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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08 23:48
[한국사] 여진족과 발해유민 악연 정리(약간의 비속어 포함)
 글쓴이 : history2
조회 : 1,340  

부여에서 읍루를 복속시키고 있었다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니 한국사의 처음부터 떼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존재인 여진족. 조선의 다른 이름이라는 숙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진족
그런데 생각보다 우리는 그들과 서로 통수를 치고 또 통수를 맞고 하는 사이였다 
(물론 최대의 피해자는 발해유민이었지만)

1)고구려,발해시대에는 말갈이란 이름으로 피지배층으로 복속해 있기도 하였으며, 말갈의 한갈래 흑수말갈이 발해에 저항하면서부터, 악연의 연속이었다. 
여진족들이 침략자의 이미지지만, 꽤 오랜 시간 한민족의 피지배 민족이었던 셈이다.
(이건 우리가 좀 미안) 

2)송막기문에서 거란인과 발해인의 관계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거란은 발해인은 '논밭을 주고 그 부입을 덜어주었으며 무역이 오고 갔으며 시장이 모두 탈취하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나, 즉 '전쟁이 있으면 곧 앞서 말을 몰게 하기 위하여 부렸다'라고 하여 전시(戰時)를 위한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불쌍한 발해유민, 이때부터 앵벌이....신세, 근대 이 기사는 여진과는 무관함) 

3)송사 송기에는 '발해의 병마와 토지는 해장에 비해 풍성하다. 비록 거란에 힘써 일하지만 주인을 죽이고 나라를 무너뜨린 원한을 품고 있다' 라는 언급이 나와 발해 유민들이 거란에 대한 원한이 사무쳤음을 기록하고 있다. 
(거란에 대해 원한이 깊은 발해유민들, 그러나 고려는 딱히 도움을 안준다. 어쩔때는 그냥 여진인 취급한다)

4)뿐만아니라 거란은 발해인을 강제 동원하여 선봉에 세웠다. 특히 여진족과 싸움을 붙인 이유는 여진족과 발해인이 사이가 나빠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발해유민과 여진은 확실히 구분된다는 말이다)

5)심지어 거란국지 1116년에서 '대저 요동에는 일찍이 여진과 발해가 원수여서 전호가 곧 양민들로 하여금 여러 번 명하여 전쟁하게 했다. 라고 기록하였고, 금사 호사보 열전에서 여진족 호사보가 거란에게 사신인척 파견되어 정탐하다 발해군과 마주치자 발해군은 오랑캐를 향해 한편으로 비웃고 한편으로 말하기를 '듣자하니, 여진이 난을 일으키고자 한다는데 여진 니네 놈들은 참 나쁘다.' '야 너네 여진족 새퀴들아!  거란놈들 상대로 반란 일으키려다가 이제 와서 사신보내고 꼬리내리냐? 이런 졸렬하고 간사한 새퀴들 같으니'라고 욕한것이다. 발해인들이 얼마나 여진족에 대해서 안 좋게 보았는지 알수있는 대목.
(사이가 더러운 발해와 여진, 당연히 둘사이가 같은 부류일 수 없다)

6)아골타의 경우도 금사 1114년에 '발해인 양복과 알답자로 하여금 거짓으로 도망치게 하여 그 고향 사람들을 불러놓고 '여진과 발해는 같은 집 식구이니 우리가 군대를 일으켜야 (거란의) 죄를 벌할 수 있으니 함부로 망동하지 말고 우리를 따라서 죄가 없게 해야한다.' 여진과 발해를 한 집안이라고 언급을 하지만 곧 '딴 생각 말고 우리 따라와라?'라고 말하게 하여 사실 세력 흡수 목적임을 천명했다
(동조동근론의 함정에 빠진 발해유민....병...신) 

7)금사 1116년 기사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잘 드러나는데,  고영창이 동경을 근거지로 삼아 발해를 다시 일으키려고 하고, 금나라에 달불야를 사신으로 보내 동맹을 제안하자, 금사 알로(斡魯) 열전에  오래지 않아 달불야가 영창과 탁자를 잡아 바치니, 이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하여 요의 남로의 계적여진(요나라, 즉 거란 국적의 여진)과 동경의 주현이 모두 항복하였으니, 알로를 남로도통과 질발극렬에 임명하여, 오준에 남아 동경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다. 
(여진의 발해유민 탄압의 시작, 고영창이 황제 칭호 좀 쓰겠다는데, 그걸 못봐준다고 싹 쓸이한 여진, 그러고도 동조동근이냐...윈윈을 모르는 놈들)

