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실학자를 표방하고 있는 주류사학계 인간들이 한사군 재한반도 설을 주장하는 논리는 조선시대 때 실학자들의 논리와 전혀 다릅니다. 조선시대 때는 금서도 많았고 연구할 수 있는 사료가 현재에 비해서 매우 적고 한정적이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또한 조선후기에 와서는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이 강해졌다는 것도..)
현재 한사군재한반도설의 근거로 사용되고 있는 논리는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논리가 아니라 왜정시대 때 일본에 의하여 왜곡되어진 역사 사료들을 바탕으로 근거를 내놓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실학자들이 전부 한사군을 한반도에 비정한 것은 아니지요..
열하일기를 지은 박지원은 낙랑군을 요양으로 보고 한사군 역시 압록강 이북 요동땅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현재 5000원권 화폐의 인물인 이이와 함께 조선시대때 실학자을 대표하였던 이익선생 또한 낙랑은 요동, 진번은 요하 서쪽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참고로 조선시대때 학자인 권근의 응제시주를 보면 요동은 요하의 동쪽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하의 서쪽도 가르킨다고 하였습니다.. 이후 권근 이후 많은 학자들도 요동의 범위를 요하 동쪽으로 국한시키지 않았음..)
그러면 왜 당시 사서기록하고 지금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한사군 위치하고 왜 맞지 않는건지 설명을 해봐라 ㅉㅉ 고구려가 한사군 칠 때 한반도 설이면 당연히 남쪽으로 쳤다고 해야되는데 사서에서는 서쪽으로 진격했다고 나오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지금하고 방향감각이 달라서 그런거냐?
이른바 그 강단사학이라는게 식민사학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부정하지못할 진실이죠.
그리고 걔네들이 툭하면 이덕일 소장을 주타겟으로 까대는데 이덕일 소장도 김현구처럼 자신을 사이비니 유사역사학이니 비방하는 강단 식민사학 패거리들에게 법적으로 조치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동영상 다 보셨나요?
그렇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동영상 내의 대표적인 낙랑 유적이라 보여지는 것에대한 조사결과가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었고, 오히려 조작이라고 보여지게 해준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 보시면 유물들이 더 있지만 현재 정밀 조사는 거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말씀 중에 전부 조작되었다고 보냐고 물으셨지만 이 동영상에서 유물 검증을 하신분들은 재야사학자가 거의 없었다는 겁니다.
1. 평양 정백동 낙랑 호구조사 목간
호구조사 목간 내용:
기원전 45년 요동에 있던 낙랑군 호구조사로 한족과 관적에 오른 토착민, 관적에 오르지 못한 토착민 인구수 조사 내용.
주류사학:
낙랑이 요동에서 평양으로 옮겨 왔다거나 확장되었다는 증거.
북한학자 손용종:
낙랑군에 소한 현 중에서 위치가 요녕 지역이 분명한 탄렬, 패수, 함자 등이 들어 있으므로, 낙랑군 목간은 낙랑군이 천산산맥 서쪽에 있을 때인 기원전 45년에 요녕지역에서 낙랑군 인구조사를 한 것인데, 어떤 사유로 평양으로 이동되어 속리의 무덤에 묻힌 것으로 봄.
민족사학:
호구조사 목간에 나온 지역이 요동으로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는 증거는 될 수 있으나 낙랑군이 요동에서 평양으로 옮겨 왔다거나 평양까지 확장 되었다는 증거는 될 수 없음.
이 외 설:
후한서 광무제기 6년(30년) - 낙랑군은 요동에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32년) - 낙랑국이 항복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44년) - 광무제가 낙랑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후 살수 이남은 한나라에 속한다.
후한서 한전 광무제(44년) - 한(韓)인 염사인 소마시 등이 낙랑군에 와서 공물을 바쳐 광무제는 소마시를 한(漢) 염사읍군에 봉하고 낙랑군에 속하게 하니 사시 조공하였다.
위의 기록과 낙랑 호구조사 목간을 근거로 기원전 45년에 요동에 낙랑군이 있었는데 기원후 44년에 낙랑태수가 낙랑군에 새로 편입된 지역으로 옮겨 왔다가 기원후 49년 고구려 강성으로 평양지역으로 도망쳐와 살다가 죽은 것이다는 설.
2. 낙랑군 지배층 무덤에서 청동기 유물 출토
주류사학:
낙랑군 지배층 무덤에서 청동기 부장품들이 나온 것으로 보아 지배층이 고조선 주민들이었을 것이며, 일제시대 한사군 강압적 식민지설을 뒤엎는 증거.
민족사학:
기원전 3세기 청천강 이북지역에서는 철제가 출토.
헌데 기원전 2세기 낙랑유적에서는 철제가 확인이 안됨.
오히려 세형동검 문화의 청동기 부장품들이 출토.
고고학을 무시한 주장이다.
2번이나 댓글 작성한 걸 날렸더니 이제 싫증이 나네요.
낙랑토성 유적과 낙랑 기와 등에 대한 주류사학과 민족사학의 주장은 생략할게요.
결론은 낙랑군과 관련해 기록과 연대, 고고학을 보면 맞지 않는게 많습니다.
호구 조사 목간만 봐도
지금의 평양이 고조선의 수도였다면 2세기 낙랑군 지배층 무덤 같은게 나올 수 없죠.
그때는 낙랑군이 요동에 있을 때이니까요?