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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0-19 21:01
[한국사] 조선시대 건축물 수원화성
 글쓴이 : yj12
조회 : 3,005  

수원 화성은 조선 후기에 세워진 계획도시입니다. 개혁적인 통치자 정조와 실학자들이 지은 성곽 도시로, 조선 후기 토목 건축의 백미로 꼽히고 있지요.

수원 화성은 선조들의 뛰어난 자연관과 통치 이념이 반영된 것은 물론이고 예술성과 과학, 경제까지 생각하고 건설되었습니다. 자연환경을 적절히 이용한 것은 물론, 설계부터 공사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기술과 장비를 이용하여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 효과를 거두었지요.

수원 화성은 예술성도 뛰어납니다. 웅장한 문과 포루, 공심돈 등의 건축물은 군사 시설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수원 화성의 특징은 동서양 건축술의 만남입니다. 화성은 동양의 건축 양식으로 지었으나, 서양의 건축 방법과 건설 장비를 활용해 완성했습니다. 화성 건축에 관한 모든 과정을 기록한 책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입니다.

설계부터 동원된 사람과 장비, 공사 과정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까지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철저한 기록 덕분에 훗날 전쟁 등으로 파괴된 수원 화성을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정조의 효성이 탄생시킨 도시, 화성

수원 화성 건설은 정조의 효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 세자(장헌 세자)는 조선 왕조에서 가장 불행하게 삶을 마친 사람 중 하나입니다. 영조의 둘째 아들이었던 사도 세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당파 싸움에 희생되어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조는 11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 사도 세자의 죽음을 목격했답니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심도 깊었지만 슬프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효심도 대단했습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사도 세자의 무덤 이름을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바꾸었어요. 그리고 몇 년 뒤 경기도 양주 배봉산(지금의 서울 휘경동)에 있던 사도 세자의 무덤을 명당으로 꼽히는 수원의 화산(지금의 경기도 화성)으로 옮겼어요.

무덤 이름도 ‘영우원’에서 다시 ‘현륭원’으로 바꾸었지요. 그 뒤 사도 세자에게 장조라는 임금의 칭호를 주고 무덤 이름을 ‘융릉’으로 높였습니다.

사도 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옮기면서 오랫동안 이곳에 살던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옮겨야만 했어요. 그래서 화산 백성들이 옮겨 갈 도시를 지어야 했고, 팔달산 아래 신도시 화성이 건설되었답니다.

위풍당당한 모습의 수원 화성 서북공심돈
위풍당당한 모습의 수원 화성 서북공심돈

위풍당당한 모습의 수원 화성 서북공심돈

정조와 실학자들의 개혁 정신이 담긴 도시

수원 화성은 정조의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도시였어요. 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것은 아버지의 무덤을 옮기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백성들을 보다 편리하고 풍요롭게 살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어요.

한편으로는 당시 조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던 노론파를 견제하고 강한 왕권을 확립하려는 목표도 있었지요. 화성 건설을 통해 개혁 정치를 실시하고 실학자들을 비롯한 인재들을 고루 등용하려고 했던 거예요.

화성 건설에 대해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던 정조는 조선 최고의 실학자이자 저술가인 정약용에게 도시 설계를 맡겼습니다. 일찍 실학을 접한 정약용은 전통적인 방법을 기초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의 여러 도시에 관한 책을 참고하여 화성을 설계했어요.

1년 남짓 연구한 끝에 정약용은 도시의 기본 틀과 구체적인 건축 방법까지 꼼꼼히 담은 〈성설〉이란 보고서를 완성해 정조에게 바쳤습니다.

화성 공사 모습

화성 공사 모습

설계는 정약용이 했지만 화성의 공사 책임자는 영의정이었던 ‘채제공’이었어요. 채제공은 정약용을 비롯하여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화성 건설 감독관 조심태 등 젊고 유능한 실학자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사람이지요.

화성 건설은 1794년 1월에 시작되어 1796년 9월 초에 끝났어요. 예상보다 훨씬 빠른 2년 9개월 만에 완성되었답니다. 정약용이 설계한 첨단 기계를 사용한 것은 물론, 일꾼들에게 정확히 품삯을 주어 열심히 일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화성이 완성되자 정조는 그해 10월 16일, 축하 잔치를 베풀었어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금도 수원에서는 매년 10월이면 정조 임금의 행차 등 다양한 행사를 열고 있지요.

