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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1-24 18:11
[기타] 조선후기, 일제시대의 식량 생산량과 소비량
 글쓴이 : archwave
조회 : 3,946  

계산 근거는 [ 조선시대의 쌀, 논 면적 계량 단위, 한 끼 식사량 (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38061 ) ] 이 글 참고하시고요.


1807 년 (순조 7 년) 당시 조선의 전답은 한전(밭) 927,602 결과 수전(논) 528,990 결이 있었고,

( 위의 결 표기는 논이든 밭이든 곡물 종류에 관계없이 1 결에 2 톤이 나온다고 보면 됨. )


인구는 1800 만명으로 가정하겠습니다. ( 이후 점점 줄어들어서 1900 년에는 1700 만명 수준 )


우선 쌀만 보면 논이 53 만결이 있으니 약 106 만톤의 쌀 생산이 가능했고요.

곡물까지 다 하면 약 291 만톤의 식량이 생산되는군요.


1 인당 쌀 생산량은 연간 58.9 kg, 하루 161 g 에 해당합니다.

밭에서 나오는 곡물까지 다 포함한 1 인당 생산량은 연간 161.8 kg 이고요.


1 인당 수요를 산출하기 위해 평균적인 가구가 노인 1 명, 부부, 아동 2 명으로 구성되었다고 가정할 경우, 한끼에 성인 남자와 여자의 평균인 305 g * 3 명 + 아동 152 g * 2 명하면 1 인당 243.8 g 이고, 허루 두끼를 가정하면 1 인당 하루 487.6 g 이 됩니다.

( 곡물만 먹을 경우 UN 의 하루 권장량이 600 g 임. 쌀로만 600 g 이라도 2232 kcal 밖에 안 되고 잡곡 섞이면 더 떨어짐 )


조선에서는 어른, 아이 다 해서 평균내면 1 년에 178 kg 을 먹은 것이고, 지금의 석 기준으로는 연간 1.19 석. 당시 조선 후기의 석을 기준으로 하면 연간 2.34 석이며, 1 결은 11.4 명이 1 년 먹을 식량을 생산한다는 얘기.


1800 만명 * 487.6 g / 하루 * 365.2425 일을 하면 1807 년의 조선의 연간 식량 수요는 321 만톤.


1807 년 조선의 생산은 291 만톤, 필요한 양은 321 만톤.


빠듯할 뿐만 아니라, 쌀 1 에 잡곡 2 정도를 넣은 식사를 해야 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다만 위 통계는 조선 후기의 혼란 덕분에 숨겨진 생산량도 꽤 있었을 것이지만, 빠듯했던 것이 넉넉할 정도로 바뀌지는 못 할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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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년 기준으로 보죠. 쌀의 생산량은 229.77 만톤, 곡물까지 전부 합치면 515.32 만톤이고요.

1918 년 한반도의 인구는 1700 만영으로 잡아보겠습니다.


1 인당 쌀 생산량은 연간 135.2 kg, 하루 370 g 에 해당합니다.

밭에서 나오는 곡물까지 다 포함한 1 인당 생산량은 연간 303.1 kg 이고요.


1700 만명 * 487.6 g / 하루 * 365.2425 일을 하면 1918 년의 한반도의 연간 식량 수요는 303 만톤.


1918 년 한반도의 생산은 515 만톤, 수요는 303 만톤.


쌀도 비교적 넉넉해졌기 때문에 쌀 3 에 잡곡 1 정도 넣어도 먹을 수 있게 되었고요.

물론 일본으로 판매하는 양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평균적으로 쌀 2 에 잡곡 1 정도였을 것으로 봅니다.


1918 년을 보면 소가 148 만마리, 돼지가 92 만마리, 닭이 491 만마리에 달하는 것을 보면 초과생산된 잡곡들이 사료로 쓰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막걸리 1200 ml 를 만드는데 쌀 200 g 이 들어간다죠. ( 옛날엔 모두 쌀막걸리였음 ) 막걸리 만들어먹고 난 술찌거기를 돼지 먹이는데 썼을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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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내내 150 만결 정도는 확보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고, 그 150 만결 전부가 쌀일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것 같네요. 잡곡까지 포함해서 그런 것이고, 쌀은 60 만결을 넘기 어려웠을 것으로 봅니다.


조선 후기내내 소빙하기로 인한 강수량 격감의 문제도 있지만, 쌀농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저수지등 수리관개시설이 필요합니다. 논이 있어도 물이 없으면 못 하니까요.


