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7-07-16 13:40
[기타] 고구려 기병의 무기와 기병전술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356  

. 고구려 기병의 무기와 기병전술

고구려 기병은 경기병과 중장기병으로 구분한다. 경기병은 기동력을 이용해 전술적 요충지를 선점하거나, 중장기병의 좌우 측면에서 적의 흩어진 보병을 공격한 반면에, 중장기병은 적진의 중앙으로 돌진하여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따라서 고구려 경기병은 중장기병이 등장하는 3세기 중반까지 기마전을 주도하였다.

경기병의 과하마(果下馬)는 체구가 작았으므로 기동력을 높이기 위해서 마구(馬具)는 적게 사용하였고, 무기 역시 짧은 활과 창을 사용하였으며, 무사는 가벼운 가죽 갑옷을 입었다. 중장기병은 상당한 중량의 마구와 무기를 갖추기 때문에 중형의 호마(胡馬)를 이용하였다. 따라서 여기서는 경기병의 과하마마구무기, 중장기병의 호마마구무기를 살펴보고, 그것과 관련한 기병전술을 살펴보려고 한다.

과하마는 고구려 토종마로서 키가 3(90)에 불과했지만, 하루에 1천 리를 달렸으며, 지구력이 강해 산악전에 뛰어났다. 특히 주몽이 부여에서 내려와 고구려를 건국할 때 과하마를 타고 왔는데,4 당시 부여가 명마를 생산한 사실과 관련해 본다면, 과하마는 뛰어난 전마였음을 알 수 있다.5

경기병에 쓰인 마구는 재갈[()], 고삐[()], 편자[마제(馬蹄)], 발걸이[등자(鐙子)], 안장 등이 있다. 편자는 비탈진 곳에서 말의 중심을 잡게 하였으며, 말발굽이 마모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과하마에 편자를 사용해 산악전에서 기동력을 발휘하였다.

등자(鐙子)6는 말을 타고 달릴 때 발을 안정시켜 몸을 자유롭게 하는 도구다. 흉노가 처음 발명했지만, 기마전에 사용한 것은 스키타이계의 사마르트(B.C.400A.D.400). 특히 철제 등자와 안장의 출현은 기마 전술에 있어서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그런데 고구려는 기원 전후시기부터 등자를 사용하였다.7

경기병의 무기는 만궁(彎弓)[굽은 활]8, 명적(鳴鏑), 단검(短劍), 전부(戰斧), 경창(輕槍) 등이 있다. 만궁은 8090㎝정도의 짧은 활이다.9 만궁은 짧으면서 굽었기 때문에 명중률과 살상력이 우수했다. 만궁의 전체 모습은 활의 중앙을 중심으로 활채가 많이 굽었으며, 활의 양쪽 굽은 부분인 활꼬지는 활채가 굽은 방향과는 반대로 굽었다.10 고구려 활이 짧으면서도 사거리가 먼 것은 굽은 활의 탄력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한편 고구려는 우는 화살 또는 효시(嚆矢)라고 일컫는 명적(鳴鏑)을 만들어 사용했다. 명적은 날아갈 때 바람에 부딪혀 우는 소리를 내는 것으로 신호용이나 적의 기선을 제압하고 적진을 분열시키는데 사용했다.

 

<그림 1> 고구려 활

경기병은 말 위에서 창과 칼. 도끼 등을 휘둘러 적을 제압했는데, 경기병은 철의 무게 때문에 소매가 없는 철제용 단갑(短甲)을 입었으며, 대부분의 갑옷은 목도리가 있었다. 특히 소매가 없는 갑옷은 토시를 꼈다.11



고구려는 2세기 이후 요동으로 진출하면서 후한의 전차(戰車)부대와 교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체형이 큰 호마에게 철제 투구를 씌우고, 철편으로 만든 마갑을 입혀 중무장한 중장기병을 창설하였다. 호마는 중앙아시아에서 생산되는 서역마(西域馬)12와 몽고고원에서 산출되는 몽고마(蒙古馬)로 구분한다.13 고구려에 호마가 유입된 것은 북방 흉노의 기마문화가 중국과 한국에 전래되면서 함께 전래되었다

.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말과 마구(馬具), (甲冑), 궁시(弓矢), 명적(鳴鏑)등은 모두 흉노계통의 것으로 기마문화의 전래를 보여준다. 특히 흉노 이후에는 선비(鮮卑)에게 직접 교역을 통해 호마를 구입했을 것이다.

고구려 중장기병에 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은 246년 동천왕이 철기오천(鐵騎五千)14으로 조위(曹魏)와 교전했다15는 기사다. 그리고 덕흥리 고분기사도가 그것을 입증한다. 중장기병은 철제 갑옷을 입고 방패와 장창, 마갑(馬甲)[말의 갑옷]으로 무장하였다. 그리고 방패를 가지고 선봉에서 적진으로 돌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중장기병이 입었던 갑옷을 찰갑(札甲)이라고 하는데, 찰갑은 작은 철판에 구멍을 뚫어 만든 여러 개의 소찰을 가죽끈이나 쇠줄로 연결하였다.