8)조서를 내려 요나라의 법을 폐하고 세금을 덜어주었으며 맹안모극을 설치하여 본조(금나라)의 제도와 같게 하였다.' 즉 얼마후 고영창을 배신하고 정복 후 죽여버린 다음 그 세력을 모조리 흡수한 것이다.
(여진 배신의 시작과 발해유민의 여진 빵셔틀의 시작)

9)여진족도 발해인을 상당히 안 좋게 보거나 매우 경계한 듯한데, 송막기문의 내용을 살피면 대요, 대송 전쟁의 선봉으로 발해인을 사용하는데, 무려 발해군 3만을 동원하고 북송 전쟁이 끝난 후 산동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시켰고 거란국지에서도 해당 사실을 기록하며 이에 발해인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금사 병지의 기록에도 한족과 발해인을 맹안모극에서 강제로 탈퇴시켜 차별대우했으며, 그 혜택을 국인/내족, 즉 자신들에게 몰아주게 된다. 
(죽어라 부려먹고 뒷통수 치는 여진, 그러고 발해민족을 아예 말살 시킨다)

10)금사 희종(熙宗) 본기에서는 거란인과는 달리 그냥 한족 취급을 해서 한족의 글자를 강제한다. 금사 병지에서는 여진, 거란, 한인의 통혼을 허락하면서도 발해인은 아예 기록을 하지 않아 대놓고 없는 취급 내지는 배제를 하며, 금사 세종(世宗) 본기에서도 발해인들은 여진, 거란과는 다르게 형사취수를 금지당하고, 양자를 들이는 것 또한 차단당하며 한족의 풍습을 강제당하는 등 한족과 똑같은 취급을 당했다. 이를 보면 북방에서 꽤 많은 숫자를 유지하며 살고 있던 한민족을 사라지게 만든 것은 바로 거란과 여진족이라고 할 수 있다. 
(거란의 삥 뜯음과 여진의 빵셔틀 뒤, 발해유민은 아예 살해당함) 

11)고려시대 여진은 고려와 거란 사이에 끼어서 고려나 거란의 제후국 노릇을 하기도 했다. 고려는 외왕내제를 하려면 명분상이라도 제후국이 필요했는데, 탐라국이 비슷한 역할을 했고여진 제부족들도 고려에 형식상 복속되기도 했다. 
물론 요나라와 서희로 대표되는 고려의 합의에 의해 영역을 빼앗기는 시절도 있었지만 그 직전인 983년 고려가 먼저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가려다가 여진에게 참패를 당하는 등 결코 만만하지만은 않은 상대였다.
(근대 여기서 여진이 원래 여진인지, 발해유민 or 정안국인지 헷갈린다) 

12)여진이 치사한게, 지들이 고려에 공격을 당하면, 신라 말 고려 초의 신라인 내지 고려인을 조상으로 삼았다면서  '아 우리 생각해 보니까 옛날에는 잘 지냈는데' 하면서 족보를 읊는 이들도 있었는데, 문제는 이들이 후에 금나라를 건국하는 완안부가 된다는 점. 이 때문에 이게 고려사에만 실려 있는 것이 아니라 금사 등 중국 측의 정사서에도 실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는 여진족 내에서 성공 신화를 이룬 단 한명만이 신라인 출신이었다는 것일 뿐 여진족의 민족 구성이 뒤바뀌었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는 의견도 있다
(감언이설로 고려를 현혹하는 여진족들)

13)고려 전기엔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섬기며 조공 했으나 힘이 강성해져서 고려 측에서는 윤관의 지도하에 동북9성을 세우기도 했지만 겨우 2년 만에 반환해야 했다. 
여진족이 급속도로 흥기하여 금나라를 세워 화북을 정복하자 고려는 이런 금나라를 보고 매우 놀란다.하지만 여진은 고려의 제후국에서 금나라를 세울 때까지 성장한 뒤 이전 거란이나 이후 몽골과 달리 고려와 굳이 전쟁을 하려고까지 하지는 않았다.
 
