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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4-26 18:29
[기타] 명나라 요동총병 이성량(李成梁)의 혈통분석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598  

https://blog.naver.com/sambolove/150139550274

1. 이성량은 누구인가

 

이성량은 자가 여계(汝契)이고 호는 은성(銀城)이라 하며, 명나라 요동 철령위 사람이다. 명세종 가정5년(1525년) 7월 14일에 태어났으며, 명신종 만력46년(1618년)에 사망했으니, 향년 92세이다. 만력4년에 요동총병관에 올랐으며, 만력7년 5월에 전공으로 영원백(寧遠伯)의 작위를 받았으며, 만력8년에는 세습이 허용되었다. 만력19년에는 투항한 적을 죽여서 공을 가로챘으며, 독직발호등의 죄를 받고 탄핵을 받아 직위가 박탈된다. 만력29년에는 수보(首輔, 명나라의 재상) 대학사인 신시행(申時行)의 추천으로 신종은 특별히 나이 76세의 이성량에게 다시 요동을 맡긴다. 만력36년에 다시 탄핵을 받는다.

 

이성량은 요동을 22년간 지켰고, 전공이 탁월했다. 만력초기, 왜를 물리친 후 북으로 옮겨온 척계광(戚繼光)과 협력하여, 경사북부와 동북지방에서 몽고와 여진의 각 부족에 큰 타격을 가했고, 영락제이후 유례없는 큰 전과를 거두었으며, 위세를 떨쳤다. 그리하여 천하의 장수중 최고로 손꼽혔다. 목종과 신종의 두 황제는 이성량의 승리로 인하여 대첩을 고한 것이 16번이고, 묘에 제사를 지낸 것이 14번이다. <<명사초략. 이성량전>>에는 "이성량 부자는 인걸이다"라고 적고 있다.

 

혁혁한 전공으로 이성량의 집안은 일세를 풍미한다. 이씨부자는 한 집안내에서 여러 장군이 나와서 그 세력이 엄청났다. 특히 이성량이 제2차로 요동을 맡았을 때, 요동세감(遼東稅監)인 고준은 이성량과 결탁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다. 요동사람들은 전란의 고통과 과대한 세금부담을 못이겨 "도로에 걸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기운이 없으며 발걸음이 무겁고 옆을 흘겨본다. 초췌하기 그지 없으며, 반은 사람같고 반은 귀신같다. 눈을 들어 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외에 이성량은 만력11년에 아타이를 습격하는 전투중에 길안내를 하던 부자를 잘못 죽였는데, 그들이 바로 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이다. 이성량은 당시 15세인 누르하치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그를 거두어 길렀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13벌의 물려받은 갑옷을 가지고 병사를 일으킨" 때로부터 다른 부족을 병합할 때도 눈감고 모른척 해주었다. 이런 점에서 이성량은 명,청 역사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나중에 누르하치가 청하, 무순을 습격하며 공개적으로 명나라에 반기를 든 만력46년에는 이미 이성량이 사망한 이후였다.

 

2. 이성량의 선조는 조선인인가?

 

<<명사. 이성량전>>에 의하면, "이성량은 자가 여계이다. 고조인 영(英)은 조선에서 귀의해왔고, 철령위지휘첨사의 직을 받았다"

 

이성량의 선조가 명나라초기에 조선에서 건너왔다는 주장은 사료의 기재로 인하여 더이상 다툼없는 사실이 되었다. 그리고, 이씨는 이에 대하여 다른 말을 한 적이 없다.

 

<<이씨보계(李氏譜係)>>(이수덕 강희간본. 1991년 8월 철령시박물관의 인쇄본에 근거함)의 서문에는 "오리의 조상은 조선에서 철령으로 이주했다"라고 적고 있고, "이씨의 원적은 조선인이다. 명나라초기에 강을 넘어 중국에 귀의했고, 철령으로 갔다. 그곳의 풍토가 순후하여 살기 시작했다"

 

이성량의 장남인 이여송(李如松)은 제독의 신분으로 만력기간에 조선에 파병갔을 때, 일찌기 조선의 군신에게 여러차례 자신의 가족이 예전에 조선에서 중국으로 건너갔던 사정을 언급했었다.

