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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10 10:22
[한국사] 양평은 지금의 요양이 아니다
 글쓴이 : 독산
조회 : 841  

《금사(金史)<알로열전斡魯列傳>(71열전9)에는 요금(·金) 교체기에 동경(東京)에서 모반한 옛 발해인이었던 요나라의 비장(裨將) 고영창(高永昌)에 대한 정벌기가 실려 있는데, 고영창은 금(金)나라의 완안알로(完顔斡魯)가 요나라로부터 조산성(照散城; 정확한 위치는 미상이나 심주부근의 성인 듯)과 심주(瀋州)를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알로군(斡魯軍)에게 투항하려 하여 그들 사이에는 사자(使者)가 오고간다.

 

마침 같은 발해인 출신인 고정(高楨)이 항복했는데, 그가 고영창이 항복하려는 것은 진심이 아니고 잠시 알로군(斡魯軍)의 진병(進兵)을 늦추려는 것이라고 하여 알로는 고영창을 토벌키로 하고 진병(進兵)하자, 고영창은 알로가 보낸 사신을 죽이고 무리를 이끌고 와서 거전(拒戰)하였다.

 

당시 고영창과 알노군(斡魯軍)『옥리활수(沃里活水)에서 조우(遭遇)하였는데 알로(斡魯)의 병사는 이미 강을 건넌 뒤였다.

, 고영창은 『옥리활수에서의 도하(渡河)를 저지하려 하였는데, 이미 금나라 병사가 강을 건넌 후에 도착하여 고영창의 무리는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고, 마침내 알로군북으로 진격하여 동경성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튿날 고영창이 모든 무리를 이끌고 와서 싸웠으나 또 다시 패하여 5천기를 이끌고 장송도(長松島;위치미상)로 도망쳤다는 것이다.

*斡魯進兵永昌遂殺胡沙補等率衆來拒遇于沃里活水我軍既軍既濟永昌之軍不戰而却, 逐北至東京城下. 明日, 永昌盡率其衆來戰復大敗之遂以五千騎奔長松島.

 

심주(瀋州)는 원대(元代)에 심양(瀋陽)으로 바뀌는 동일지역이며 모두 지금의 요양지역에서 동북 12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기록하는 곳이다.

물론 瀋陽『심수(瀋水)의 북쪽』이라는 의미를 갖는 지명이다.

《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3468) ‘’(簡化字)에 의하면, 은 수명(水名)으로 지금의 요령성(遼寧省) 심양시(瀋陽市) 남쪽에 있는데, 수원(水源)은 심양시 동쪽에서 나와 아래로 흘러 혼하(渾河)로 들어간다고 한다. 또 오리하(五里河)、소심하(小瀋河)라고도 한다고 풀이하고 있다.

『오리하(五里河)를 주목해둔다.

 

“요(遼)、금(金)의 심주(瀋州), 원(元)의 심양로(瀋陽路), 명(明)의 심양중위(瀋陽中衛), 구심양현(舊瀋陽縣) 및 지금의 심양시(瀋陽市)는 모두 심수(瀋水)로 인하여 이름된 것이다.”라고 풀이한다.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권15· 산천2·악이화수(鄂爾和水)>.,“金史高永昌率衆來拒遇於鄂爾和舊作沃里活今改水我軍既濟永昌之軍不戰而却. 逐北至東京城下案明志刪去原文沃里二字稱高永昌拒金兵於活水謂即渾河殊誤.”라고 하여 악이화수(鄂爾和水)는 옥리활수(沃里活水)이며 지금의 혼하(渾河)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혼하(渾河)는 고칭(古稱)이 역시 『심수(瀋水)이기에 알로(斡魯)가 있던 瀋水(渾河) 북쪽에 있던 瀋州(후에 瀋陽)에서 동경성에 있는 고영창을 치기 위해 瀋水(沃里活水)를 건너, 심주의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북쪽으로 나아가 東京城에 이른다고 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전개된다.

 

요컨대 沃里活水는 지금의 渾河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동경을 지금의 『요양(遼陽)으로 상정(想定)했기 때문에 알로(斡魯)가 동경성(東京城)으로 가는 진군로에 도하(渡河)하는 강인 『옥리활수(沃里活水)를 남쪽의 혼하(渾河)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앞서 주목해 두었던 『오리하(五里河)『옥리활수(沃里活水)와 같은 강으로 『압(鴨)(국어 훈, 오리일 것이다)의 의미에서 왔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지금의 혼하(渾河)가 될 수 없고,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 시에 하루 동안 450를 도주하여 닿았다는 압록수(지금의 청하淸河)일 것이다.

