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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사초략>에 호태왕이 “2년(392) 임진 7월에 친히 4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해 석현성 등 12개 성을 빼앗고, 9월 군대를 옮겨 거란을 공격해 남녀 3,500명을 사로잡고 유민과 잡혀갔던 고구리 백성 만여 명도 데리고 돌아왔다. 백성들 모두가 수유(茱萸)나무 가지를 머리에 꽂고 축하했다. 이것이 ‘9월 9일’의 풍속으로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가을 7월 남으로 백제를 쳐 10성을 빼앗았다. 9월, 북으로 거란을 쳐 남녀 500명을 사로잡고 본국에서 흩어진 1만 명을 타일러 데리고 돌아왔다.”라고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호태왕이 사로잡은 거란인의 숫자가 축소되어 있는데다가, 1만 명의 백성이 거란에 잡혀간 것이 아닌 것으로, 게다가 거란의 위치가 마치 고구리의 북쪽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고구리사초략>의 문맥으로 보면 호태왕은 남쪽에 있는 백제를 정벌 후 방향을 틀어 북쪽에 있는 거란을 공격한 것이기에, 거란은 고구리의 북쪽이 아니라 바로 백제의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호태왕이 거란을 정벌한 이유는 당시 거란이 고구리 땅의 일부를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으면서 고구리 백성들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란은 소수림제 8년(378) 무인년에 고구리에 극심한 가뭄이 들자 양맥곡(梁貊谷)의 여덟 부락을 노략질한 적이 있고, 고국양제 2년(385) 을유년에 전연이 전진에게 멸망당한 이후 거란이 요동 땅을 넓게 차지하고 있기에 군대를 보내 되찾은 적이 있는데, 호태왕이 백제 정벌 후 바로 거란을 정벌했다는 것은 고국양제 당시에는 완전하게 수복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맥 위치에 대해서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2152 참조)
거란족의 활동무대는 어디인가?
거란은 원래 동호계열로 4세기에 우문선비에서 갈라진 일족으로, 황수(潢水/黃水)와 토하(土河) 일대에서 유목하던 민족이다. <당서 거란전>에 거란은 황수의 남쪽에 황룡의 북쪽(潢水之南、黄龙之北)에 있었다고 하며, 6세기 당나라 초기에 부락연맹이 형성되어 일찍이 막북에 있는 돌궐의 칸에게 신하로서 복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에는 흉노계열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동호나 흉노 모두 나라 조선을 이루는 종족으로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황수(潢水)는 시라무덴(锡拉木伦)강이고 토하는 노합하(老哈河)라고 말하고 있는데 둘 다 홍산문명으로 유명한 내몽고 적봉시를 흐르는 강이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의 黃水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으나, 거란족의 潢水/黃水는 다른 강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황룡과 토하의 위치가 정확하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막북은 송막(松漠) 북쪽으로 낙양 북쪽 황하변에 있는 소나무 밭이 울창한 맹진(孟津)시 일대이다.
① 即河南之潢河。(하남성 남부 남양시 일대를 흐르는 潢河)
② 在河南新郑县西北,源出自然山,经县城北东南流入于洧, 《左传襄公二十八年》公如楚,过郑,伯有廷劳于黄崖,《杜注》荥阳宛陵县西有黄水。(황제 헌원의 도읍인 하남성 신정현 서북)
③ 在湖南石门县西,九澧之一,源出慈利县黄石山,东北流至石门县入渫水,一名黄石溪。(호남성 석문현)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는 토하를 일명 백랑수로 산서성 남부에 있는 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곳 일대가 바로 전연의 도읍이 있던 용성(유성)이었고, 전연이 망한 후 거란이 잠시 점거하고 있었기에 고국양제와 호태왕이 군대를 보내 되찾아온 것이다. 위 고국양제 2년(385)의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백랑수(=토하)와 관련 있는 전연 모용황의 도읍 용성(=유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4544 참조)
(번역) 토하 : 노합하, 노하, 도하이다. <요사지리지> 중경대정부가 토하에 있다. 상경도 영주는 황하 동쪽 토하 남쪽에 있는데, 두 물길은 합쳐진다. <청일통지> 토하라는 이름은 요나라 때 시작된다. 그 유무는 고증이 가능하다. 혹은 <수경주>의 백랑수라는 의혹이 있다. 요새 밖에서 요의 물길로 들어가고, 노하가 황하와 합쳐진다고 생각되고, 노하는 동북쪽으로 흘러 옛 황룡과 유성의 북쪽을 경유한다. <수지>에 요서군 유성현에 백랑수가 있고, <당서 해전>에도 그 땅에 역시 백랑하가 있다.
(원문) 土河 : 卽老哈河,亦曰老河,又曰涂河。《辽史地理志》:中京大定府有土河。《又》:上京道永州,东潢河,南土河,二水合流,故曰永州。《清一统志》:土河之名,始于辽时,其有无可考证,或疑即水经注之白狼水,以塞外入辽之水,惟老河合潢河,县老河东北流经古黄龙柳城之北,与水经注合。隋唐以来犹名白狼,隋志辽西郡柳城有白狼水,唐书奚传其地有白狼河是也。
바로 이 지역이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중경도(中京道)였던 것이다. <요사지리지>에서 중경도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중경도 대정부는 순임금이 영주라 했고, 하나라 때는 기주에 속했고, 주나라 때 유주를 나누어 있었다. 진나라 때 요서군이라 했다.(中京道大定府,虞为营州,夏属冀州,周在幽州之分。秦郡天下,是为辽西。)” 유주와 영주는 기주에서 나눠진 주이고, 요서군은 유주(幽州)에 속하는 군이다.
<한서지리지>에 기록된 유주에는 요동군, 요서군, 우북평군, 상곡군, 어양군, 낙랑군, 현토군, 탁군, 발해군, 대군 등이 속해 있는데, 그 지역은 바로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 요서군 땅에 바로 전연 모용황의 도읍 용성이 있었는데 전연이 망하자 거란이 잠시 점거하고 있던 것을 호태왕이 되찾아왔던 것이다. 이후 이곳은 줄곧 고구리의 강역이었다가 후예인 대진국(발해)과 요나라(거란)의 활동무대가 되는 것이다.
<대명일통지 大明一統志>에 “순임금이 기주의 동북을 나누어 유주와 금주로 했다. 상나라의 고죽국이며 주나라의 유주 땅이다. 진나라 때는 요동군 땅이었으며 또 이 유주는 요서군이 되었다. 한나라 때는 무려와 망평현의 땅이었으며 요동군에 속했다. 당나라에서는 유성현을 설치했으며 영주에 속했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곳은 고죽국의 상국인 조선의 강역이었으며, 이전과 이후 조선왕조 전까지는 대대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영토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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