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정부가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하자 일본은 거류민 보호명목으로 인천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이어 그해 7월 23일 경복궁에 난입해 ‘국왕생포작전’을 벌였다. 왕궁 점령 이틀 후 일본은 아산만의 청군함대를 기습 공격해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러면서 일본은 김홍집, 박영효를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조선의 내정개혁에 적극 개입하였다.(제1차‧2차 갑오개혁) 그러나 1895년 5월 삼국간섭으로 인해 요동반도를 반환하면서 일본의 기세가 꺾이자 민씨 일족은 친러파인 이범진, 이완용 등을 기용해 일본에 대한 견제를 시도했다. 일본은 1895년 7월경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주한일본공사로 임명하고 친러 정책을 펴는 명성황후를 제거하고자 ‘여우사냥’ 작전을 획책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미우라는 흥선대원군을 앞세우고 일본 낭인들을 지휘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체를 불태웠다. 그리고 고종을 위협해 유길준,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수립, 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로 인한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하자 미우라와 가담자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히로시마 감옥에 가두고 재판했으나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석방하였다.
우리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정부대개혁도朝鮮政府大改革之圖」(69.2㎝×34.5㎝)는 1894년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갑오개혁을 소재로 한 니시키에錦絵다. 니시키에란 근대 일본의 목판화로 무로마치시대 말기부터 에도시대 초기에 걸쳐 그려진 우키요에浮世繪라는 풍속화를 근간으로 한 것이며 이것이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풍부한 색채를 사용하는 컬러판 니시키에로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미인화를 주로 그렸으나 19세기에 들어와서는 풍경화나 일본과 중국의 역사상의 인물을 소재로 삼았고, 일본이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면서부터 당시 전황을 알리거나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보도화報道畵가 많이 그려졌다. 이 그림은 오오토리大鳥圭介 주한일본공사가 배석한 가운데 조정 대신이 신료와 백성들에게 내정개혁안을 공포하는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그림 중앙 상단에 당시 정치상황을 설명한 글이 있는데 “민씨 일파의 폐정 때문에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였으며, 이를 개혁하기 위해 대원군을 내세우고 무력으로 청군을 격퇴했다.”고 적혀 있다. 그림 속의 궁궐을 나서는 기모노 입은 여인은 개혁 조치로 인해 권좌에서 쫓겨나는 민씨 일파를 상징한다.
위 그림과 짝을 이루는 「조선전보실기朝鮮電報實記」(69.2×34.5, 1894.7)와 「조선왕성대원군참전도朝鮮王城大院君參殿圖」(69.2×34.5, 1894)도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다. 전자는 오오토리 공사가 일본군을 지휘하여 조선군과 전투를 벌이며 경복궁으로 입성하는 그림이고, 후자는 대원군과 어린 의화군이 경복궁에 들어와 고종을 배알하는 그림으로 함께 있는 오오토리 공사와 왕궁 주위를 경계하며 도열해 있는 일본군의 모습은 당시의 강압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1890년대에 그려진 조선‧중국 관련 니시키에는 한국과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일본 국민에게 전파하고 제국주의 침략사상을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일본 풍속화를 다년간 연구해온 재일사학자 강덕상 교수는 “다른 어떤 매체보다도 민중을 선동하기에 적합했던 게 우키요에 전쟁화였으며, 이를 통해 일본의 근대화가 당초부터 침략과 병행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
∷ 선임연구원 박광종
https://www.minjok.or.kr/archives/83440
너무나 부풀려진 동학농민봉기
동학은 그 자체논리에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각성, 민본사상, 계급타파, 남녀평등 등 민주주의적 요소가 다수 발견된다. 구한말 동학은 전통적인 양반지배 사회질서에 대한 부정, 새로 전파된 서학에 대한 저항이라는 뜨거운 기운 위에 서 있는 정신적 기둥이었다.