 

오함(吳?)이 모은 <<조선왕조실록중의 중국사료>>라는 책의 선조27년(만력22년)4월(수정실록)을 보면: "이여송이 동쪽으로 올 때, 부친인 영원백 이성량이 글을 보내왔다:' 조선은 나의 조상의 고향이니, 너는 열심히 하여라' 이여송은 이 부친의 서신을 따르던 사신에게 보여주면서, '집안어른의 가르침이 이러하시니 어찌 귀국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는 선조가 우리나라의 이산군(理山郡)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사람들은 어딘지 잘 모르겠다고 한다"(제5책제1997-1998쪽)

 

같은 책 선조26년(만력21년) 3월 기묘에는: "접반사인 한응인이 보고했다: 제독(이여송)이 어제밤에 차비통사 진효남과 동생 이여매를 불러서 방에서 얘기했는데, 여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국왕과 같은 성이라는 것을 아는가? 우리 조상은 두만강에서 대대로 살았는데, 간음을 저질러서 동녕위로 이주한 것이다'"(제5책 1743쪽)

 

같은 책 선조26년(만력21년) 3월 병인에는: "병조판서 이항복이 말하기를: 제독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희 나라 사람이다. 오대조가 죄를 지어 중국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올대 가져온 활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면서 그 활을 꺼내서 보여주면서 '...나는 일품관으로 너희 국왕을 대함에 태만하지 않도록 하겠다' 자칭 독로강(獨魯江) 사람이아고 하였습니다. 독로강이라 함은 지금의 강계땅입니다"

 

같은 책 선조26년(만력21년) 2월 을사에는 "내(이여송)가 떠나올 때 어르산에게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서는데, 어르신이 불초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고려는 조상이 살던 곳이다. 너는 잘 헤아려야 하고, 해를 끼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을 마음 속에 간직해서 잊지 않고 있다"(제4책1699쪽)

 

3. 이성량이 여진혈통을 보유했을 가능성

 

최초로 이성량이 여진혈통을 지녔을 것이라고 의심한 사람은 일본인인 원전일귀(園田一龜)였다. 그는 <<이성량과 그 가족>>이라는 글(<<사학잡지>> 35편9호에 실림. 1931년)에서 이씨의 조상은 순수한 조선인이 아니라 여진사람같다고 하였다.

 

<<이씨보계. 세차원시>>에는 "이씨의 원적은 조선인이다. 명나라초기에 강을 건너 귀의했고, 철령으로 갔다. 풍토가 순후함을 흠모하여 눌러살았다. 변형역은 철령동남쪽 최공보의 북쪽에 있는데 씨족사람들은 노분(老墳)이라고 부른다. 나중에 정혁으로 비의 기록은 이미 훼손되고, 족보도 잃어버려서 입철근수(立哲根穗), 이합산(李哈山), 이하패노(李廈覇努), 이파도리(李把圖理), 이응니(李膺尼)의 다섯 분 선조에 대하여는 고증할 수없어서 감히 주석을 달지 못하겠다"

 

원전은 이 글에서, 이성량의 이러한 선조들은 조선의 초산(楚山) 지역에 살았고, 압록강의 남안에 해당하는데, 원말명초때에는 여진족이 거주하던 곳이다. 이외에 이성량의 조선선조중에 "이파도리"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이름은 분명히 만주어인 빠투루(巴圖魯, 용사라른 뜻)와 같은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로 인하여 그는 이성량이 무공으로 천하에 유명하게 이름을 날릴 것이 아마도 그의 혈관내에 흐르는 강인한 여진의 피때문이 아닐까 라고 추측했다.

 

<<이조실록>>에도 이씨의 조상이 조선국경내에 거주했던 지역을 세 곳으로 적고 있다: 이산군, 두만강, 독로강(강계)

 

<<동국여지승람>> 권55에는 "이산군은 북으로 압록강 12리에 있다. 설치연혁을 보면, 원래 여진이 거주하던 두목리(豆木里)이다. 고려공민왕(1351-1374)때 사람과 재물이 점차 실해졌다. 본왕조(조선) 태종2년(명나라 건문4년, 1402년)에 산양호, 도을한, 봉화대, 등이언등의 땅과 합하여 이주(理州)라 하였다. 13년에 이산군으로 개명했다"