당시 수많은 대군을 잃은 수나라 군대는 요동성(즉, 양평襄平) 서쪽 수리(數里)에 진주하고 있던 수양제와 합류하여 황급히 도주하였던 것이다.

*자치통감<대업大業8>에 의하면, “7壬寅(24), 살수(薩水)에 도착하였는데 이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가 뒤에서 후순(後軍)을 공격하여 신세웅(辛世雄) 등이 사망하고 제군(諸軍)이 붕궤되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나머지 장군과 사병이 모두 도망쳐 11夜(하루 낮 하루 밤)만에 압록수에 다다르니 450리를 간 것이었다. ……癸卯(25)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당시 수양제(隋煬帝)는 요동성(옛 양평) 부근에 있었다.

신당서<지리지>에 의하면 안동도호부 남쪽 700리에 박작성이 있었다고 기록한다.

이 박작성은 한반도 북부의 압록강 북안에 있던 성(城)이다.

양제(煬帝)는 밤을 지새우며 달려온 우문술군에게 쉴 틈도 주지 않고 당일 퇴각해버린 것이다.

살수에 도착한 것은 24일 낮이며 압록강에 도착한 것은 24일 밤, 혹은 25일 새벽이기 때문에 양제는 이 몰살(沒殺)로 인하여 황급히 퇴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문술군이 도착한 곳이 한반도의 압록강이라면 700리 길을 더 가야만 양제가 있던 요동성부근 지역에 도착할 수 있게 된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양제가 25일 요동성을 출발하기 전에 305천의 병력을 끌고 가, 겨우 27백인이 살아 돌아 온 지휘자인 우문술에게 제(諸) 물자와 병력을 망실한 책임을 물어 형리(刑吏)에게 형구(刑具)에 붙들어 매는 문책을 가한 점을 보면 확실히 우문술은 양제와 합류하였던 것이다.

우문술이 도착한 압록수를 한반도 북부의 압록강으로 이해하는 이병도에게는 이해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닌 것이다.

 

때문에 그는 《책부원구冊府元龜<제왕부帝王部·친정親征2>가 살수薩水의 패전敗戰『임인壬寅(24)이 아닌 『임오壬午(4)로 기록한 점을 들어, “壬寅은 지리상地理上 거리에 따르는 날짜의 허비虛費로 보아 불가不可하므로 壬午』설을 취함이 온당할 것 같다.”1983, 이병도 역주譯註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366, 주36.고 하는 것이다.

壬午설을 취하면 21일  만인 『게묘癸卯일에 반사班師한 것이 되는데, 《책부원구冊府元龜11450리라는 살수薩水남쪽에서 압록수(鴨綠水)까지의 퇴각 소요기간과 거리를 기록하지는 않고 단지 敗續於薩水還亡者二千餘騎.라고만 적고 있다.

그러나 당 태종의 고구려 정벌 전에 편찬(636)《수서隋書<우문술전宇文述傳>에 의하면, 一日一夜, 還至鴨綠水, 行四百五十里.라고 기록되어 《책부원구冊府元龜보다 늦게 편찬된 자치통감의 기록과 동일하다.

따라서 薩水에서 鴨綠水까지 11, 4백리라는 것은 자치통감이 지어낸 것이 아닌 《수서隋書》에 확실한 근거가 있는 기록인 것이다.

양제煬帝가 요동성 서쪽에서 주둔하고 있을 때, 대군大軍 30만 중에 고작 2천여가 생환하였다는 사실은 언제 요하가 폭창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만약 책부원구壬午(4)을 취한다면 一日一夜, 還至鴨綠水, 行四百五十里.하고, 癸卯(25)까지의 기간 동안 한가하게 요동성에서 기다린 것이 된다.

30만의 大軍을 잃고도 요하 동쪽에서 약 20일을 기다릴 만큼 양제의 사정은 한가하지 않았다.