 말의 갑옷은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상세히 알 수 있다. 마갑은 말의 몸 전체를 덮는 것이고, 마면갑(馬面甲)은 말의 투구를 말한다. 마면갑은 말의 아래턱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금속판으로 씌웠으며, 거기에 두 개의 눈구멍을 냈다. 이렇게 무장한 말을 개마(鎧馬)라고 불렀는데, 『삼국사기』에서 철기(鐵騎)라고 한 것은 이렇게 무장한 말에 탄 기병을 뜻한다.16

경기병의 도검은 길이가 70㎝와 60㎝ 정도였는데,17 도검의 길이가 이와 같이 짧은 것은 경기병의 대부분 전투가 멀리서 활을 쏘는 원거리 전투였고, 한편으로 말 위에서 긴 칼은 행동반경이 넓어 적의 역습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기병은 철의 무게 때문에 소매가 없는 철제용 단갑(短甲)을 입었으며, 대부분의 갑옷은 목도리가 있었다. 특히 소매가 없는 갑옷은 토시를 꼈다.18

고구려 중장기병의 기본 무기는 삭()()이다. 삭은 1() 8()(4)의 기병용 창을 말한다. 그리고 ()()와 비슷하지만, 선단부가 모에 비해 가늘고 길며 자루가 철로 된 창의 일종이다. ()는 전차전을 위해 특화된 창인데, ()() 찌르는 용도로 쓰였다면, 과는 전차병을 걸어서 베는 용도로 사용하였다.19

고구려에서는 경기병과 중장기병이 모두 등자를 사용하였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경기병을 마궁수라고 했는데, 마궁수는 달리는 말에서 두 손을 놓고 활을 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등자가 없었다면 자세가 흔들려 명중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중장기병은 창을 가진 무사가 적진으로 돌진하여 적을 찌르거나, 적의 중장기병과 창검술로 대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등자가 없었다면, 이러한 돌격전을 감행할 수가 없었다.

고구려 기병전술은 중국 왕조의 주력군에 따라 두 시기로 구분한다. 하나는 후한과 조위의 전차를 상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연후연의 중장기병과 교전한 것이다.20 여기서는 고구려 기병전술을 경기병과 중장기병으로 구분하여 살펴본다.

후한의 요동태수가 28년에21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이때 후한의 주력군은 전차였고, 고구려의 주력군은 경기병이었다. 경기병이 전차를 상대로 정면에서 교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성 밖에서 기습하자는 우보 송옥구의 견해와 처음부터 성에 들어가 방어하다가 후한군이 철수할 때 성문을 나가 기습하자는 좌보 을두지의 견해가 맞섰다. 송옥구가 성 밖의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선제공격을 감행하려고 한 반면, 을두지는 먼저 방어하다가 틈새가 보이면 공격하는 전술적 차이가 있었다. 당시 대무신왕이 을두지의 수성전술을 좆아 후한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송옥구의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경기병의 우수한 기동력을 활용하는 기병전술(奇兵戰術)도 유효했다. 다시 말해서 송옥구는 후한의 전차를 험준한 지형까지 유인한 다음, 매복시킨 보병과 경기병으로 일시에 공격하는 전술이었다.22

고구려와 후한은 요동지역의 패권을 놓고 105(태조왕 53)121(태조왕 69) 두 차례 전쟁을 벌였다. 그런데 105년의 전투에서는 고구려 경기병이 후한군의 전차와 정면에서 교전함으로써 패배한 반면, 121년의 전투는 대조왕의 아우 수성이 후한의 연합군 진영에 거짓으로 항복한 다음, 병목 지형을 선점하여 후한군의 이동을 차단하고, 3천기의 정예기병이 우회하여 현도군과 요동군의 성곽을 쳐서 두 성의 수비군 2천여 명을 살상했는데, 이러한 전술은 앞의 송옥구가 사용한 경기병의 기동력을 바탕으로 기습한 전술과 맥락을 같이 한다.

후한의 전차와 고구려 경기병의 주력군의 교전형태는 172(신대왕 8)의 후한군 침공에서도 변화가 없는데, 고구려의 공론은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다음, 경기병의 이점을 살려 기습하자는 전술인 반면, 재상 명림답부는 수성전(守城戰)을 전개하다가 후한군이 철수할 때 기습하는 전술을 주장했다. 신대왕이 명림답부의 수성전술을 지지함으로써 승리했다. 만약 고구려 경기병이 평지에서 교전했다면 패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후한군의 전차부대를 험한 지형으로 유인하여 전차의 기동성을 상실케 한 다음, 경기병이 기습작전을 전개했다면, 승리할 확률이 컸다.