 

<<대동여지.초산>>에는 "건립설치: 고려충렬왕(1274-1298) 4년(1277년) 도목리만호를 설치했다. 원래 고구려, 발해때 거란여진이 대를 이어 살던 땅이다. 후2년에 이주로 고치고, 충혜왕 후3년에 초산으로 고쳤다. 본왕조 태종2년에 산양회, 도을한, 봉화대, 등이언의 땅과 합하여 다시 이주라고 하였다. 13년에 이산군으로 개칭했다. 세종때 앙토리로 치소를 옮기고, 세조때 진관차령산양회를 두었다. 경종4년에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정종초에 초산으로 개칭했다" 이로써 볼 때, 초산, 이주, 이산군은 모두 한 곳이고, 설치연혁에 따라 바뀐 이름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55에는: "강계도호부...건치연혁: 고대에는 독로강이라고 했다. 고려공민왕 10년에 만호를 두었다. 본왕조 태종원년에 입석, 등이언의 두 땅을 합하여 석주(石州)라고 하였다"

 

태종이년에 등이언은 다시 이주에 합병되어 이산군이 된다.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에서 이씨의 조상이 거주하였다는 장소중 이산군, 독로강이 교차하는 지점이 한 곳 있다 바로 등이언(等伊彦)이다. 비록 기계적으로 이씨조상이 거주하던 곳이 바로 등이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 지역이 "두목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웠고, 이 지역이 일찌기 여진족이 거주하던 지역이라는 것이다.

 

"두만강"이라는 것은 사실 "토문강"을 얘기하는 것이라는 것이 한국과 일본의 해석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훈춘강은 여진의 땅이다. 동림성에 이르러 두만강에 합해진다. 알도리 야인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원나라때 요동의 판도는 넓었고, 남으로는 한반도중부에 이르고,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며, 북으로는 흑룡강 이북에 이르렀다. 이 넓은 땅이 모두 원나라 소유였다. 이 지역내에 사는 사람의 과반수는 여진족이었고, 이들은 요, 금, 원의 세 왕조를 거치면서 4세기동안 이 곳에 거주했다.

 

그러므로, 이씨의 조상이 여진족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당시 조선에 거주하던 지역은 오랫동안 여진족이 살던 지역이라는 것은 확인된다.

 

여기에 "이파도리"라는 여진의 냄새가 풀풀나는 이름을 보더라도 전원일구의 추리는 전혀 근거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외에 이여송은 또한 "나의 조상은 대대로 두만강에 살았는데, 음란한 일을 해서 동녕위로 이주했다"고 했다는 점이다. 동녕위는 원래 동녕, 남경, 해양, 초하, 여진의 오천호가 있는 곳이고, 홍무13년에 설치되었다. 19년 7월애 고쳐졌다" 명나라초기에 동녕위는 여진천호소였다. 이것도 방증이 될 수 없을까.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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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병자 19-04-26 20:09
   
위글의 생각해볼점(오류)
1. 철령위
철령위 설치 문제로 고려는 군사를 일으켜 요동정벌을 감행했고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을 건국
외교로 해결이 안되서 군사까지 동원하려 했는데 뜬금없이 명나라가 원하던 위치에 철령위 설치를 포기하고 물러났다?
그것도 조선이 내부쿠데타로 혼란한 시기에?

2. 한반도 중부가 요동에 포함된다?
이건 일제의 한사군 한반도설을 끼워맞추려고 나온것.
왜냐하면 중원 사서에는 한사군 관련 내용이 다 요동주변을 기술하고 있기때문.
그러니 식민사학의 한사군 한반도설을 중국 정사와 맞추려면 한반도 중부까지 요동이라고 했다고 주장할수밖에.

3. 현재 통설의 한반도 철령은 함경도에있는 고개이름이다.
명나라는 왜 이런 산골짜기 고개에다가 행정중심지를 설치하려는 헛짓거리를 했을까?
그리고 왜 이성계의 고려군은 철령으로 가지않고 위화도까지 갔을까?
     