물론 우문술이 도착한 곳이 한반도의 압록강이라고 하더라도 요동성까지 700리길을 더 달려가야 하지만, 생사가 걸려 있는 우문술 등은 추가된 700리길도 1-2일 사이에 주파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고, 양제는 우문술 등이 요동성에 도착한 후에도 15일 이상을 더 체류滯留한 것이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우문술 등이 도착한 압록수도 한반도 북부의 압록강일 수는 없다.

필자는 이 압록수鴨綠水가 바로 옥리활수沃里活水, 『오리하五里河일 것이며 지금의 철령시를 흐르는 청하淸河일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살수薩水는 지금의 무순시撫順市 동쪽의 대화방수고大伙房水庫로 흘러드는 소자하蘇子河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알로斡魯는 심주에서 북쪽으로 간 것이지 남쪽으로 향한 것이 아니다.

<알로열전斡魯列傳>『옥리활수沃里活水를 건넌 후에 逐北至東京城下라고 기록하여 심주瀋州에서 동경성으로 향하는 금군金軍의 진군로를 명백히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동경성(漢 襄平)은 심주 남쪽의 오늘날 요양지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주 북쪽의 沃里活水』(지금의 청하)를 건너 북쪽으로 향하는 모처某處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필자가  양평성을 노성老城 부근지역에 비정하는 것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세한 것은 따로 해설), 무엇보다도 오늘날 발견되는 연북장성 주향선과 같은 위도 상에 소재하기 때문이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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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8-03-10 10:24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이곳 동아게에서는 양평을 지금의 요양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 사서에도 양평을 심양 쪽으로 적고 있지 요양으로 적은 것은, 제가 아는 한 없습니다
독산 18-03-10 10:40
   
양평=동경=지금의 요양이 통설이고 저는 이 설을 비판한 것입니다.
감방친구 18-03-10 11:16
   
그런데 독산님은 비사성을 학계 통설과 같이 요동 남단에 비정하시는 게 특이하네요

무엇에 근거하신 건가요?
독산 18-03-10 11:41
   
당연히 평양(장안성, 지금의 요양)으로 진격하기 위한 수로군의 상륙지점이기 때문이죠!.
수나라의 1차(사실은 2차, 1차 역시 한반도로 건너오다가 수몰됨) 침공 때는 한반도 평양에서 요동의 장안성으로 옮긴줄 모르고 비사성이 아닌 대동강 하구를 통하여 한반도로 진입하죠!(이에 대한 자세한 증거는 따로 기회가 있으면 설명드리죠)
당시 백제가 향도를 자처했지만 이를 무시하고 강행한 결과, 치명적이고 초보적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평양(장안성)도(道)의 상륙지점이 요동반도 남단인 비사성으로 수정하게 되는 것은 1차 실수 후의 일입니다.
     
감방친구 18-03-10 11:49
   
고구려 비사성=발해 남경남해부=거란 해주 남해군=명 해주위라는 기록들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감방친구 18-03-10 12:05
   
요양이 양평이라는 기록은 요사 지리지에 없습니다
제가 못 찾는 건가요?

요나라 동경이 양평성이라는 기록은 없어요

다른 사서에도 양평성=요동성 기록은 무수히 많아도
거란 동경=양평성=요양은 없습니다

동경요양부 요약

양평 지역
ㅡ 동주 광주 귀덕주 탕주 = 혼하 일대
요동성
ㅡ 요주 시평군=발해 동평부=요하 중류~혼하 및 요동 일원=그러나 만주의 주군현이 요동으로 교치돼 오며 나중에는 이름만 남음 (1주 2현. 호구수 기록 없음)

遼州始平軍 下 節度, 本 佛寧國城, 渤海 為 東平府.  唐太宗 親征 髙麗, 李世勣 㧞 遼城, 髙宗 詔 程振 蘇定方, 討 髙麗 至 新城 大破之皆 此地也.  太祖 伐 渤海, 先破 東平府, 遷民實之.  故 東平府 都督 伊䝉陀黒比五州, 共領縣十八, 皆廢.  太祖 改為 州, 軍曰東平, 太宗 更為 始平軍.  有 遼河 羊腸河 錐子河 蛇山 狼山 黒山 巾子山, 隸長寧宫, 兵事 屬 北女直兵馬司, 統州一縣二.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
감방친구 18-03-10 12:11
   