쌀 수확량이 1807 년 106 만톤에서 1918 년에는 230 만톤으로 2 배 이상 늘어난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죠.


1918 년 쯤에 강수량 폭증으로 근 40 년만의 풍년이 든 탓도 있을 것이고, 저수지등의 확충과 논의 증가도 있겠고요. ( 물론 풍년 들었다고 2 배 수준 될리는 없고, 저수지/논의 증가로 2 배 정도에 풍년으로 좀 더 보탠 정도겠죠. )


마지막으로 어째 이글과 어울리지 않고, 계산도 조금 다른거 같지만 일제시대 당시 식량 흐름(?)에 대해 참고하시라고 링크겁니다. 숫자는 봐둬야죠. http://blog.daum.net/stonehinge/8727704


위 링크를 보면 1933 년이 되면 한반도의 1 인당 쌀 소비량이 1918 년의 2/3 수준으로 떨어지네요.


일본에 쌀 팔고 대신 만주등에서 조 같은 잡곡을 사다먹은 시기죠. 이 시기는 쌀 1 에 잡곡 1 을 섞어먹어야 했을 듯합니다. 한반도에서 쌀이 일본으로 많이 넘어가는 통에 일본 농민들이 어려워질 정도였다나 뭐라나..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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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987 16-11-24 20:45
   
아키님 여러가지로 제가 링크한 글을 생전 처음 보심에도 이것 저것 적으시는 것은 좋은데요 ^^
그럼에도요 좀 합리적으로 생각을 해주셨으면 바람이네요
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그건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조금의 책임감을 느껴서 다시 간단하게 글을 적자먼요 제가 링크한 작성자님 통계를 보면요 일본의 메이지11년 그러니까 1879~80년의 생산량을 보면 당시 인구가 무려 3600만명이에요 그리고 말씀하신 가축의 수도 닭의 무게를 마리당 1km으로 잡으면 이게 소로 환산하면요 소 한마리르 400kg으로 잡으면 고작 소 1만마리 분량니까 오히려 일본의 가축수가 더 많고요 그리고 추가해서 아키님께서 최초로 주장하신 일본은 육식이 금지되었다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오직 축력으로만 사용이 되었을테니 오히려 조선에서 활발했던 육식보다 성체의 소를 수십년 식량으로도 사용하지 못한체 사육해야 되는 것이고요 이런 간단한 비교만으로도 오류 투성이가 곳곳에서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런 간단한 생각을 안하시는 것인지 정말 알수가 없네요 하시는 행동의 진의를요 ..에궁~~
그리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님이 조선의 쌀 생산량을 100만톤이라고 인용하신 이영훈교수님의 18~19세기 위기론을 거론하시면 오히려 그 세부내용에서는 아키님의 주장과는 정반대가 된다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하네요 다시한번 그럼 오히려 조선후기는 조선중기의 생산성이 30~40%에 불과해서 님이 말씀하신 일본인구가 5000만가까이 되던 당시의 생산성을 조선은 중기에 도달하게 된다니까요 무려 단보당 일본석으로 2.5석 가까이요 지금과도 큰 차이가 안나고요 에이고...뭐 더이상 상관은 하지 않겠지만 좀 제대로된 지식을 말씀해 주셨으면 하네요 계속 인터넷에서 찾아 보기만 하는 방식도 바꾸시길
     
archwave 16-11-24 21:17
   
위 글에서 링크해드린거 좀 읽어보세요. 단보당 1 석 정도밖에 안 나옵니다. 1 ha 에 1.5 톤입니다.

이거 사실 조선의 결 계산 방식 (1 결 = 400 말) 에 따르면 1 등급 논의 경우 1 ha 에 2 톤이 나와야 하는거거든요.

논은 수로가 있어야 하는거고 몰래 경작하기 어렵습니다. 일본 관헌들의 눈길을 피하기 어렵죠. 그러니 일본의 통계를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2 톤 나왔는데 그 중 일부 빼돌려서 1.5 톤 식으로 속였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쨌든 수확량은 그럴 수 있다 쳐도 경작 면적은 빼도 박도 못 할거로 보고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879 년 일본 자신의 통계를 보면 역시 단보당 1 석입니다.

크게 차이나지 않는 시기인데 일본에 비해 2.5 배나 높은 수확량을 올렸다고 믿을 이유가 없는거죠.

그리고 단보당 2.5 석이면, 현대의 쌀 농사 수준에 육박합니다.