관심병자 19-04-27 23:41
   
고려시대 국경은 중국 요동지역까지 였다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178561

압록강 서북쪽 ‘철령’은 요동… 일제때 함경남도 안변이라 우겼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313024002
Tenchu 19-04-27 19:13
   
명은 원나라땅 = 지네땅이란 개념이었슴.  그래서 제주도도 내놓으라그랬다가 제주도에서 기르는 말은 원나라꺼였으니깐 다 바치라고했던거였고.
공민왕이전 철령이북은 고려직할지가 아니고 쌍성총관부관할지였기에 명이 어거지 쓴거였슴.
감방친구 19-04-28 06:21
   
관심병자 이 분은 참 사람 맥 빠지게 하는 데 실력자시네요
맨날 남의 블로그 퍼 오시는데
여보슈
내가 여기 동아게에서 이미 지난 2017 년에 고려사, 명사, 명일통지 등을 토대로 철령위를 고찰했고
기회 있을 때마다 철령위에 대해서 설명을 했는데

동아게 동료 유저가 고증하든 말든 맨날 남의 글만 퍼다가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고 도돌이표를 그리고 계시네

비단 철령위만 그러는 게 아니라 역사쟁점에 대해서 매냥 그러고 계셔

여보슈
동아게가 딴 데보다 못해서 맨날 그러십니까
감방친구 19-04-28 06:25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7478&sca=&sfl=mb_id%2C1&stx=cellmate&page=40

1. 1258 몽골 침입시 고려 동북면(정주,  용진현) 사람 탁청과 조휘가 화주 이북의 땅을 바치며 몽골에 투항
ㅡ 화주는 함주 근처
ㅡ 고려의 함주는 요동의 금나라 함주가 아님
ㅡ 요동 함주로 근처 심주(선양시)에 쌍성현이 있는데 이 조휘와 탁청 두 사람이 고려 화주에 있던 작은 성 두 개를 쌍성이라고 알려줌
ㅡ 즉 이 잘못된 정보로 인하여 쌍성총관부가 설치 되고
ㅡ 고려 동북면 지리 정보와 요동의 지리정보가 섞여서 꼬여버림
ㅡ 철령은 바로 이 쌍성총관부 관할 하 화주에 있던 지명

2. 1356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없애고 동북면을 수복한 후에 원나라와 외교전을 통하여 외교적으로도 이 땅을 다시 고려의 땅으로 공인 받음
ㅡ 이 지역이 바로 예종 2년 윤관이 동북9성을 설치한 선춘령ㆍ공험진에서 함경도에 이르는 땅임

3. 공민왕이 요동을 몇 차례 정벌하나 지킬 힘이 없어서 고려 땅에 완전히 복속시키지 못 함
ㅡ 이를 테면 힘은 힘대로 들면서 헛삽질

4. 이와중에 명이 북원 세력을 넉다운 시키고 고려에 붙는가 싶었던 나하추도 명에 가서 붙음
ㅡ 명은 군사적 요충지인 요동을 안정적으로 접수ㆍ관리하고자 요동도사를 요양에 설치
ㅡ 이러한 가운데에 발생한 게 1388 년 철령위 문제이다

5. 명은 애초에 요양 아래를 고려의 영토로 보고 있었으나 요동반도 전체와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수를 던지는데 그게 바로 철령위 설치 통고
ㅡ 명은 철령을 요동에 있는 것으로 보았으나 철령은 요동에는 그 이전에는 없던 지명
ㅡ 즉 1의 사건으로 인하여 근 1백여 년에 걸쳐 지리 정보가 꼬여버린 것
ㅡ 즉 화주이북은 원의 개원로 관할이니 그 남부인 철령에 병참인 위를 설치해 이북은 명이 다시 승계하겠다는 말
ㅡ 개원로, 함주로는 다 요동 북부

6. 이를 잘못 이해한 고려가 당연히 항의
ㅡ 명과 고려가 서로 동문서답 딴소리를 하며 싸움
ㅡ 고려는 철령이북부터 공험진ㆍ선춘령까지가 고려의 고유한 영토였고, 1258에 몽골에 투항한 자들이 함부로 그 땅을 바친 것이며 그 때에 지리정보의 오해가 있던(쌍성, 함주로, 개원로) 것을 1356 공민왕 때 원과 협의해 바로잡았다고 해명ㆍ항의
ㅡ 명의 주원장은 너희 고려는 압록강이 경계인데 이제 철령까지 달라 하느냐 하며 오히려 화를 냄
ㅡ 즉 고려가 말하는 철령과 명이 생각하는 철령이 다른 것