조위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246 8 1만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관구검의 주력군은 전차이고, 고구려의 주력군은 중장기병이었다. 고구려 철기병은 관구검의 전차부대를 비류수까지 유인하여 3천 명을 죽이고, 후퇴하는 관구검군을 추격하여 양맥골짜기에서 또다시 3천 명을 살상했다. 그러나 고구려 철기병은 방패와 장창으로 방진을 치고 대응한 관구검군에게 패배하였다. 일반적으로 방진에 대한 기병의 공격은 방진 내에 틈이 있어야 하며, 한편으로 보병과의 연합전술이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고구려군은 기병만으로 정면에서 무모하게 관구검 군대의 방진을 공격함으로써 패배를 자초하였다.

다음은 3세기말 선비족의 고구려 침공에 따른 양국의 기마전이다. 342년 전연의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고구려 고국원왕은 주력군 5만을 평탄한 북쪽 길에 배치하고, 왕 자신은 약졸 15천을 이끌고 지형이 험한 남쪽 목저성을 방어하였다. 모용황은 고구려의 예상을 깨고 남쪽 길을 공격하여 고구려 수도를 정복하였다. 당시 고구려군의 패인에 대해 학계는고구려가 통신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예비 병력도 부족했다23는 것과병력 배분의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24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러나 전연은 부대배치, 기병전술 등에서 이전의 유목민 수준을 벗어났을 뿐 아니라 한족(漢族)의 전차병이 쏘는 쇠뇌에 제압당한 이후 중장기병을 발전시켰다. 갑옷으로 무장한 중장기병이 쇠뇌의 공격력을 크게 약화 시킨 셈이다.25

남쪽 길의 모용황이 펼친 기병전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선봉에 중장기병을 배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당시 모용희의 선봉대는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목저성 주변의 산성을 모두 탈취하여 목저성을 함락시키고, 주변의 교통망을 장악하여 공격의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한편으로 교전 중 경기병을 고구려군의 후방으로 침투시키는 공격을 자유롭게 구사하였다. 고구려 군사 대부분이 이때 전사했다.

 http://blog.naver.com/joseon_500/220803326724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Total 19,98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6061
3269 [한국사] 갱단의 낙랑군 사기극 - 요서가 200년동안 바다?? (3) 징기스 08-24 1363
3268 [세계사] 조선의 운명을 가른 청일전쟁 뒷얘기 (5) 레스토랑스 09-21 1363
3267 [한국사] 개천절이라서 (1) 감방친구 10-03 1363
3266 [한국사] 8) 환단고기에서 밝혀주는 역사 (3) 스리랑 03-13 1363
3265 [기타] 누란의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한 명나라 여인 (1) 응룡 04-25 1363
3264 [한국사] 다시 모습을드러내는 국내최대의 고인돌.jpg 소유자™ 05-24 1363
3263 [한국사] [FACT] 역사유튜버 글림킴, 규원사화 원문 번역문 아비바스 11-29 1363
3262 [기타] 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국민들이 꼭 다시 되새기어… 전쟁망치 03-31 1362
3261 [기타] 역사는 역사학자의 사견과 주위의 입김으로도 충분… 내홈 09-06 1362
3260 [기타] 삼국시대부터 지진이 잦았던 영남 지방 (1) 흑요석 04-02 1362
3259 [기타] 동학 농민 운동 잡설 (20) 관심병자 07-10 1362
3258 [기타] 수나라 당나라 지배층은 선비족 (1) 인류제국 01-24 1362
3257 [한국사] 학계 통설 비정으로 본 고려 전기 북계 (10) 감방친구 04-21 1362
3256 [중국] 중국기록에 영가의 난 대한 궁금증이 있습니다 (5) 뉴딩턴 10-18 1362
3255 [한국사] 책부원귀와 자치통감주에서의 냉형(冷陘/冷硎) 감방친구 02-25 1362
3254 [세계사] 일본도vs 조선 환도에 대해서 알아보자 (4) yj12 08-02 1362
3253 [한국사] 정안국 수도, 서경 압록부(발해5경)에 대한 정약용 선… (19) history2 02-23 1361
3252 [한국사] 삼국사기 초기기록불신론과 삼국지 위서 동이전 (2) 감방친구 01-09 1361
3251 [중국] 치파오 VS 한푸 중국전통의상 논란 (19) 투후 06-21 1360
3250 [다문화] 만약에 외국인이 범죄를 안저지른다면? (3) 둥가지 02-14 1360
3249 [기타] 그렇다면 그 해결수단은? (잠정적 마지막글) (5) Marauder 04-23 1360
3248 [기타] 한일 고유 유전자 서로 대입 했을때 나오는 비율 (중… O2b1b1L682 06-10 1360
3247 [한국사] 도종환 문체부장관 "환단고기 읽어봐야겠다" (6) 마누시아 06-17 1360
3246 [한국사] 황허의 거센 물결 한족에 맞선 고조선 (5) 고이왕 02-13 1360
3245 [일본] 고마가쿠(高麗樂, 고려악) (1) BTSv 04-23 1360
3244 [한국사] 고대 새를 신성시 했던 한반도인들 (유물 포함) (2) 예왕지인 06-29 1360
3243 [기타] 고려의 강역은 어디까지일까 강동6주, 동북9성, 철령… (1) 관심병자 07-05 1360
 <  611  612  613  614  615  616  617  618  619  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