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 조선과 중국이 외부와 거래를 한다면 조공을 주거나 조공을 받거나 둘중 하나 양자택일밖에 안됨. 특히 조선은 폐쇄국가이기 때문. 조공이란게 무역이나 선물과 다를게 아니고 속국만 조공한다는 그런 인식자체가 이상한것임. 무역거래를 틀려고 물건을 선물하는건 서양에서 굉장히 흔한일이고 중국과 한국은 그걸 조공이라고 기록함
오히려 일본이랑 사례가 굉장히 다른것
내가 언제 영국이 조선에 조공을 받쳐서 조선이 킹왕짱이라고 했음? 아님 기록에 그런 대목이 있는 감?
기록에 조공이란 공 무역관계를 개설하기 위해서 라고 나와 있구만. 왜 맨날 조선이나 고려가 중국(?)에 조공이나 바치던 속국이어야 되는 것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임?
조공이란 공무역 관계를 개설하기 위해서 하는 행위인데 그 것에 이상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ㅄ 들이란 말이고 툭하면 서양의 속국과 동양의 속국의 개념이 다르다는 헛소리 하는 부류 그리고 근대적 의미의 속국과 전근대적 의미의 속국이 다르다고 하는 부류들이 주장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기록으로 보여 주었더니 뭔 헛소리들이 작렬 인지...
일단 조선왕조실록의 권위 부터 확인 합시다. 조선왕조 실록은 유네스코 새계기록문화유산으로 우리나라만 검증한 것이 아닌 세계가 검증한 기록입니다. 세계기록문화유산이 몇개 있는지 부터 확인하고 어떻게 선정되는지 부터 확인합시다.
기록으로 인정 되지 않는 일본서기나 기타 기록들은 철썩 같이 믿으면서 검증된 기록은 무시하는 것은 왜 그런 것 입니까? (님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무리들이 그렇다고요)
정조 때까지 조선은 영국과 무역과 외교관계를 유지 했습니다. - 일본이 툭하면 조선이 폐쇄적이고 은자의 나라라고 헛소리 하는데 전혀 안 그렇습니다.
은자의 나라는 수구의 나라 또는 극우의 나라란 소리인데 조선은 사대주의(사대교린)을 기반으로 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건설된 나라고 이런 풍조가 정조 때 까지 유지 되었단 말이죠. 그래서 툭하면 정조 때를 그린 소설등에서 제국이라 하는 것입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제국으로 건설된 나라 입니다.
그래서 정조 때 까지 모든 나라와 자주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해서 통상관계를 유지 했습니다. 이것이 안동을 기반으로 하는 남인과 안동 김씨등의 외척이 발호 하면서 청나라에 종속적인 관계로 전환되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 바로 저 기록이란 말입니다.
순조실록에 무단으로 침입해서 교역관계를 재 설정하자는 영국인이 주장하는 내용이 있는데 영국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고 조선에 조공을 바치겠다는 대목이 있단 말이죠. 일단 이 영국인의 실명등이 기록되어 있으니 이들을 추적하면 이 기록이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죠.
그런데 유네스코는 조선왕조실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 했단 것이고 저 기록이 어느정도 근거가 있단 것이란 말입니다. 서양과 동양의 기록사이에서 교차검증이 가능한 대목이란 말이죠.
거문도는 한참 후의 일로 역시 청나라와 조선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사건 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국이 조선을 점령 하려 한 것이 아니라 청이 조선을 침탈 하려는 것을 견제 하려 한것이란 말이죠.
말이 통보지 순조기록을 보면 항의죠. 러시아 남진을 막기위해 영국이 거문도를 점유 했다고 하는 것은 일견 맞다고 보여지지만 달리보면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거문도가 영국군에 점유 되었다는 것을 조선이 몰랐고 이것을 청나라와 일본이 알려줘서 알았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것 입니다. 그럼 조선이 거문도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부족 국가 입니까? 다시 말해서 조선정부는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고 뒤늦게 청나라와 일본이 항의하니 형식상 항의를 한것이란 말이죠.
당연히 영국은 조선정부의 입장을 고려해서 러시아의 남진 때문에 주둔한다라고 한것이라 개인적으로 추측 하는 것 이고요.
거문도 사건은 갑신정변후 1885년-1887년후 고종때이고, 아무리 위안스카이 섭정시절이었다하더라도 1880년대 국제정세에서 여기저기 두드려맞고 땅따먹기 당하는 청나라는 영국에게 이미 아웃오브안중이에요. 영국은 러시아와의 수십년간 치고 받고 싸우던 시절이고.