숫자 계산 좀 해보세요. 단보당 일본석으로 2.5 석이면 어느 정도 양인지를요. 1 ha 당 3.75 톤이 나옵니다.

온갖 종자 개량하고 비료에 살충제에 발전할대로 발전한 현재도 기후가 좋아도 1 ha 당 5 톤을 넘지 못 합니다.

또 하나 생각해볼 점이 있는데요. 단보당 2.5 석이나 나왔다면, 일본에 쌀을 판매(라 쓰고 수탈이라 읽는다) 를 당했다 해도 쌀이 그리 모자라지 않는데, 만주에서 잡곡 수입해다먹을 이유가 없죠.

사실 일본에 쌀 판매하지 않았다면 쌀은 그만하면 모자라지 않고, 잡곡은 아주 철철 남아돌았을겁니다. 한반도의 쌀 수확량의 절반 넘게 일본에 판매하는 통에 쌀 대신 먹을 잡곡도 수량 모자라서 만주에서 수입해서 먹은거죠.

숫자를 좀 잘 따져보세요.
          
eo987 16-11-24 21:21
   
"쌀 수확량이 1807 년 106 만톤에서 1918 년에는 230 만톤으로 2 배 이상 늘어난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죠." 작성하신 글이고  아무래도 근거는 밑에 글에서 언급하신 조선후기에 2450만석이 총생산량이라고 주장했던 이영훈교수의 주장을 인용하신 것인데요 그 주장을 그대로 따라서 조선 중기를 보면 그렇다는 지적을 하는 것인데 도리어 그게 문제점 이라고 답변을 하시네요 참 이성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분 이군요
               
4번째정지 16-11-24 21:25
   
아쉽네요. 무플이었는데 ^^
                    
eo987 16-11-24 21:26
   
힘드네요 정말...너무 ㅠ.ㅠ

가만히 보니 오타가 많았네요 급하게 쓰다보니

아키님 여러가지로 제가 링크한 글을 생전 처음 보심에도 이것 저것 적으시는 것은 좋은데요 ^^
그럼에도요 좀 합리적으로 생각을 해주셨으면 바람이네요
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그건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조금의 책임감을 느껴서 다시 간단하게 글을 적자면요 제가 링크한 작성자님 통계를 보면요 일본의 메이지11년 그러니까 1879~80년의 생산량을 보면 당시 인구가 무려 3600만명이에요 그리고 말씀하신 가축의 수도 닭의 무게를 마리당 1km으로 잡으면 이게 소로 환산하면요 소 한마리를 400kg으로 잡으면 고작 소 1만마리 분량니까 오히려 일본의 가축수가 더 많고요 그리고 추가해서 아키님께서 최초로 주장하신 일본은 육식이 금지되었다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오직 축력으로만 사용이 되었을테니 오히려 조선에서 활발했던 육식보다 성체의 소를 수십년 식량으로도 사용하지 못한체 사육해야 되는 것이고요 이런 간단한 비교만으로도 오류 투성이가 곳곳에서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런 간단한 생각을 안하시는 것인지 정말 알수가 없네요 하시는 행동의 진의를요 ..에궁~~
그리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님이 조선의 쌀 생산량을 100만톤이라고 인용하신 이영훈교수님의 18~19세기 위기론을 거론하시면 오히려 그 세부내용에서는 아키님의 주장과는 정반대가 된다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하네요 다시한번 그럼 오히려 조선후기는 조선중기의 생산성이 30~40%에 불과해서 님이 말씀하신 일본인구가 5000만가까이 되던 당시의 생산성을 조선은 중기에 도달하게 된다니까요 무려 단보당 일본석으로 2.5석 가까이요 지금과도 큰 차이가 안나고요 에이고...뭐 더이상 상관은 하지 않겠지만 좀 제대로된 지식을 말씀해 주셨으면 하네요 계속 인터넷에서 찾아 보기만 하는 방식도 바꾸시길
                         
archwave 16-11-24 21:34
   
산수 계산만이라도 좀 제대로 해보세요.

조선은 일본의 인구 절반인데 소가 148 만 마리입니다.
일본은 조선의 인구 두배인데 소가 겨우 100 만 마리.

단순히 총량 비교해도 1.5 배이고, 인구당 소의 숫자를 비교한다면 조선은 일본에 비해 무려 3 배나 많은 소를 갖고 있었던겁니다.