7. 최초 철령위 설치는 봉집현
ㅡ 봉집현은 요양 근처
ㅡ 강계까지 명의 군사 1,000여 인이 왔으나 그곳에 설치하지 못함
ㅡ 봉집현을 경계로 명과 고려가 국경을 맞댐
ㅡ 곧이어 지금의 철령시로 옮겨 철령위 최종 설치
ㅡ 명의 철령위 설치로 인한 조ㆍ명 간 분쟁은 주원장의 일석이조의 이득을 가져다 줌
ㅡ 즉 조선을 길들이고, 요동과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옴

8. 여말에 북원과 명 사이에서 갈팔질팡하다 결국 명을 선택한 당시 고려는 곧 왕을 폐위하고 나아가 역성혁명을 통하여 조선개국
ㅡ 주원장의 명은 중원을 제패하고 북원을 분쇄시키며 기세가 양양
ㅡ 몽골과 여진 세력이 명에 줄 서며 명이 판도의 대권을 완전히 휘어잡음
ㅡ 이후 여진족이 강성해지자 조선은 서북계의 봉집현~봉황성 등지에  이르던 영토에 대한 실효지배력을 상실
ㅡ 동북계는 세종 때 김종서를 통해 공험진ㆍ선춘령을 재확인하나 실효지배하지 못하고 후대로 갈 수록 압록강~두만강 라인을 북방한계로 겨우 수습

9. 만약 고려가 명이 요구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면 명의 의도를 헤아려 적어도 혼하~선춘령 라인으로 영토를 보전 받고 별무리 없이 국경문제가 정립됐을 것임
ㅡ 물론 주원장의 욕심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으나

10. 현행 국사 교과서에 철령위가 한반도 내에 표시돼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고쳐야 함
ㅡ 철령위는 단 한번도 한반도에 설치된 일이 없음
감방친구 19-04-28 06:27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1366&sca=&sfl=mb_id%2C1&stx=cellmate&page=32


앞서서 고려와 인접한 요나라 신주의 위치를 고찰하면서 이 지역이 철령위 위치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 지역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철령위의 위치를 사서탐색을 통해 다시 고찰하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였습니다

몇 달 전에 저는 이곳에 게시한 몇 편의 글을 통해 명나라가 최초 설치한 철령위는 봉집현으로 그 위치가 혼하 근처에 있음을 과정적으로 논거한 바 있습니다

당시에는 철령위가 최초든 최종이든 한반도에 설치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논증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기에 봉집현의 위치가 한반도가 아닌 요동에 있었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고 생각을 그쳤는데

실제 게시글에서 예시로 들기까지 한 복기대 팀(인하대 고조선 연구소)의 관련 뉴스와 관련 지도의 주장하는 바가 제가 고찰한 내용과 다르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기대 팀에서는 봉집현이 혼하 근처에 있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들고 있음에도 동시에 현 철령시 동남쪽 500리에 있었다는 기록을 들어서

실제는 혼하 한참 아래의 번시시(本溪市)를 봉집현이자 철령위 최초 위치인 1388 년 철령위 위치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1) 혼하에 있다
2) 현 철령위 동남쪽 500리에 있다
3) 번시시에 있었다

무엇이 잘못 된 것일까요?
저는 지난 고찰 당시에 혼하의 위치와 그 지류를 특별히 염두하지 않고 그저 요동에 있는 강 이름이라는 사실에 만족하였습니다

우선 本溪를 요사, 원사, 금사, 명일통지, 명사, 청사, 독사방여기요 등에서 찾아봤습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鐵嶺衛와 奉集을 중심으로 독사방여기요로부터 명사를 거쳐 요사로 역순으로 추적해 가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먼저 독사방여기요의 기록을 보겠습니다

新興城即衛治。本勃海富壽縣,為富州治,境有延津。遼更名延津縣,銀州治焉。金皇統三年,州廢,更置新興縣,屬咸平府。金末廢。元因之。明洪武二十一年,在衛治東南五百里故鐵嶺城,置鐵嶺衛,與高麗接境。二十六年,徙治於此,因故城修築,周五里有奇。又有故新興城,在今衛東。《遼志》云:故越喜國地,勃海置銀冶於此,因置銀州。遼改富州為銀州,以故銀州置新興縣屬焉。是也。金並入延津縣,又改延津為新興縣。