이 사건은 동아시아만으로 국한해서 보면 우물안 개구리식 이해가 안갈것이고, 당시 전 세계에 프랑스 나폴레옹3세의 식민지 확장부터 해서, 독일 비스마르크체제, 영국 글래드스톤체제 및 크림전쟁부터 있어왔던 러시아 제정과의 The Great Game 힘겨루기 판세를 봐야 이해가 갈거에요. 전쟁으로 외교를 하던 시대에 청불전쟁마저 패전당해 국제정세에 영향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리홍장이 조선에 대해 어쩌구 저쩌구는 영국에게는 지나가던 개가 왈왈짖는 Trivia일뿐, 무시가능.
하지만 이 후의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사건이 이상합니다. 일본은 원세계에게 청일전쟁 후의 맺어진 조약의 이행을 촉구 합니다. 이 부분도 굉장히 이상한데다 일본이 원세계에게 요구한것이 산동성의 할양이죠.
원세계는 이러한 일본의 요구를 일축하고 황제가 되기 위해서 노력을 하지만 손문등이 이에 큰 반발을 하고 일본은 손문을 지원해서 원세계를 흔듭니다. 결국은 손문등이 주도한 공화정이 정권을 잡고 결국 산동성을 일본에 할양하게 되는데 여기에 반발하는 집회가 바로 그 유명한 5.4 학생운동 이죠.
그리고 이 학생운동을 주도한 세력이 후일 중국의 좌익세력이 되고 주은래는 프랑스로 유학가고 북경에 남은 모택동이 이 세력에 흡수 됩니다. 그리고 모택동은 후일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공산당 창당 발기인이 되고 결국 지금의 중국을 건설하게 되는 것이죠.
저는 원세계와 일본이 조선을 겁박하고 영토를 빼앗을려고 하는 것을 보고 조선정부가 영국을 끌여들여서 막으려 했다고 보는 것 입니다.
그리고 프랑스 / 미국 그리고 오페르트(독일 북부 연명의 상인) 등과는 전쟁을 했지만 영국과 러시아와는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국과 러시아와는 오래 전 부터 교역관계를 유지 했지만 미국 / 프랑스와 독일과는 교역관계를 유지 하지 않았죠.
무역활동에 더 충실했던(?) 네덜란드 사절은 청황제에게 무릎을 꿇는 것에 동의했지만 영국 사절은 그것을 거부했던 사례가 있으나, 사실 영국도 청국에서 경제적으로 얻을 것이 막대했고, 영국 사절도 본국의 훈령을 지켜 어떻게든 청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결국 영국 사절이 청황제에게 한쪽 무릎을 꿇는 것으로 서로 타협을 보았고 실제 양국의 관계야 어쨌든 청국은 영국도 자신들의 조공국이라고 인식했다고 합니다.
어느 분이 위에 인용해주신 정조 실록 내용은 의주 부윤이 조정에 올린 보고서인데, 영길리국(영국?)의 국왕 사촌들이라고 밝힌 '마알침'과 '이시당동'이라는 사람들이 조선에 조공하며 공물을 바쳐왔다는 공물 리스트입니다.
이 보고서에 대한 신빙성 여부를 제가 논하지는 않지만, 영국왕이 정식 국서를 보내왔다는 내용이 실록에 없고, 이 당시의 영국왕 조지 3세의 사촌들 중에 '마알침'과 '이시당동'이 실제로 누구였느냐에 대해 아직 연구된 바가 없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 아쉽기는 합니다.
여담이지만 유네스코가 조선왕조실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다고 해서 조선왕조실록 내용이 모두 일일이 검증된 팩트라고 인정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조선왕조의 자체 역사기술 방식이(!) 신빙성이 높기 때문에 실록이 훌륭한 역사 기록물이라는 것이지, 그것을 타국과의 역사 기록물과 서로 교차 검증해서 팩트를 놓고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준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당대 조선인들의 서구에 대한 사고방식도 가감없이 드러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사고방식이 실제 정확한 정보에 기반한 것이라거나, 조선과 타국의 실제 국력을 대변하는 지표를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의 경우, 그가 네덜란드인이(아란타인) 아니라 남만인이라고 조선이 잘못 알고 실록에다가 사실과 다르게 기록했다고 해서, 유네스코가 벨테브레는 네덜란드인이 아니었다고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