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어떤분이 조선의 갑옷은 천쪼가리에 삼지창 말씀을 하시길래 참고하시라고 올립니다.
눈에 보이는것만이 진실이 아니죠...
고종 황제의 투구
고종 황제의 갑옷,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약탈 당했다
먼저 조선의 갑옷을 머리 속으로 떠올린다면 징만 박힌 천 또는 가죽 갑옷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아무래도 사극에서 비춰진 조선의 갑옷들이 일본 갑옷처럼 화려하지도 서양식의 갑옷처럼 튼튼해 보이지도 않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위 사진처럼 과연 천이나 가죽 위로 일정하게 부착된 저 징(리벳)만이 적의 공격을 제대로 막을 수나 있었을까? 하지만 이 생각은 큰 오해였다. 먼저 투구부터 살펴보자.
러시아 표트르 대제 민족박물관에서 공개한 조선 투구, 녹색 어피가 특징/임금 투구 추정
투구의 감투에 조각된 장식과 형상이 굉장히 화려하고 디테일하다
또한 미국의 브루클린 박물관에서도 공개된 조선 투구
조선 갑옷이 대량 발견됐는데 신미양요 때 미군에 의해 약탈된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의 투구는 보기만해도 동양풍의 화려한 음각과 장식, 서구풍의 수려한 디자인으로 서양인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결코 일본 갑옷의 화려함에 뒤쳐지지 않는 기품이 있다. 또한 중국과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서구식의 친근한 외형과 동양스러운 화려한 조각들로 서양인들을 매료시키기 쉬웠다. 하지만 조선의 투구는 디자인 외에도 그 실용성부터가 방호력이 뛰어났는데 그 비밀은 투구의 드림에 부착된 징(리벳)들에게 있다. 드림이란 귀와 목덜미 부분을 가리는 천(가죽) 덮개를 말한다.
투구의 옆드림을 장식하고 있는 저 징들에게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까?
바로 징(리벳)은 외피 속에 숨겨진 철제 방호찰을 고정하는 못이었다
조선의 갑주는 실제로 철제 방호찰로 겹겹이 중장비 된 갑옷이었다
한반도는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 탓에 한겨울에는 철제 찰이 몸에 닿을 경우 피부가 쉽게 상하고 한기를 느꼈다. 그래서 철제로 만든 방호찰을 목면이나 명주, 비단 따위로 감싸고 솜을 넣어 그 보온 효과를 높였다. 이러한 실용적인 효과는 쇠 갑주의 쇠독 방지와 함께 피부 마찰을 줄여주었고 기능적인 면에서도 활동성이 편리했었다. 또한 활을 사용할 경우, 투구의 옆드림이 걸리적 거리지 않도록 목 뒤로 넘겨 뒷드림과 함께 끈을 묶어 사격이 수월하도록 제작했었다.
반면에 근접전 시 양쪽 옆드림을 턱까지 묶어 목을 보호할 수도 있었다
그밖에도 쇄자갑(체인메일) 형태의 조선 투구. 서양 투구와 매우 흡사하다
갑옷에 박힌 저 징들 속에는 철판들이 촘촘히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찰갑 형태로 철제 방호찰이 옷감 속에 숨어있다
심지어 팔 가리개와 각반도 철편을 넣어 몸을 보호했다
반면에 일본 갑옷은 단갑이 원형이다(장수용 갑주)
임진왜란 시기(추정) 출토된 일본 갑옷. 흉갑이 판갑 형태다
조선의 찰갑은 그 방호력이 매우 뛰어났는데 일본의 단갑보다 기능성에서 우수했다. 일본의 갑옷은 판갑 형태로 화살이나 찌르기 형태의 창술 공격에는 취약했다. 그리고 전투시 기동성에도 제약이 많아 기병 체제는 유지할 수 없었으며 더욱이나 단갑이기 때문에 전쟁 중 갑옷에 구멍나거나 파손되면 보수할 수가 없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흉갑). 반면에 조선의 갑옷은 찰갑 형태로 능동성과 기동성이 좋아 움직임이 편했고 전투 중 훼손되거나 망가진 방호찰은 그 부분만 옷감 속에서 때어내고 새 방호찰을 달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전시 중에 갑옷을 빠르게 수리하고 보수할 수 있어 실용성이 좋았다.
일본과 같은 판갑은 화살에 뚫리는데 반해 조선의 갑옷은 화살을 튕겨냈다
이처럼 표면에는 징만 박힌 천 갑옷처럼 보이나 실상은 철판들이 숨어 있었던 갑옷이었다
만약 외피를 벗긴다면 이런 형태로 이해하면 쉽다. 여기서 허벅지와 팔까지 모두 가린다
위 사진은 수군의 복장이라기 보다는 평시 상황의 관졸 복장에 더 가깝다
일본인이 그린 임진왜란의 조선전역해전도다. 모든 병사가 전립과 두정갑을 입고 나온다
조선 전기 시절, 쇄자갑과 경번갑
복원된 조선 갑옷들, 무게는 25kg으로 동시대 주변국들의 갑옷보다 가벼운 편이었다
마지막은 김세랑 작가님의 성웅 이순신 장군 피규어
출처 - 네이버, 구글
조선의 갑옷은 결코 볼품없거나 방호력이 빈약했던 갑옷이 아니었습니다. 전투 상황에서 굉장히 실용적이고 기능성 또한 높았던 갑옷이었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갑옷은 가장 보편적으로 많이 쓰였던 양국의 갑주를 비교한 것입니다. 조선 두정갑의 찰갑, 일본 오요로이 판갑처럼 그 특징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왜 조선군이 약했는지는 당시 정치판도를 아셨으면 합니다. 무관을 배척하고 문관을 등용하며 안보를 무시했던 왕과 조정 관료들이 국방력을 등한시하였기에 벌어진 일입니다. '왜놈 따위'라는 안일한 생각과 율곡이이의 10만 양병설 묵살 등 그 자만심이 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두정갑은 조선 9대 성종 때(임진왜란 발발 100여년전) 채택되어 보급되기 시작됐고 지방의 하급 병사까지는 몰라도 5군영의 병사들에게는 두정갑이 지급됐습니다. 사람들이 꼭 '두정갑 = 장수용'이라는 인식이 강한 것 같아 말씀드렸습니다. 그외에 지방의 하급 병사들에게는 지갑이라고 해서 기름먹인 수백장의 창호지를 붙여 말린 갑옷이 지급됐고 마찬가지로 일본의 하급 병사는 죽편(대나무) 갑옷이 지급됐습니다. 그 외에 미늘 형태의 두석린갑은 장수용으로 의장 활동 때 많이 입었습니다.
두정갑=병사+장수 통용(투구 장식, 방호찰, 징의 갯수 차이)
두석린갑=장수(의장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