襄平城司北七十里。漢縣,為遼東郡治。後漢及晉因之。亦謂之遼東城。慕容使其子翰鎮遼東,即是城也。隋大業八年,度遼水圍遼東城。唐貞觀十九年,親征高麗,拔遼東城,以其城為遼州。上元二年,移安東都護府於遼東故城。儀鳳二年,復移新城。賈耽曰:自營州入安東道,經汝羅守捉,度遼水,至安東都護府五百里,府故漢襄平城是也。又司東北有武次城,亦漢縣,屬遼東郡,東部都尉治此。後漢廢。晉咸和中,慕容復置,尋廢。

<독사방여기요>

1) 양평성은 요양 북쪽 70리
2) 양평성은 한나라 요동군 치소가 있던 곳이다
3) 양평성은 또한 요동성이라고 한다
4) 후한에서 진에 이르는 시기에 이곳을 지키기 어려웠다
5) 모용이 한을 시켜 요동을 진압하게 했는데 그곳이 바로 이 성이다
6) 모용한은 모용황의 형, 직책은 입위장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고국원왕(342년) 기사 참조
7) 수와 당이 공략하고, 당 태종이 빼앗아 요주로 삼은 곳이 바로 양평성
8) 가탐도리기에서 안동도호부가 있다 한 한(漢) 양평성이 이 양평성이다
칼리S 18-03-10 12:19
   
누가 봐도 한나라 시대의 양평은 고구려의 요동성이면서 현 요양이 맞고, 고려 조선의 압록강은 현 압록강이 맞으며 강동6주(8주)는 청천강과 압록강 사이임이 분명하다고 봅니다. 머 통설의 견해이기도 하고요.

고려와 조선이 별개의 시대도 아니고, 조선은 고려를 사실상 그대로 이어받은 국가이면서, 그 기록들을 물려받은 국가인데, 그 기록들은 개무시하면서 조잡한 요사, 금사 게다가 고구려는 아예 개무시하면서 만주는 여진족의 역사라는 흠정만주원류고같은거나 빠는게 이해가 안됨.

무엇보다 고려는 조선보다 결코 컸던 적이 없는 나라임.

고려의 행정체제만 봐도, 양계는 고려의 방어를 위한 지역인데, 한반도 밖까지 확대시키면 시킬수록 양계만 엄청나게 커지는 어이없는 결과를 양산하는데, 이는 설명하지도 못함.
     
감방친구 18-03-10 12:22
   
누가 봐도?
          
칼리S 18-03-10 12:39
   
아 네 여기 몇몇 분들만 빼고요.
     
도배시러 18-03-10 13:31
   
[수경] 요수, 양평
大遼水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대요수(大遼水)는 새(塞) 밖의 위(衛) 백평산(白平山)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흘러 새(塞)로 들어간 후
요동군(遼東郡) 양평현(襄平縣) 서쪽을 지난다.

===> 지금 요양의 서쪽을 지나가는 하천은 ? 태자하.
주류학계의 뻘소리에 요수의 위치는 맨날 흔들흔들...
     
남북통일 18-03-10 16:10
   
일단 만주원류고에 고구려가 없다고요?
목차에는 없지만 내용에는 엄청나게 많이 언급되는데?
          
감방친구 18-03-10 16:15
   
222
               
남북통일 18-03-10 16:18
   
三國志魏書 辰韓(另條見前)十二國 有斯盧國 通典 新羅國 魏時新盧國 其先本辰韓 辰韓始有六國 稍分為十二 新羅其一也 魏将毌丘儉 討髙麗破之 髙麗王奔沃沮 其後復歸故國 留者遂為新羅焉-흠정만주원류고
『삼국지 위서三國志魏書』에는 “진한辰韓 (다른 조에서 이미 보았음) 12국에 사로국이 있다.”고 되어 있다. 『통전通典』에는 “신라국은 위魏라때 신로국新盧國으로 기록되었고, 그 선조는 본래 진한辰韓 이다.진한辰韓 은 처음에 6국이었는데 점차 나누어져서 12국이 되었다. 신라는 그 중의 하나이다.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쳐서 이기자 고구려왕은 옥저沃沮로 달아 났다. 그 뒤에 옛나라로 돌아 왔으나 (옥저에) 남은 (고구려) 사람들이 신라를 세웠다.
通考 新羅國 在百濟東南 五百餘里 (亦在 髙麗東南 兼有 漢時 樂浪郡之地)初曰新盧 或曰新羅 東濵大海 魏毌丘儉破髙麗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留者遂為新羅 故其人雜有華夏 髙麗百濟之屬 兼有沃沮 不耐韓濊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入新羅 遂王其國-흠정만주원류고
번역-『통고通考』에는 “신라국은 백제 동남 5백여리에 있다.(또한 고구려 동남에 있고, 한나라 때의 낙랑군(2) 땅을 차지하고 있다), 초기에 신로 또는 신라로 불렀다. 동쪽 끝은 대해이다. 위魏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쳐부수자 옥저로 달아 났다. 그 뒤에 옛나라로 돌아왔으나 남은 사람들이 신라를 세웠다.그래서 그 나라(신라) 사람들은 화하 華夏 고구려 백제 사람이 섞여 있다. 옥저沃沮 불내不耐 한韓 예濊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왕은 본래 백제인인데 바다를 통해 신라로 들어 와 그 나라 왕이 되었다.
               