14)사실 따지고 보면 북중국을 제압했으므로 여요전쟁 때보다는 더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고려 측에서 압록강을 건너와 존재한 요의 영토였던 보주 등을 회복하겠다고 했을 때, 완안아골타는 '알아서 하라' 라고 얘기하고 끝냈다.
금나라를 세운 후 충돌을 피하고자 고려가 금을 상국으로 대우해준다. 
금나라도 고려를 동생황제라 칭하면서, 서로 체면을 살려줌 

* 압록강과 보주에 대하여(압록강의 한자를 유의하면서 보시길)

“압록강(鴨淥江)은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을 관통해 흐르는 랴오허, 압록강(鴨綠江)은 북한과 중국 국경선인 압록강”이다. 고려의 서북 국경에는 압록강이 둘 있었다. 국경선으로서의 압록강(鴨淥江)과 후방방어선으로서의 압록강(鴨綠江)이다. 압록강(鴨淥江)은 보주(保州), 압록강(鴨綠江)은 의주(義州)가 거점도시였다. 보주는 의주방어사가 관할했다. “고려의 서북 국경선은 고려 전체시기를 통해 변함없이 압록강(鴨淥江)이었다.” 

 건국 초 고려는 유소(?~1038)에게 천리장성 축조 책임을 맡겼다. 변방 방어체계인 천리장성의 탄생이다. 압록강 하구~원산만에 있었으려니 한다. 그러나, 이 선상에서는 천리장성으로 볼 수 있는 대규모 시설이 확인되지 않는다.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다. 돌로 쌓은 담은 일부 남아있지만 성이라고 할 정도는 못된다.  압록강(鴨淥江)으로 추정되는 현 랴오허 유역에 천리장성이 있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 “‘1084년 시점 압록강(鴨淥江) 연안 요 수비병의 규모는 1부, 1주, 2성, 70보, 8영에 합계 정병 2만2000명이었다’는 고려의 기록이다. 남쪽은 요나라의 동경성에서 시작해 서북으로 황룡부에 이른다. 즉, 천리장성은 현 압록강변이 아니라 랴오허 유역에 있었던 것”이라는 설명이다. 

중국 고고학계는 고려 천리장성을 고구려의 장성으로 오판했다.  “기본 사서를 근거로 해 고려 국경사를 연구하면 기존의 후방방어선인 압록강(鴨綠江) 아래쪽으로 비정돼 온 강동 6주, 북경장성(천리장성), 서경 등은 현 랴오허 유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윤한택 교수(인하대 고조선연구소)

본래 고려의 용만현()이었으며 화주()라고도 하였다. 거란이 압록강 동쪽 기슭에 성을 두고 보주()라 했고, 1054년(문종 8) 거란이 또 궁구문()을 설치하고 포주(, 또는 )라고 고쳤다.

1117년(예종 12) 여진이 요나라를 공격하자 요나라의 자사() 상효손()과 도통() 야율녕() 등이 바다를 건너 피해 와서 영덕성()에 문서를 보내 내원성()과 포주를 고려에 귀속하였다.

군사가 성에 들어가 병기·돈·곡물을 수습하니 왕이 기뻐하며 의주방어사(使)로 고치고 남계()의 사람들을 이주시켰으며, 이 때부터 압록강을 경계로 하고 관방()을 두었다.

1221년(고종 8) 이곳에서 반역사건이 일어나 함신()으로 격하시켰다가 곧 복구시켰다. 1269년(원종 10) 원나라의 박색부()에 소속되었다가 1276년(충렬왕 2) 고려로 회복되었으며 지주사를 두었다. 1366년(공민왕 15) 의주목으로 승격시키고 방어사를 두었으며, 1369년 만호부를 설치하였다.


발해유민 묘지명.jpg
                 
발해 멸망 후에도, 발해인으로서 정체성을 인식한 발해유민의 비석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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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2 18-03-09 08:43
   
15298이 너무 깨져서 다시 정리하여 올립니다...... 가생이가 글을 적기가 편한 시스템은 아닌것 같아요...사진을  넣으면 자주 깨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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