그런데 무슨 엉뚱하게 일본의 가축수가 더 많다는 얘기를 하는겁니까 ?
                         
eo987 16-11-24 21:39
   
님 중요한건 인구가 아니라 당시의 국가별 총 생산량에서의 비중이죠.....
소가 사람을 사료로 먹고 사는게 아니잖아요..
                         
archwave 16-11-24 21:49
   
정말 뻔히 숫자로 있는데 계속 우길겁니까 ?

님께써 인용하셨던 자료에 나온 것이

조선은 소가 148 만 마리입니다.
일본은 소가 겨우 100 만 마리.

100 만마리가 148 만마리보다 많다는 것은 대체 어디서 나온겁니까 ?
                         
eo987 16-11-24 22:15
   
말이랑 돼지는요?
                         
archwave 16-11-24 22:27
   
계속 소, 소 거리더니 이젠 또 말, 돼지 ?

돼지는 조선엔 92 만마리나 있는데, 일본은 아예 통계도 안 잡혔네요. 일본은 육식 금지 때문에 돼지 키울 일이 없어서겠죠.

크크. 말도 가축인거에요 ? 말은 교통/운송수단으로 쓴거잖아요. 이건 식량 관련해서가 아니라 상업/유통 관련해서 얘기해야 되는 부분이에요.

말고기도 잡아먹는거라고요 ?

크크. 정말 질기구만.

조선은 소/말/양/염소/돼지 다 합해서 248 만 마리. ( 닭 491 만마리는 조그만거라 시비거니 뺐음 )
일본은 소/말만 있어서 262 만 마리.

아주 기쁘시겠네요. 일본이 총량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이겼네요 ?
인구 두 배나 되는 국가가 총량에서 겨우 ?

일본이 소/말만 있는거 보면 몰라요 ? 축력 쓰는 용도로만 키우는거잖아요.
                         
archwave 16-11-24 22:43
   
닭 마리당 1km 라니.. 1kg 얘기겠지.

그런데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를 보지 마시길..

요즘에야 1 kg 짜리 닭이 있지. 그 옛날에는 닭들 우람하게 키웠음.
                         
archwave 16-11-24 22:51
   
심심한데 하나 더 추가해놓자.

소 수명은 20 년인데, 다 늙어죽을때까지 부려먹진 않을거고 좀 일찍 도살하겠죠. 그러면 적게 잡아도 평균 10 년. 400 kg 짜리를 10 년에 한번 잡으니까 사육두수 1 마리당 연간 40 kg 꼴.

돼지는 요즘 돼지보다 늦게 자란다 해도 2 년이면 충분히 100 kg. 즉 사육두수 1 마리당 연간 50 kg. 너무 적게 잡은거 같은데... 어쨌든 뭐..

심심하시면 이 수치를 대입해서 한반도 사람들은 1 년에 고기 얼마나 먹었을지 계산해보세요.
               
archwave 16-11-24 21:31
   
이영훈 교수 주장 읽어보지도 않았는데 무슨 엉뚱한 얘기에요 ?

조선 시대에 가장 많았던 때가 165 만결이니 170 만결이니 하던데요. 이건 조선 후기가 아니니 확인해보지 않았지만요.

1807 년에 146 만결이란게 그리 이상한 수치인가요 ? 조선이 전성기 다 지나서 혼란에 혼란 거듭하고 인구도 정체하는 와중에도 이 정도 유지했으면 오히려 양호한거 같은데요.
               
archwave 16-11-24 21:38
   
조선후기에 2450 만석이라면 367.5 만톤이네요. 이걸 결 수로 환산해보면 184 만결입니다. ( 세종대왕 이전처럼 결당 1.5 톤으로 치면 무려 245 만결 )

조선이 언제 184 만결이나 갖고 있었는지 궁금해지는군요. 제가 본 최대 수치가 170 만결인데요. 전성기 다 지난 조선 후기에 그 정도를 ?

이영훈 교수란 사람이 그 말하면서 주장하는 것이 뭐였나요 ? 조선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농업 생산량을 달성했다는건가요 ?
                    
eo987 16-11-24 21:45
   
님 2450만석이라는 건 GDP개념인데요?
그리고 결당 생산량이란 어디까지나 조세의 안정성을 위한 생산성의 최소치 개념이지 실제 생산량에 대한 조사는 경국대전에 20년마다 양전 수칙이 지켜지지 않아서 1720년의 경자양전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전국적 양전은 광무양전까지 전무했어요 지역단위별 읍양전만이 실시되었지요 소유권 등록을 위해서요 더군다나 당시의 여러 논문을 보면 양전또한 실질 생산량에 대한 반영이 부실했고요
                         
archwave 16-11-24 21:52
   
글쎄. 그 말이 맞다 쳐도 바뀔거 없어요.