군사들을 지휘하고 훈련시켰던 장소인 연무대와 화성 성곽

군사들을 지휘하고 훈련시켰던 장소인 연무대와 화성 성곽

새로운 개념의 복합 도시

화성이 세워지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성곽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마을에 쌓은 읍성과 전쟁에 대비하여 건설한 산성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읍성에서 살다가 적군이 침입하면 삶의 터전을 포기하고 산성으로 이동하여 적과 싸웠습니다.

하지만 화성은 읍성과 산성을 모두 갖춘 성곽 도시였어요. 즉 생활 공간이면서 적군을 상대로 전쟁도 치를 수 있었답니다. 우리 전통 성곽과 서양의 도시 개념을 접목한 새로운 개념의 계획도시였던 거예요.

화성은 군사적인 기능만큼이나 백성들의 삶도 중시한 도시입니다. 화성이 한양과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잇는 위치에 있는 것을 고려하여 전국의 상인들이 모여 거래할 수 있도록 길을 새로 만들었어요.

또한 많은 양의 물건을 거래하는 대상으로부터 소상인들을 보호하였고 가난한 상인들에게는 무이자로 돈을 빌려 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상업을 활성화시키는 여러 정책이 실시되었고, 이런 정책 덕분에 화성의 경제가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 읍성의 한 곳인 고창 읍성

조선 시대 읍성의 한 곳인 고창 읍성

군사 시설물인 화성 동남각루

군사 시설물인 화성 동남각루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지은 성곽

화성은 동서양의 성곽 도시를 결합시켜 완성했지만 중국이나 유럽에 세워진 성곽 도시하고는 뚜렷한 차이가 있어요.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주어진 자연환경을 활용하여 지은 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연이 준 지형은 어떤 건축물보다 견고하여 쉽게 파괴할 수가 없습니다. 정약용은 화성을 설계할 때 이런 점을 우선 고려했지요. 화성의 성곽은 지형을 따라 자연스러운 형태를 띠게 되어 견고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답니다.

화성은 얼핏 보면 계획도시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생긴 도시로 보이기도 해요. 구릉을 따라 성곽을 건설했기 때문이에요. 성곽의 높이도 제각각입니다. 주변 지역에 비해 높은 능선을 따라 쌓은 성벽은 높이가 낮고, 주변에 비해 낮은 지역에 쌓은 성벽은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화성의 성곽과 주변에 세워진 모든 시설물 역시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지었어요. 화성에는 총 48개의 각기 다른 시설물이 있었어요(지금은 7개 시설물은 사라지고, 41개만 남아 있어요). 출입문은 물론이고 높은 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공심돈, 주요 도로, 출입문 근처에 세워진 포루와 적대 등은 하나같이 자연을 활용한 군사 시설물입니다.

자연 지형에 따라 지은 화성 성곽

자연 지형에 따라 지은 화성 성곽

포를 쏘는 군사 시설물, 동포루

포를 쏘는 군사 시설물, 동포루

동북포루와 자연 지형에 따라 세워진 화성 성곽

동북포루와 자연 지형에 따라 세워진 화성 성곽

화성 건설에 대한 기록들

화성 건설에 관한 놀라운 점 가운데 하나는 도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모든 사실을 완벽하게 기록해 놓았다는 사실이에요. 준비 과정에서부터 완공에 이르기까지 여러 권의 책과 보고서가 작성되었는데, 도시 건설에 관해 이렇게 상세한 자료가 남아 있는 곳은 화성이 유일하지요.

