서성에 있어야 하는데
첫째) 한나라 시대, 춘추전국 시대에
로현이 산서성에 있었는지, 고수가 로현을 지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수경주는 북위 시대 역도원이 515~524년경에 작성한 것입니다
따라서 어양이 산서성에 있으려면 수경주에서 말하는 로현의 춘추전국 시대의 위치가 산서성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춘추전국 시대 고수, 포구수가 로현을 지나는 것도 증명해야 합니다
서기 500년 경의 북위시대 역도원의 지리 설명으로 서기전 BC 300경의 어양의 위치(늦어도 한서지리지 작성시점인 서기 100년 경의 어양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거의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서기 200년 이전의 사료를 참고하고 서기 200년 이후의 사료나 지리지는 참고만 하라고 한 이유입니다)
단) 북위 역도원이 춘추전국 시대나.. 한나라 시대의 지리지를 그대로 옮겨서 수경주를 작성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가능할 수 있습니다
둘째) 하지만 사마천 사기는 기원전 91년에 완성한 것이고
한사군 설치 당시에 사마천이 한사군과 요동,요서 어양 우북평, 상곡을 직접가 보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또한 한사군과 요동, 요서, 우북평, 상곡은 한시대의 연나라로 춘추전국 시대의 연나라와 크게 차이가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양이 동쪽에 있다는 한서지리지 연나라 내용도 낙랑군이 있었던 서기 100년 경에 작성된 내용이기에 어양은 태행산맥 동쪽인 하북성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보정시가 연나라라고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은 기록이 아니라 소전이 유세하는 말 속에 나오는데
소전이 연소왕에게 유세하는데..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朝鮮), 요동(遼東)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林胡), 누번(樓煩)이 있습니다. 또한 서쪽에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이 있으며 남쪽에는 호타(嘑沱)와 역수(易水)가 있습니다. 사방 2천리에 달하는 땅에 무장한 군사들은 수십 만에 달하고 6백 승의 병거에 6천기의 기병과 수년 치의 식량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남쪽에는 갈석(碣石)8)과 응문(應門)9)의 비옥한 평야가 있고 북쪽에는 대추와 밤의 특산물로 나오는 이익으로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않아도 풍족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천혜의 부고(府庫)라고 부릅니다.'
라고 소전이 말했다고 나옵니다
조(趙) 세가를 보면
무령왕 26년 기원전 299년, 다시 중산을 공격했다. 이로써 그 때까지 빼앗은 땅이 북쪽으로는 연(燕)과 대(代), 서쪽으로는 운중(雲中)138)과 구원(九原)139)에 까지 이르렀다
소진이 연나라 북쪽에 운중과 구원이 있다고 말로 연소왕을 설득했는데.
사마천 사기 조세가에는 조나라 서쪽에 운중과 구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조나라는 한단이고 한단 서쪽에 운중과 구원이 있으니
운중과 구원 남쪽이 연나라가 됩니다
그러면 연나라 위치는 보정시가 아니라 산서성 남쪽인 임분시나, 섬서성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소전의 말이 맞다면 조세가 기록이 틀린 것이 되고요
조세가 기록이 맞다고 한다면 소전의 말이 틀린 것이 됩니다
저는 소전의 말보다는 사기의 조세가가 맞다고 보아서
연나라 북쪽에 구원과 운중이 있다는 소전의 말은 뻥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의 흐름이나 파악한 주변 환경으로 고수를 주장할 수 있고,
심정적으로 저 강이 고수라고 개인적으로 확신 해도 되겠지만..
다른 사람을 설득하거나 제 3자의 반론에 대응하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제3자의 반론에 대응할 수 있고 설득할 수 있을 때에 해당 강이 고수라는 주장을 인정 받을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자료 를 준비해야 하고 제 3자의 반론에 대응할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심스러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