그것은 조선 말기에 정치·사회적으로 직면해 있던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민중 차원에서 개혁하고, 점점 압박해 오는 외국의 압력으로부터 민족적 이익을 지키려는 조선 사회의 역사적 바람을 반영한 사상이었다. 한편에선 고난을 피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종교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 학자나 정부의 주장처럼 그것을 ‘혁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이 존재한다. 동학농민봉기가 외세(청국군·일본군)를 끌어들여 청일전쟁을 야기한 결정적 단서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청일 양국군 조선 출병→청일전쟁→민비 시해→조선에서 러시아 세력의 득세→러일전쟁→일본 승리→을사보호조약→한일합병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망국이라는 뇌관을 때려 대폭발을 일으킨 것이 바로 동학농민봉기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동학을 ‘혁명’으로 자리매김할 경우 좌파나 전체주의 추종자들이 그토록 저주하는 외세의 군대를 이 땅에 불러들여 촉발된 망국 책임에 대해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1894년 전라도를 중심으로 농민들이 두 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제1차 봉기는 1894년 2월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백성들을 착취하는 고부 군수 조병갑을 징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것이 확대되어 농민군이 황토현 전투 등에서 관군을 연거푸 물리치고 전주를 점령하자 청군의 조선 파병을 불러왔고, 이것이 일본군의 출병까지 연쇄작용을 일으켜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제2차 봉기는 1894년 가을 조선을 점령한 일본군에 저항하기 위한 반일 봉기였다. 1894년 11월부터 12월, 공주 일대에서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 및 조선관군 연합군과 전투에서 전멸하여 농민봉기는 좌절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학의 봉기와 관련하여 과장되거나 가짜 내용들이 부풀려져 마치 그것이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인 것처럼 횡행하고 있다.
우선 고부에서 일어난 전봉준 봉기부터 살펴보자. 이때의 봉기는 동학교단이나 민족주의적 동기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저 조선 후기 지방 곳곳에서 발생했던 전형적인 민란이었다. 이러한 민란을 동학 대봉기로 끌고 간 주범은 민란 진압을 위해 파견되었던 안핵사 이용태였다.
그는 고부 관아를 습격한 난민 가운데 동학교도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용태는 동학교도들이 고부 민란을 일으킨 것으로 몰아붙여 민란 참여 여부와 관계없이 동학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아무 죄도 없는 동학교도들이 거센 탄압을 당하자 그 때부터 동학 지도자인 손화중과 김개남이 전봉준의 봉기에 가세하면서 '동학'이라는 종교적 색채를 띠게 된다.
다시 정리하면 전봉준의 봉기는 처음부터 동학 종교집단의 조직적인 거사가 아니라 전형적인 민란이었다. 이 민란을 위무하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의 탐학 행위에 저항하기 위해 동학이 뒤늦게 합류한 것이다.
동학 지도부, 전봉준을 “국가의 역적, 사문난적”으로 규정
게다가 전봉준이 주동이 된 제1차 봉기는 전라도 중심의 동학 세력(남접)만이 참여한 거사였을 뿐 동학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최제우와 북접 세력은 제1차 봉기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제1차 봉기에 찬성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호응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북접 지도자들은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그것이 동학과 연계되자 불쾌감과 배신감을 느꼈다. 덕분에 전봉준은 거사 과정에서 동학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완전 무시당했다.
뿐만 아니라 동학 지도부였던 북접은 남접을 적대했다. 교주 최시형은 성격상 수도사적인 비폭력주의자였기 때문에 무장봉기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전봉준과 동학이 합세하여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을 때 최시형은 전봉준에게 밀사를 보내 해산을 지시하고 거병이 잘못된 일임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최시형은 전봉준이 끝내 자신의 비폭력 노선을 따르지 않자 4월에 전봉준을 모욕하는 경고문을 보냈다.
자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이 거병했다는 소식을 듣자 북접 지도부는 “전봉준을 비롯한 남접 지도자들은 국가의 역적이요 사문난적”으로 규정하고, 이들에 대한 토벌군을 조직하기 위해 교도들에게 통유문까지 돌린 사실이 천도교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접이 봉기에 참여한 것은 1894년 9월 제2차 봉기 때의 일이다. 그것도 자발적 참여라기보다는 내키지 않는 참여를 하게 된 것이다. 명분상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는 동학 지도부가 남접의 항전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조선 침탈을 눈 감고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접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이 일본군에 맞서 봉기하자 일부나마 북접 지도자들이 형식적으로 가세하여 면목을 세워준 정도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때 동학의 제3대 교주가 되어 훗날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떠오게 되는 손병희가 중군 통령으로, 친일파의 거두 역할을 하게 될 이용희가 손병희 부대의 우익부대장으로 참전했다. 이용희도 동학 교단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주도적 인물이었다.
