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한 부족이었던 흉노가 목특선우 시기에 독립해서 동호(고조선)과 전쟁을 벌여 크게 이깁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흉노가 패자가 되고 고조선은 몰락하게 되는 것 이고요. 그래서 동호라는 명칭 보다는 흉노라는 명칭이 고조선족의 대명사가 되는 것 입니다.
흉노와 고조선과의 전쟁 후에 흉노족은 고조선의 포로들을 선비산과 오환산으로 분리해서 배치 했는데 여기서 선비족과 오환족이 생기는 것으로 선비족 역시 고조선족(동호족) 입니다. 그리고 본래의 흉노와 이들을 구분해서 본래의 흉노는 북흉노 이들은 남흉노라 구분 합니다.
선비는 고구려의 부용민족이라 하였는데 이를 보면 고구려는 북흉노 계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리고 백제는 고구려의 일맥이니 역시 북흉노 계열이며 신라의 지배층은 백제계니 북흉노 계이고 피 지배층은 남흉노 계열이라 추축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가야는 남흉노 계일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합니다.
이것이 기록을 따라온 추정인데 기존의 식민사학에서는 동호의 존재 자체를 부정 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지도 않았고요. 예맥의 근거는 고구려 소수림왕을 소수맥의 왕이라 부르는 데서 고구려는 맥족이라 하는 것이고 예족은 동예족에서 나온 것으로 백제족이란 것이죠.
이렇게 되면 고조선의 역사는 완전히 상실되게 되죠. 그래서 동호족은 이미 멸망하고 사라진 종족이라고 주장 하였죠. 여기서 이렇게 끝나으면 좋겠지만 중국이 치고 들어왔습니다. 동호족이 실제 했고 동호족 역시 지금 중국의 조상이라는 것이죠. 이것 역시 동북공정의 주 내용입니다.
우리가 부정하고 지우려 하는 동안 중국은 그 들을 자신들의 역사로 만들어 놨고 지금에서야 부랴부랴 동호(퉁구스)를 인정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것 입니다. 이전에는 동호라는 말을 꺼내면 한심한 인간으로 몰았던 시기도 있었고 동호를 가장 부정했던 인간이 이기백이죠.
예맥족이라고 들어보셨을겁니다. 그리고 고조선이라고 말해도 틀린말이 아니죠. 부여 고구려등이 고조선 멸망후 세워진 나라들이고.. 고조선 왕이 밀려와서 준왕이 되고 이 준왕이 마한의 목지국을 다스렸고.. 이 목지국이 삼한의 우두머리였으니까요. 동예 옥저 등등 전부 예맥족으로 포함시킬수 있고... 이런 다양한 부류가 섞여서 우리민족이 된거죠.
나중에 여진족이라든지 다른 민족도 일부 섞였겠지만.. 결국 원류는 고조선계 혹은 예맥족이라고 말하면 틀리지 않습니다. 신라도 분류하면 예맥족이죠.
그리고 말하신 부분에 오류가 좀 보이는데 신라가 흉노라서 민족이 흉노라는 것은 정답은 아닙니다. 프랑크 왕국은 현재의 프랑스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게르만족 국가였지만 결국 붕괴후에는 원주민인 갈리아+로마인들에게 주도권이 넘어가서 게르만족 국가가 아니게 되었죠. 신라에 북에서 내려온 흉노세력이 있다해도 원주민세력과 결합했고.. 또 삼국통일후 점령한 다른 지역들은 흉노가 아니었기에 신라의 훙노세력이 주도권을 상실한 이후로는 흉노국가라고도 말할수 없게 됩니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중국에 자주 침입하고, 후에 흉노(匈奴)에게 멸망된 동호(東胡)의 후예라고 하나 분명하지 않다. 선비족이 역사에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흉노의 피지배 종족으로서 1세기 초부터이고,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유목을 하고 있었다. 1세기 말 북흉노가 후한(後漢)에게 격파되자, 선비는 흉노에 이어 몽골지역에서 번영하였다. 2세기 중엽 단석괴(檀石槐)가 선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국가를 세운 후 자주 후한에 침입하는 등 중국을 압박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선비족 [鮮卑族] (두산백과)
여기서 이 선비족의 당대 비문(금석문)에 그들의 선조는 기자이며, 이전왕조는 조선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비족중 가장 유명한 인물인 모용황은 그 당시 조선왕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君의 諱는 永恩이고 子는 某이며 「周書」에는 말하기를 "豆盧寧의 아우이다"라고 하였다. 昌黎 徒河 사람이다. 본성은 慕容으로 燕나라 文明帝 皝의 후예이다.
「周書」에는 말하기를, "그 선조의 본래 성은 慕容씨이고 南燕의 支庶이다"라고 하였다.
十六國春秋 「前燕錄」에는 말하기를, " <모용황>의 자는 元眞이고 <모용외>의 둘째 아들이다. 어렸을 적에 子는 萬年인데 키가 7척 8촌이나 되었다. 남자답고 씩씩하여 權略에 능했고 박학하여 材藝가 많았다.
晉나라 建武 원년(317)에 진무장군이 되었고, 永昌(322-323) 초기에 좌현왕에 임명되었으며, 太寧(323-326) 말기에 평북장군. 조선공에 임명되었다.
모용황(慕容皝)은 자(字)가 원진(元眞)이고 (모용)외(慕容廆)의 셋째 아들이다. 눈썹뼈가 솟고(龍顔) 앞니가 크고 가지런했으며(版齒) 신장은 7척 8촌이었다. 웅의(雄毅,뛰어나고 굳셈)하며 권략(權略,권변과 지략)이 많고, 경학(經學)을 숭상하고 천문(天文)을 좋아했다. (모용)외가 요동공(遼東公)이 되자 그를 세자(世子)로 세웠다.
건무(建武: 317-318) 초에 관군장군(冠軍將軍), 좌현왕(左賢王)으로 임명하고 망평후(望平侯)(→현도군 망평현의 현후縣侯 cf.후한서 군국지에 의하면 요동군 망평현)에 봉하였고, 무리를 이끌고 정토(征討)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명제) 태녕(太寧: 323-325) 말에는 평북장군(平北將軍)으로 임명되고 조선공(朝鮮公)으로 올려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