<독사방여기요>

1) 현 철령위(현 철령시) 동남쪽 500리에 옛(1388) 철령위가 있다 (在衛治東南五百里故鐵嶺城 置鐵嶺衛 與高麗接境)

그런데 철령위는 봉집현에 있었습니다 독사방여기요의 다른 기록에는 수상한 점이 엿보입니다

貴德城(沈陽中)衛東八十里。《遼志》:漢襄平縣地,契丹置貴德州寧遠軍於此,治貴德縣。金因之。元廢。又有奉德廢縣,在貴德州東。《遼志》:勃海緣城縣地,契丹置奉德州於此,尋降為縣。金省。

奉集城,在衛東南。《遼志》:高麗置霜巖縣於此。勃海置集州,治奉集縣。契丹仍曰集州,又為懷眾軍。金廢州,以奉集縣屬貴德州。元縣廢。今為奉集堡,有鐵場百戶所,屬鐵嶺衛。《志》云:堡東去鐵嶺衛二百十里。

<독사방여기요>

1) 귀덕성은 심양위 동쪽 80리에 있다
2) 한 요동군 양평현, 요나라 귀덕주 영원군 자리이다

3) 발해 집주에 속했으며 봉집현에서 다스렸다
4) 요가 집주 회중군으로 삼았다
5) 금이 집주를 폐하고 봉집현을 귀덕주에 속하게 하였다

6) 지금(17 세기)의 봉집보인데 철 광산이 백여 곳이 있으며 철령위 소속이다
7) 명일통지에 따르면 봉집보는 철령위(요양 북쪽 240 리, 현 철령시) 동쪽으로 210리 가면 있다

같은 기록에서 전혀 사실 관계(기술 내용)가 맞지 않는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1388 년(명 홍무 21년) 철령위는 현 철령위 동남 500리에 있었다면서

그 철령위가 있던 봉집현이 현 철령위 동쪽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다른 기록들을 찾아 견줄 필요가 절실해 보입니다

鐵嶺衛洪武二十一年三月以古鐵嶺城置。二十六年四月遷於古嚚州之地,即今治也。西有遼河,南有泛河,又南有小清河,俱流入於遼河。又南有懿路城,洪武二十九年置懿路千戶所於此。又範河城在衛南,亦曰泛河城,正統四年置泛河千戶所於此。東南有奉集縣,即古鐵嶺城也,接高麗界,洪武初置縣,尋廢。又有咸平府,元直隸遼東行省。至正二年正月降為縣。洪武初廢。南距都司二百四十里。

<명사 지리지>

1) 홍무 21년(1388) 3월 옛 철령성에 설치
2) 홍무26년(1393) 4월 옛 은주 땅으로 옮기니 곧 지금의 치소가 자리한 곳(현 철령위, 현 철령시)


3) 현 철령위(현 철령시) 서쪽에 요하, 남쪽에 범하, 또 남쪽에 소청하가 있는데 모두 요하로 흘러든다
4) 동남쪽에 봉집현이 있는데 곧 옛 철령성으로
고려와 경계를 접한다

5) (철령위) 남쪽으로 요동도사(요양)가 240리 거리이다.

명사는 독사방여기요보다 후대의 사서이지만 명나라 당대의 역사 사실을 기록한 사서입니다
이러한 명사 지리지에는

1) 옛 철령성이 봉집현에 있었으며 그 지역이 고려와 접경을 이루었고
2) 그 옛 철령성이 있던 봉집현이 현 철령위 동남쪽에 있다

라고 적혀 있고 500리라 하는 수치는 없습니다

대체 동남 500리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요?