결당 2 톤 나온다 했죠 ? 일본의 통계에 명확하게 있는 1 단보당 1 석을 적용하면 결당 1.5 톤밖에 안 되는겁니다.

님이 하시는 얘기는 조선 후기의 쌀 생산량이 제가 말한 것보다 더 적다고 하는거라니까요.

그리고 그 양전 부실했을거 감안해도 결 수치가 그렇게 크게 늘어나지도 않을겁니다. 1807 년의 쌀 생산량은 위 글에 적었듯이 턱없이 적었음.
                         
eo987 16-11-24 22:15
   
답정너  ㅋㅋ 에이그
     
archwave 16-11-24 21:27
   
전 이 문제에 관해선 뭐 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객관적일 수 있다는 얘기고요.

인터넷에서 찾는 것은 모조리 가치없다 여기시는 것인지..

숫자를 따지면 충분히 교차검증 가능합니다. 숫자에 모순이 없는가. 숫자의 기준이 언제 어떻게 달라진게 없나 찾으면 되죠.

아 그리고 일본의 가축수가 많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요 ? 저 아래에서 링크해주신 일본의 통계를 보면 소가 108 만, 말이 155 만입니다. 양/염소/돼지/닭은 통계에 잡히지도 않았네요.
인구가 2 배인데 겨우 이 수준이란 것은 소/말 모두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축력을 이용하기 위해서란 얘기죠.

그리고 조선의 쌀 생산량이 100 만톤 정도라 한 것은 이영훈교수의 글을 보고 말하는게 아닙니다. 사실 그런 글 읽어보지도 않았고요.

저 위에 몇 결 몇 결은 역사의 기록입니다. 결당 수확량도 역사의 기록이고요.

제 글에 반박하고 싶으시다면, [ 1807 년에 수전(논) 528,990 결 ] 이 아니라는 근거를 제시하시면 됩니다. 이것으로 인해 106 만톤이란 계산이 나온거거든요.

저 인간 누구 글 보고 저러는구나 같은 엉뚱한 생각하지 마시고, 의심스러우면 직접 계산해보세요.
          
eo987 16-11-24 21:38
   
일단 님이 인용하셨던 이영훈교수님의 주장과 놀랍도록 일치하시는데요?
어떻데 무려 1세기만에 그것도 1800년-1900년에 농업생산량이 2배 가까이 증가하나요?
그런 역사적 변화는 어디서도 들어본적이 없어서 참 의아스럽고요
아키님 당시 1결의 생산량은 이미 이호철 교수님이나 김건태 교수님등이 단위면적당 생산량을 충분한 시계열 연구를 통해 수많은 연구 논문을 발표하셨다라는 말을 이미 수차례 드리는 것 같네요 예를들어 석전이씨가의 50년 동안의 통계를 보면 평균 3-4등급의 논에서 약1000두 가량이 생산되요 17c~18c중반에 말이죠 그리고 이것을 쌀의 석으로 환산하면 절반이 감소하니까 약 500두고요  즉 당시 적어도 1결에서의 생산량을 500두로 치고
이것을 절대면적 단위로 환산하면 16.6단보=16.8석 이니가 일본석으로 단보당 1석가량인데 일제초기에 평균과 유사하니까 이호철교수님의 추계를 따르면 당시 1단보당 생산성을 0.85석으로 잡고 전체 경지면적을 최소 430정보로 잡아도 논과 밭의 비율이 1:2정도이니 180만톤 가까이 되는 것이지 어떻게 100만톤이 나오나요? 더군다나 경북대 교수님인 이정수교수님이나 고려대의 이헌창교수님도 이런식으로 추계를 해서 조선의 gdp를 구하고 계시고요 무슨 교차검증을 말씀하시고 자신은 객관적이라는 믿을을 주장하시면 ...
정말 그만할래요 이제는.....
               
archwave 16-11-24 21:42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서 계산하면 위 글처럼 나올 수밖에 없다니까요.
1+1 을 계산하면 누구나 2 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그냥 산수 문제라니까요.

이영훈 교수란 사람도 저와 비슷한 방식으로 계산한 모양이죠. 조선 후기 2450 만석이라 주장했다는 부분은 대체 어떻게 했기에 그렇게 나온건지 제가 궁금할 지경이고요.
               
archwave 16-11-24 21:48
   
아까는 단보당 2.5 석을 주장하시더니, 이젠 저와 똑 같이 단보당 1 석 정도를 말씀하시네요.