남북통일 18-03-10 16:53
   
와우 댓글도 삭제하셨네요
왜 답글이 안 달리나 했더니............
                    
감방친구 18-03-10 16:56
   
저요??
                         
남북통일 18-03-10 16:57
   
아뇨 칼리S님 말입니다
     
남북통일 18-03-10 16:19
   
晉(진대)-前秦錄 新羅 在百濟東 符堅建元十六年 符洛反 遣使徴兵 於百濟新羅等國 並不從 秦書 符堅建元十八年 新羅國王 樓寒(按 蒙古語 謂 龍曰婁 寒字 當即 汗音之訛)遣使朝獻 通志 新羅國 在百濟東南 五百餘里 東濵大海 其王本百濟人 自海入新羅 遂王 其地其國 初附屬于百濟 後因百濟伐髙麗 人不堪戎役 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 伽羅 任那 諸國滅之 其西北界 出髙麗之間 先是其國小 不能自通 符堅時 其王樓寒 遣使衞頭朝貢 堅曰卿言 海東之事 與古不同 何也 對曰 亦猶 中國時代變革 名號改易今焉 得同-흠정만주원류고
『전진록前秦錄』에는 “신라는 백제의 동쪽에 있다. 부견符堅 건원建元 16년 부락符洛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신을 보내 백제, 신라 등의 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는데 모두 따르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진서秦書』에는 “부견 건원 18년 신라국왕 루한樓寒 (살피건대 몽골어로 용龍을 누婁라 하는데 한寒은 곧 칸汗의 발음을 다르게 적은 것이다.)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통지通志』에는 “신라국은 백제 동남 5백여리에 있다. 동쪽끝은 대해이다. 그 왕()은 본래 백제인으로 바다를 통해 신라로 들어와 왕이 되었다. 그 영토와 나라는 초기에 백제에 부속되었다. 뒤에 백제가 고구려를 칠 때 사람들이 노역을 참지 못해 서로 가솔을 이끌고 신라로 들어 와서 드디어 강성해지자, 가라伽羅 임나 任那 등 여러 나라를 쳐서 없앴다.
          
남북통일 18-03-10 16:52
   
뭔 헛소리를 하시는 건지...........
만주족의 뿌리는 신라이며, 만주원류고에서는 신라의 선조를 고구려라고 하고 있는데....
     
남북통일 18-03-10 16:23
   
唐會要 新羅者 本弁韓之地 其先出髙麗 魏破髙麗 其衆保沃沮 後歸故國 其留者號新羅 國多金朴兩姓異姓不為婚 永徽元年 王金真徳 大破百濟 遣使金法敏來朝 五年 真徳卒  髙宗為舉哀于永光門  使太常丞張文收弔祭之 贈開府儀同三司 仍賜綾綵三百段 -흠정만주원류고
당회요」에는 “신라는 본래 변한의 땅이다. 그 선조는 고구려에서 나왔다. 위魏나라가 고구려를 쳐서 이기자 그 무리들은 옥저沃沮로 가서 보존하였다. 뒤에 옛 나라로 돌아갔다. 그 곳에 남은 사람들을 신라로 불렀다. 나라에는 김金 박朴 두 성씨가 많고 다른 성과는 혼인을 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휘永徽 원년 그 왕 김진덕金真徳이 백제를 크게 쳐서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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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안 나온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남북통일 18-03-10 16:24
   
여기는 목차=내용이 되는 신비한 사이트로군요.
          
