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 교과서에 반영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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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는 고구려가 건국된 B.C 27년을 전후해 신라와 백제가 건국되었다고 전하지만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이른바『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은 조선사편수회의 쓰다 소우키치가 만든 것이다. 그는『삼국사기』초기기록을 부인하는 대신 진수의『삼국지』「동이열전」으로 대치했다.『삼국지』「동이열전」은 ‘부여, 고구려, 동옥저, 읍루, 예, 한(삼한)’의 순서로 기록했는데, 여기에서 읍루를 제외했을 뿐 나머지는 같다.
일제 식민사학자 쓰다 소우키치의 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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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추모왕은 고구려인들이 만든 공상의 왕이며, 2대 유리왕 부터 7대 모본왕 까지의 세계는 공상적인 시조 이야기에 윤색을 가해서 만든 것이 된다.
쓰다 소키치(일본어: 津田 左右吉 , 1873년 10월 3일 ~ 1961년 12월 4일)는 일본의 역사 학자 이다.
만주철도주식회사와 조선사 편수회 출신으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 등의 조선 식민사학 이론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쓰다 소키치는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한군현이 평양을 비롯한 한반도 북부에 존재했으며 한반도 남부에는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하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만주철도주식회사의 위촉을 받아 쓴 <조선 역사 지리(1913년)> 등의 저서가 있다.[1]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이병도가 쓰다 소키치의 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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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현덕부의 위치 비정은 정약용(丁若鏞)의 후르하(虎里河) 서북인 액돈산(額敦山)을 비롯해, 나단포러(那丹佛勤), 화전현(華甸縣)의 소밀성(蘇密城)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었으나, 이 중 1915년 일본학자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주장한 길림성(吉林省)돈화(敦化)로 비정하는 설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933년에서 1934년에 걸쳐 일본의 동아고고학회(東亞考古學會)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를 발굴해 발해의 도성 규모가 밝혀짐에 따라 중경현덕부의 돈화설도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돈화분지의 여러 산성이나 소밀성은 규모가 너무 작아 발해왕국의 수도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1934년부터 상경용천부와 같은 규모의 도성 유지(遺址)를 찾으면서 두만강 북안에서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해란하(海蘭河) 기슭의 화룡현(和龍縣)서고성자(西古城子)라는 설이 유력해졌다. 서고성자는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 등의 일본인들에 의해 1937년, 1943년, 1945년에 각각 발굴되었다.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 등은 발해의 중경현덕부임을 구체적으로 제기하였으며, 1942년 사이토 진베이(齋藤甚兵衛)가 조사하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경현덕부 [中京顯德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근대 일본의 동양사학자인 도리야마 기이치는, 몽골 침략으로 나라가 망한 고려인들이 조의를 표하기 위해 흰옷을 입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삼국지위지' 등의 역사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에게 깜빡 속을 뻔했다. 또다른 일본인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주변국의 오랜 침략으로 한이 맺힌 조선인이 상복을 일상복으로 입게 됐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추측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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