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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6-04 21:11
[한국사] 대륙백제 반론의 반박
 글쓴이 : 꼬마러브
조회 : 1,371  

< 반론의 반박 >

 

첫 번째, 위나라 경초 문제

 

호랭이해님의 반론대로 위나라 경초 연간은 서기 237~239년입니다. 저는 앞서 글에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백제의 고이왕이 낙랑군을 침입한 기록이 <삼국지>에서 마한의 신지가 대방군을 공격해 대방태수 궁준을 죽인 것과 같은 기록이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삼국사기>에서 고이왕이 낙랑군을 공격한 시기는 서기 246년입니다. 그런데 <삼국지>에서는 이 사건이 경초 연간, 즉 서기 237~239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사건인데 연도가 대략 7년에서 9년 정도라는 매우 긴 차이가 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건 논쟁을 할 가치도 없습니다. <삼국지>의 기록을 잘 보면 마한의 신지가 대방군을 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이 전사한 시기가 서기 237~239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국지>의 다른 기록을 보면

 

<삼국지> 정시 6(245)에 영동[단단대령의 동쪽]의 예가 고구려의 지배 아래 들어가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은 군사를 일으켜 공격했다. 불내후(不耐侯) 등은 수하의 마을을 들어 항복했다.


위의 기록을 보면 정시 6년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영동의 예를 공격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정시는 위나라 명제 조예의 4번째 연호입니다. 그리고 정시 6년은 서기 245년이고요. 이 기록을 보면 대방태수 궁준이 서기 245년에 멀쩡히 살아남아 예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한의 신지가 대방군을 공격한 것과 대방태수 궁준이 죽은 것은 서기 237~239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닌 겁니다. 문제의 <삼국지> 기록을 다시 보죠.

 

<삼국지> 위나라 경초 연간(237~239)에 명제는 몰래 대방태수 유흔 · 낙랑태수 선우 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2()을 평정하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들에게는 읍군의 인수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들에게는 읍장이란 벼슬을 주었다.

부종사 오림이 낙랑에서 원래 한국(韓國)을 관할했다는 이유로 진한의 8개의 나라를 분할하여 낙랑에 주려고 했는데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잘못 옮겼다. 그러자 신지가 한() 백성들을 격분시켜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했다.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를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했으나 두 군은 마침내 한()을 멸망시켰다.

 

, 위에서 본 <삼국지>의 기록에서 밑줄을 안 친 부분은 경초 연간인 서기 237~239년에 일어난 일이 맞습니다. 밑줄을 친 부분은 서기 237~239년에 일어난 일이 아닌 겁니다. 그러므로 이 기록이 <삼국사기>와 연도가 매우 오차가 난다며 두 기록이 서로 다른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료를 잘못 읽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위나라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저는 이를 고구려와 백제의 협력으로 반박하고자 합니다. 앞서 글의 <송서>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와 백제가 협력했다는 뉘앙스가 느껴지지요. (나만 그런가?)

당시, 고구려는 유주자사 관구검에 의해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고 고구려의 왕인 동천왕이 피난을 가는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백제를 이용해 위나라의 후방을 공격할 수 있다면 고구려로서는 기회 중에 기회이지요. 마침 그 당시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과 함께 고구려를 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떠났으니 유주는 평소보다 방비가 허술해졌습니다. 그러니 백제로서도 유주에 속한 낙랑, 대방을 치는데 부담이 없습니다. 더구나 위나라 중앙에서는 중원통일을 위해 오나라, 촉나라에 주로 신경을 쓰고 동북쪽은 기껏 해봐야 고구려에 신경을 쓰는 정도였습니다. 결국 이런 조건이 다 맞아떨어져 백제는 고구려와의 적극적인 협력 아래 유주자사 관구검과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 등이 고구려를 치는 사이에 낙랑, 대방을 기습한 겁니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동천왕, 백제의 고이왕 이전에도 <삼국사기>에서 태조대왕 69,70(서기 121,122)에 고구려와 백제의 협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기록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의 논증에는 딱히 문제될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로써 기리영 전투에 대한 글을 마칩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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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랭이해 17-06-04 22:10
   
지도에 백제가 점령한곳은 요동을 잇는 요충지입니다 점령에 관한건 설명이 되어도 이후 위나라가 가만히 놔뒀을리가요 고구려도 토벌했겠다 등뒤에 후환을 남겨둘리가 없지요 259년에 다시 고구려를 치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백제의 낙랑공격과 마한의 낙랑공격이 동시간에 일어났다면 이렇게 보는게 옳지 않을까요