전체 경지면적 430 정보 ? 430 만 정보 말하는거죠 ? 대체 그건 어디서 나온 수치인가요 ?

1807 년의 146 만결이 모두 1 등급으로만 이뤄졌다면 146 만 정보가 되고, 전부 6 등급이라면 584 만 정보가 됩니다.

[결] 개념부터 공부하셔야 할거 같네요.
                    
eo987 16-11-24 21:49
   
그만하도록 하죠 보시는분들이 평가를 하시겠죠 각자의 지적능력에 맞추셔서 다들
                    
archwave 16-11-24 22:01
   
에구 황당해라.. 대체 이 사람은 글을 어떻게 읽는건지..

430 만 정보가 뭘 말하는가 했더니 1918 년의 것을 말하는 것이었네요.

위 글 다시 읽어보세요. 106 만톤 나온 것은 논이 53 만결이었던 1807 년 얘기에요.

이젠 아예 111 년의 세월을 넘나들면서 헷갈리고 계시는구만.
                         
eo987 16-11-24 22:05
   
이호철 교수님의 통계를 보세요 ^^
경지면적은 조선초부터 거의 변화가 없어요 일일히 이런 것까지 이야기를 해주면서 이야기를 한다는게 정말 중노동이네요 에유
http://blog.naver.com/zajo0/220842771496
아직까지 제대로 읽지를 않으셨다는게 또 드러나고요
중간 부분입니다 작성자님의 글의
애초에 이글의 자료를 기반으로 이야기 하시면서 정작 글은 제대로 읽지를 않으시니...
                         
archwave 16-11-24 22:10
   
그래서 조선 후기 (19 세기) 에 경지 면적이 몇 결이란거에요 ?

전체 경지 면적과 그 중 논의 경지 면적 좀 말해보세요.

조선 초부터 경지 면적 변화 거의 없다고요 ?

그럼 조선 초기에 인구가 몇이었는지도 말씀해보시죠 ?
                         
archwave 16-11-24 22:13
   
조선이 언제 개국했는지는 알고 계시나요 ?

1392 년입니다.

대체 그 글에 어디 14 세기나 15 세기 얘기가 있나요 ?

조선초라는게 대체 언제 얘기에요 ? 링크하신 그 글에 어디 그런게 있나요 ?
                         
eo987 16-11-24 22:16
   
님 이호철교수님의 통계는 2군데에 등장해요 우선 가장 첫번째 그림 그리고 중간부분에 그림이요 맡에 (이호철)이라고도 나와 있는데요 좀 잘 찾아보시길 부탁드릴께요 그리고 조선초기의 인구는 한국에서 역사인구학이라는 학문의 성립이 사실상 없어서 알수가 없다라는게 글쓴이님의 취지인데 님께서 아래글 에서 저 블로그님의 글의 취지를 무엇이라 말씀하셨죠?
음...애초부터..
                         
archwave 16-11-24 22:21
   
링크하신 글에서 제가 봐야 할 부분 근처 몇 단어나 문장 긁어서 보여주세요. 대체 어디에 조선초 얘기가 있다는건지 원..
                         
eo987 16-11-24 22:23
   
안보이시는데 제가 굳이 그럴필요를 못 느끼네요 이 글을 보시는 다른 분들은 관심이 있으시면 찾아서 보시겠죠 ^^
          
촐라롱콘 16-11-24 21:43
   
조선의 쌀생산량이 19세기 전반기에 비해 그로부터 100여 년 후인 1918년 통계로
2배 정도 증가한 것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외부적 요인 가운데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이 지속적인 이촌향도 현상과 징병제 등의
요인으로 농촌인구가 감소하고 쌀생산량이 감소하는데 반해 식생활을 비롯한 생활수준은
점차 개선됨에 따라 쌀수요가 늘어남으로써....