감방친구 18-03-10 16:25
   
여기가 아니라 저 사람만 그래요 아니 몇 명 더
               
남북통일 18-03-10 16:29
   
애초에 만주를 언급하는데, 만주를 700년 이상이나 호령했던 고구려가 만주원류고에
"나오지 않는다.","개무시한다."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멍청한 소리입니다.
만주를 언급하면서 고구려가 언급이 안된다는것은, 한반도 역사를 언급하면서 조선이 언급이 안된다는 소리랑 같은 소리인데 ㅋㅋㅋ
                    
칼리S 18-03-10 17:26
   
만주원류고는 책 제목 그대로 만주족의 원류를 파악하겠다고 쓴 책인데 여기에 부여, 삼한, 발해와 같은 한민족 국가들을 다 집어넣었습니다. 즉 부여, 삼한, 발해가 여진족의 변방 부족이 되도록 구성했습니다. 만주원류고 강역조에서도 부여, 삼한, 옥저, 백제, 신라, 발해까지 다 만주에서 활동한 것으로 만들어 청나라의 전사(前史)로 취급하고 있고요.

그러면서 만주의 지배자였던 고구려는 외면합니다. 만주원류고에 고구려가 따로 있습니까? ㅋㅋㅋ

만주원류고는 만주에서 대대로 속국야만인 취급 당하던 청 만주족들이 자위질할려고 날조한 소설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 이딴걸 가지고 물고 빠는거 보면 한심하지 않나요? ㅋㅋㅋ
                         
남북통일 18-03-10 17:31
   
고구려라는 목차가 없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만주원류고에서는 "신라왕족의 성씨를 따 국호를 금으로 한다."라는 서술이
있고, 신라의 선조를 고구려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주원류고에서 고구려를 외면하였다니............허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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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목차에 고구려가 없는 이유는 제가 대강 추측해보면 고구려에서는 야인 취급을
받았으나, 발해에 이르러서는 말갈의 힘이 발해 건국에 큰 영향을 미쳤으니, 발해를
서술한 것으로 추정되네요
독산 18-03-10 12:28
   
저는 고구려 이전의 요동군을 논하고 있습니다.
후대인 발해-요금원=명을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나라 때의 요동도사성은 지금의 요양으로 되었고, 이것은 삼만위나 개원 등이 남쪽으로 내려오듯이 명의 동북지역은 이전보다 상당히 남쪽으로 방어선을 옮긴 결과입니다.
고려말 원의 동녕로와 심양(정동행중서성의 치소)를 약칭으로 쌍성, 혹은 요심(遼瀋)이라 한 것은 충렬왕(?) 때인가 요심에 기근이 들어 구휼미를 고려에 징발하는데, 일본 원정을 위하여 강화도에 쌓아두었던 강남미를 원나라 황제가 요양성(省; 동경, 즉 양평)에 징발합니다.
이때 원사와 고려사는 쌍성, 또는 요심으로 같은 사건을 다르게 기록하였으나, 결국은 같은 곳임을 나열되는 기록을 통하여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공민왕 때에 원나라 황제가 북토로 도망간 후, 동경으로 보내는 사자가 길이 막혀 요양 또는 심양까지밖에 갈 수 없었던 상황도 요심이 지금의 요양과 심양임을 확인ㅁ할 수 있습니다.
당시(前인가?) 황건적이 요동으로 침입하여 끝내 한반도로 들어 옵니다.
간신히 물리친 후 요양행성의  평장 고가노(高家奴)가 동경을 지키고 심양에는 모인(某人)이 개주에는 유일(劉일)이 금산에는 모인(某人)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로 건너온 엽왕과 마운이 있던 곳이 바로 금주(金州; 당시는 아직 성을 구축하지 못하엿음)에 주둔하고, 개주를 지키고 있던 유일이 명나라에 투항하기 전(홍무4년;1310년)에 고려에 보낸 편지에 요심의 고려 인민이 명나라 내지로 옮겨질 것을 염려하여 미리 고려에서 받아들이도록하는 내용을 보냅니다.

역시 요양과 심양의 고려 인민입니다.
원래 요동반도 서쪽지역은 한나라 때는 낙랑군 남부도위, 요나라 초기에는 고려의 땅이엇는데 요나라 성종(聖宗)이 통화(統和)29년(1011년)에 고려를 정벌하고 발해민을 호구로 옮겨 영주(寧州; 지금의 와방점시 서북)를 세운 곳입니다(요사 지리지 참조).
요동반도의 서부 지역까지 고려 초에는 점유하고 있었음 알 수 있습니다.
     