《화성성역의궤》 표지

《화성성역의궤》 표지

《화성성역의궤》 중 녹로전도

《화성성역의궤》 중 녹로전도

화성 건설에 관한 첫 번째 기록은 정약용이 도시 계획을 기록한 〈성설〉입니다. 그 밖에도 화성의 모습을 알 수 있는 〈화성일기〉와 《화성성역의궤》 등이 있어요. 성곽과 도시를 건설하는 전 과정을 담아 낸 책이 바로 《화성성역의궤》입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화성 건설 계획을 비롯하여 공사 기간, 공사에 동원된 인원, 사용된 자재, 건설 방법 등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화성성역의궤》를 보면 방대한 성곽 도시를 단 2년 9개월 만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사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고 새로운 장비와 기술을 도입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높은 곳으로 무거운 돌을 끌어 올리기 위해 도르래를 이용한 거중기를 사용했고, 짐을 실어 나르는 수레인 유형거, 물건을 들어 올리는 기구인 녹로 등의 건축 기구를 사용했지요. 《화성성역의궤》에는 이 모든 내용이 글과 그림으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요.

《화성성역의궤》를 보면 건축 자재와 기법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일부이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벽돌을 도입하여 건축을 한 거예요. 벽돌이 가진 곡선미와 견고성 덕분에 화성을 튼튼하고 아름답게 지을 수 있었답니다. 또한 자연환경을 활용하여 독자적으로 설계한 것은 물론,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벽돌로 아름답고 견고하게 지은 화성

벽돌로 아름답고 견고하게 지은 화성

화성 건축의 꽃, 장안문

화성에는 모두 11개의 문이 있어요. 화성의 4대문으로 부르는 장안문, 팔달문, 창룡문, 화서문과 비상시 군사들이 이용할 수 있는 5개의 암문, 그리고 물이 지나는 문인 북수문과 남수문이 있지요.

11개의 문은 저마다 뚜렷한 특징을 갖고 있지만 그중 최고의 문은 바로 장안문이에요. 장안문은 임금이 사는 북쪽 한양을 향해 세워진 화성의 정문으로, 화성의 출입문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합니다. 높은 성곽 출입문 위에 2층 누각이 세워진 모습은 위풍당당하지요.

화성의 상징인 장안문은 출입문인 동시에 치밀하게 설계된 군사 시설이에요. 장안문 바깥에는 반원형 모습의 성벽인 옹성이 세워져 있어요. 옹성은 적으로부터 장안문을 보호하고, 동시에 장안문 앞까지 진입한 적군을 사방에서 포위하여 공격할 수 있는 군사 시설이에요.

옹성 출입문 위에는 적군이 문에 불을 지를 경우에 대비하여 물을 저장해 놓은 5개의 커다란 구멍인 오성지가 있답니다. 장안문은 적군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일정한 거리마다 총이나 활을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요. 적군을 피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성벽 위에 몸을 숨길 수 있는 낮은 담장인 여장을 쌓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화성의 정문, 장안문

화성의 정문, 장안문

장안문 옹성 안쪽 모습

장안문 옹성 안쪽 모습여장에 총 구멍인 총안이 뚫린 것을 볼 수 있다.

장안문 양쪽에는 적대라는 곳을 설치했어요. 성벽보다 더 높게 지은 적대는 멀리서 접근하는 적군을 감시하고, 높은 곳에서 효과적으로 적군을 공격할 수 있도록 건설한 곳이에요. 그리고 적대 옆에는 성벽이 튀어나온 곳에 건물을 짓고 군사를 머물게 한 포루가 있어요. 포루에는 화포를 두어 적을 공격했지요.

이처럼 화성은 치밀하게 설계된 군사 시설물을 통해 적군의 움직임을 이중 삼중으로 살피고 방어와 공격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건설되었습니다.

남쪽에는 장안문에 버금가는 팔달문이 있습니다. 장안문에 비해 조금 작지만 당당하고 화려한 모습이 장안문에 뒤지지 않는답니다. 동쪽과 서쪽에는 창룡문과 화서문이 있습니다.

화성의 동쪽 출입문인 창룡문

화성의 동쪽 출입문인 창룡문

화성의 남문, 팔달문

화성의 남문, 팔달문

각기 다른 기능과 멋을 간직한 군사 시설물

화성 성곽을 따라 건설된 시설물은 모두 48개였어요. 그중 군사적인 특징을 잘 드러낸 건축물이 공심돈이에요. 공심돈은 적군을 감시하도록 높은 곳에 설치한 것으로 망루와 비슷하지만 망루보다 더 웅장한 모습의 건축물이에요. 화성에는 동북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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