1890년을 전후해서는 조선으로부터의 쌀수입의존도가 점차적으로 높아지는 추세였습니다.
또한 일본입장에서 쌀을 조선에서 수입하는 것이 일본국내의 물가안정에도 기여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추세에 편승하여 청일전쟁 전후시기부터는 일본 자본의 조선의 농업분야에
대한 직간접적인 투자비중이 늘어나게 되었고, 조선의 지주층에게도 쌀생산량과
쌀수출량이 늘어날수록 이윤이 증대되는 동기부여로 작용하여 조선의 쌀생산량은
지속적으로 늘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20년대~1930년대에 이르면 조선으로부터의 쌀수입으로 인해 일본 쌀농가가
존립위기의 큰 타격을 입을 정도로 위기감이 팽배해져 조선쌀 수입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시위가 활발히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eo987 16-11-24 21:48
   
님 일본 통계청에 가보시면 장기통계라고 해서 메이지유신부터 통계치를 제공하고 있어요 무슨 일본의 농업생산량이 감소하나요? 이분은 계속해서 짝을 이루시는 분이니
더군다나 이전 글에서는 같은 쌀 수출을 두고 일본경제의 편입이라고 표현을 하셔놓고 물론 그 부분도 전체 생산량 대비 수출량을 보면 워낙 미비해서 말이 안되지만요
그리고 님 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부분은 이미 2011 허수열교수님에 일제초기 조선의 농업이라는 학술원상을 수상한  책에서 모두 검증하고 있는 사안으로 말 그대로 님은 지속적으로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 하고 계시네요 어떤분은 님의 행태를 보고 일뽕이라고 하시던데 하는 행동이 그렇게 틀린 표현은 아니고요
                    
촐라롱콘 16-11-24 21:52
   
농업생산량과 쌀생산량을 그냥 동일시하시는군요... 구별하시기 바랍니다...!!!^^
                         
eo987 16-11-24 21:56
   
농업생산량에는 쌀생산량도 포함되는 개념이 아닐까요? 당연히 당시 활발히 노농과 서양식기술이 도입되어서 단위 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하는데요 말장난을 하시는 것인지...
더군다나 농업의 중심은 쌀인데 농업생산량은 증가하는데 쌀이 감소한다라는 발상이 무엇인지..대체
                    
촐라롱콘 16-11-24 22:10
   
농업의 중심이 쌀은 맞는데...
개항 이전 시기 조선의 경지면적에서 논이 차지한 비중은 30~40%에 불과했고
물론 단위면적당 수확량은 논이 밭보다는 월등하다는 점을 감안해도
전체 곡물생산량에서 쌀이 차지한 비중은 절반이 채 되지 못한 것으로 아는데.....

이것이 개항 이후 일제시기에 이르는 동안 일본의 쌀수요와 맞물려 지속적으로
경지에서 차지하는 논의 비중을 늘려갔고 당연히 곡물에서 차지하는 쌀의 비중이
늘어난 것은 상식중의 상식인데.... 게다가 일본자본의 투자로 인해 종자개량과
수리시설까지 확충되어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는 것은 상식중의 상식인데.....^^

다만 일본통계청 자료는 내가 확인하지 못한 사항이니 그냥 생산량 증감은 그렇다치고
일본의 쌀수요량을 생산량이 따라잡지 못하여 부족분을 조선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였다 정도로 수정하지요~~~ 일본이 쌀공급이 딸리거나 또는 군량미 등의
용도로의 비축분이 부족하니 부족분을 조선에서 수입해갔을 것이고.....

수입량은 해가 거듭될수록 증가추세에 있었으니......
                         
archwave 16-11-24 22:20
   
결이란 단위가 면적이 아니고 수확량 기준입니다.

19 세기초를 기준해서 보면
수확량 기준해서 봤을 때 논이 차지하는 비중이 30 ~ 40 % 죠.
실제 땅의 면적 기준으로 보면 논이 차지하는 비중은 글쎄.. 10~20 % 대로 떨어질거 같네요.

-----------

1931 년에는 무려 903 만석 (한반도 생산 쌀의 57 % ) 나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쌀이 건너갔네요. 일본 기준으로 성인 남자 903 만명이 1 년 먹을 분량. ( 1933 년 이후는 기록 안 찾아봄 )
                         
eo987 16-11-24 22:21
   
님 월등이가 어느정도를 월등이라고 말씀하시는지는 모르지만 고려시대
조선초에 관습적으로
1:0.5로 설정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관습적 인식이고 실제로는
1:0.7~1:0.8의 비율이에요  님 그리고 말씀하신 그 상식의 주장이 바로 전형적인 식민지근대화론 분들의 주장인데요 그런데 그 분들 주장이라는 것도 일제초기 1910~1918에
약 10%의 생산이 증가했다라는 개념이라 그렇게 큰 것도 아니고요

아키님과의 공통점은 생각으로 이야기를 하신다는 것 이네요 근거가 아니라
                         
archwave 16-11-24 22:36
   
현재 기준으로 보면 쌀의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월등하죠. 물론 곡물중에서 비교임 ( 채소같은건 영양가는 없는데 무게는 많이 나가는 것들이 있으니까 )

단보당 무려 3 석까지도 가능하니까요.