동학에서는 포교한 사람의 숫자에 따라 지위가 상승한다. 40명을 포교하면 해접주(該接主), 300명을 포교하면 수접주(首接主), 1,000명을 포섭하면 대접주(大接主) 지위가 부여된다. 1만 명을 포섭하면 의창대령(義昌大領), 5만 명을 포섭하면 해명대령(海明大領), 15만 명이면 수청대령(水淸大領)이다. 당시 동학에서 수청대령은 이용구 한 명뿐이었고, 그 위에 대도주(大道主), 즉 제3대 교주 손병희가 있었다. 이용구는 신도 15만 명을 거느린, 손병희 다음가는 동학 지도자였다.
그런에 전봉준이 과연 동학교도였는가에 대해 이견이 제기되었다. 천도교 자료 가운데 전봉준이 동학교도, 혹은 동학접주라고 주장하는 최초의 기록은 이돈화의 『천도교창건사』다. 이 책에서 이돈화는 전봉준이 30세 되던 1884년 동학에 입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영익은 전봉준이 동학교단에 가입한 것은 사실이나, 교리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이비 동학도였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하지만『전봉준평전』의 저자 신복룡은 전봉준이 동학교도였다거나 동학접주였다는 설을 강력 부정한다. 전봉준이 동학에 입교한 내용은 어떠한 사료로도 입증되지 않으며, 후세 사가들의 곡필에 의해 동학교도로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전봉준이 동학교도가 아니었다는 신복룡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수많은 학자와 지식인, 일반인, 언론들이 ‘동학혁명’ 운운하는 용어로 붕붕 띄워온 이 사건의 성격 규정에 어떤 변고를 겪을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신복룡은 동학 농민봉기의 성격을 “종교(동학)의 표피를 쓴 민란”이라고 정의한다. 전봉준이 동학교도, 혹은 동학접주가 아니었다는 신복룡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동학혁명’이라는 명칭은 재검토되어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 동학교도, 혹은 동학접주인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부여된 '동학혁명'이란 과장된 용어는 영웅과 자신의 동일시를 통해 위광효과(identification)를 얻으려는 동학교단 측과, 학문적 수련이 철저하지 못한 몇몇 학자들의 일방적인 해석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주화약(全州和約), 폐정개혁 12개조 내용도 허구
동학 농민운동을 설명하는 자료들을 보면 전주화약에 대해 “농민군은 외세의 출병 구실을 없애고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폐정개혁안을 제시, 이를 받아들이면 해산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정부 측이 이에 응하여 6월 10일 정부군과 농민군 사이에 화약이 체결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전봉준이 병법을 좀 공부했다면 양식이 풍부한 전라도 곳곳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게릴라전을 벌여 관군을 지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병법에 문외한이었기에 농민군을 전주성으로 끌고 들어가 관군에게 스스로 포위를 자초함으로써 자멸에 이르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전주성 전투와 전주화약을 정리해보자.
첫째, 전주성 전투는 동학 농민군의 승리가 아니라, 관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전주성 전투에서 농민군이 관군을 제압한 것처럼 기술한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는 반대 되는 허구의 창작이다.
둘째, 일방적으로 완벽하게 승리한 관군이 동학 농민군에게 화약(和約)을 요청할 이유가 없었다. 농민군은 두 차례 성문을 열고 나가 무모한 전투를 벌이다 패주를 거듭하여 궤멸 일보 직전에 몰렸다. 이 상황에서 농민군이 휴전 조건으로 뭔가를 요구할 상황이 아니었다.
셋째, 서울에서 파견된 관군 지휘관 홍계훈도 농민군에게 폐정개혁이나 탐관오리의 처벌을 약속한 적이 없다. 초토사의 목표는 ‘비도(匪徒)의 귀화’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전주화약은 존재하지 않았다. 관군의 무력에 압도당한 농민군이 자진해산했고, 관군은 농민들이 빨리 도주하여 해산하도록 포위를 풀어주었을 뿐이다.
조정과 농민군 대표가 각 읍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위한 12개조를 공포한 것은 전주에서 농민군이 해산하고 난 후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런데 12조의 ‘폐정개혁’도 완벽한 소설 창작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일부 학자들이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주장해 온 '폐정개혁 12개조'의 내용 중 노비제도 혁파, 천민에 대한 차별 금지, 토지균등 등 반봉건적·평등주의적 개혁 요구조항은 가히 충격적이다. 이 요구조항이 사실이었다면 동학은 봉건체제의 변혁을 추구한 ‘혁명’이 분명하다.
