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야와 임나는 같은 용어라는 입장: ‘지사지도님의 블로그 인용’ . 통설
임나는 분명 가야와 연관이 있는 용어였음이 분명하며, 이는 고대 일본의 기록 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그 일례를 제시하자면 다음과 같다.
王驚喜恨相見之晩問其姓名對曰臣夲任那加良人名字頭王曰見卿頭骨可稱強首先生使製迴謝
왕이 놀라고 기뻐하며 그를 늦게 만난 것을 유감스러워 하였다. 그 성명을 물으니 “신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으로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그대의 머리뼈를 보니 강수선생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강수
: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강수는 가야 즉 "임나가량" 유민의 후예였던 것으로 보인다.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뒤를 급히 쫓아 임나가라(任那加羅)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렀다. 「광개토왕비문」
: 광개토왕비문에서 광개토왕이 백제와 가야의 지원을 받아 신라를 침공한 것으로 추측되는 왜군을 격파하기 위해 한반도 남부를 정벌할 당시를 묘사한 대목이다.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 草拔聖枝每苦隣兵投於我國.
대사의 이름은 심희요, 속성은 김씨이니, 그 선조는 임나(任那)의 왕족이다. 풀에서 성스러운 가지를 뽑았으나 이웃나라의 침략에 괴로워하다가 우리나라에 투항하였다.
김유신의 후손 「진경대사탑비문」
: 해당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 진경대사 심희는 흥무대왕 김유신의 후예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김유신은 가야제국 중에서도 금관국의 마지막 왕으로서 일족을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하였던 구형왕의 자손이었다. 해당 비문에서는 그의 가계를 설명하면서 "임나 왕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興死, 弟武立, 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흥(興)이 죽자 아우인 무(武)가 즉위하였는데, 스스로 칭하기를 사지절(使持節) 도독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칠국제군사(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 왜국왕(倭國王)이라 하였다.
- 『송서』 이만열전 왜국조
地惣任那. 齊書云, 加羅國三韓種也. 今訊新羅耆老云, 加羅·任那昔爲新羅所滅. 其故今並在國南七八百里.
그 땅으로 임나를 총괄하였다. 제서(齊書)에 이르기를, 가라국은 삼한의 종족이라고 하였다. 지금 신라의 늙은이들이 말하기를, 가라(加羅)·임나(任那)는 옛날에 신라에게 멸망당하였으며, 그 옛 (땅)은 지금 모두 나라의 남쪽 7~8백리에 있다고 하였다.
- 『한원』 번이부 신라조
: 위에서 보이는 『송서』와 『한원』을 비롯한 중국의 사서에도 "임나"의 존재가 드러난다. (다만 『송서』에서 왜왕이 자칭한 관작은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원』의 기록에서는 신라인들의 증언을 인용하여 가라(가야)와 임나가 신라 남쪽의 땅으로 흡수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여기서도 『삼국사기』 열전 강수조와 「광개토왕비문」의 기록처럼 가야와 임나의 용어가 연칭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론: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임나는 곧 가야의 별칭이었다. 다만 임나라는 말이 상세히 뜻하는 바는 기록에 따라서 다른 편이기 때문에 그 범위가 들쭉날쭉하다는 문제점이 있고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존재한다. 이는 가야가 하나의 단일 정치체가 아니었으며, 대략 10개 이상의 소국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임나는 기록의 쓰임새에 따라서는 가야와 연칭되어 이를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혹은 가야제국 중에서도 어느 특정한 정치체를 가르키는 말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연구자들은 임나와 가야를 각기 김해의 금관국(금관가야)와 고령의 반파국(대가야)에 비정하기도 하고, 혹은 이를 뒤집어 각기 대가야 혹은 금관가야로 보기도 하고, 혹은 임나라는 용어 자체를 가야 전체를 통틀어 말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가끔 『일본서기』 숭신기에서 "임나는 축자국(筑紫國)에서 2,000여 리(里)나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계림(鷄林 ; 신라)의 서남쪽에 있다"라고 했던 점을 인용하여서 임나가 한반도 남부에 없었다고 주장한다거나, 혹은 그 위치를 대마도로 비정하려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여기서 "2000리나 떨어져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다"라는 부분은 사실 일본의 입장에서 임나와의 거리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뿐만아니라 김유신의 후예인 진경대사의 비문에서 그의 가계를 "임나 왕족"이라 칭했듯이, 비록 명확하지는 않으나 가야제국의 특정 세력을 임나라 칭했던 점은 이미 국내 혹은 중국의 기록에서도 충분히 관찰된다는 사실 또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