이거는 현대의 시각으로 생각하니 나온 실수인 것을 갖고.. ^^;

3:0.7~0.8 인 셈이니..
                         
archwave 16-11-24 22:41
   
[ 전형적인 식민지근대화론 분들의 주장인데요 그런데 그 분들 주장이라는 것도 일제초기 1910~1918에 약 10%의 생산이 증가했다라는 개념이라 그렇게 큰 것도 아니고요  ]

이거 말이 안 된다는 생각 안 드세요 ? 쌀만 놓고 본다면..
1910 년에 이미 1807 년보다 2 배의 쌀 생산량을 보였다는 얘기잖아요.

인구는 별 변화 없는데 쌀 생산량 2 배 ?

그럼 도대체 왜 농민들과 직업군인들이 난리친건가.. 조선 후기의 혼란은 대체 무엇 때문이고 ?

혹시 GDP 로 10 % 성장 얘기에요 ? 지금 식량 얘기하는데, GDP 를 꺼내는건 뭐하는건지..
타샤 16-11-25 06:19
   
결의 기본 단위는 파(把) 입니다.
1파는 1움큼 이라는 뜻이죠.

즉 손으로 이삭을 쥐었을때 한움큼 단위로 1파 라고 하구요.
이 1파들이 모여서 상위 단위가, 또 이 상위 단위가 모여서...(중략) .... 해서 1결이 됩니다.
(중간에 단위들이 5갠가 7갠가 그런데 다 기억하질 못하네요.)

따라서 1결에 2톤이라는 것은 사실상 틀립니다.

모든 곡물의 이삭을 다 손으로 쥘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곡물을 재배하는 땅의 단위 이기는 하지만...
쥐는 사람(주로 세관...)의 손 크기에 따라서 그리고 그 사람의 욕심과, 검사 받는 사람의 뇌물에 따라서 변하는 크기 입니다.


그리고 결의 단위가 한주먹... 에서 시작하는 만큼 수확량으로 재는 단위지만...
땅의 면적 단위 입니다.
중간에 잘 모르는 단위 까지 합쳐서 대략 1결=10만 혹은 100만파 정도 될겁니다.
10만파=1결 이라고 가정할때...
1결은 수확량으로 10만 주먹이라는 뜻이 아니라, 10만 주먹을 생산하는 땅의 면적 입니다.

그래서 아랫쪽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논과 밭의 1결의 면적 차이가 생기는 겁니다.
비단 논과 밭과의 차이뿐 아니라...
호남과 함경도 평안도 같은 척박한 땅과의 차이도 생깁니다.

함경도나 평안도의 1결은 면적이 엄청 컸습니다.(논이라고 해도)
     
archwave 16-11-25 14:07
   
1 결의 실제 면적은 면적당 수확량에 따라 6 가지 등급이 매겨졌습니다.

http://arim.pe.kr/liguard_bbs/view.php?code=li_history2&number=816&page=6&keyfield=&key=

위에 따르면 조선후기의 1 결은 1 ha 에서 4 ha 사이의 면적을 가졌습니다.

결은 수확량 기준으로 땅을 재는 줄자(?)를 달리 하는 셈이었지만, 매년 실제 수확량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었죠. (무려 20 년주기 갱신) 즉 수확량이라기보다는 풍년, 흉년 모두 포함해서 평균적으로 기대 가능한 수확량을 말한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했습니다.

1 등급 경지의 연간 수확량이 세종대왕 전에는 300 말이었다가 그 뒤로는 400 말이 된 것은 농업 발달로 인해 예전보다 더 많은 수확이 가능해졌기에 반영한 것이겠고요.

어쨌든 조선 후기의 1 결은 (물론 평균적으로) 2 톤의 수확을 기대할 수 있는 경지인 것이 맞습니다.
     
archwave 16-11-25 14:11
   
그리고 조선시대가 무슨 원시시대도 아니고 사람이 한 줌 한 줌 쥐는 식으로 수확량을 쟀겠습니까 ? 그 많은 양을 일일이 ?

세종대왕 이전에는 평석으로 1 석짜리 용기 (91.7 리터) 에 20 번 채울 수 있는 양이 1 결이고,
그 이후는 전석으로  1 석짜리 용기 (122.3 리터) 에 20 번 채울 수 있는 양이 1 결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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