하지만 폐정개혁 12개조는 어떤 동학란 관련 논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폐정개혁 12개조’는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것은 실재했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일제 후기인 1940년, 오지영이란 사람이 창작한 『역사소설 동학사(東學史)』에 처음 등장한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소설가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면서 꾸며낸 ‘허구’라는 뜻이다. 소설가가 창작해낸 내용을 확인조차 하지 않고 학자들이 지금껏 사실인 것처럼 믿어온 신기루일 뿐이다.
동학 농민혁명의 ‘반봉건’ 부분도 사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엉터리 주장이라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한 유영익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유영익은 전봉준의 재판기록, 일본영사관 심문기록 등을 분석한 끝에 전봉준은 농민항쟁을 통해 체제변혁을 추구한 사실이 없다는 점을 낱낱이 밝히는 『동학농민봉기와 갑오경장』(1998)이란 저서를 오래 전에 발간했다.
유영익의 연구에 의하면 전봉준은 ‘반봉건 혁명’을 한 것이 아니라, 농민들을 괴롭혀온 수령, 탐관오리, 보부상의 작폐, 부세의 남징을 국왕이 바로 잡아 달라는 요구를 했을 뿐이다. 즉 전봉준은 농민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여 국왕을 현혹하는 권세가를 잡아 죽이고, 기강과 명분을 바로 잡고, 성인의 가르침을 떨치고자 하는 유교적 질서 하의 개혁을 원했던 사람이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이 엄연하게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동학이 어떻게 “체제변혁을 시도한 진정한 혁명”이라고 우겨댈 수 있단 말인가? 이 나라의 국사학자들은 소설(fiction)과 사실(fact)의 차이도 모르는 무지랭이들이었단 말인가? 정말 소가 웃다가 코뚜레가 터질 일이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고종 31) 동학접주 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이 합세해 일으킨 반외세·반봉건 운동이다. 요즘 말로 하면 반일(反日), 민족자주를 외친 것이다. 그렇다면 동학농민군이 어떻게, 왜 토착왜구가 된 것일까.
안중근은 1909~1910년 뤼순감옥에서 쓴 글에서 “동학은 일진회의 무리”라고 적었다. 일진회는 친일파이자 민족반역자인 송병준 이용구를 주축으로 해 일제의 대한제국 병탄에 호응한 친일단체다.
애국지사 정암 이태현(1910~1942)의 유고집 정암사고(精菴私稿)에 적힌 ‘수왜십죄(數倭十罪·왜놈들의 열 가지 죄목)에는 “토왜가 원수와 같은 오랑캐(일본)를 끌어들여 종묘사직을 망하게 했다”는 대목이 있다.
이태현은 유교의 가르침대로 산 정통 유학자다. 정암사고의 ‘토왜’는 안중근이 가진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동학농민군이 토왜로 몰린 것은 친일단체 일진회의 다수가 동학농민군 출신이기 때문이다. 친일 단체에서 송병준 같은 고위직은 소수였고, 저변을 이룬 게 동학농민군과 박해를 당하던 천주교인이었다.
카를 마르크스를 원용하면 조선의 양반 계급은 ‘봉건지주’다. 안중근의 아버지 같은 ‘봉건지주’들이 의병을 조직해 자신들이 ‘폭도(동학농민군)’라고 규정한 이들과 싸웠다. 안중근도 16세의 나이로 출전해 동학농민군을 ‘때려잡았다’.
동학농민군을 학살한 주역은 고종이 끌어들인 일본군이 아니라 조선의 관군과 ‘봉건지주’들이 조직한 의병이었다. 양반 계급이 조직한 항일 의병과 동학농민군을 때려잡은 의병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일제가 양반들이 조직한 항일 의병들을 진압할 때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이 친일파가 돼 의병을 타격했다.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일진회에 가입했다. 학살에 대한 복수였을 수도 있고 일본의 실체를 착각했을 수도 있다. ‘봉건지주’들은 농민군을 토왜라고 칭했다.
토착왜구라는 낱말은 이렇듯 아프면서도 슬픈 역사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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