감방친구 18-03-10 12:40
   
그것은 알겠는데 저는 님의 논설 가운데에 의문이 드는 부분을 언급한 것입니다
     
칼리S 18-03-10 12:50
   
고려는 북계와 동계 그 두 지역에는 방어를 위해 공부를 자체 군비로 해결하게 했으면서도, 고려조정에서 필요할때마다 지원을 할 정도였습니다.

동계지역은 워낙에 지형이 산악이 많고, 쓸모없는 지역이 대부분인지라, 그 주부군현의 수로서 그 지역과 넓이를 가늠하기 좀 힘들겠지만, 서경(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북계 지역은 나름 괜찮은 지역들이고, 요동지역까지 그 관할하에 둔다면 북계 지역은 엄청나게 대단한 지역으로 변합니다. 그럼 인구도 늘어야 하고, 농토도 많은데, 북계지역의 주부군현으로 설명이 되나요?

요동지역의 서부지역까지 고려가 점령했었다면 북계에 서경까지 집어넣을 하등의 이유가 없죠.
     
감방친구 18-03-10 16:01
   
독사방여기요를 쓴 고조우는 한족학자로 이 기술태도와 내용을 보면 청나라 지리고증서가 아니라 명나라 것으로 봐야 할 정도이고 중화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산동8과 산동9의 내용에 있어서 서로 배치되는 게 있을만큼 우리에게 유리하게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이 사서 내에서, 또 다른 사서와 교차하여 검증비판이 가능하고 오류 역시 같은 방식으로 최선의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불리하게 쓰여진 사서들조차 지금의 우리 학계 통설이 입으로 방귀를 뀌고 똥구녕으로 피리를 부는 소리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게 우선이지 이걸 우선하는 것이죠
독산 18-03-10 14:01
   
신당서 지리지 안동도호부(양평)동북 개모-신성 입니다.
개모성은 당나라가 개주(蓋州)로 한 곳입니다.
훗날의 개주는 요동반도 서북쪽으로 옮겨옴니다.
이 뒤안에는 복잡한 이동과정이 섞여 있습니다.
양평을 어느 곳으로 보든지 청대 개주의 비정에는 그 이동과정이 생략되고 고구려 개모성이 본래 요동반도 서북부에 있었던 것처럼 설명합니다.
마치 양평의 남쪽에 개주가 있던 것처럼 되버리니까요.
매우 잘못된 예이지요.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이세적군은 따로 북쪽으로 해서 초원의 길을 거쳐갑니다.
그 정확한 길은 추적하기 어려우나 백랑수와 황암2수(서요하와 신개하)를 거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처음 마주치는 곳이 현토성-신성-개모성입니다.
모두 양평(요동성) 북쪽에 위치한 성입니다.
이 부근에는 부여성과 남소성도 있었습니다.
모두 북쪽 지역에 있습니다.
당태종은 남쪽로(옛 양평로; 유성-양평)를 거치는데 망우하-세하-요택-유하-수수하-요하를 거쳐 요동성(양평) 남쪽에 상륙합니다.
이세적군은 현토-신성-개모를 거쳐 내려오고, 태종이 이끄는 친어(親御)6군은 요수현에서 요동성을 향해 북상하여 이세적 군과 회합합니다. 
결코 개주(蓋州; 고구려의 개모성)가 양평성 남쪽에 위치하지 않았습니다.
청대 지리지는 대부분이 오류입니다.

임유관(산해관 부근)에 한나라 석성(石城)이 있었다고 하여 백랑수를 지금의 대릉하로 비정하는 것이 청대 학자들입니다.
수경주가 백랑수에 합류하는 지류로서 석성천수를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석성이 임유관 부근으로 옮겨온 것은 당 만세통천(몇년인지는 기억나지 않음) 연간에 옮겨진 것입니다.
대릉하가 백랑수로 잘못 비정되는 결코 웃을 수만은 없는 사연입니다.
이러한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청대 지리지를 검토하면서 특히 유의할 점입니다.
     
감방친구 18-03-10 15:00
   
그거야 따져 봐야 하는 일로 님 말씀이 어느 정도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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