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 26년(서기 371), 고구려가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임금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 강가에 복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공격하니, 고구려 병사가 패배하였다.
겨울, 임금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여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二十六年 高句麗擧兵來 王聞之 伏兵於浿河上 俟其至 急擊之 高句麗兵敗北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高句麗 攻平壤城
高麗王斯由 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 移都漢山
백제의 한산(漢山), 한성(漢城)이 시작되는 사건입니다. 관련 지명은 패하(浿河 혹은 패수, 패강)입니다.
장수왕 63년(서기 475)
9월, 임금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의 서울 한성(漢城)을 점령한 후, 백제의 왕 부여경(扶餘慶,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六十三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秋八月 遣使入魏朝貢 九月 王帥兵三萬 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
장수왕 남진정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장수왕의 백제 한성 공격후 개로왕 시해사건' 입니다.
여기서 잘못된 부분은 이 사건이 고구려 남진정책이라 주장하는 것입니다.
삼국사기 본문을 보시면 "남녀 8천 명을 생포하여 (고구려로) 돌아왔다." 고 기록합니다.
남진정책을 하려면 어케해야 하죠 ?
고구려 사람들을 데려와서 백제 한성에 거주하게 하는것이 점령이요. 남진정책입니다.
그냥 되돌아가면... 남진정책이 아닙니다. 바뻐서 다음 문장을 마저 읽지 않은듯 합니다.
虜男女八千而歸 돌아왔다.
문주왕(文周王)[혹은 문주(汶州)라고도 한다.]은 개로왕(蓋鹵王)의 아들이다. 처음에 비유왕(毗有王)이 죽고 개로가 왕위를
이었을 때, 문주가 그를 보좌하여 직위가 상좌평에 이르렀다.
개로왕 재위 21년(서기 475)에 고구려가 침입하여 한성을 포위하였다.
개로가 성을 막고 굳게 지키면서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도록 하여 병사 1만을 얻었다.
고구려 병사는 비록 물러갔으나 성이 파괴되고 개로왕이 죽어서 문주가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품은 우유부단하였으나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도 그를 사랑하였다.
겨울 10월(서기 475),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文周王[或作汶洲] 蓋鹵王之子也 初 毗有王薨 蓋鹵嗣位 文周輔之 位至上佐平 蓋鹵在位二十一年 高句麗來侵 圍漢城
蓋鹵嬰城自固 使文周求救於新羅 得兵一萬廻 麗兵雖退 城破王死 遂卽位 性柔不斷 而亦愛民 百姓愛之 冬十月 移都於熊津
백제 개로왕 사망후 왕위를 이은 문주왕의 기록에서도 고구려 병사가 물러갔다고 합니다.
고구려 병사가 물러갔다면 기존의 백제 영토는 어찌 되었을까요 ?
무령왕 7년(서기 507) 여름 5월, 고목성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세우고 또 장령성(長嶺城)을 쌓아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겨울 10월, 고구려 장수 고로(高老)가 말갈과 모의하여 한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횡악橫岳 아래에 와서 주둔하니
임금이 군대를 내어 싸워서 그들을 물리쳤다.
七年 夏五月 立二柵於高木城南 又築長嶺城 以備靺鞨 冬十月 高句麗將高老與靺鞨謀 欲攻漢城 進屯於橫岳下 王出師 戰退之
문자왕 16년(서기 507) 겨울 10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임금이 장수 고로(高老)를 파견하여
말갈과 함께 백제의 한성(漢城)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횡악(橫岳) 아래에 주둔하게 하였다.
백제가 병사를 출동시켜 우리의 병사에게 대항하자 곧 물러났다.
十六年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王遣將高老 與靺鞨謀 欲攻百濟漢城 進屯於橫岳下 百濟出師逆戰 乃退
백제 무령왕, 고구려 문자왕때에도 한성(漢城)은 여전히 백제의 영토입니다. 여기서 키워드는 횡악(橫岳) 입니다.
횡악은 백제 초기 기록에서 자주 나오며, 위치는 한수 이북지역 입니다.
백제왕의 사냥터이며, 흉년이 들었을때는 백제 아신왕이 기우제를 지낸 백제의 명산 횡악(橫岳) 입니다.
아신왕 11년(서기 402) 여름, 크게 가물어 벼가 타서 마르므로, 임금이 친히 횡악(橫岳) 에서 제사를 지내니 곧 비가 내렸다.
十一年 夏 大旱 禾苗焦枯 王親祭橫岳 乃雨 五月 遣使倭國求大珠
성왕(聖王)의 이름은 명농(明穠)이다. 무령왕(武寧王)의 아들이다. 지혜와 식견이 뛰어났고 일을 처리함에 결단성이 있었다.
무령왕이 돌아가시고 왕위를 잇자 나라 사람들이 성왕이라고 불렀다.
가을 8월(서기 523), 고구려 병사가 패수(浿水)에 이르자, 임금이 좌장 지충(志忠)에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싸우게 하니 그가 적을 물리쳤다.
聖王 諱明穠 武寧王之子也 智識英邁 能斷事 武寧薨 繼位 國人稱爲聖王 秋八月 高句麗兵至浿水 王命左將志忠 帥步騎一萬 出戰退之
원문과 번역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백제 성왕 때에도 한성 과 한수의 북쪽 지역, 그리고 패수(浿水) 아래의 영역에서 지역방어 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수있습니다.
장수왕 남진정책으로 백제 한성을 점령 당했다면, 그 북쪽의 횡악과 패수 지역을 백제가 방어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삼국사기 기록에 분명히 나옵니다. 장수왕 이후에도 백제 한성의 북쪽 지역을 백제는 여전히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역사교과서에 상상으로 만들어진 장수왕의 남진정책을 교육하는 것은 부당하지 않을까요 ?
이 문제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이어 삼국사기 후기기록도 불신하는 역사학계의 풍토를 보여 줍니다.
즉, 삼국사기 기록 자체를 불신한다는 의미가 되는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