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보빙사 민영익의 건의로 육영 공원이 세워지고, 헐버트는 길모어 등 미국인 교사로서 초빙되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헐버트는 육영공원에서 상류층의 자제들에게 영어를 비롯하여 수학, 지리학, 정치학 등 근대 학문을 교육하였으나 1894년 육영공원은 폐교되고 맙니다.
그 후 약 10년이 지난 1905년, 고종 황제와 정부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군사적 위협과 을사오적에 의해 일방적으로 체결된 제2차 한일 협약 이후, 헐버트는 고종 황제의 밀서를 휴대하고 미국으로 귀국합니다.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면담하려 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하였고, 1906년 다시 내한한 헐버트는 고종 황제에게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 평화 회의에 밀사를 보내도록 건의하였습니다. 그는 이상설 등 헤이그 특사보다 먼저 도착하여 '회의식보(Courier de la Conferénce)'에 한국 대표단의 호소문을 싣게 하는 등 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1904년 영국인 베델은 양기탁과 한영 합작으로 대한메일신보를 설립하였습니다.
한성순보, 독립신문, 제국신문 등 비슷한 시기에 창간된 타 언론에 비해 비교적 활동이 자유로워 가장 강경한 항일 논조를 펼쳤고, 독립운동가 서상돈 선생에 의해 전개된 '국채 보상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특히 신문사 정문에 '일본인 출입 금지'라는 문구를 붙여놓고 강력히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였습니다. 또한 을사조약 때 고종 황제가 서명하지 않았다는 친서를 보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