貴德州,刺史,下。遼貴德州寧遠軍,國初廢軍,降為刺郡。戶二萬八百九十六。縣二:
貴德倚。有範河。


奉集遼集州懷遠軍奉集縣,本渤海舊縣。有渾河。

<금사 지리지>

1) 귀덕주, 범하가 있다
2) 봉집(귀덕주 속현), 혼하가 있다

지도에서 범하와 혼하를 찾아보십시오 범하는 현 철령시 남쪽을 흐르는 강이고, 혼하는 범하 아래에서 흐르는 강으로 심양을 지나며 사하와 만나서 요양을 지나며 태자하와 만나 요하로 합쳐지는 강입니다 혼하 역시 현 철령시의 근처에서 심양, 요양 등을 지나는 강입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혼하에 있다는 봉집현이 뚱딴지 같이 그 수백 리 남쪽에 있다고 기록된 것일까요?

하여 문제의 ‘동남 500리’의 원처인 명일통지를 찾아봤습니다

瀋陽中衞在都司城北一百二十里本挹婁國地唐時渤海置瀋州遼置興遼軍後改曰昭徳金改為顯徳軍元改為瀋陽路治遼陽故城本朝洪武二十年置衞後又以城東北八十里撫順千户所城北四十里蒲河千户所來屬鐵嶺衞在都司城北二百四十里古有鐵嶺城在金衞治東西五百里接髙麗界洪武二十一年置衞於彼二十六年徙今治即遼金時嚚州故地也二十九年調所領左右千户所於城南六十里懿路城永樂八年復調中千户所扵懿路正統四年又調中左千户所扵城南三十里汎河俱仍屬衞

<명일통지>

찾으셨나요?

古有鐵嶺城在金衞治東西五百里接髙麗界

東南五百里가 아니라 東西五百里라고 돼 있습니다

즉 명일통지의 기록은 “금나라 (귀덕주의) 치소가 있던 옛 철령성(봉집현)은 고려와 동서로 국경을 500리를 접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명일통지는 독사방여기요보다 2세기 앞 서서 나온 지리총서입니다

그런데 상기 명사 지리지와 독사방여기요의 다른 기록에서 보듯 ‘동남’과 ‘동쪽 210리’가 온 지리 정보와 명일통지의 ‘동서 500’ 지리 정보가 혼재돼 ‘동서’를 ‘동남’으로 바꿨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210리가 어떻게 500리가 되었는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명일통지에는 분명히 동서 500리로 돼 있으며 西와 南이 그렇게 비슷한 모양의 글자가 아니나 혹여 직접 목판본 원서를 확인하기 전에는 그 진위를 가리기 어럽다 하겠습니다

하여 다른 경로를 통하여 봉집현의 위치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奉集廢縣在撫順千户所南八十里古郫離郡地漢為險瀆縣髙麗為霜巖縣渤海改為奉集縣置集州金屬貴徳州

瀋陽中衞在都司城北一百二十里本挹婁國地唐時渤海置瀋州遼置興遼軍後改曰昭徳金改為顯徳軍元改為瀋陽路治遼陽故城本朝洪武二十年置衞後又以城東北八十里撫順千户所城北四十里蒲河千户所來屬鐵嶺衞在都司城北二百四十里古有鐵嶺城在金衞治東西五百里接髙麗界洪武二十一年置衞於彼二十六年徙今治即遼金時嚚州故地也二十九年調所領左右千户所於城南六十里懿路城永樂八年復調中千户所扵懿路正統四年又調中左千户所扵城南三十里汎河俱仍屬衞

<명일통지>

1) 폐지된 봉집현은 무순 남쪽 80리에 있다
2) 그 자리는 옛 비리국 땅이다
3) 한이 험독현으로 삼았고, 고구려가 상암현으로 발해가 집주의 봉집현으로, 금이 귀덕주의 봉집현으로 삼았다

4) 요양 북쪽 120리에 심양
4) 심양 동북 80리에 무순
5) 심양 북쪽 40리에 포하
6) 요양 북쪽 240리에 철령(현 철령시)
7) 옛 철령성은 금의 치위소(봉집) 자리에 있었는데 고려와 동서로 500리 국경을 접했다
8) 1388에 옛 철령성 자리에 설치했던 철령위는 1393에 요ㆍ금의 은주(여기서는 銀이 아니라 嚚을 씀)가 있던 옛땅인 지금의 자리(현 철령시)로 옮겼다

