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츠라-태프트 회담을 미국을 믿지 못할 나라로 인식하는 것은 어느정도 타당성은 있지만, 다음사항은 기억해야 한다.
1) 일본이 조선을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외교전을 펼쳤는지를 상기해야 한다.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의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은 각 열강의 동의를 확보하며 이중삼중으로 조선을 꽁꽁 옭아맸다. 가츠라-태프트 회담은 그 과정에 불과하다.
2) 미국의 조선에 대한 입장은 극동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한 전략적 이해관계 속에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극동에서 미국의 이익은 만주를 포함한 중국의 문호개방에 방점이 두어져 있었고, 미국은 어느 나라건 이러한 전략적 이익에 합치하는 제안을 하는 상대와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츠라-태프트 회담을 누가 누구를 배신하고 해코지한 사례로 보는 것은 감정의 배설은 될지 모르나, 현실정치(realpolitik)의 냉엄한 원리를 외면하는 근시안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3) 정작 조선은 가츠라-태프트 회담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 조정은 러일전쟁의 결과로 촉발된 국제정세의 구조적 변화 속에서 외교정보 유통망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고, 결국 헛된 희망적 사고에 매달리다가 망국의 운명을 맞았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당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1890년대 선진국에 의한 후진국의 문명화를 찬양하고, 미국의 국가이익과 위신을 지구상 어느 지역에서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철저한 제국주의자였다. 루즈벨트의 동아시아 정책은 영국, 일본과 협력하여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한국과 같은 약소국이 일본에 종속되는 것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었다.
루즈벨트는 1904년 8월 11일 주미 독일대사를 지낸 바 있는 슈테른버그(Hermann Speck von Sternberg)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은 일본의 보호 아래 두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지배와 같은 것이다.”
사실, 한국과 미국 간에는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있었다. 이 조약의 제1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미합중국 대통령과 조선 국왕 및 각 정부의 공민과 신민 간에 영원한 평화와 우호가 존재하는 것으로 한다.
타국이 일방의 정부를 부당 또는 억압적으로 다룰 경우, 타방의 정부는 사태의 통지를 받았을 때 원만한 타결을 주선해 그 우의를 표시한다.” 제1조를 ‘주선조항(周旋條項)’이라고 하는데, 주선이란 제3국이 분쟁 당사국의 직접 교섭에 의한 해결을 권고하든가, 교섭을 위한 편의를 제공하는 형식으로 외부로부터 화해를 알선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선조항의 의미에 대해 한국과 미국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은 주선조항이 국제법적 효력이 있으므로 유사시에 미국이 한국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1904년 2월 6일 <데일리메일> 의 한국특파원 매킨지는 한국의 군부대신 이용익과 인터뷰를 했다. 한국의 중립 선언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 전운이 감도는 때였다.
매킨지가 “한국이 스스로를 구하려면 개혁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추궁하자, 이용익은 “한국은 안전하다. 왜냐하면 한국의 독립은 미국과 유럽에 의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답변하였다. 다시 매킨지가 “한국이 스스로를 지키려고 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나라가 한국을 지켜준다는 말인가?”라고 묻자, 이용익은 “우리에게는 미국의 약속이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미국은 우리의 친구다.”라고 답변하였다.
한국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은 주선조항이 구속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순히 상징적 의미만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미국은 한국문제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다. 1897년 11월 국무장관 셔먼은 주한 공사 알렌에게 “미국은 한국에 대해 절대적으로 중립적 태도를 유지해야 하며, 한반도 관련 열강에 대항하여 한국의 상담역을 맡지 말고, 한국과 보호동맹을 체결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주선조항에 대한 한미 양국의 견해 차이는 후에 한국의 미국에 대한 실망과 좌절로 이어진다.
한국의 고종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주선조항에 따라 다양한 경로를 통해 미국에 일본의 침략을 저지시켜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루스벨트는 일본을 두둔하는 입장에 서서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의 주선조항이 국제법적으로 구속력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미국이 조약에 근거해서 당연히 한국을 도와줄 것으로 생각한 것은 국제법과 국제정세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미국 정부가 한국과 일본 사이를 주선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의지만 있었다면 양국을 주선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청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은 한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청국과 일본에 유감의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따라서 미국이 일본과 밀약을 체결한 것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정신을 위배한 행위로서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비난받을 소지가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예정대로, 1905년 7월 31일 가쓰라 · 태프트 밀약이 체결되고, a) 8월 7일 양국 정상에 의해 확인되었고, b)8월 22일 영국과 일본 간에 제2차 영일동맹조약이 체결되고, 영국은 한국의 일본 보호국화를 승인했다. 그리고 c)9월 5일 루스벨트의 주선으로 러시아와 일본 간에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되고, 러시아는 한국의 일본 보호국화를 정식 승인했다. 9월 6일 일본 외상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는 루스벨트에게 “한반도의 화근을 완전히 없애려면 일본이 한국의 외교관계를 전부 인수하는 것밖에 없어 이를 단행하려고 하는데 미국의 의견은 어떤가?”라고 물었고, 루스벨트는 “화근을 없애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일본이 그런 조치를 취해도 이의는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d)이에 따라 일본은 11월 17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에워싼 가운데 고종과 대신들을 겁박하여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을사조약
을사조약 체결 후, 한일 수뇌부
즉, 한국은 열강들의 승인하에, 특히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적극적인 협조하에,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e)한국은 태프트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1910년에 일본에 강제로 합병된다.
1945년 제2차세계대전 후 미국은 소련을 봉쇄하기 위해 다시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전략을 구상하였다. 미국은 일본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데 중점을 두었고, 그로 인해 패전국인 일본이 아니라 한반도가 분단되었다.
미국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일본보다 낮게 평가하였고, 북한은 소련의 지원 아래 남침함으로써 한반도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게 되었다. 그후 에도 일본을 기축으로 하는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은 변함없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가쓰라 · 태프트 밀약은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다. 가츠라-태프트 회담이 밀약이라면 그러한 밀약은 지금 이 시간에도 워싱턴DC, 도쿄, 베이징에서 시시각각 벌어지고 있을 터이다. 북핵문제, 사드(THAAD) 배치 문제 등으로 한반도정세가 혼란스러운 요즘, 미•일•중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대한 입장을 탐문하고 확인하고 조율하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것이다.
북한의 1호열차가 오늘 베이징에 도착을 하였다고 한다. 한국의 국익에 반하여 한국을 옭아매는 외교전을 펼치고 있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는 어디일까? 동북아지역에 있어서 한반도를 종속 변수로 만드는 강대국의 전략적 이익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과연 한국은 그러한 밀약에 참가하고 있는가, 배제되어 있는가? 그것을 묻는 것이 가츠라-태프트 회담이 현재 우리의 상황에 던지는 역사적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