백제가 마한을 도와 낙랑을 공격 이후 마한이 패배하자 백제는 낙랑에서 납치한 사람들을 풀어준다

이렇게 보는게 사료에 딱 맞겠죠
     
꼬마러브 17-06-04 22:58
   
국가의 외교란 복잡한 법입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백제를 이용하여 중국을 견제하려 했을 수도 있지요. 강대국이면 무조건 옆에 붙어있는 약소국을 모조리 다 가만히 안 둘거라고 생각한다면 매우 단순한 생각입니다. 또한 반대로 고구려는 백제를 이용해 중국을 견제하고자 했을 수도 있습니다.

고구려 - 백제 협력관계는 <삼국사기>를 보면 더욱 확실해 집니다. 고이왕 때에 백제와 신라는 서로 적국이었지요. 고이왕 때에 백제와 신라는 서기 240년,255년,266년,283년에 총 4차례의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그런데 서기 245년에 고구려가 백제의 적국인 신라를 공격했습니다. 본래 동천왕 이전만 해도 고구려와 신라는 서로 아무런 충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한 시기는 서기 245년으로, 서기 240년에 백제와 신라가 전쟁을 벌인지 불과 5년 뒤의 일입니다. 즉 당시 백제와 사이가 나쁘던 신라를 고구려가 먼저 공격한 것인데, 이것은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동맹관계였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지요. 게다가 동천왕이 신라를 공격한 시기는 백제의 요서 공략(서기 246년)으로부터 불과 1년 전입니다. 그맇기 때문에 백제는 요서에 영토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겁니다.
          
꼬마러브 17-06-04 23:00
   
또한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마한은 온조왕 때에 멸망했다는 것으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마한이 여전히 잔존해있었고 <삼국지>의 한이 백제가 아니라 마한이라 할지라도, 백제의 입장에서는 중국을 도와 마한을 공격하는 것이 더 이득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호랭이해 17-06-04 23:05
   


12년(259) 겨울 12월에 왕이 두눌(杜訥) 골짜기에서 사냥을 하였다. 위(魏)의 장수 위지해(尉遲楷)가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왕이 정예 기병 5천을 골라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서 이를 물리쳤다. 베어버린 머리가 8천여 급이었다.

당시 위나라는 백제에게 부탁할만큼 견제할만한 세력이 없어요 위나라가 259년 고구려를 치게 되는데 저 지역의 백제를 가만히 내비둔다? 이상하지 않나요?
                    
꼬마러브 17-06-05 01:16
   
그러게요. 이상하네요. 님이 제시하신 의문에 답할 수 있는 정확한 사서적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당시 위나라는 사마씨가 권력을 장악하고..265년에는 진나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격변의 시기였다는 것을 참작하면 어떨까 혹은 당시 백제의 기록이 생략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아니면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가 악화되었기 때문에 위나라가 백제를 상관치 않고 고구려를 공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로지 저의 억측일뿐 사서적 근거를 내놓을 순 없군요.

아니면 백제가 저 지역을 점령한 후, 오래 유지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검토해 봐야겠습니디.
     
위구르 17-06-05 12:29
   
백제의 대륙 진출 시기를 잘못 잡으셨습니다. 백제는 서기 266년 이후에야 진출했지 위나라 때 진출한게 아닙니다. 님 말씀대로 건재했던 위나라가 그대로 놔뒀을리 없고 이후에 진나라가 세워지고 곧 혼란에 빠지자 그 틈을 타서 가까이 위치한 대방, 낙랑부터 먹어 들어갔겠죠. 그리고 위나라 때 낙랑을 쳤다는 것은 말 그대로 침공했다는 것이지 정복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뭐꼬이떡밥 17-06-05 00:37
   
이거 역사저널인가 어딘가에서도 본 기억 납니다..

저는 잠시 점령할수는 있었어도 정복하지는 못했다라고 봅니다

제 국사 선생님도 잠간 말하셨는데..

대륙백제이야기를 해서 그당시 깜짝놀랐죠.

황해를 끼고 있는 중국땅에 세력들이 백제의 관직도 받고 한나라의 관직도 받았다고 하더군요

뭐 혼란의 시기이니까 ... 양쪽다 인정해주며 버티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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