자,
상기 기록을 정리해 보면

1) 무순은 현 철령 동남쪽 약 4~50리
2) 봉집은 무순 남쪽 80리

이를 합하면
봉집은 철령 동남쪽 약 120~130리인데
현이 아니라 현에 있는 보인 봉집보와 철령위가 210리(독사방여기요가 인용한 명일통지, 정작 명일통지에서 해당 기록을 찾지 못 했음) 거리라는 기록에 근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철령이 실제로는 심양 동북쪽에 있음에도 북쪽이라 한 방위감각(이런 사례는 사서에 비일비재하다)을 고려하여 볼 필요가 있으니

봉집현은

1) 혼하 근처
2) 요양과 철령의 사이
3) 요양과 무순의 사이
4) 심양과 무순 사이이되 심양 근처

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혼하는 심양을 지나 흘러간다


결론

1) ‘현 철령 동남 500 리 봉집현’ 설은 사서 교차 분석 결과 성립할 수 없다
2) 봉집현은 현 ‘심양ㅡ무순ㅡ혼하’ 근처에서 찾아야 한다

3) 고려 공민왕 때의 북방개척을 통하여 고려는 고려 전기인 11세기~12세기 초의 전성기 강역을 거의 회복하였고
4) 개국초 요동에 진출한 명나라는 혼하 일대까지 고려의 강역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5) 실제 심양 근처이자 고려와의 접경지대인 봉집현에 철령위를 설치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옛 심왕의 봉지인 요동 반도 전체와 한반도 내의 원나라 영역까지 탐을 내었다
6) 이로 인해 고려는 요동정벌을 시도하였으나 이성계의 반정으로 실패, 철령위를 북쪽으로 후퇴하는 성과를 얻었으나 결국 요동을 내어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7) 이후 조선의 서북경계는 혼하에서 봉황성으로, 다시 현재의 압록강으로 축소돼 오늘에 이르렀다
8) 그러나 한편으로 조선은 고려 전기 이래 우리의 강역이었던 동북계 선춘령ㆍ공험진 이남의 땅에 대한 권리를 명에게 계속적으로 주장하였고 세종 때는 적극적인 군사행동으로 그 지역을 재개척하였다
감방친구 19-04-28 06:28
   
봉집현을 본계시에 비정하면
무순 남쪽 80리라는 명일통지의 기록에 비교적 합치하지만
혼하에 있다는 금사의 기록에 배치가 된다.
본계는 혼하가 아니라 태자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령위 설치 당시와 가까운 때의 지리서인 명일통지는 명나라 당시에 인식한 봉집현의 위치를 어느 사서보다 현실 반영했다고 보이고
금사와 배치가 되는 위치는 현의 크기, 그리고 그 현의 늘고 줆을 고려한다면 납득될 수 있는 사안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무순 남쪽 100여리에 위치한 본계를 봉집현에 비정한 복기대 팀의 주장은 사실기록의 교차 검증을 통해 타당하여 수긍할 수준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명일통지에는 분명히

東西五百里接髙麗界

라고 적혀 있으며

在衛治東南五百里故鐵嶺城 置鐵嶺衛 與高麗接境

라 적은 독사방여기요의 기록은

그 전대 기록인 금사, 명일통지, 그리고 동일서 내의 다른 기록과의 교차 검증을 통해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잘못된 기록임이 확인되는 바

여말선초의 철령위 제문제의 거론에 있어서 확실한 언급과 비판이 필요하다고 본다

명일통지의

東西五百里接髙麗界

기록은

무순ㆍ본계 기점으로
소자하ㆍ혼한ㆍ태자하 등지의 동쪽 기점과 요하만의 서쪽 기점을 연결한 선의 거리가 500 리에 근접함을 지도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감방친구 19-04-28 06:43
   
여기 동아게에서 좌장 역할을 했던 굿잡스님, 꼬마러브님 등은 기본적으로 인용을 하거나 링크를 할 적에도 되도록이면 동아게 동료유저들의 글을 제시하였고 이게 동아게의 전통이었는데 어느새부턴가 이러는 게 실종되버렸음

아니 여기 동아게 10 년 데이타에 다 있는데 뭘 자꾸 도돌이표 찍으며 자꾸 바깥에서 가져 와

가생이 동아게 것을 다른 데 퍼갈 생각은 안 하고
마그리트 19-04-29 01:57
   
놀라운 사실이네요.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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